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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의 책으로 보는 세상 - 굶주림

정직한 의식이 살아있는 한 빵 한 조각도 행복이어라
노벨상 수상 작가 크누트 함순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 웹출고시간2011.01.16 19:07:1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배경음악처럼 행간에 깔리던 백석 시의 한 구절이다. 내가 좋아하는 백석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외로움과 쓸쓸함의 정조가 주를 이룬다.

<굶주림>은 백석 뿐 아니라 어쩐지 근대화 시기의 우리나라 문인들을 많이 떠올리게 했다. 밥 한 끼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의식은 새벽이슬처럼 맑고, 식민통치하의 압제와 어둠을 책에 의탁하여 한껏 고양된 영혼으로 시대를 벼리어 나가던 사람들……. 폐결핵으로 사위어가는 심신을 추스르려 닭 한 마리를 소원했으나 끝내 먹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 김유정, 집도 없이 오직 좋아하는 담배 연기에만 휩싸여 살던 공초 오상순…….

함순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겪은 이 자전적 이야기를 발표한 것도 우리의 근대화 시기와 멀지 않은 1890년이었다. 그의 말년의 정치적 행로-세계대전 중 독일에 대한 지지-가 어떠하든 이 굶주리는 지식인의 이야기에서 나는 오랜만에 신선한 기쁨을 맛보았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고 소비해야 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상하지도 않은 음식물 쓰레기로 넘쳐나는 이 도시 생활에서, 빵 한 덩이 때문에 온 존재를 던져 고뇌하는 지식인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나는 자그마한 돌 하나를 발견하고 먼지를 털어 이것을 입 속에 넣었다. 혓바닥 위에 무엇이고 놓고 싶어서였다.'

먹고 소화시켜 배를 채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혀에게만이라도 물체를 감촉시켜 주고자 하는 주인공의 허기와 절박함이 눈물겹다. 심지어 손가락까지 깨물어 본다. 그리고 흘러나온 핏방울을 자신도 모르게 핥아 먹었다. 그러다 제정신이 든 그는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낀다.

주인공의 의식은 첨예하지만 그의 몸은 무위자연처럼 살아간다. 배고픔만 해결할 수 있으면 그에게 더 이상의 물질은 필요하지 않다. 그의 전 재산이란 입고 있는 옷과 안경, 남에게 빌린 담요 한 장이 전부이다.

벽지 대신 묵은 신문이 도배된 초라한 하숙집 방안도 그에게는 천국과도 같았지만 그마저도 방세가 밀려 더 이상 거주할 곳이 못되었다.

집을 나온 주인공은 조끼를 전당포에 맡겨 얻은 1크로네의 돈으로 빵을 사고 나머지는 거지 노인에게 주어 버린다.

"영감이 누구보다 나에게 먼저 부탁해 준 것이 고맙소."

굶다 못해 말먹이인 귀리까지 얻어 볼 생각을 하는 그가 이렇게 호기를 부리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순간의 화려한 적선은 지속적인 궁핍을 보상하는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충만감에 휩싸여 그에게는 다음을 위한 생활의 계획 같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일용할 뿐이다.

평범하고 합리적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없을 때를 대비하여 잉여의 물질은 저축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의 허기만 채우면 남은 돈에 관심이 없었다. 불쌍한 이웃에게 다 주고 자신은 또 다시 빈곤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육신이 굶주릴수록 의식은 점차 날이 서도록 번쩍인다. 따라서 그의 배가 음식으로 가득 찰 때 그의 의식 또한 두텁고 호사스런 카펫과도 같은 포만감에 질식되어 버릴 지도 몰랐다.

그는 장부 정리하는 일자리를 구하러 갔다가 숫자 하나 잘못 쓴 실수 때문에 그마저도 놓친다. 사실 과잉된 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직장을 얻기 어렵다. 그러한 일자리는 인생을 회의하지 않거나 머뭇거리지 않는 낙관적인 사람들이 어울린다.

신문사에 원고를 판 돈 10크로네로 2주일을 보내지만 한 끼니의 빵이란 끊임없이 밀려오는 조수와도 같은 것이다. 이번에는 마지막 남은 윗저고리의 단추까지 뜯어 팔 생각을 한다. 거기에 안경까지 잡히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서다 다행히 아는 친구에게 동정을 사 5크로네를 얻는다.

그 돈으로 또 일주일은 즐겁게 보냈다. 그러나 이제 원고는 팔리지 않고 하숙비도 내지 못해 그는 자기 방에서 쫓겨나 주인식구들 방에 구박덩어리 강아지처럼 끼어 숙식을 해결한다. 한 구석에서 글을 쓰고 싶어도 불 밝힐 초 한 자루 구할 수 없는 처지다. 그는 어떻게 초를 외상으로 빌려 볼까 가게에 갔다가 점원의 착오로 인해 초는 물론이고 오히려 몇 크로네의 돈을 얻게 된다.

그 돈으로 그는 비프스테이크를 사먹는데 금방 다 토해버리고 만다. 오랜만에 기름기가 들어간 것과 부정한 돈이라는 생각이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는 남은 돈을 가난한 과자집 노파에게 다 주어 버린다.

몇 주일이나 같은 속옷을 입어 그 뻣뻣해진 옷자락에 살갗이 쓸려 피가 맺히고, 공원의 벤치에서 잠자리를 청하면서도 그에게는 생활의 실질적 분별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 남은 옷의 단추까지 뜯어 팔며 담요까지 저당 잡히려 하는 그가 느닷없이 수중의 모든 것을 남에게 털어 주는 행위는 정말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치 기생충을 자기 위 속에 넣고 키우며 관찰하려는 생물학자와도 같이, 굶주림이란 괴물을 몸 속에 키우며 그에 맞서 치열한 생존 전략을 습득하려는 투사적 학자같이도 느껴진다.

'가난한 인텔리는 돈 많은 인텔리보다 훨씬 세밀한 관찰자란 말이지요.'

그의 말대로 가난은 홀로 어둠의 미세한 부분까지 몰아가는 특성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의식의 가장 깊은 심연 속에 잠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몸을 저 밑바닥에 방기(放棄)함으로써 의식은 더욱 맑고 높이 떠오르고자 하는 욕망…….

책의 마지막에서 그는 어두워오는 부둣가에 서 있다. 그리고 러시아 선박에 자신의 빈 몸을 싣는다.

가난하고 외로운 자만이 길고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다고 했던가.

그의 출항은 그 꿈으로의 출발이었다. 실제 크누트 함순은 노벨상을 받았고 아흔 셋의 수를 누렸다.

왜곡되고 과잉된 자의식으로 불안한 삶을 위태롭게 이어가는 주인공에게 연민과 동조를 느꼈다면, 그 선한 의식의 높고 맑은 자존 때문이었다. 한 조각 빵만 있으면 다른 것은 구하지 않는 청빈함이 좋았다. 정직한 의식만이 필요했을 뿐이고 허기만 채울 수 있으면 물질은 남에게 주었다.

온갖 종류의 기름지며 호사스런 음식이 넘쳐나고, 그래서 오히려 다이어트로 '굶주리는' 이 시대에 <굶주림>은 참 맛있는 정신적 영양제이다. 또한 백석의 시와 더불어 음미하니 식후 한 조각의 과일처럼 달콤한 뒷맛이 감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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