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후 산림자원도 수탈해 갔했다. 이때 맹수인 호랑이는 방해물이 됐다. 따라서 일제는 호랑이 포획을 장려했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 호랑이가 멸종됐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까지도 상황은 그 반대였다. 호랑이가 자주 출현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따라서 호환(虎患)이라는 단어가 대중어로 사용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관련 내용이 64건이나 등장하고 있다. 호랑이가 가장 많이 출몰한 지역은 북한지역이었고, 그 다음은 태백산맥을 끼고 있는 영동이었다. 호랑이는 산간벽지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능과 궁궐에도 출몰했고 심지어 궁안에 새끼까지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망기로 홍경신(洪慶臣)에게 전교하였다."내가 듣건대,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그 새끼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고 한다. 발자국을 찾아 잡도록 이미 전교를 내렸으니 지금처럼 초목이 무성한 때에는 군대를 풀어 잡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발자국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방법이야 어찌 없겠는가.'- 호랑이를 애완동물처럼 대했다면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한 인물이 있었다. 짐작했겠지만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이) 우리(檻)에 큰 호랑이와 큰 멧돼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지은 시조로,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주제는 권농(勸農)이지만 농촌의 평화로움도 잘 드러나 있다. 남구만은 목가적 시조를 남긴 것과 달리 정치적으로는 굴곡이 많았다. 그는 송시열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소론의 영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면서 강릉으로 유배됐고, 장희빈에 대한 극형을 반대하다가 완전히 실각·낙향했다. 남구만의 사당과 묘는 경기도 용인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난히 우리고장 충북에도 많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현종대에 청주목사를 역임했다. 그가 올린 상소문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청주 목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전세 및 대동미 여분을 받아 본읍에 두었다가 진휼의 자본에 충당하고, 속오군의 복호는 그대로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잃지 말고(…)"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여, 속오군을 급복하는 일 외에는 모두 그 말대로 따랐다.'- 실록 수정본은 고친…
실록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생 이름이 등장한다. 장중경(掌中輕), 세류지(細柳枝), 내한매(耐寒梅), 일타련(一朶蓮), 적선아(謫仙兒), 계궁선(桂宮仙), 승양비(勝楊妃). 장중경은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출 정도로 가려리다, 세류지는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허리, 내한매는 추운 겨울을 견뎌낸 매화, 일타련은 진흙속의 한 송이 연꽃, 적선아는 죄를 지어 인간세계로 귀양온 선녀, 계궁선은 달나라 궁궐에 사는 선녀를 각각 일컫고 있다. 여러 기생 이름중 압권은 아무래도 승양비(勝楊妃)인 것처럼 보인다. 미모로 양귀비를 뺨친다는 뜻이다. 기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낸 왕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건 말건 자기 욕심부터 채웠다. 여기에도 승양비, 내한매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녀(妓女) 승양비(勝陽妃)·내한매(耐寒梅)는 자색(姿色)이 있었는데, 계성군(桂成君) 이순(李恂)이 가까이하는 바였으므로, 비록 감히 원(院)에 뽑아 들이지는 못하였으나, 왕이 자주 비밀히 불러다가 간음하였다.'- 조선시대 기생 이름 중 영자, 순희 식으로 흔한 이름은 '홍일점'(紅一點) 또는 '일점홍'(一點紅)이었다. 두 단어는 같은 뜻으로, 글자 그대로 푸른 잎 가운데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37차)'가 지난 30일 대관령 바우길(강원도 강릉시) 5구간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이날 37차 클린마운틴 행사에는 레저토피아 탐사대(대장 김웅식)와 충북일보 임직원, 한국전력 충북본부 직원 등 120여명이 함께했다.강한 바람과 시간당 20㎜이상의 강한 비가 예고됐던 지난 30일. 김웅식 대장이 기상조건을 고려해 기존 대관령 옛길에서 바우길 5구간으로 코스를 변경했다.바우길 5구간 출발지점인 남항진에 도착했을 때는 오던 비가 그치고 흐린 하늘을 내주었다. 준비운동으로 시작된 이날 코스는 '남항진~솔바람다리~강릉항(죽도봉)~안목해변~강문해변~경호교~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경포대'로 이어지는 대관령 바우길 5구간(약 10km).죽도와 남항진을 가르고 있는 남대천 위 솔바람다리는 이 코스의 백미라 불릴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발아래로 보이는 남대천의 푸른 물이 바다로 스러져가고 먼발치 백두대간의 스카이라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죽도봉에 오르면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데 아름드리 솔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푸른 동해가 막힌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강릉항을 따라 안목해변과 강문해변을 잇따라 걸으면 수 미터의 소나무길이 펼쳐진
오는 15일은 세종대왕이 탄신하신 지 614돌이 되는 날이다. 이런 가운데 세종시(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도 본 궤도를 맞고 있다. 중심지인 연기군 남면과 인근 금남면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하늘로 솟아오르는 정부청사와 아파트 건물이 지도를 바꿔가고 있다. 한반도 역사 상 최대 규모의 인공도시인 세종시 건설 현장 모습이다. 세종시는 대한민국 '지방화 시대'의 대표적 상징물이면서,첨단 정보화 도시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나라 정보통신(IT) 기술을 활용,유비쿼터스 도시((Ubiquitous-City)를 만드는 것이다. 이에 본지는 이달 말 시작될 세종시 첫마을 2단계 아파트(3천576가구) 분양을 계기로 시민들의 '삶의 질'과 직접 관련이 있는△유비쿼터스 도시(U-City) △유비쿼터스 학교(U-School) △유비쿼터스 홈(U-Home) 전략을 3회에 걸쳐 살펴 본다. 유비쿼터스 도시(U-City) 진동하는 악취와 함께 골목마다 넘쳐나는 쓰레기,전깃줄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전봇대. 수도인 서울을 포함한 대다수 국내 도시 뒷골목에서 아침 이른 시간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삭막하게 철조망이 쳐진 높은 담장,시야를 어지럽
고려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의 세력을 흡수하는 방편으로 성(姓)을 하사했다. 이른바 사성(賜姓) 정책이다. 이와 관련해 평민들에게도 성(姓)에 앞서 본관이 먼저 주어진 경우도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세금과 관련이 있다. 양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면 거주지가 명확하고 고정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유랑생활을 하면 세금 부과가 쉽지 않다. 지금의 가족관계등록법에 고려 본관제도의 잔상은 남아 있다. 바로 본적란이다. 본적란을 보면 당사자나 그 선대가 어느 곳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시대 평민들은 역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상당 부분 제한받았다는 것이 된다. 성씨·본관 문화와 관련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이때의 삼한은 원삼국 시대의 마한, 변한, 진한이 아닌 신라, 고려, 조선조를 일컫고 있다. 누대에 걸쳐 문벌이 좋은 가문이라는 뜻으로, 달리 의관갑족(衣冠甲族)이라고도 한다. 어느 성씨·본관이 삼한갑족에 속하는지는 주관적인 면이 있다. 이와 관련, 상당수 문중이 자신들의 선조를 아전인수 격으로 삼한갑족에 포함시키고는 한다. 전주이씨를 제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삼한거족이
고려의 말기의 왕으로 '우'와 '창'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호가 주어지 않았다. 왕씨가 아닌 신씨의 씨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때의 신씨는 신돈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야 쿠데타 명분이 보다 뚜렷해질 수 있다. '고려사'는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고려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초 정인지 등이 작성했다. 승자의 시각 여부를 떠나 고려사가 없었다면 한국 중세사는 어둠 속에 묻힐 뻔 했다. 고려사가 편찬되기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실록을 작성, 보관해 왔다. 그러나 잦은 외침과 내란 등으로 그 보관이 쉽지 않았다. 고려 고종 때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합천 해인사에 실록 보관을 위한 외사고를 설치했다. 당시 중앙에 있는 춘추관사고는 내사고, 이를 분산·배치했던 지방사고는 외사고로 불렀다. 그러나 해인사 외사고도 몽고 침략과 왜구창궐로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1381년(우왕 7)에 충주 개천사로 옮겨져 약 2년간 머물렀다. 이것은 1383년(우왕 9) 죽주 칠장사로 옮겨가고, 약 7년 뒤인 1390년에는 다시 충주 개천사에 옮겨 약 30년간 존치되다가 충주읍성 안으로 옮겨졌다. 충주성…
전회에 우리고장 인물 남이장군을 소개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한참 기개가 높던 시기에 극형에 처해졌다고 밝혔다. 이때 며느리와 사이가 안 좋았던 남이의 어미도 극형에 처해진다. 죄목은 국상중에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정황상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하나 문헌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아뢰기를, "남이의 어미는 국상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고 그 아들이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며, 또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소서"하니, 명하여 저자에서 환열하게 하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으니.'- 조선시대 때 국상이 발생하면 백성들은 소복(素服)을 입고 백립(白笠)을 썼고, 또 빈소를 차린 후 곡반(哭班)을 편성하여 곡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가무, 도살, 혼인 행위도 엄격히 금지됐다. 나아가 고기도 먹을 수 없었다.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도살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엄하게 다스렸다. 국상과 관련해 고기와 생선이 들어가지 않은 투박한 반찬을 '소선'(素膳)이라고 불렀다. '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이 졸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죽거나 살거나 함께 고생하자던(死生契闊) / 당신과는 굳게 언약하였지(與子成說) / 섬섬옥수 고운 손 힘주어 잡고(執子之手) / 단둘이 오순도순 백년해로하자고(與子偕老)'. 중국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격고'(擊鼓)라는 한시다. 춘추전국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에는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 병사의 애절함이 배여 있다. 이 표현이 국내에 유입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과 함께 결혼식 주례사의 단골 내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살아서는 같은 방을 쓰고(生則同室) / 죽어서는 같은 무덤을 쓰네(死則同穴)'도 있다. 조선시대도 백년해로가 주요 미덕이 됐다. 따라서 평민들의 이혼은 쉽지 않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 질투 등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했을 경우 남편은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다. 이같은 행위를 아내를 버린다는 뜻에서 기처(棄妻) 또는 휴기(休棄)라고 불렀다. 아내가 무척 싫어졌으나 칠거지악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조선시대 남편들은 이때는 아내를 소박(疏薄)했다. 내쫓지 않으면서 구박하는 것을 말한다. 소박당한 아내는 평생 뒷방차지 신세가 되어 첩 주위를…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한많은 사연 /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기적도 숨이차서 목메어 울고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 거치른 두뺨위에 눈물이 어려 / 그 모습 어렸구나 추풍령 고개'- 가수 남상규씨가 불러 크게 히트한 대중가요 '추풍령'이다. 가사 내용이 너무 정겨워 1·2절 모두를 소개했다. '추풍령'은 남상규씨 뿐만 아니라 배호, 나훈아, 이미자 씨 등도 불렀다. 그 만큼 추풍령은 지금의 50대 이상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 일이키는 노래다. 추풍령면소재지에서 김천 방향으로 잠깐 달리면 추풍령 노래비를 만날 수 있다. 고풍스런 한자 글자체 때문에 꽤 오래 전에 세워진 노래비처럼 보이나 그렇지는 않다. 지난 88서울올림픽 때 성황 봉송을 기념, 그해 9월 영동군에서 세웠다. 추풍령는 '秋'와 '風' 자가 만나면서 묘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지명어다. 언뜻보면 명시(名詩)에 등장하는 시어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중국 무협영화에 나오는 이름같기도 하다. 지명 추풍령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밝혀 놓은 사료는 존재하
고려와 조선 조정은 출장나가는 관원들을 위해 국영 숙박시설인 원(院)을 운영했다. 원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됐다. 임진왜란 후 이른바 참(站) 제도가 도입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 흔적이 지명에 더러 남아 있다. 조치원, 광혜원, 장호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광혜원은 한때 '양질의 쌀이 만 되(升)나 난다'는 뜻으로 만승면(萬升面)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지난 밀레니엄 때 주민들이 과거 역사를 되찾자는 의미에서 지금의 광혜원으로 개명했다. 광혜원 주민들이 이름을 바꾼 데는 나름의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가 있다. 청주에서 서울을 가려면 지금은 고속도로를 주로 이용한다.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에는 달랐다. 청주-오창-진천-광혜원-용인 등을 경유했다. 바로 17번 국도다. 조선시대 거유 우암 송시열도 이 코스를 자주 이용했다. 문집 송자대전에 우암의 동선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인용문중 '만의'는 수원을 말한다. '19일에 만의(萬義)에서 출발하여 20일에 죽산 광혜원에 머물렀는데(…) 21일에 국장도감 낭청이 지문의 첨가와 개정에 관한 일로 진천(鎭川)까지 뒤쫓아왔다. 22일에 승지가 또 뒤쫓아와서 서원(청주 옛이름)에서 유지(諭旨)
전회에 지리지의 표현을 빌어 우리고장 단양인물인 황계옥을 소개한 바 있다. '본조 황계옥(黃啓沃) 과거에 올라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본문 중 '문명'이 있었다, 즉 문필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은 시를 잘 지은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황계옥은 투철한 관료정신 외에 또 다른 진면목을 지니고 있었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는 시짓기 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당시 심사관은 서거정, 이승소 같은 당대 문장가들이었다. '문신을 불러서 춘설(春雪)을 제목으로 금체고시(禁體古詩) 20운(韻)을 짓도록 명하고, 서거정·허종·이승소·이파(李坡)·어세겸·노공필로 하여금 등급을 정하게 하였는데, 홍문관 정자(正字) 황계옥이 수석을 차지했으므로 표피좌자(表皮坐子)를 하사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금체고시는 금체와 고시가 합쳐진 표현이다. 이중 금체(禁體)는 특정어의 사용을 금하는 시를 말한다. 가령 눈(雪)이 제목으로 들어간 시에는 옥(玉)·은(銀)·여(麗)·서(絮)·노(鷺)·학(鶴)같은 글자를 쓰지 못한다. 고시(古詩)는 말 그대로 옛 형태의 시로, 구수(句數)·자수(字數)에 제한이 없고 압운(押韻)에도
성안은 인구가 조밀하고 또 목재건물도 적지 않게 존재, 보기와 달리 화재에 취약한 편이다. 1419년(성종 2) 함경북도 회령성 안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영안도 관찰사 성준(成俊)이 치계 하기를, "3월 10일 회령부의 성 안에서 실수로 불이 나 연달아 3백여 집을 태우고 남녀 6명과 소 3두와 말 4필이 타서 죽고, 관중(官中)에 소장된 문서와 군기(軍器)도 타서 훼손된 것이 거의 10분의 8에 이르렀으니…' 당시 조정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경차관(敬差官)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경차관은 조선시대 때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되는 관리를 일컫는 말로, 세곡, 군사, 구황, 재민(災民)과 관련된 업무 등을 수행했다. 이때 경차관으로 선발된 인물이 황계옥(黃啓沃·?~1494)이다. 성종이 변방의 화재에 이같이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은 화재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여진족의 침입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황계옥이 성종을 알현하고 회령으로 출발했다. '아마도 야인(野人)이 틈을 타서 소란을 피울 듯합니다. 이 고을은 다른 여러 고을의 예가 아니고 야인이 왕래하면서 살펴보는 경우가 매우 많으니, 관사(館舍)를 영조(營造)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실수로 불을 낸 인민
적지 않은 사람들이 1592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토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1년 앞서 왜승 겐소(玄蘇)를 조선에 보내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조선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협박을 해왔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다. 조헌이 이를 알고 겐소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겐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또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양측 강화회담에 참여하는 등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했던 인물이다. 정명가도에 관련된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 '이보다 먼저 일본국 사신 현소(玄蘇) 등이 와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상이 조정 신하들과 의논하여 성절사 김응남(金應南)이 갈 적에 왜적이 중국을 침범할 뜻을 갖고 있음을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였는데…'- 조선 조정은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의 정명가도에 대한 내용이 오키나와(琉球) 사람을 통해…
전회에 영동 황간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한 때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내내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이는 황간이 현의 지위를 한때 상실한 적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황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 조치에 따라 지금의 면이 됐다. 이 설명에는 빠진 부분이 있다. 황간현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년) 지금의 옥천 청산현에 병합돼 현 자체가 없어진 적이 있다. 이를 둘러싸고 두가지 주장이 존재한다. 임진왜란 때의 황간현감은 박몽열(?~?朴夢說)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당시 충청병사 황진(黃進·1550∼1593)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진주를 외원(外援)할 목적으로 삼가 고현에서 진군하였는데, (…) 우리의 제장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黃進) 등이 성 안에 유진(留陣)하고 있었는데 이달 20일 오후에 왜적 2백여 명이 동쪽의 성 밑으로 진격해 왔다.'- 선조실록은 전반부에는 병마절도사(병마)를, 뒷 부분에는 현감급 참전인물을 적고 있다. 다음 내용에는 황간현감 박몽
# 금요일△ 청주 우정 산악회 (011-464-1434)* 8일 = 여수 영취산* 15일 = 강화 고려산* 22일 = 춘천 삼악산* 29일 = 태안 백화산△ 청주 무궁화 산악회 (010-3423-2783)* 8일 = 신시도 대각산* 15일 = 임실 고덕산* 22일 = 제주 관광* 29일 = 원주 치악산△ 청주 금요 산악회 (011-487-5556)△ 청주 의정 산악회 (016-864-3259)# 토요일△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13기 (043-277-2114)* 30일 = 강릉 바우길(대관령 옛길-주문진 경유) △ 청주 웰빙산악회 (010-9919-0602)△ 사람과산 산악회 (010-9573-3651)* 9일 = 경기 수원산* 16일 = 강화 고려산* 23일 = 광양 깃대봉* 30일 = 추자도 돈대산, 올레길△ 산내음 산악회 (010-5485-9160)△ 해맑은산꾼들 산악회 (010-6473-4488)* 9일 = 거금도 적대봉* 16일 = 창원 대산~광려산* 23~24일 = 울릉도 성인봉* 30일 = 포천 소요산△ 청주토요 산악회 (010-2432-7152)* 9일 = 위도 망월봉* 16일 = 김제 모악산* 23일 = 고창 선운산* 30일 = 대구 비
영남에서 추풍령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만나는 곳이 영동 황간이다.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간주돼 왔다. 황간은 지금은 면(面)이다. 그러나 황간은 한 때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내내 줄곧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 황간은 지금도 인구수가 적은 편이지만 조선시대 때도 궁벽한 곳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당시 인구가 적었고, 족제비털, 송이같은 토산물이 많이 나왔다. '궁벽'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나 실록에는 자주 등장한다. 매우 후미지고 으슥하다는 뜻이다. '호수가 3백 8호요, 인구가 7백 42명이다. (…)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많이 차다.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지초(芝草)·수달피·삵괭이가죽이요,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이다.'- 인용문 중 토공은 해당지역 토산물로 궁궐에 진상하는 것을, 토산은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나 진상 대상은 아닌 품목을 말한다. 황간의 이같은 모습은 중종(16세기) 대에 이르러서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지리서다.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조선시대 역대 임금 중 약수를 가장 많이 찾은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격무로 얻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약수가 나는 곳을 즐겨 찾았다. 세계 3대 광천수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우리고장 초정약수도 그중 하나였다. 보통사람의 움직이는 행동은 '거동'(擧動)이라고 한다. 반면 임금의 움직임은 쓰기는 '擧動'으로 쓰지만 읽기는 '거둥'이라고 읽는다. 인용문 중 거둥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등장했다. 익히 알다시피 세종대왕은 초정약수로 거둥을 하고 나서도 훈민정음 창제작업을 골몰하게 된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그 유명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1445) 상소문이다. 요약을 하면, "왜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십니까" 정도가 된다. 현재 초정약수에는 세종대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언문 같은 것은 (…) 어찌 이것
지금의 문의는 일개 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의는 고려시대부터 '현'(懸)의 행정적 지위를 가졌다. 그뒤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됐으나 1914년 개편 때 청원군 소속이 되면서 '면'(面)이 됐다.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당시 객사 건물이었던 문산관(文山館·도 유형문화재 제 49호)이다. 문의는 대청호를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한 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는 궁벽하게 인식됐던지 유배지로 자주 이용됐다. 이 부분은 대청호가 없었던 것을 감안해 볼 필요가 있다. '첨지돈녕부사 안종렴이 숙직에 들어갈 당번날에 처부의 제삿날이라고 거짓 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추핵하니, 종렴이 승복하지 않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매 항복하므로, 문의현(文義縣)에 부처(付處)하였다.'- 유인숙(柳仁淑·1485∼1545)은 을사사화 때 윤임의 당여(같은 일파)라는 이유로 사사된 인물이다. 이때 희증, 희맹, 희안 등 그의 세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유배지에서 처형됐다. 이들의 유배지도 문의였다. 그러나 풍수적 의미의 문의는 달랐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문의를 풍수상으로 매우 중하게 여겼다. 특히 문의의 진산인 양성산은 명당
지난해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일명 '펀치볼'에 조성된 '펀치볼 둘레길'( 2개 구간,총연장 25km)가 오는 5월 개통된다.이를 앞두고 현장 모니터링 행사가 30일부터 이틀 동안 현지에서 열린다. 산림청(청장 이돈구)은 30일 오전 해안면 해안분지 전쟁기념관 광장에서 지역 주민과 숲길 전문가 등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장토론회와 함께 모니터링을 했다. 산림청은 이번 행사에서 숲길 현장을 미리 둘러보고 문제점과 개선 사항을 찾아내 보완,올해 추가로 조성할 예정인 제3구간 예비노선에 대해서도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다.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로 외국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 펀치볼은 가칠봉 대우산 도솔산 대암산 등 해발 1천100m 이상의 산에 둘러싸인 분지다. 남북 11.95km, 동서 6.6km에 전체 면적이 44.7㎢로 서울 여의도 면적의 6배가 넘는다. 펀치볼 둘레길 제1구간은 전쟁기념관에서 시작해 '평화의 숲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분지 동쪽 산을 도는 12.5km 코스다. 제2구간인 '오유밭길'은 북쪽 산으로 올라갔다가 장뇌삼포지와 오유저수지를 지나 도솔천 뚝방길로 돌아 내려오는 1
조선시대 '예무이적'(禮無二嫡)의 논리가 있다.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 아내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그럴듯 해보이지만 이같은 논리 때문에 첩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천인이 돼야 했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의 9번째 여자인 장녹수(張綠水·?~1506)는 천인 출신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었고, 이 때문에 장녹수는 제안대군(齊安大君·성종의 친형)의 가노(家奴)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장녹수는 의외로 미모는 빼어날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으나 노래를 무척 잘 했던 것으로 사료는 적고 있다. 그녀는 '노비의 아내'였던 시절에 노래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의 가노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연산군과 장록수 사이에 연분이 싹트도록 한 사람은 삼촌 제안대군이었다. 이미 폭정기에 접어든 연산군이 어느날 미복 차림을 하고 한잔 걸칠 요량으로 삼촌집을 찾았다. 게서 만난 것이 장녹수다.
얼마전 청주인물 박훈(朴薰·1484∼1540)을 소개한 적이 있다. 조광조와 절친했으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16년 동안 성주, 의주, 안악 등의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그의 부친이 박증영(朴增榮·1464∼1493)이다. 그는 22살 나이에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오를 정도로 매우 총명했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 때 인재육성 차원에서 젊은 문신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세종 때 처음 도입됐고 신숙주, 성삼문 등이 모두 사가독서 출신이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의 혁파와 함께 폐지됐다가 성종 때 다시 부활됐으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그 기능이 흡수됐다. 박증영은 29살 나이로 단명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사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일부 문헌은 그가 총명함과 더불어 기개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증영이 아뢰기를, "불교는 청정(淸淨)한 것을 종(宗)으로 삼는데 어찌하여 흥판(興販)을 하여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먹을 것이 넉넉한 연후에야 청정한 교(敎)를 닦을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중은 장차 먹지 아니하고 굶어 죽어야 하겠는가.'- 임금이 말하기를, "승인의 흥판(興販)을 금
화창한 날씨지만 코끝은 여전히 맵다.춘래불사춘이라 했던가. 앞가슴을 파고드는 찬바람이 예사롭지 않다.청원군 문의면 마동창작마을. 그 곳엔 아직도 겨울의 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마동창작마을은 대청로 둘레길 3구간의 시발점이다. 수해전부터 예술인들이 하나둘 모여 폐교를 작업공간으로 바꾸면서 마동창작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마동창작마을 지기인 이홍원 화백은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는 이 곳이 보은군에 속했는데 이제는 청원군 문의면으로 바뀌었다"며 "이 곳은 누구나 찾아와 쉬면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이 화백의 말을 뒤로 하고 나선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대청호 둘레길 탐사길. 길은 험하지 않았다. 간벌작업후 남은 나뭇가지 등이 산길을 막어서곤 했지만 산행길은 푸근했다. 논둑에는 어느덧 여린 냉이가 고개를 내밀었고, 겨우내 얼었던 계곡물도 봄의 전령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1시간여 콧노래 부르면 가던 둘레길은 잘 다듬어진 임도길이 끝나자 가파른 경삿길로 바뀌었다. 20여분 힘겹게 능선을 오르자 대청호 주변이 시야에 잡힌다. 걸음을 재촉해 보은군과 청원군의 경계인 염티재로 내려선 뒤 다시 능선을 잡아타고 다시 1시간여를 가서 다다른 벌랏마을.이
기린각(麒麟閣)이라는 중국 음식점 이름을 종종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의미의 기린각은 음식과는 관련이 없다. 중국 전한 때의 황제인 무제(武帝·BC 156~BC 87)가 장안에 기린각이라는 누각을 세웠다. 그후 선제(宣帝·BC 91~BC 49) 황제는 11인의 공신상 그림을 기린각에 걸었다. 이때부터 기린각은 입신양명을 상징하게 됐다. 조선 중종대의 인물로 박영(朴英·1471∼1540)이 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에 오르는 등 전도가 양양했으나 어떤 이유에서 인지 기린각이 되는 것을 꺼렸다. 선전관은 임금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던 직이었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를 핑계로 낙향, '송당'(松堂)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유유자적했다. '사신은 논한다. 박영은 선산 사람이다. 소시 적에 무예를 업으로 삼아 무과에 올랐다. 그리고 유학의 서적을 통달하고 낙동강 가에 집을 지어 살며 영화와 복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남쪽 변방에 장수로 나가서 시를 쓰기를, 투구 쓰고 갑옷 입은 왕손 늙어가네 기린각에 이름 오르는 것 마음에 없어…'- 그는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제)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인용문의 '왕손'이라는 표현은 그래
조선시대에는 삼금이 존재했다. 송금(松禁), 우금(牛禁), 주금(酒禁)이 그것이다. 이중 금주령은 흉년 때 곡식 절약이 주목적이었으나 적용 범위는 일정하지 않았다. 사신 접대용, 혼례용, 약용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했다. 술을 점잖게 이르는 말인 '약주'는 여기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밖에 겨울 추위가 심할 때는 체온유지 등을 위해 금주령을 일시적으로 완화했다. 관련 내용이 실록에 등장한다. "수원 부사 김사원(金嗣源)은 술을 많이 장만하여, 장례(葬禮)에 모인 재상에게 주었으므로, 본부에서 바야흐로 국문(鞫問)하는데, 이제 관찰사 김양경(金良璥)이 아룀에 따라 국문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사헌부에서 차자(箚子)를 올린 것으로, 뒤에는 "김양경이 금주령에 관한 규정을 어겼으니 파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뒤따른다. 이에 성종은 "무리를 지어 술을 마셨다면 워낙 죄가 있겠으나, 비바람이 일던 날에 늙은 재상에게 술을 주었는데 무슨 안될 것이 있겠는가. 그것을 말하지 말라"며 감양경을 감싼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차자'는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을 일컫는다. 김양경은 상주 사람이나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를 오래 지냈다. 사료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