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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의 책으로 보는 세상 - '외투'

러시아 작가 '고골리' 단편소설
인간군상 세밀한 현실묘사 눈길

  • 웹출고시간2011.01.30 19:23:3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한겨울밤, 세찬 눈보라의 골목길을 외투 깃을 여미며 걸어갈 때면 간혹 생각나는 이방의 사내가 있다. 외진 모퉁이 주홍의 나트륨 가로등 아래 해진 옷차림으로 떨고 있을 듯한 '외투' 속의 사내 아카키예비치…….

"작가는 전 인류가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나는 주저없이 고골리의 단편소설 '외투'를 펼쳐 놓겠다. "우리 모두는 고골리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저 유명한 도스트예프스키의 헌사 때문만은 아니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토록 곡진한 삶을 극명하게 드러내준 작가의 필력이 존경스럽다.

'외투'

니콜라이 고골리 지음

"작달막한 키에 살짝 얽은 얼굴과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칼, 눈은 근시인데다 대머리이고 양쪽 뺨은 주름이 쭈글쭈글하며 안색은 치질을 앓고 있는 것과 같이 거무튀튀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외모마저도 볼품없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독신으로 살아가는 아카키예비치는 페테르부르크 한 관청의 말단 서기이다. 그가 하는 일은 늘 정물처럼 앉아서 정서(正書)하는 일이다. 술과 놀이 사교 등 그 어떤 것도 즐길 줄 모르는 그는 글씨를 반듯하고 예쁘게 쓰는 것에서 삶의 보람을 얻는다. 그가 누리는 유일한 사치가 있다면 집에 돌아와 혼자서 소박한 저녁을 마친 뒤에 뜨거운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단조로운 일상에 자족하던 그에게도 고민거리가 생겼다. 유난히 길고 추운 러시아의 겨울, 하나 밖에 없는 외투가 다 해져 버린 것이었다. 그동안 같은 건물 안에 세들어 사는 재봉사의 뛰어난 솜씨로 기우고 기워가며 아껴 입어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고쳐 볼 수 없다는 외투의 마지막 사망 선고를 들은 그는 큰 돈을 들여 새 외투를 장만해야 할 처지에 놓여 버린 것이다. 연봉 400루블을 받는 아카키예비치에게 새 외투 가격인 150루블은 너무도 큰 돈이었다. 옷감과 디자인의 수준을 낮추는 것으로 80루블까지 타협을 본 주인공은 그때부터 내핍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즐겨 마시던 차도 끊고 밤에 불도 켜지 않는다. 심지어 속옷 빨래 맡기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퇴근 즉시 속옷마저 빨리 벗어 놓고, 저녁은 거의 굶다시피 생활한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주인공은 새 외투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외투라는 단순한 물성의 옷이 아니었다. 몇 달간의 따뜻한 저녁식사와 차를 마실 수 있었던 뜨거운 시간들, 어둠의 침대에서 떨며 인내하던 시간들로 짜여진 외투였다. 그가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가장 환한 희망으로 빛나던 절정의 한 시기가 고스란히 응축된 것이 바로 그 '새 외투'였다. 따라서 그에게 외투는 한낱 물질이 아니라 그의 '전인격적 생애'였던 것이다.

그가 새 외투를 입고 관청에 출근하던 날, 그에게 도통 관심이 없던 동료들조차 그의 새 외투를 칭찬하고 축하해 주었다. 그는 종일 흡족한 마음으로 일했다. 그런데 그의 상사가 새 외투를 장만한 것도 기념할 겸 그를 파티에 초대했다. 그는 사실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추운 거리에서 따스한 외투의 감촉을 즐기고, 집에 가서 외투의 존재를 찬찬히 음미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화기가 도는 상사와 동료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상사의 집에서 외투를 벗을 때 그는 잠깐이나마 외투와 떨어지는 불안함을 느끼지만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현관 입구의 보관소를 찾았을 때 외투는 무사히 걸려 있었다. 그는 뿌듯함을 느끼며 다시 외투를 입고 밤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광장의 어두운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그는 졸지에 한 무리의 사내들에게 에워싸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 바로 그의 '생애'를 벗겨 달아났다.

외투를 잃어버린 아카키예비치가 거의 넋이 나가리라는 것은 익히 짐작할 만 일이다. 그는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를 비롯한 모든 관청을 찾아가나 한밤중 강도에게 강탈당한 외투를 되찾는 일은 요원한 일이었다. 헌 외투조차 걸치지 못한 채 그는 그의 외투를 찾아 눈보라치는 밤거리를 헤매다 병이 들고,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후로 페테르부르크 밤거리에는 유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외투만을 빼앗는 아카키예비치 유령이었다.

1800년대 중반 고골리는 인간 군상의 세밀한 현실 묘사를 통해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알리고, 러시아 문학사에 '고골리 시대'가 명명될 정도로 사실주의 문학의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일견 단순하고 평범한 듯 보이나 '외투'라는 소설에서 인간 내부에 담긴 심리 묘파는 치밀하고 날카롭다.

자신의 작품(외투)을 입고 걸어가는 사람을 보려 이른 아침의 골목길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재봉사, 변변찮은 주인공을 놀리면서도 그의 외투에 '경의'를 표하는 동료 관리들, 친구 앞에서 고위 관리로서의 위엄을 보이려 아카키예비치를 호통쳤다가 죄책감에 그를 도울 방법을 찾는 속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유력 인사'등 인물군의 스펙트럼도 다채롭다.

정물화된 글자들의 세계에서도 그 획의 차이에서 색다른 기쁨을 발견할 줄 아는 아카키예비치는 실상 그 미세한 마음의 현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 놓쳐버린 외투 자락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유령이 되었나보다.

아카키예비치에게 못내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쩐지 그의 모습에 내 삶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아카키예비치가 그의 그 '하찮은 일에서도 그 어떤 다채롭고 즐거운 자기 세계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나 또한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 속에서도 시간의 층위에서 빚어지는 삶의 변별력을 제법 두둑한 생의 이력처럼 내세우는 두꺼운 낯도 지니게 되었다. 꼭 외현(外現)의 진폭이 크다고 해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운신의 폭이 극히 적은 자의 못난 변일 수도 있겠지만, 저마다 조용히 되풀이되는 일상 또한 인공위성의 우주 탐사만큼이나 신비하고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과 관계 맺는 물질의 속성이다. 생멸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에게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이 주는 만족감과 행복은 생각보다 매우 큰 함량으로 우리 삶에 얹혀 있는 것 같다. 머리맡에 놓인 새 운동화를 더듬어 보려 어두운 방 안에 자주 깨어 일어나 앉아, 한밤중에도 몇 번이나 가슴 벅차 잠 못 이루던 어린 날의 깊은 밤들을 생각하면 아카키예비치의 죽음에 더욱 마음이 서늘해진다. 더구나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며 그의 삶을 따스하게 덮어 주던 '외투'에 있어서랴.

이 겨울이 가기 전, 외투를 잃고 상심하여 유령이 된 북국의 사내를 만나 보자. 당신의 외투가 유난히 더 따뜻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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