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충격적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생각나는 인물을 순위별로 써 보라는 어느 앙케트였다.
엄마가 1위 아버지가 9위였다. 아버지는 억울하다. 막돼먹은 세파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쓰디 쓴 소주를 탈탈 털어 넣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랴.
자식들에게 다 주고 나서 더 줄게 없어 가슴 아파하는데, 자식들은 다 받고 나서 못 받은 것만 크게 생각하며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그랬다. 늘 헐은 옷과 거친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를 미워했다.
중학교를 못가서 아버지가 가르치는 서당에 들어갔으나, 아버지에 대한 적의를 품고 들개처럼 쏘다니기만 하였다.
회초리가 내 장딴지에 항상 달라붙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아버지한테 유산으로 받은 것은 돋보기 하나뿐이라며 제삿날도 잊어버렸다.
어리석게도 나는 40이 훌쩍 넘어서야 아버지가 나에게 값진 유산들을 물려주셨음을 알았다.
웬만한 학업에 견딜 만한 머리와 끈기를 주셨고, 문학의 바탕이 되는 상상력과 감수성을 주셨다.
가난에 비굴하지 않는 법도를 일깨워 주셨으며, 큰 나무 밑에서는 자랄 수 없음을 깨우쳐 주셨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내가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고,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지만 이미 돌아가셨다.
/ 권희돈 시인
아버지의 돋보기 / 권희돈(1946 - )

진갈색의 굵은 뿔테를 두른 두터운 유리알
유행에 뒤떨어진 아버지의 돋보기
입김으로 남루를 지우고 조심스레 걸쳐본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눈가의 안개 걷히고
영리한 활자처럼 추억이 살아 움직인다
한지 같은 흰옷 정갈히 입고 얌전히 앉으시어
몸을 느릿느릿 흔들며 한적을 읽으시는 아버지
가끔 꿈속에 근심스런 얼굴로 찾아오셔서
아주 먼 곳에 계신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글소리 듬뿍 배인 돋보기를 걸치면
싸리나무 회초리가 무서운 서당 아이
꿈결인 듯 물결치는 호밀밭을 내닫는다
노고지리 한 마리 파르르 하늘로 치솟는다
아, 빈 하늘 안쪽의 견고한 중심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