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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의 책으로 보는 세상 - 홍어

인고와 순일의 여성, 눈길 따라 세상으로

  • 웹출고시간2011.02.13 17:20:2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겨울이 가기 전, 잔설이 녹기 전에 읽으면 좋을 작품이다.

시골에 살던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폭설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문 밖 모든 것이 하나의 광대한 은빛 설원이 되어버린 광경에 압도되어 있던 나는 닭장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퍼드덕거리는 앵무새를 보았다. 새라면 늘 칙칙한 빛깔의 참새 정도만 보아 오던 나에게 그림책에서만 보던 빨간 부리, 주홍빛 얼굴, 녹황색 목덜미, 유월의 벼포기처럼 선연한 초록색 깃털의 화려한 앵무새는 하나의 경이로운 세계였다. 천지를 덮어 버린 흰 눈 속에서 비현실적이며 가상적인 세계가 또렷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나는 아찔한 충격에 빠져 바라보고 있었다.

"쯔쯔… 이 눈 속에 먹을 게 없어 예까지 날아 든 모양이구나"

할아버지는 그 날부터 새장을 만들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새장이 완성되던 날, 동생의 실수로 미련없이 내 곁을 포르르 떠나 버린 그 아름다운 빛깔의 새…….

<홍어>를 읽는 동안 나는 어린 시절, 그 겨울에 잠깐 만났던 앵무새가 다시 돌아와 내 언저리를 배회하는 느낌에 계속 사로잡혀 있었다. 떠날 때의 그 자유로운 날개짓으로 내게 한없는 무력감과 안타까움을 안겨 주었던 새…….

<홍어>를 온통 덮고 있는 그 부신 눈(雪)빛과 그 속에서 선연한 모습으로 자꾸 도드라지는 내 어린 시절의 앵무새 빛깔 때문에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눈시울이 아렸다. <홍어> 속에 펼쳐진 그 많은 눈의 잔광은 이렇게 어린 날의 편린들을 들추어내듯 하나하나 반사해 내고 있었다. 유년의 겨울은 <홍어>의 책장 뒤에서 추운 아침 부엌에서 몸을 떨며 들어오시던 할머니의 입김으로 뿌옇게 되살아나, 행간을 읽을 때마다 군불 지피시던 할머니의 기침 소리가 점점 또렷해지고, 나뭇가지 타는 소리가 툭툭 마음에 지펴져 오는 것이었다.

<홍어>의 '어머니'는 곧 내 할머니였고 '아버지'는 곧 할아버지였다. 단아하면서 흐트러짐이 없는 한국적 여인. 순일(純一)한 마음으로 한 지아비만을 기다리는 여인. 그러한 여인은 흰 눈 속에서 더욱 고적하게 빛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언제나 겨울이다. 그것도 항상 세상을 표백하는 듯한 깊은 설원의 겨울……. '나(세영)'에게 잠깐의 여름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삼례'를 찾아온 사내에게 잠식당해 잃어버리는 계절이다.

어머니와 아들(세영)만이 단출하게 사는 한적한 시골 마을의 집, 폭설이 내린 날 아침의 은빛 장막을 들추고 거지 계집애가 들어서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눈에 쫓겨 한 줌 불씨를 찾아 부엌으로 찾아 든 거지 계집애를 어머니는 차츰 받아들이면서 '삼례'라 이름 붙인다.

세상과 거의 단절되다시피 집안에만 파묻혀 삯바느질로 세월을 박음질하며, 오직 바람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왜 삼례를 거두었을까. 그것은 어머니 나름대로 비로소 세상을 향해 호흡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삼례는 곧 세상을 향한 어머니의 눈과 귀가 되어 삯바느질 일감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점차 어머니의 영역을 벗어나는 거침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몽유병을 가장하여 한밤중에 남자를 몰래 만나기도 하고, 어머니가 꺼려하는 읍내 술집 '춘일옥'의 일거리를 가져오기도 한다. 어머니는 삼례에게 모진 매질을 가하지만 끝내 삼례를 내치지는 않는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애정이다. 심지어 나중에 삼례가 집을 나간 뒤 삼례를 찾아 온 남자에게 돈까지 쥐어 준다. 아무리 그동안 사람들에게 삼례를 친정 쪽 일가붙이인 양 했다지만, 어머니의 삼례에 대한 마음 씀씀이는 단순히 책임감과 체면 유지에서만 비롯되었다고 할 수 없는 야릇한 데가 있다. 또한 후일 술집 여자가 되어 다시 읍내로 흘러들어 온 삼례에게 어머니는 자신의 전재산이랄 수 있는 돈을 건네 주며 멀리 떠나가 잘 살아 주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그 돈은 단순히 물질적 가치에서 뿐 아니라, 세상과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희망과 염원이 담겼던 소중한 돈이었다. 이렇듯 어머니는 삼례에게 친딸과 같은 애착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삼례는 어머니가 가슴 저 밑바닥에 둥지를 틀어 놓고 기다리던 한 마리 새가 아니었을까. 비록 누더기꼴이었지만 흰 눈밭에 선연히 도드라지며 답답한 가슴에 한 줄기 호흡처럼 때마침 날아든 빛 고운 새, 삼례……. 그녀는 어머니 자신의 도덕의식으로는 도저히 실현될 수 없었던, 저 내재되어 있던 무의식의 잠재에서 끌어 올려진, 드넓은 세계를 향한 어머니의 화려한 날개짓이 아니었을까. 얹혀 사는 처지이면서도 거침 없는 나락의 삶을 영위하는 삼례에게서 어머니가 처음부터 가출의 징후를 읽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남편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세계로 조금씩 길을 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부엌 입구에 매달려 있던 홍어가, 삼례가 처음 눈과 추위를 피해 들어오던 날 없어지지만 그것을 다시 사다 매달아 놓았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도 어느 정도 그 '길'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와 그가 뿌려 놓은 씨앗(호영)까지 거두어 들여 놓고, 폭설이 내린 날 아침, 그 자신 홍어가 되어, 가오리연이 되어, 삼례가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순백의 눈밭 위에 세상을 향한 자신만의 발자국을 낸 것이다.

폭설에서 시작하여 폭설로 마무리 되는 이 소설은 그 눈의 여광으로 인해 아리도록 눈부시며 가슴 서늘하다. 가뭇한 그림자조차 없는 설국의 세계, 언제나 소복 차림을 하고 있는 어머니, 삼례에 대한 순진한 갈구로 바랜 색감의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나(세영), 이러한 정경은 내 어린 시절 겨울의 풍경과 맞물려 돌아간다.

창호지 문을 환하게 물들이던 마당의 흰 눈밭,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을 떨구어 내던 거뭇거뭇한 감나무 가지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오래전 이야기들.

"니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만주로, 일본으로 무작정 떠돌아 다니셨단다. 어린 것들 굶길 수가 없어 내가 도부 장사로 나섰지. 어둑신해서 돌아올라치면 저 고갯마루에 삼남매가 새까맣게 기다리고 있고……."

할머니는 말없이 속 깊은 정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셨다. <홍어>의 어머니에게서 나는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체취를 느꼈다. 반듯하면서 세속에 함부로 휩쓸리지 않는 태도, 이러한 전통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은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라는 김주영의 또 다른 소설에서 이미 보아 온 바가 있다.

그러나 이제 <홍어>의 어머니는 좀 다르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성과 부덕의 자리에서 모든 회귀를 하염없이 다 받아 줄 듯 하던 어머니도 드디어 떠나는 것이다. 그 어머니의 발걸음에서 나는 어린 시절 긴 방천둑 옆 미루나무를 따라 아득히 흘러 가던 강줄기의 흐름을 본다. 분명 한쪽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어쩐지 향방없이 아련하던 물길의 흐름……. 실재(實在)의 시간에서 비켜 서 있는 듯한 그 먼 여정의 자취 끝자락에, 어머니의 펄럭이며 멀어져 가는 흰 치맛자락이 끌린다.

어머니는 세상의 어디로 아득히 흘러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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