김영랑의 초기 시에는 자연의 내밀한 정서가 섬세하게 드러나고 후기 시에는 죽음에 대 시인의 고뇌, 사회와 민족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시인의 이런 동적(動的) 의식 변화는 흐르는 물 이미지, 피고 지는 꽃 이미지 등을 통해 드러난다. 자연과 세계에 대한 시인의 순환적 인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 중 하나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이 시에서 모란은 시인의 육체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물상이면서도 시인의 마음과 의지가 투영된 심리적 대상이기도 하다. 이 모란의 피고 짐과 시인의 감정이 하나로 결합하여 반복 순환 구조를 낳고 있다. 즉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며 봄을 기다리는 나(화자)의 기대와 설렘, 모란이 뚝뚝 떨어져 지던 날 느끼는 상실감과 슬픔, 오월 어느 날 세상에서 모란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후에 느끼는 섭섭함과 소멸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모란이 꽃피기를 기다리며 새봄을 기다리는 의지의 표출 등으로 이어진다.
이 죽음과 재생의 반복 순환은 시인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으로 시인에게 꽃의 개화와 낙화,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은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육체로 수용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金永郞 1903~1950)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五月)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三百)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