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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호

시인

품바축제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왜 하필이면 거지 축제를 음성에서 여느냐는 원망의 목소리를 수없이 들어왔고, 한때는 축제 폐지론이 제기되어 찬반의 주민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품바축제는 올해로 13회째를 맞는다. 아내는 벌써부터 내 부모님이 평생 실천해 오시던 베풂과 나눔을 이벤트행사로 펼치는 품바행사에 참여하고자 마음이 부풀어 있다.

내가 사는 집이 우리 집이 아니고, 그 많은 전답과 임야가 우리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그해 겨울 어느 날. 큰형님으로부터 기둥과 재목으로 쓸 나무를 베러 가자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것도 낮이 아닌 밤에 남이 알지 못하게 몰래 베어야 한다고 하셨다. 원체 큰 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평소 나무를 해다 팔곤 하였던 형이었는데 남몰래 나무를 해야 한다는 말에 의아하기도 했다. 어느 날밤 영문도 모르는 나는 불빛이 멀리 퍼지면 안 된다고 종이삿갓을 씌운 남포등(lamp)을 들고 형을 따라 산을 올랐다. 동산에도 큰 나무가 많았지만 우리는 고개를 두 개나 넘어 동네에서 가장 먼 구렁까지 갔다. 처음엔 좋아서 신이 났으나 동네에서 점점 멀어지고 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자 덜컥 겁이 났다. 연필 하나도 남의 물건에 손대보지 못한 나였다. 나무 도둑질. 도벌이다.

큰형은 나무를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톱을 댄 나무는 굵고 곧은 해송나무였다. 오래전부터 재목으로 쓸 나무를 점지해 두었던 것이다. 나무가 원체 굵었으므로 두 사람이 양쪽에서 밀고 당기는 틀톱으로 흥부네 내외가 박을 켤 때 사용하던 탕개톱이었다. 초조한 긴장감과 힘겨운 톱질로 내 가슴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살을 에는 한 겨울밤이었지만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솟았다. "쿵"하고 나무가 쓰러질 땐 가슴이 터졌다.

세 그루를 베는데 걸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는 알 수 없으나 한 서너 시간 이상 지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기둥과 대들보로 쓸 나무였고, 이제부터는 소나무를 베어야 한다."며 재를 넘어 소나무 밭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뭇결이 무른 소나무로 마루를 깔아야 마루가 매끄럽고 향이 좋다고 하셨다.

고개 마루에서 잠시 쉴 즈음 이 나무를 무엇에 쓸 것인가에 대하여 물었다. 형은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는 집을 지을 거라고 했다.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이 우리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많은 농토와 2만평이 넘는 산도 우리 산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가문의 종토였다. 나는 하늘이 꺼지는 듯 했다. 어린나이에 종가, 종답이며 종산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아무튼 우리 것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았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소나무를 베는 동안은 도벌이라는 죄의식 같은 것은 어느새 사라졌다. 힘든 것도 몰랐다. 무서움도 사라졌다. 이 나무 베어가야 우리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벤 목재들을 땅에 묻어야만 했다. 지난 가을 형은 미리 구덩이를 파 놓았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통나무를 구덩이에 옮겼다. 나무를 땅에 묻는 것은 남의 눈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생나무로 재목을 쓰면 뒤 틀리거나 갈라지므로 땅에 묻었다가 몇 년 묵힌 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덩이에 재목을 넣은 뒤 흙으로 덮으려 했으나 꽁꽁 언 흙은 삽질을 할 수가 없었다. 형과 나는 낙엽을 긁어모아 흙 대신 덮었다. 일을 끝냈을 땐 어둡던 사방이 훤했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부모님은 집 없는 설음에 대하여 낙심하신 적이 없으셨다. 산지기를 천직으로 알고 평생을 사셨다. 그러면서도 베풂을 몸소 실천하신분이다. 반대로 큰형은 작던 크던 내 소유의 집을 갖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지난해 축제에 참가한 형님은 "그려. 최귀동처럼 우리 부모님들도 그러하셨어. 나보다 못한 이웃에게 베푸셨지. 천사가 따로 없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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