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령(牛頭嶺)은 삼도봉(1,177m)과 황악산(1,111m) 사이에 위치하는 고개로 720m의 해발고도를 지니고 있다. 영로(嶺路) 상으로는 충북 영동군 상촌면과 경북 김천시 구성면을 연결하면서 도내 최남단 고개가 되고 있다. 대간(大幹)이 지나는 만큼 분수령 역할도 하고 있다. 영동 쪽으로 흐르는 물은 궁촌천, 초강천 등으로 하천폭을 넓히며 금강으로 들어가고, 김천 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에 합류한다. 고개의 경사도는 남쪽사면(김천)보다 북쪽사면(영동)이 훨씬 가파른 모습을 하고 있다. GPS고도표(그림참조)에서 보듯, 북쪽사면은 정상에 다가갈수록 그 경사도가 마치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는 정교함과 함께 나름의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김정호는 지도를 제작할 때 인(人)과 물(物)의 흐름이 많은 길은 선(線)으로 표시하고 10리마다 점을 찍었다. 반면 인물의 왕래가 적은 고개는 이름만 표기하고 연결선을 그리지 않았다. 우두령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大東地誌·1863)는 이른바 쌍둥이 사료이다. 대동여지도를 글로 풀어 보충 설명을 한 것이 대동지지다. 여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청주가 교육도시임을 주장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망선루(望仙樓)이다. 망선루는 고려시대 때 과거시험의 합격자 방이 붙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청주에서 7개월 가량 머문다. 임시수도 생활이 길어지자 과거시험을 봤고, 그 합격자 명단을 망선루에 내걸었다. 근현대기의 망선루는 자주 이전했다. 지금의 중앙공원 망선루는 제일교회측이 부대건물로 사용하던 것을 청주시에 기증하면서 공원 안으로 이건(移建)됐다. 2천년 밀레니엄 때의 일이다.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지정(至正) 신축년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으로부터 이곳에 옮겨 와 수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도적이 평정되자 문과와 감시(監試)의 합격자 방을 붙였었는데, 훗날 사람이 그 방을 써서 누각에 게시하였다.'- 인용문에서 보듯 망선루의 본래 이름은 취경루로, '경치를 끌어들인다'는 뜻을 지닌다. 이 누정 이름을 망선루로 바꾼 인물이 한명회(韓明澮·1415∼1487)다. '누각은 오랫동안 헐어 있었는데, 천순(天順) 신사년(세조 7년)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다.'- 한명회는 청주가 본관이나 여러 정황상
향토사학자 이자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는 송부일씨가 30여년 동안 전국 유명 사찰을 돌면서 얻은 스님들의 생활의구식과 사찰의 전설, 유래, 역사들을 지면에 연재해 우리나라 사찰, 문화재에 대해 소개한다. 진부령의 낙엽들이 빨갛게 물들은 계곡들은 한폭 풍경화다.우리나라 최북단 고개로 해발 529m이며 적설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겨울 진부령 계곡물에 얼려서 국수틀처럼 생긴 나무에 걸어놓은 명태들이 눈, 비, 바람에 지쳐 황태가 된다.이 덕장을 지나 알프스 스키장으로 이어지며 눈의 낭만을 찾아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스키장에는 은빛나라 눈의 세계로 오르는 리프트에 앉아 사랑의 밀어가 익어가는 곳이기도 하다.스키장을 뒤로하고 진부령 고개를 넘는데 아스팔트 위에 낙엽이 차가 지나갈 때마다 오색 그림을 그리고 옛 사랑을 그리워하며 양지 바른 언덕으로 풍수 찾아 날아간다. 낙엽은 바람둥이 인 것 같다. 금방 푸른옷을 입었더니 어느새 오색 빛깔 색동옷을 입고 수줍어한다.마술사 바람이 찾아와 나무에 달린 단풍잎을 날리면 나무는 옷을 벗고 벌벌 떨면서 가을, 겨울을 보내고 봄을 기다린다.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진부령 고갯길을 내려오는데 좌측으로 건봉사 입구가 보인다. 시멘트…
포도청(捕盜廳)은 지금의 경찰청과 같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포도청은 전국적인 기구는 아니었다. 성종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수도권을 좌변과 우변으로 나눠, 서울의 동부·남부·중부와 경기좌도는 좌변포도대장이 맡았다. 반면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는 우변포도대장이 맡았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좌·우변 포도청을 폐합해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했다. 전회에 박응서라는 인물을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대북파 이이첨(李爾瞻)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했다"고 거짓 자백했다. 이때 박응서의 형관을 맡은 인물이 당시 좌변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1623)이다. '좌변포도대장 한희길이 아뢰기를, "지난 달에 조령(鳥嶺) 길목에서 도적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적괴(賊魁)인 서얼 박응서는 도망갔고 도적 허홍인의 노비 덕남 등을 체포했는데…'- 그러나 그도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였다. 그의 뒤에는 대북파 영수인 이이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이첨이 이를 듣고 희길을 불러 묻기를 "자네가 큰 도적을 잡았다고 들었는데 그 실상이 어떠한가" 하니, 희길이 공초(供招)받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을 선발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호성공신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문신에게 내린 훈호(勳號)를 지칭한다. 무신에게는 선무공신이라는 훈호가 주어졌다. 호성공신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났다. 1등에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崑壽) 등 2명이 선발됐지만 나머지 등급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 대상이 됐던 인물은 정운, 이희득, 심희수, 유몽정등 4인이었다. 특히 심희수와 유몽정은 역할이 비슷, 공신 포함 여부를 놓고 삼정승들이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흔적이 실록에 나타난다. '만일 심희수을 녹공할 경우에 유몽정(柳夢鼎)은 임진년의 성절사로서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할 적에 뒤따라갔고, 북경에 도착해서는 정문(呈文)하여 위급을 상고(上告)하는 노고가 있었으니, 유몽정만 유독 빠지게 된다면 미안스러울 듯합니다.'- 파문이 가라앉은 후 유몽정 아들 '영'이라는 인물이 "아버지가 공신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이는 유몽정이 호성공신에 포함되지 못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실제 호성공신 최종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당시 조정도 "안타깝게 됐다"는
선거철만 되면 배를 타고 소정리로 나와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막지리. 드넓은 보리가 출렁이고 군북8경이라 불리우던 아름다운 일출을 자랑하던 마을인데 대청댐 건설로 '육지속의 섬'이 되어버린 곳이다. 물길을 가운데 두고 손을 뻗으면 닿을듯 가까운 거리지만 40여리를 에둘러 와야 하는 현실이 어이없다. 다리 하나만 놓으면 될 것 같은데...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정기적으로 운행을 하고 있지만 이용하는 주민이 없으면 운행하지 않는다. 정기선외 배를 이용하려면 미리 시간과 장소를 약속한 후 방문해야 한다.(이수길 011-8845-0101)빨갛고 파란 지붕을 얹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막지리를 보듬어 안고 있는 산이 막지봉(512m)이다. 대청호 물빛 수면을 힘차게 차오른 400~500여m 산능은 마치 천연의 요새처럼 우뚝하다. 오지 개척산행의 특정상 차량이동과 교통편을 감안한다면 막지리에서 막지봉을 오른뒤 다시 되짚어 내려오던지 장고개로 하산하는 코스가 무난하다. 거의 밑바닥부터 시작되는 오름길이 만만치않지만 산길은 잘나있고 한껏 물오른 신록의 향연과 함께 가슴 가득 청량감을 선사하는 전망대 또한 후하다. 레저토피아 탐사대는 막지리가 아닌 옥천군 안내면 현리 탑산이
조선 광해군대 여주 한강변에서 강변칠우(江邊七友)를 자처하는 패거리가 서자에게도 관계 진출을 허용해 주도록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강변칠우는 7명의 명문 서자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을 말한다. 박응서는 영의정, 서양갑은 목사, 심우영은 관찰사, 이준경은 병마절도사의 서자였다. 이들은 여주의 강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시와 술로써 소일하며,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불만을 토로했다. '칠우'라는 명칭은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했다. '칠우'의 본멤버는 아니었지만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1569~1618), 이재영(李再榮·1553~1623) 등도 가끔 찾아와 이들과 어울렸다. 1612년에는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약탈하는 강도살인 사건이 발행했다. 이때의 조령이 괴산 사면인지, 문경 사면인지는 분명치 않다. 범인들은 강변칠우였고 이들은 이듬해 모두 검거됐다. 제도 불만이 악행으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직전의 조정은 북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후계 문제로 분열했다. 대북파는 광해군,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옹호했다. 당시 대북파의 영수였던 이이첨(李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다. 게다가 분조(分朝)의 경험까지 있어, 그가 왕위를 승계하는 것은 당연시 됐다. 선조의 분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자신의 유고를 대비해 그렇게 했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조 자신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는 설이다. 임진왜란이 종전되자 광해군의 왕위계승 환경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 이와 같았다. 선조는 광해군이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고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제거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불안감은 증오심으로 발전했다. 선조는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게 악감정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의인왕후 박씨가 사망하자 선조는 바로 후처를 맞이했다. 그가 바로 인목황후 김씨였다. 이때 선조의 나이 50세, 인목황후는 19살이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분격적으로 불거졌다. 얼마안가 선조는 병이 위독하자 영창대군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다. 선조는 신임하던 일곱 신하에게 영창군의 뒤를 유명(遺命)으로 부탁하기도 했다
강변에 살다보니 어려서부터 개헤엄과 자맥질을 익혔고, 강변의 모래사장과 나루터가 놀이터였다. 행인을 건네주는 작은 나룻배 대신 평평하고 널찍한 차량용 나룻배에 버스를 싣고 서너 명의 사공이 노를 젓고 줄을 당겨 강을 건너는 광경은 언제나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강변의'진사래밭'(긴 사래 밭)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어른들이 큰소리로 부를 때까지 아이들은 하루종일 소를 뜯기거나 다슬기를 잡거나 물수제비를 뜨고 놀았다.누구나 회상하는 유년시절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기억속에서 더욱 아름다울 수 있는 것 같다. 보은군 회남면 어부동은 원래 사음리를 칭하지만 사음리, 법수1, 2리, 산수리를 통칭해 어부동이라 부른다. 대청호 담수와 함께 삶의 터전이 물에 잠기면서 평생 농사만 짓던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남겨진 사람들조차 농사대신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게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강변의 농촌마을이 바다처럼 드넓은 호숫가의 어촌마을이 된 것이다. 호수가 생기고 고기잡는 동네가 되리라 어찌 알고 그옛날 지명을 어부동이라 지었는지...지금도 도로변에 어부동 간판 서있는 법수1리 마을내에는 횟집과 민박집등의 간판이 보이지
# 금요일△청주우정산악회(011-464-1434)* 3일 : 강진 덕룡산* 10일 : 평창 오대산 * 17일 : 홍천 팔봉산* 24일 : 정읍 갓바위봉△청주무궁화산악회(010-3423-2783)* 3일 : 횡성 운무산* 10일 : 남해 호구산 * 17일 : 양주 불곡산* 24일 : 홍천 공작산△청주2030산악회(010-2466-3822)* 3일 : 소백산철쭉제* 10일 : 한라산, 올레길 * 17일 : 금산사 모악산* 24일 : 호명호수 호명산△청주에이스 금요산악회(011-487-5556)* 10일 : 포천 백운산 * 24일 : 진도군 접도 남망산# 토요일 △해맑은산꾼들(010-6473-4488)* 4~5일 : 올레10코스, 한라산 돈내코* 11일 : 화순 백아산 * 18일 : 청도 문복산* 25일 : 오대산 노인동 소금강△백두오름산악회(010-6486-1055)* 4일 : 소매물도 망태봉* 11일 : 치악산 종주 * 18일 : 춘천 오봉산* 25일 : 관악산~삼성산△청주산사랑 산악회(010-3423-8505)* 4~6일 : 소매물도 망태봉* 11일 : 석룡산 조무락골 * 18일 : 검룡소 금대봉* 25일 : 해산 비수구미 트레킹△사람과산(011-9573-3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는 윤형원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을 공격, 이로 인해 사림이 크게 화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 노수신(盧守愼·1515∼1590)도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유배를 가야 했다. '노수신과 정황은 본래 못나고 망령된 사람인데 헛된 칭예(稱譽)를 내세우며, 부박한 무리를 고무 선동하여, (…)사습의 궤격함을 빚어내어서 시사(時事)를 분란하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울러 멀리 유배시키소서" 하니…'- 그가 유배생활을 하던 1546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벽에는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벽서의 내용은 임금에게 보고되었고, 당시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잔여 윤임 일파를 완전 숙청했다. 이 사건 역시 소윤이 잔여 대윤을 공격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노수신은 여기에도 연루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에 송인수·이약빙은 사사하고, 이언적·정자는 극변안치 하고, 노수신·정황·유희춘·김난상은 절도안치 하고 (…) 윤강원·조박·안세형·윤충원·안함은 부처하고자 한다.'- 인용문 중 극변안치는…
1589년 정여립(鄭汝立·1546 ~ 1589)이 모반을 꾀했다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이었던 정여립은 표변했다. 율곡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인을 비판했다. 이후 전북으로 귀향,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다. 그해 황해도 관찰사, 안악 군수 등이 정여립이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반란을 시도, 선조 임금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했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정여립은 진안 죽도(竹島)의 토굴에서 자결했다. 혐의자에 대한 국문에 2년의 시간이 걸렸고, 이때 형관을 맡은 사람은 정철이었다. 기축옥사로 동인 1천여명이 희생됐고, 한때 전라도는 반역지향(叛逆之鄕)이라 하여 인재 등용이 제한됐다. 기축옥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여립의 반란으로 규정됐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서인의 책사였던 송익필이 조작했다는 설, 서인의 집단 조작설, 정여립의 혁명적인 주장이 옥사를 초래했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혼재하고 있다. 기축옥사 때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한백겸(韓百謙·1552~1615)이다. 또한 그는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이기도 했다. 한백겸도 체포
구질구질하던 날씨가 활짝 갠 지난 28일.38차 충북일보 클린마운틴이 실시된 보은군 회남면에는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넘쳐났다.대청호반에 낚시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묻어 나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여린 연둣빛 새순을 부끄럽게 내밀던 풀과 나무는 어느새 짙은 녹음으로 여름을 맞고 있었다.대청호 둘레길 4구간 출발지인 남대문공원에서 중간 지점인 판장대교까지는 아스팔트길이다.'둘레길에 왠 아스팔트길인가' 의아해 할 지도 모르겠지만 비록 아스팔트 길이지만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호반을 끼고 한적한 길을 전세낸 양 흐느적 거리고 걷노라면 콧노래가 절로 난다.대부분 50~60대인 탐사대원들도 마치 소풍나온 어린아이처럼 재잘거림을 멈추지 않는다5㎞ 넘게 이어지던 아스팔트길이 끝나고 둘레길은 임도를 타고 숲속으로 이어졌다. 졸졸졸 흐르는 계류만이 산중의 적막함을 깨울 정도로 숲은 깊고 고요했다.완만한 오름을 이어가던 산길은 어느덧 고갯마루인 늘치에 이르렀고, 이곳부터 옥천 땅 '운은리'까지는 논과 밭사이로 난 농로를 따라 휘파람을 불며 갈 수 있는 길이었다.대청호 둘레길 4구간은 남대문공원에서 운은리까지 11㎞지만 대부분 임도와 아스팔트길로 별 부담이 없는
영동군 양강면 두평리 561번지에 자풍서당(資風書堂)이라는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중앙에 대청이 자리잡고 있어 시원스러움이 느껴지는 18세기 건물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유교건축물 내에 불탑이 자리하고 있는 점이다. 영동군 향토유적 제8호로, 공식 명칭은 '두평리 5층석탑'이다. 1989년 지하에서 발굴된 이 석탑은 신라말~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이곳에는 풍곡사(風谷寺)라는 사찰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사찰이 폐지되고 유교 건축물이 세워졌다. 종교간에도 역전과 반전이 있었던 셈이다. 자풍서당의 관리가 잘 안 되어 있는 모양이다. 주변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닭까지 잡아 주고 또 건물 아궁이 주변이 불에 끄슬려 있다고 최근 언론에 보도됐다. 자풍서당할 때의 '자풍'은 자법정풍(資法正風)에서 딴온 말로, 광해군 65년(1614) 정구(鄭逑)라는 인물이 작명했다. '資'는 명사로 쓰이면 재물을 뜻하지만, 술어로 사용되면 '헤아리다', '바탕으로 하다'는 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자법정풍은 '법을 바탕으로 해서 풍속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 된다. 조선시대 예학을 논할 때 좌우에 나란히 위치하는 인물이 김장생과 정구다.
첩첩산중의 연봉으로 둘러싸인 충북 옥천군 안내면 은운리와 대청호에 마을을 묻고 뒤로 물러 앉으면서 뒤로는 첩첩산중이 앞으로는 물이 길을 막아버린 옥천군 군북면 용호리 그리고 겨우 차 한 대 다닐 비좁은 구절양장의 험한 산길을 따라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막지리가 대청호 인근의 대표적인 오지마을이다. 다리를 건너면 옥천읍이 지척이어서 근동의 길목이 되었던 마을이 불어나는 물에 쫓겨 마을 뒷산 중턱에 까지 올라 자리를 잡으니 길은 물에 잠겨 없어지고 읍내를 가자면 40여리를 돌아 나가야 하는 '육지속의 섬'이 되어버린 마을들이다. 대청호를 가운데 두고 5분여 시간이면 건너갈 수 있는 배가 운행되고는 있지만 그또한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어 운영상의 어려움이 따른다. 현재는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마을 이장님들이 관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배를 이용하려면 미리 시간과 장소를 약속한 후 방문 해야 한다. 대청호 둘레길 5-1구간은 대청호 인근 대표적인 오지마을중 하나인 옥천군 안내면 운운리를 시작으로 답양리 소재 가산사를 들목으로 산을 오른뒤 아기자기한 산능을 타고 막다름에서 만나게 되는 용호리 화일마을로 연결되는 산길투어코스이다. 가산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운 채 벽을 비우고 2층에는 마루를 깐 건축물로, 관아에서 부속 건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지면서,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누각과 정자의 공통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누허즉능납만경'(樓虛則能納萬景)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의역하면 '누각이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취경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선사상은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둘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충북에도 유명한 누정이 적지 않다. 지명도가 높은 누정으로 제천 청풍의 한벽루(보물 제528호)와 영동 황간의 가학루(도유형문화재 제 22호) 등이 있다. 청풍 한벽루는 물가, 가학루는 추풍령 바로 밑의 영로(嶺路) 변에 위치하고 있다. 가학루는 조선 태종 3년(1403)에 당시 황간현감 하담
기수학(氣數學)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인들은 점술학으로 많이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기수학자로는 명종 때 인물인 박지화(朴枝華·1513∼1592)가 꼽히고 있다. 그는 벼슬이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이르렀다. 이문학관은 승정원 소속으로, 중국 외교문서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서자 출신으로,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명산을 유람했고, 특히 금강산에 들어가 7년간 수도했다. 이수광은 이런 그를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그는 밥을 먹지 않고 솔잎과 소나무 껍질만 먹었으며, 엄동설한에도 무명옷을 입고 지냈다'고 적었다. 그렇다고 그가 도인의 모습으로만 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을 보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다음은 문신 신흠(申欽·1566∼1628)이 지인 박인수(朴仁壽·1521∼1592)가 박지화에 감화되는 모습을 적어 놓은 내용이다. '그러다가 수암 박지화를 만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들었고(…). 이로부터 도의 진수에 깊이 맛들여서 평소에 방 하나를 말끔히 정돈하여 왼편에는 거문고, 오른편에 책을 놓아두고 거처하였으며 세간의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본문중 '위기지학'은 타
전회에 세종대왕과 불교정책을 언급했다. 이때 '태종에 이어 조선 초기의 가장 강력한 억불책의 하나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태종은 종교정책에도 과단성을 발휘했다. 그는 사원 혁파를 단행해 사찰의 노비와 전답을 국고에 환수했다. 그는 이같은 연장선에서 유교적 사회질서의 정착을 위해 가정에는 가례(家禮), 그리고 향리에는 이사법(里社法)을 보급했다. 가례는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말한다. 그러나 이사법은 자주 접하던 용어는 아니다. 이사법은 조선시대 각 향리에서 토신(土神)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풍년을 빌었고, 또 마을 인심(人心)을 밝게 하기 위한 의견을 주고 받았다. 넓은 의미의 현대판 반상회로 볼 수 있다. 이를 처음 건의한 인물이 허지(許遲·1372∼1422)다. '무릇 우리 동리(同里)의 사람은 각각 예법(禮法)을 존중하고, 힘을 믿고 남을 능욕(凌辱)하지 않는다. 위반하는 자는 먼저 함께 다스린 뒤에 관(官)에 넘긴다. 혹은 가난하여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그 집을 두루 도와주되, 3년에 자립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 손으로 출처를 가리고 보면 "어느 동네 반상회 때 나온 얘기인가" 할 정도로 현실적
대청호 담수가 시작되면서 조용하고 평화롭던 마을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수몰선을 벗어난 사람들도 물길에 의해 나뉘어진 땅뙈기를 거머쥔채 새로운 삶을 일구어야 했지만 그또한 녹녹치 않았다. 강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고립감으로 사람이 살지않거나 1~2가구 정도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마을 또한 부지기수다. 석탄리 안터선사마을에서 굽이굽이 산길을 2시간여 걸어 막다름의 끝에 위치한 곳이 옥천군 석탄리 피실이다. 마을앞을 흐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마을이 둘로 나뉘어져 버린 마을중의 한곳이다. 안남면에 인접해 있는 마을이 안피실이고 석탄리에 인접해 있는 마을이 바깥피실이다. 그곳이 탑산을 가기 위한 들목중 하나인 석탄리 피실이다. 봄이오는가 싶더니 들녘은 경운기 소리 요란하다. 앞다투어 피어나는 봄꽃들의 잔투정에 초록의 잎은 눈을 뜨기 시작한다. 아! 흙냄새 풀냄새...바람결에 전해져오는 봄내음에 움직임들이 흥겹다. 산그림자 드리운 강물을 뒤로하고 산길은 시작된다. 수북수북 쌓인 낙엽으로 희미하던 산길은 파고들수록 뚜렷해진다. 당차게 오르던 오름길은 가다 쉬었다를 반복하고
음성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성실했고 남을 배려 할 줄 알았다.그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모든 과목에 두각을 나타냈고 특히 영어를 잘했다. 1962년 미국 정부가 주최한 대한민국 고등학생 전국 영어 웅변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해 미국 여행 기회를 갖는다.그곳에서 존 F. 케네디(1917~1963) 대통령을 접견한 이 고등학생은 가슴속에 원대한 꿈을 담는다. 이때부터 더욱 성실히 공부해 국내 최고 대학의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그가 원하는 외교관이 된다.이 외교관은 지난 2007년 세계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8번째 유엔 사무총장에 오른다.그가 바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다.◇음성군민에게 감사반기문 사무총장 예방은 방미 3일차인 12일 오후 4시 30분으로(현지시각) 계획됐다.세계의 대통령을 만난다는 설렘보다 '과연 만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지난달 12일 이시종 충북도지사의 반 총장 예방이 불발될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만남이 이뤄졌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 터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들보다 수월하게 검색을 마쳤고 곧장 접견장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접견장 복도에는 각국의 외교관들이…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는 것에 반비례해 불교를 억압했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그 정도가 더 심해 석가모니를 아예 '불씨'(佛氏)라고 불렀다. 고려말 사대부들이 불교를 줄기차게 공격한데는 이데올로기 외에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고려 후기의 전국 사찰들은 노비 외에 광범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찰들은 여기서 나오는 잉여자본을 고리대금업에 재투자, 막강한 경제력을 확보했다. 고려후기를 '사원경제'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원경제를 공격해야 사대부 자신에게도 재분배된 토지가 돌아올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당시 대신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불교 여러 종단을 선·교종 양종만 남기고 산문 폐쇄령을 내렸다. 이때 불교 통폐합을 강력하게 건의한 인물이 당시 대사헌 하연(河演·1376∼1453)이었다. '세종 계묘년에 대사헌 하연(河演)이 동료들과 함께 상소하기를, 부처는 임금을 버리고 작위를 사양하였는데, 역대에서 깊이 믿어서 널리 절을 짓고 전지를 시주하며 노비를 바쳐서, 중외 사찰에서 나누어 부친 밭이 1만 1백여 결이나 됩니다. 동포 백성들이 주려 죽는 판인데, 놀고 있는 중들에게 또 무슨 밭을 주어서, 그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가 /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 잔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임제(林悌·1549∼1587)의 시조다. 그는 서도병마사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위 시조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당했다. 임제는 그후 다시 복직되나 본래의 호방한 성격은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는 벼슬아치 사회에 대해 환멸과 절망을 느낀다. 그는 10년간의 관직생활을 뒤로 하고 전국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이때 만난 여성이 한우(寒雨)라는 평양 기생이다. 둘이 나눈 시조가 '해동가요'(김수장), '청구영언'(김천택)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먼저 임제가 한 수 읊는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를 / 우장(雨裝) 업시 길을 나니 /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한우가 화답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 오늘은 비 맛자신이 녹아 잘 노라.' 임제가 '한우'라는 기생 이름에 빗대어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자겠다고 한다. 그러자 한우는 자신을 찬비에 빗대어 원앙침 비취금 속에 녹아 자라고 한다. 남녀간 서로의 수작을
금강 한가운데 콘크리트 벽으로 흐르는 물을 막아 14억 9천만 톤을 저장해놓은 대청호. 중부권에서는 충주호 다음으로 큰 호수로 그 명성을 자랑하는 대청호는 해발 200~700m의 야산 산줄기가 겹치며 호수 속에 산뿌리를 담고 있어 아름다운 다도해의 풍경을 연출한다. 웅장한 대청댐과 용트림하듯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대청호의 물줄기가 그려놓은 아름다운 풍경을 가장 잘 바라다 보이는 곳이 구룡산 이다. 구봉산이나 현도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문의면과 현도면의 경계를 이룬다. 능선이 대청호반을 따라 이어져 있어 바다가 없는 내륙의 도시민들에게 바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거미줄처럼 얽힌 산길로 이어져 있지만 어느 코스를 선택하든 3시간여 시간이면 충분하다.우선 구룡산을 가기위해선 대청댐이 있는 청원군 문의면을 가야하는데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한다면 신탄진 IC를 청원, 상주간 고속도로를 이용한다면 문의 IC를 이용하여 빠져나온 뒤 대청호 방면으로 가다보면 문의대교와 현암사입구 사이 호숫가 언덕위에 자리한 휴게소겸 전망대가 현암정이다. 기존 현암사 입구는 위험한 커브길 로 2차선 도로 양옆에 주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므로 약 100여m 떨어진 현암정 주차장을 이용하는…
중국 고서 중에 '잠서'(蠶書)가 있다. 북송 때 진관(秦觀·1049~1100)이라는 인물이 지은 책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잠업책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때 이 잠서를 알기 쉽게 풀이한 인물이 서강(徐岡·?∼1461)이다. 또 그는 최항 등과 함께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할 정도로, 학문에 관한 한 경지에 올랐다.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그의 직언은 유명했다. 단종실록 내용이다. '헌납 서강(徐岡)이 본원의 뜻을 가지고 아뢰기를, "신 등이 듣건대, 내일 장차 동교에 사냥한다고 하는데, 사철 강무같은 것은 인군(人君)의 부득이한 일이지만, 지금 명분도 없는 사냥을 자주 행하시는 것은 불가할 것 같으니, 청컨대 이를 정지하소서…"'- 이 대목의 실록 내용은 훨씬 더 길다. 단종이 '뭐 그런 것을 가지고!'라는 식으로 말을 해도 그는 직언은 계속 된다. 시쳇말로 임금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있다. '서강이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나이가 바야흐로 어리신데, 자주 사냥을 구경하러 다니시고 학문을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주군이 바뀌었지만 그의 직언 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상대가 단종과 정반
우리나라 역대 조정은 고대 이래로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냈다. 시대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국가의 흥망성쇠는 산천의 음양 조화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명산대천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조선시대 들어서 다소 변하게 된다. 산천신에 신격(神格)을 부여하는 것은 종전과 같았다. 다만, 산천신을 신하로 의식하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을 탈 없이 하고 (…)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태조 이성계가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이라는 인물을 보내서 산천의 신에게 고유한 내용의 일부다. 고유문(告由文)은 중대한 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치른 뒤에 그 까닭을 적어서 사당(祠堂)이나 신명에게 고하는 글을 말한다. 인용문을 보면 '왕은 이르노라', '이에 알리는 바이다' 등의 표현에서 보듯 신을 휘하처럼 하대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사에 대한 의식은 국조오례의 길례(吉禮) 편에 적혀 있다. 길례는 조선시대 제사의 종류를 사(祀), 제(祭), 향(享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