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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호

영동 황간초 교장

'그대는 곁에 있던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서럽게 울어 본 적 있는가? 그대와 늘 함께 하리라 믿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무너져 내린 아픈 마음을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치유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충북 영동군 상촌면 궁촌 2길, 그곳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시골 학교가 있었다. 학교 뒤편에는 황학산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깊은 골짜기를 감싸 안고 있었고, 마을 앞엔 민주지산 흘러온 맑은 시냇물이 넘쳐흘렀다. 황학산의 원래 지명 이름은 황악산이지만 영동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냥 소리 나는 대로 황학산이라 불렀다. 매곡에 사는 박희선 시인은 그게 바로 영동의 자존심이라고 했다.

봄이면 학교 담장 너머로 노란 개나리가 만발하고, 사택 주위 아름드리 벚나무에서는 탐스런 꽃송이가 함박눈으로 흩날렸다. 교실 창문을 열면 멀리 산밭에서 고향을 지키는 늙은 뻐꾸기가 목쉰 소리로 지루한 봄날을 밀어내고 있었다.

언젠가 가을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미루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신작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양지뜸 소나무 숲이 보였다. 하루에 버스가 서너 번 다니던 형편이었으니, 차타고 멀리 가는 것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출발할 땐 늘 같은 곳으로 간다고 시들한 표정의 아이들이었지만 막상 소풍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서면 어느새 들뜬 기분이 되어 콧노래를 불렀다. 아마 눈치 빠른 아이들은 소나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년 이맘 때 보물 숨겼던 장소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 뒤에 멀찍이 떨어져 학부모들이 경운기에 가마솥과 땔나무를 싣고 따라왔다.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어울려 가을 하루를 즐기고 있는 사이, 그들은 밀가루 반죽을 해서 칼국수를 만들었다. 소풍날 들판에서 벌이는 칼국수 잔치라니!

지금도 선생님과 학부모와 학생들이 함께 풀밭에 둘러앉아 맛있게 먹던 칼국수 맛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시골 사람들의 따스한 인정과 소박한 정성이 담긴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며 시골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던 황학초등학교도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막지는 못했다. 1944년 황학공립국민학교로 개교한 이래, 한때 열 두 학급 육백여 명을 헤아리던 학교는 어느새 학생 수가 백 명 이내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상촌초등학교 황학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가, 1998년 45명의 학생들을 마지막으로 폐교되었다. 그간 47회 졸업식에 221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아이들이 떠난 학교는 한동안 녹슨 자물쇠로 채워져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웃음소리 넘치던 창가 화단엔 향나무들이 산발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함성소리 넘치던 운동장엔 잡초가 우거졌다. 책 읽는 소녀상도 동물원 기린도 숨죽인 채 아이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에 고시원이 들어섰다. 전국각지에서 온 젊은 학생들이 밤새 불을 밝힌 채 청운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년 봄, 떠난 아이들을 대신하여 늙은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잃어버린 폐교의 꿈을 피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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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