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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의 책으로 보는 세상 -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英 극작가 버나드쇼 묘비명 표제목 '눈길'
이기호 작가 재기발랄 단편 8편 읽을거리
개성 넘치는 인물…날렵한 상상력 돋보여

  • 웹출고시간2011.03.06 18:01:3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책읽기의 참맛은 무엇보다 묵직한 고전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이겠지만. 다가오는 봄날 상큼하고 재기발랄한 단편들로 구성된 한 권의 책에서 새봄의 활력을 얻어 보는 것도 좋겠다. 사실 2006년 출간되었으니 신간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단편집에 실린 면면을 다시 들여다보아도 이처럼 날렵한 상상력의 작품들을 최신간에서도 보기 어렵다. 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인 이기호 작가는 타고난 재치 만점의 입담꾼이다. '나쁜 소설' '누구나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흙볶음' '원주통신' '국기게양대 로망스' '수인(囚人)'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등 8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저 유명한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차용하여 표제작의 제목으로 삼았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소설의 인물들은 일상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인물들의 좌충우돌을 그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대표작 '토지'를 소재로 한 '원주통신'과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독특한 형식의 소설 '나쁜 소설'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원주통신

-룸살롱 '土地'의 모태가 된 소설 '土地'

<토지>를 쓴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온 것은 일천구백팔십년도의 일이었다. 선생의 정확한 주소는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742-9번지. 우리집은 선생의 집에서 오십 미터쯤 떨어진 742-1번지였다.

선생과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생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일천구백팔십년도라면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이제 막 일 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건 즉, 내가 팔팔에 육십사 같은 고난도의 구구단을 외우느라 온갖 핍박과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달게 받고 있던, 그런 시절이란 소리이다. 그러니 이웃에 새로 이사 온 소설가 할머니에게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중고등학교 시절 박경리의 손자라는 '특별한 오해'를 받고도 작가의 후광이 싫지 않았던 주인공 '나'는 그러한 오해를 유야무야 묵인해 버린다. 그러나 한때 박경리의 손자라는 명망을 누렸던 달콤함은 훗날 학교를 졸업하고서야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

상호명 사용 승인서

나 박경리는, 박용구가 소속된 사업장에 대해 '토지' 상호 사용권을 허락하며, 이에 대하여 일체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주인공 '나'는 룸살롱 '토지'를 운영하는 학교 동창으로부터 위와 같은 서류를 강제로 떠맡게 된다. 백수인 처지에 멋모르고 건달 동창에게 룸살롱에서 온갖 향응을 받은 -웨이터'길상'과 어여쁜 '서희'의 시중으로-주인공은 졸지에 위와 같은 서류를 들고 작가 박경리 선생을 찾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 실존했던 유명 작가의 현 근거지인 '원주'를 배경으로 저자는 한 편의 그럴 듯한 코믹극을 만들어 내었다. '토지'라는 저명 문학 작품을 지역적 특산물 정도로 인식하여 손님을 유인하려는 룸살롱 건달 사장의 상술은 실소를 자아내는 한편 애교스럽기조차 하다.

원주 박경리 선생의 집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와 조손간일지도 모른다는 친구들의 유언(流言)을 모르는 척 즐긴 죄로 주인공은 눈 오는 밤새 온몸이 꽁꽁 언 채 덜덜 떨며 작가의 집 앞을 지켰다. '토지' '상호명 사용 승인서'를 차마 내밀지 못하여…….

◇나쁜 소설

-기호氏에게 소설적 기호(嗜好)를 묻다

나쁜 소설을 들려준 당신, 어떤 소설과 소설가를 좋아하시는지· 혹시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읽어보셨는지·

이 소설에서 방송국 사장은 연속극 제작을 위해 타방송사에서 이야기 원고를 저울에 달아 kg당 매겨진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다. 그의 말인즉슨 이렇다. '칠십 킬로가 넘는 원고를 언제 일일이 읽어 보겠는가·'

모든 것이 자본 논리로 종속되는 경제 제 1원칙의 시대에 문학도 상업이 된지 오래지만 이쯤 되면 소설도 야채나 고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사실 소설이 사과나 돼지고기보다 더 나은 격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 또한 희박한 것이다. 더구나 '누구나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요리법 저자인 당신은 '누구나 읽지 않고도 맛있게 흘려 넘길 수 있는 수프식 소설 독법' 또한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의 경쾌한 상상력은 소설과 음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그들의 관계를 궁구하여 '먹는 소설'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언제나 지경(地境)의 영역 안에서, 견고한 사고의 성곽을 즐겨 사수하는 자들이 소설을 '육체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 웬 말이냐고 항의할 수도 있겠다.

당신의 소설을 들으며 내가 요사의 소설을 떠올린 맥락의 흐름에는 어떤 '유쾌함'이 자리하고 있다. 소설을 원고 무게로 달아 매매하는 장면을 처음 접했을 때 당시 나는 어떤 소설이나 소설가에게 염오라도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 그 단순한 역발상 때문인지 매우 후련하고 통쾌하기까지 했다.

소설이란게 원래 그랬잖아요. 누군가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이야기. 들려주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각색되는 이야기. 그게 소설의 진정한 참맛이잖아요. 이 소설도 읽어 주는 사람에 따라, 그의 맘에 따라, 계속 변하고 뒤바뀌고 출렁거려, 누가 진짜 이 소설의 원작자인지 모를 지경까지 흘러가길 원합니다.

천천히 천천히 당신이 들고 있는 카메라 렌즈와 주인공의 동공이 하나가 됩니다. 하나가 됩니다.……오직 당신이 상상하는 대로만 당신이 움직이는 대로만 주인공이 움직일 테니, 주인공이 보는 것을 당신 또한 볼 수 있을 테니, 이제 당신과 소설 속 주인공은 한 몸이 되었으니

'나쁜 소설'은 생물적으로 진화한다. 읽어 줄 뿐 아니라 실행하는 소설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을 읽으면 청자가 서술자가 되며 또한 주인공으로 소설을 살아내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소설은 어떠한 정의 아래 쓰여지는 엄정한 계율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이며 한편으로는 부끄럽고도 두려운 자기 고백이다. 소설이 아무리 사회 역사적 현실과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자기 체험에 근거한 자기 위안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문제든 사회의 문제든 객관화, 타자화 시켜서 본인을 포함하여 타인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소설가나 독자의 특정한 성향에 대해 간섭할 필요는 없다. 어떤 소설을 쓰거나 읽는다는 것은 진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문제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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