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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아 세계가 떠들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세계 언론에서는 지난 천년을 되돌아보는 특집기사들을 보도하였다. 우리 인류가 발전하는데 기여한 기술적인 혁명이 무엇이었을까? 대다수의 언론에서 금속활자의 발명을 1위로 선정하였다. 그 이유는 금속활자를 발명함으로써 지식정보의 유통이 활발해 졌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민혁명, 과학혁명, 산업혁명, 근대 자본주의,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바로 금속활자 인쇄술의 영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금속활자의 발명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독일 구텐베르크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13세기 초에 한국에서 발명되었다.

중국의 경우는 8세기 초에 목판인쇄를 발명하였다. 활자 인쇄는 1040년경에 필승이 교니(흙)로 활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심괄의 『몽계필담』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교니활자는 흙으로 동전두께로 얇게 만들어 반복사용이 어려워 실패하였다. 13세기 후반에는 석(주석)활자를 만들었으나, 금속에 잘 달라붙는 인쇄용 먹을 개발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래서 1298년에 왕정은 목활자를 만들게 된다. 일반적인 금속활자 인쇄는 1490년에 화씨회통관에서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1200년대를 전후하여 사회적으로 내란과 외란을 겪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에 최충헌이 정권을 잡으면서 안정기에 들어가고, 권력은 그의 아들 최이(우)에게 넘어가게 된다. 최이는 문치를 펴기 위해 책이 필요했고, 책을 만드는 기술인 금속활자를 발명하게 되었다. 즉,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기록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와 『상정예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1239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 전하는데, 여기에 최이가 금속활자본을 목판으로 다시 새긴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것으로 보아 1239년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 인쇄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각 관서에 나누어 보관토록 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책은 안타깝게도 실물이 전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1377(고려 우왕 3)년 7월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약칭 직지)』은 실물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를 창안하여 발전시킨 슬기로운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직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53년에서 1455년 사이에 금속활자로 『42행 성서』를 간행하였다. 동·서양의 금속활자 인쇄의 차이점은 활자를 만드는 주형과 종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텐베르크식 주형은 금속으로 만들어 고정화되어 있는 반면에 동양의 주형은 흙(모래)으로 만들어 깨트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리고 동양의 한지는 부드럽고 얇은 반면 서양의 종이(양피지)는 두꺼워서 고르게 압을 가할 수 있는 프레스(기계)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금속활자 인쇄에 포도주를 짜는 압착기를 응용하게 된 것이다. 즉, 인쇄가 기계화로 발전하였으며, 전 세계에 보급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중국이 1040년경 필승에 의해 활자의 원리를 찾아냈다면, 한국은 1200년대 초부터 실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1455년부터 보편화(상업화)에 기여한 공이 있는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고려시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지식정보를 보급할 필요성을 느끼고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금속활자 발명국의 후예답게 IT강국으로 우뚝 설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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