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결실과 고독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지난 여름, 성숙을 향한 당신의 뜨거운 손길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로 태양을 가리워 서늘함을 주시고, 당신의 그 크신 은총은 열매가 익어가는 들판에 바람으로 풀어놓아 주십시오.
당신의 완전한 말씀으로 마지막 과일까지도 무르익게 하시고, 조금만 더 따뜻한 햇볕을 주시면 과일들이 완전히 익을 것입니다. 아직도 쓴 맛이 가시지 않은 포도주는 달콤한 포도주로 변할 것입니다.
이제 곧 겨울이 옵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도 깊은 가을 밤 혼자 깨어나 책을 읽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것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처럼 고독한 사람도 낙엽이 흩날리는 가로수 사이를 불안스레 거닐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집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이 거주하는 단 하나의 집입니다. 우리의 집은 강 건너에 있습니다. 그 집에 아직 당도하지 못했습니다. 강 건너의 집에 이르지 못했기에 우리는 고독하고 불안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평화가 넘쳐 흐를 때, 그 때 비로소 강 건너 우리 집에 당도할 것임을 알기에, 평화를 주는 한 편의 시를 읽어 보는 것입니다.
/ 권희돈 시인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 - 1926)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