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동지사 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7월 14일 사상범(치안유지법 제15조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징역형을 받는다. 그 때 재판장이 낭독한 판결문은 이렇다.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
그들이 윤동주가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망동이라 본 죄의 근거는 조선어로 일기를 쓰고 시를 쓰는 것이었다. 형무소에 갇혀 있는 동안 그는 피 대체용 식염수 주사를 맞으며 매일매일 피골이 상접한 채 밤을 맞이하였다. 그때 동생 윤일주와 주고받은 편지의 한 구절이 가슴에 메인다.
'붓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까. 아무리 울어도 감옥 문이 열리지 않으니 고향의 귀뚜라미가 울어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윤동주의 종교는 가톨릭이었다. 예수를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인이었다. 윤동주, 하고 부르기만 해도 나의 머리가 숙여지는 까닭은 그가 기독교인이어서가 아니다. 예수가 자신의 몸을 인류에게 헌신한 것처럼 그도 민족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고 해마다 4월이면 부활하듯이, 윤동주도 적진 강도국의 형무소에서 죽고나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부활하고 해마다 4월이면 파랗게 부활하고 있다.
형무소에서 수난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별 하나에 별처럼 아슬한 이름들을 붙여본다. 그리곤 자랑처럼 무덤 위에 풀을 키워보는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솟아날 게외다. / (<별 헤는 밤> 마지막 연
/ 권희돈 시인
십자가(十字架)/ 윤동주(1917 - 1945. 1. 16. 새벽 3시 26분)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