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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중

전 충북도 행정국장

33년여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출근시간만 되면 허둥지둥 서둘러댔던 발걸음을 칼로 무 자르듯 싹둑 끊어버린 지 1년이 후딱 지났다. 생각하기는 퇴직하고 나면 당분간은 서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선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백수가 되어 놀고 보니 처음에는 전혀 '아니 올 시다' 였다. 노는데 정신이 팔려 언제 해가 넘어 갔는지 조차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 와서는 반드시 놀고먹는 것만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오히려 무언가 부족하고 허전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가 보다. 진천군 초평면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일주일에 두세 번 회사에 출근을 하게 된 것이다. 출근길은 오창을 거쳐 증평군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 모 사단 정문 앞을 지나도록 되어있었고, 집에서부터 회사까지는 편도 30여 킬로미터가 되고 자동차로는 대략 40여분이 소요되는 거리다.

물론 자주는 아니었지만 평소에도 가끔씩은 지나다녔던 이곳은 내게는 전혀 생소하지 않은 지형이다. 막바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9년 전 3월 초, 군에 입대하기 위해 아예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채로 훈련소에 들어가 10주나 되는 고된 훈련을 받았던 바로 그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춥고 배고프다는 훈련병들에게는 날씨까지도 도움을 주지 않았었다. 손과 발은 말할 것도 없고 귀까지 동상에 걸려 진물이 줄줄 흐르는 혹독한 추위와 싸우면서 훈련을 받았던 탓이었던지, 그 때의 솔직한 심정은 전역을 하고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부대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바로 그 훈련소 앞으로 지금 출퇴근을 하게 된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이곳을 지날 때면 억지로 훈련병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려 하지 않아도 세월의 무게에 눌려 까맣게 잊고 살았던 쓰린 추억의 편린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곤 한다. 강산이 네 번은 족히 바뀌었을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도로 양옆으로는 사격장과 수류탄 투척 연습장, 각개전투 교장 등이 그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합으로 떨어지는 선착순에서 매번 꼴찌를 해 기진맥진해 하던 일이며, 비포장도로 위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낮은 포복으로 기어 다니던 일, 화생방 교장에서 가스를 들여 마시고는 눈물 콧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던 일, 뱀 한 마리를 잡아든 교관이 훈련병 한명 한명을 불러내서 꼼짝 못하게 하고는 옷 속으로 뱀을 넣었다 꺼냈다 했던 소름끼치는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며칠 전, 출근길에 늘 그랬듯이 모 방송의 '행복한 아침'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부대 앞을 막 지나려는데 오늘은 '나는 이런 일에는 정말 자신이 없다' 하는 사연이 있는 사람들은 문자를 보내달라고 한다. 훈련 받을 때 억수로 달렸던 선착순 생각이 번득 떠올라 곧바로 도로 옆에 만들어 놓은 쉼터에 차를 세워 놓고는 '군대 가서 선착순 하면 매번 꼴찌를 해 기합 정말 많이 받았답니다.'라는 짧은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라디오에서는 그동안 접수된 문자 가운데서 몇 편을 골라 읽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가 쫑긋해지는 것이다. '다음은 3877님이 보낸 사연입니다.' 하면서 조금 전에 내가 보냈던 문자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귀를 의심하고 다시 한 번 들어봐도 분명 맞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3명을 추첨을 해 기념품을 준다면서 '3877님'을 또 부르는 것이다. 지워버리고 싶었던 쓰린 훈련병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응모를 하고 당첨이 돼서 기념품까지 받을 수 있었던 행복한 아침 출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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