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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2.04.29 17:58:1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백운화상은 고려말에 태고 보우, 나옹 혜근과 함께 3대 선사 중에 한분이었다. 그가 제자 법린의 도움을 받아 노안을 비벼가며 75세에 편저한 책이 직지였다. 그리고 여주 취암사에서 1374년에 입적함에 따라 석찬과 달잠스님이 비구니 묘덕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1377년 7월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이 책은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우리 민족이 1200년대 초에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증거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직지의 간행 장소인 흥덕사지를 찾게 된 것은 청주 운천동일대 택지개발공사가 진행되던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운천동 무심천변에는 안동권씨의 정려각과 개인주택(현 청주 CCC아카데미센터 앞 공원) 한 채가 있었다. 1970년에 이 집을 짓기 위해 터를 파는 과정에서 동종과 금동불상이 출토되었다. 현재 이 동종(보물 제1167호)은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따라서 공사를 하기 위해 동종이 출토되었던 '운천동사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현장에 이 동네에 살던 사람 한분이 찾아 오셨다. 발굴현장에는 단원 이외에는 들어올 수 없었지만, 주변에 사시는 분이라 특별히 허락이 되었다. 이 분이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며,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좀 봐달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당백전이었다. 이 동전은 조선 고종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짓기 위해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려고 발행한 것으로, 현재는 큰돈이 안 되니 잘 보관하셨다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시라고 하였다. 보통의 경우는 볼일을 다보면 현장을 떠나는 것이 상식이나, 이 분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사실은 내가 연당리(현 흥덕초등학교)에 살다가 개발된다고 하여 사직동 변전소 근처로 이사를 했는데, 돌이 반질반질하고 하도 좋아서 봉당에 댓돌로 사용하다가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그 집에 달려가 보니 탑에 사용했던 면석이었다. 탑 부재라면 반드시 사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원래 돌이 있던 곳을 답사하였다. 논길을 지나 언덕위에 밭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개인의 묘가 있었고, 주위에는 주춧돌과 기와 편들이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절터가 분명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동네사람들이 옛날에 제사지낼 때면 여기에서 재깨미(기왓개미)를 주워 다가 놋그릇 닦는데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곳도 택지개발에 포함된 지역이므로 절터 발굴을 위한 행정적인 절차가 거치는 과정에서 개발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발굴허가를 받아 공사 시행업체에 공사를 중지토록 하였으나, 당시 시행업체에서는 감독자가 공사를 중지하지 않고 예비군훈련에 들어갔다. 포크레인 기사는 이장을 하지 않은 민묘를 돌려놓고 절터의 반 이상을 훼손한 것이다. 이를 두고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진홍섭 교수는 '산자가 훼손한 유구를 죽은 자가 살렸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절터가 반쯤 훼손된 상태에서 절터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자연부락 명칭을 붙여 '연당리사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발굴이 거의 끝날 무렵 절터의 동남쪽 반출된 흙더미 속에서 포크레인에 찢겨진 청동금구(금고, 반자)편이 발견되었다. 여기에 '갑인오월일 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日 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다. 발굴단에서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직지의 간행장소가 흥덕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위치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굴의 명칭도 '흥덕사지'로 하고,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방법으로 금속탐지기를 사용하여 금속활자를 찾는 2차 발굴조사와 학술회의를 거치게 된다.

이런 흥덕사지(사적 제315호)를 정비하면서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한지 올해가 20년이 되는 해이다. 시민의 제보에 의해 찾은 귀중한 문화유산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데 대해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며, 우리는 흥덕사지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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