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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중

전 충주중 교장

며칠 전의 일이다. 비슷한 연배로 비슷한 시기에 공직에서 퇴직한 동료들끼리 전화나 문자로 시간약속을 해서는 가끔씩 스크린골프를 하곤 했었다. 이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스크린골프를 하면서 하루해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끌벅적 한참을 놀고 있는데 전화 한 통화가 걸려왔다. 집사람이었다. 용건을 다 말하고 난 집사람이 조금은 이상야릇한 웃음을 섞어가면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보라'는 뜬금없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전화를 끊었다. 무슨 날 이라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같이 운동을 하고 있던 동료들에게 집사람과의 전화내용을 이야기해주고 이 말의 저의가 무엇이겠냐고 조언을 구했다. 그랬더니 '마누라 생일' 아니면 '처갓집 행사' 등 처갓집 관련 행사를 꼼꼼하게 따져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뇌세포는 전혀 꿈쩍도 하지를 않는다.

할 수없이 동료들이 일러 준 대로 집사람과 관련이 있음직한 일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보기로 했다. 먼저 생일을 따져 보았다. 집사람 생일은 음력으로 추석 십 여일 후로 불과 얼마 전에 지나갔기 때문에 생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다음은 처갓집 행사였다. 그렇지만 이 역시도 집사람이 알아보라고 한 정답을 끄집어내는데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 뻔했다. 왜냐하면 장인께서는 우리가 결혼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신 상태였고, 장모님께서도 우리가 결혼한 다음해에 첫 번째로 태어난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즈음 돌아 가셨기 때문에 처갓집 일이라고 해봐야 돌아가신 부모님 제사 말고는 특별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골프채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갑자기 머리가 띵 해지면서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랬다. 평소에도 잊지 않으려고 '119'로까지 기억해 두었던, 바로 그 11월 9일 결혼기념일을 그만 깜박해버린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야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기만 하던 현직에 있을 때도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집사람 생일과 결혼기념일만큼은 잊지 않고 장미꽃 한 다발을 사 들고 집에 들어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집사람의 입이 옆으로 찢어지면서 흐믓해 하던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까지도 넉넉해지곤 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금년에는 결혼기념일이라는 것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천만다행으로 119도 기억해내지 못했던 우둔한 머리에서 이 위기를 이렇게 모면하라는 해답까지 동시에 기억나게 해준 것이다.

운동을 멈추고 곧 바로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난데,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라 운동이 끝날 때 쯤 당신한데 저녁 먹자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성급하게 전화를 하고 그래' 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집사람은 당연히 내가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터라, 내 반격에 어리둥절했는지 반신반의 하면서 당신 정말 알고 있었느냐고 반문을 한다. 일단은 그렇다고 대답을 해 놓고는 지금 운동중이니 저녁에 만나자는 말과 함께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슬아슬하게 큰 불길은 잡은 셈이다. 운동이 끝나고 집으로 들어가 집사람을 차에 태우고는, 그런대로 분위기가 있어 보이는 양식집에서 죄인인 듯 꿉꿉한 칼질을 하면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실토하고 말았다. 집사람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입을 실룩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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