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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순

청주교육지원청 장학사

올해도 6월은 어김없이 찾아 왔다. 친정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가슴 아프지만 6월이면 더욱 그렇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늘나라로 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그리 많지 않지만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긴 옷을 입고 계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풍기도 없던 시절 더위에 부채질을 연신하시면서도 반소매 옷을 입지 않으시는 것이 너무 궁금하여"아버지, 더운데 시원한 반팔 옷을 왜 안 입으세요·" 라고 여쭈었더니, 옆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내 옆구리를 쿡 찌르셨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니 한~참 앞산을 보시던 아버지께서 "왜, 궁금하냐·" 하시면서 왼팔소매를 걷어 올려 보여 주셨다. "헉!" 아버지 외팔에는 어깨 바로 아래부터 팔꿈치 가까이까지 심한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보기 흉하지·" 한마디만 하시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시며 걷어 올렸던 소매를 다시 내리셨다. "무슨 흉터인지 궁금하지·" 그러시기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하였다.

아버지께는 아픈 기억을 떠올리시는지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빨아들여 '후우욱' 연기를 내뿜으시더니 천천히 말씀을 이어가셨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도 읍내와 우리 마을 지키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야 했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저 골짜기 동굴로 피신을 하고 젊은 남자들은 모두 군에 참여하여 인민군과 맞서 싸워야 했던 터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었다. 그때 재수 없게 총탄이 이 팔을 스쳐갔던 거란다." 라고 한 말씀을 하시고 또 담배를 길게 빨아들이셨다.

"그래도 난 총탄이 스쳐 흉터만 남아 팔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아버지와 함께 군에 입대한 동료 중에는 팔다리가 잘리거나, 심지어 사망한 동료들도 있는데 그들에 비하면 난 하늘이 도운거지……." 하시며 또 시선을 멀리 하셨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아버지께서는 비오는 날이면 그 상처자리가 욱신거려 약주를 자주 하시는 거란다. 어휴, 웬수같은 빨갱이 놈들." 하시며 눈물을 훔치셨다.

어렸을 적 기억에 아버지께서는 약주를 즐겨 하셨고 아주 엄하신 걸로 기억된다.

그해 겨울에 아버지께서는 약주를 많이 드셔서 간이 악화되어 세상을 달리 하셨다. 약주를 가까이 하게 된 동기가 어깨의 상처로 인해 시작되었다니 더욱 화가 나고 속상했다. 좀 더 오래 사시며 이렇게 좋은 세상을 보셨어야 하는데 너무도 일찍 운명을 달리하신 아버지가 생각나 우리 가족에게는 6월이 더욱 아픈 달이다. 그 후로 우리 집 문패에는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패가 달리고 한참 후에는 아버지 묘 앞에 '국가유공자 000'라고 비석이 세워졌다. 한 가정의 가장이고, 보호자이자 울타리인 가장 소중한 아버지를 잃었는데 문패가 무슨 소용이며, 비석이 무슨 위로가 된단 말인가· 1950년, 60년대의 시절에 가장 부재로 인한 한 가정의 고통을 누가 보상해 줄 수 있겠는가· 그 때 당시는 우리나라도 국가경제 살리랴 정신없어 그들을 미리 챙겨 볼 수도 없었으리라. 그 후 국가가 안정이 되고 경제도 회복하면서 보훈가족이라고 생계 보조 등 지원책을 마련한 것 같다. 이미 아픈 상처가 곪아 터져 스스로 흉터가 아믄 뒤라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단지 아쉽고 가슴 아픈 것은 우리 아버지 같은 분들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잊혀져가고 있음이 슬플 뿐이다.

호국보훈의 달, 현충일 등 해마다 6월이면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여러 기관과 사회단체가 추모식을 열고 다양한 보훈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호국 보훈에 대해 얼마 만큼이나 인식하고 있을까· 그저 따뜻한 봄의 끝 자락을 알리는 6월 초 현충일의 도로는 매년 맘껏 휴양을 즐기려는 차들로 가득하다. 또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해야 할 현충일엔 집집이 태극기가 휘날려야 하겠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6월을 맞이하는 지금, '호국 보훈의 달'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할 때이다.

나라를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공헌 그리고 국가유공자와 그 유가족들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천안함 사건을 떠올리며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호국보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6월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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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충북바이오산학융합원이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우리나라 바이오산업의 메카인 충북 오송에 둥지를 튼 충북바이오산학융합원은 지난 10년간 산업단지 기업지원과 R&D, 인력 양성이라는 목표달성을 위해 쉼없이 달려왔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토대로 제2의 도약을 앞둔 충북바이오산학융합원이 구상하는 미래를 정재황(54) 원장을 통해 들어봤다. 지난 2월 취임한 정 원장은 충북대 수의학 석사와 박사 출신으로 한국화학시험연구원 선임연구원, 충북도립대 기획협력처장을 역임했고, 현재 바이오국제협력연구소장, 충북도립대 바이오생명의약과 교수로 재직하는 등 충북의 대표적인 바이오 분야 전문가다. -먼저 바이오융합원에 대한 소개와 함께 창립 10주년 소감을 말씀해 달라. "충북바이오산학융합원(이하 바이오융합원)은 산업단지 기업지원과 R&D, 인력양성이융합된 산학협력 수행을 위해 2012년 6월에 설립된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바이오헬스 분야 산·학·연 간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창업 생태계 조성과 기업성장 지원, 현장 맞춤형 전문인력 양성 등의 다양한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충북 바이오헬스산업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부 재정지원 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