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웅전 영역 석가, 다보탑 앞 중간엔 석등과 봉로대가 있다. 석등은 신라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소박하면서도 늠름한 것이다. 봉로대는 석등 앞에 있는데 면마다 안상을 새긴 석대로 향로를 얹어 향을 피우던 봉로대 이다. 석등, 봉로대 앞 대웅전으로 들어가면 중앙 불단에 목조 석가모니불을 안치하고 좌, 우로 미륵보살, 제화 갈라보살이 찬란한 보관을 쓰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협시 하고 있다. 삼존불상 좌우에는 흙으로 빚은 가섭과 아난의 두 제자상이 있고 동쪽에는 옥돌로 빚은 16나한을 모셨다.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은 230년 전 조선왕조 때 복원된 건물인데 못을 쓰지 않고 조립하여 지은 건물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고 한다.대웅전 안 단청이 지금까지 퇴색되지 않고 그때의 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무실전, 관음전, 비로전 대웅전 뒤로 오르면 불국사에서 가장 큰 건물 무실전이다.그 길은 참선의 길로 부처님의 세계에서 팔정도 사제의 수행을 닦아 말이 필요 없는 전각이다. 무실전은 경론을 강의하는 강당으로 문무 대왕이 창건 하여 의상 대사와 그의 제자 오진. 표훈이 불법을 강론 하였으며 문무 대왕도 그들에게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지극한 진리에 이르려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첩 사이에서 난 자식을 '서얼'(庶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와 '얼'에는 구별이 있다. 서자는 양반 아버지와 평민 어머니 사이에서, 얼자는 양반과 노비 사이에서 난 자식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서얼을 차별하지 않았으나 주자학을 수용한 조선은 달랐다. 서얼은 가정에서도 천하게 여겨졌고 관직에 등용되기도 어려웠다. 조선시대 때 팔도 감사(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인물이 단 2명 존재한다. 바로 함부림(1360~1410), 반석평(1472~1540)이다. 이중 반석평은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도 역임하는 등 조선전기 단연 행정의 달인이었다.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 반석평의 묘가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반석평은 분명히 서얼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팔도감사와 육조판서를 모두 거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얘기가 전해진다.반석평은 그의 나이 13살 때 아버지 반서린을 잃는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 회미장씨는 반석평 등 3형제를 데리고 서울로 이주를 한다. 이때 회미장씨는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삯바느질 등 온갖 고생을 한 것으로 문중사는 전하고 있다. 이후부터는 다소 혼선이 일어난다.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
나석주(1892~1926) 의사는 항해도 개령 출신으로 1926년 인천을 통해 서울에 잠입, 그해 12월 28일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들을 죽이는 등 맹확약을 한다. 나 의사는 이때가 서울 초행으로 서울지리에 어두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큰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단재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1895∼1943)의 도움이 컸다고 국가보훈처 자료는 밝히고 있다.신채호는 그의 나이 16살 때 청원 가덕 고드미 마을에서 풍양조씨와 결혼식을 올린다. 둘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풍양조씨가 이른바 구식 사고를 갖고 있는 반면, 단재는 성균관에 입학하는 등 이미 신학문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던 중 첫 아들 '관일'이 우유에 체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단재는 부인 풍양조씨에게 논 5마지기를 주며 "친정에 가 있으라"고 당부한 후 두번 다시 만나지 않고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그후 만난 여인이 박자혜다. 자료를 보면 그녀는 4살 때 입궁한 아기나인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인이었지만 집안이 궁핍하자 호구지책으로 박자혜를 일찍히 궁궐로 들여보냈다.그런 박자혜는 1910년 한일병합으로 궁내부 소속 고용원, 즉 나인에서 해고 됐고 이후 호구지책으로 조산
신라장적(新羅帳籍)은 1933년 일본 황실 유물 창고인 정창원에서 고려불경 화엄경론을 수리하던중 우연히 발견됐다. 특히 신라장적은 통일신라시대의 서원경, 즉 지금의 청주 일대를 조사 대상으로 한 촌락 문서여서 더욱 애착이 가고 있다. 신라장적에는 서원경 일대 4개 촌락이 등장한다. 이중 지명 사해점촌(沙害漸村)과 살하지촌(薩下知村)은 유관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1개는 '서원경 직속의 OOO촌' 정도만 쓰여 있고, 또 다른 지명은 그 부분이 멸실됐기 때문에 촌락명을 전혀 알 수 없다. 이중 '서원경 직속 OOO'촌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촌락 위치는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는 지금의 청주시 외곽인 연기군이나 내수읍 초정 정도로 보고 있다. 반면 또 다른 학자는 당시 1개 촌이 지금의 1개 면 정도가 된다고 가정, 지금의 청주시내 어느 곳 쯤으로 비정하고 있다.신라장적은 인문지리적인 요소 외에 통계학적으로도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4개 촌의 통계를 합산한 결과, 당시 4개 촌락에는 총 462명이 생존했다. 이중 양인 즉 평민이 437명, 노비가 25명 가량이었다. 보다 면밀히 분석한 결과, 당시 노비는 인간적인 권리와 의무를…
조선시대 때 제천 청풍을 관향(본관)으로 가진 왕비로는 명성왕후, 효의왕후 등 2명이 존재했다. 명성왕후(1642∼1683)는 현종의 비이면서 숙종의 어머니가 된다. 10살 때 세자빈이 되어 가례를 올리고 8년 후 정비가 됐다. 이때 청풍의 행정적 지위가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됐다고 얼마전에 밝힌 바 있다. 효의왕후(1753∼1821)는 영조에 의해 세손빈으로 책봉되어 10살 때 정조와 가례를 올렸다. 두 여인은 혈육적으로도 매우 가까워 명성왕후가 효의왕후의 고모가 된다. 그러나 같은 청풍김씨 출신의 왕비이면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명성왕후를 평할 때 '지능이 비상했지만 성격이 과격했다'는 표현이 뒤따라 다닌다.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이른바 '홍수의 변'이다. 이때의 홍수(紅袖)는 붉은 옷소매, 즉 나인(궁녀)를 의미한다.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는 후사를 이을 아들(후에 숙종)이 한 명밖에 없었다. 반면 현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 등 3명의 아들을 뒀다. 당시 이들을 '삼복'이라고 불렀다. 이때문에 명성왕후는 자칫 인평대군 쪽이 힘을 합해 외아들을 해치고, 그후 삼복 가운데 한 명을 임금으로 추대할지 모른다는 강박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청풍명월'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와 대화를 나누던 중 조선팔도 사람의 기질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경상도 사람은 큰 산과 험한 고개처럼 선이 굵고 우직하다는 뜻에서 '태산준령'(泰山峻嶺), 강원도는 큰 바위 아래에 있는 부처님처럼 어질고 인자하다 뜻에서 '암하노불'(巖下老佛), 전라도는 바람결에 날리는 버드나무처럼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풍전세류'(風前細柳)로 표현했다.또 충청도는 맑은 바람과 큰 달처럼 부드럽고 고매하다는 뜻에서 '청풍명월', 경기도는 거울속의 미인처럼 우아하고 단정하다는 뜻에서 '경중미인'(鏡中美人), 황해도는 거친 돌 밭을 가는 소처럼 묵묵하고 억세다는 뜻에서 '석전경우'(石田耕牛)로 표현했다.이밖에 평안도는 숲 속에서 나온 범처럼 매섭고 사납다는 뜻에서 맹호출림(猛虎出林), 함경도는 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맹렬하고 억척스럽다는 뜻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표현했다.많은 사람들이 '청풍명월'과 제천 '청풍'의 관련성을 사실로 여기고 있다. 청풍명월 할 때의 '청풍'과 지명 '청풍'은 한자표기가 다르지 않다. 때문에 제천시는 제천을 '청풍명월의 본향(
◇ 친환경 관광농업의 메카 탄부면△개요탄부면은 보은군의 지역으로서 석탄이 생산돼 탄부면(炭釜面)이라 했으며으며 15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기대리와 소여리가 마로면으로 편입됐고 1946년 2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구인리가 장안면으로 편입돼 현재 법정리 13개리를 관할하고 있다.면적은 32.03㎢이며 2천20명이 거주하고 있다.△위치탄부면은 보은군의 남부에 위치하며 동남쪽은 마로면, 서쪽은 삼승면, 북쪽은 보은읍과 장안면에 접하고 있다.△자연, 산업, 문화, 교육탄부면의 북부는 비교적 낮은 산지로 돼 있으며 중앙부에는 국사봉(363m)이 고립형태로 솟아 있으며 남부면계에 비조티, 울미산(450m)등이 있어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중앙부에 있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원형의 저지가 둘러싸고 있으며 보청천이 서북부에서 남류하다가 동류하는데 그 주위에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가 전개되고 있다.주산업은 농업으로 쌀이 주산물이며 양잠업도 성행하고 있다.특산물로는 황토밤고구마, 방울토마토, 땅콩, 오이 등의 특산물이 생산되고 있으며 군내 유수한 곡창지대로 꼽히고 있고 미질이 좋은 쌀을 생산하고 있다.청주~보은~상주간의 국도 25호선이 면
합금리는 청성면에 속하고 청마리는 동이면에 속한다. 그 사이로 금강이 여울져 흐르는 곳에 청마리와 합금리를 잇는 잠수교가 나지막히 가로 놓여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차가 들어서면 가던 길 멈추고 기다린 다음에야 건너갈 수 있는 좁은길이다. 평상시엔 수면 위를 가로지르는 꼿꼿함이 믿음직스럽지만 조금이라도 강물이 불면 물속으로 숨어버리는 비겁한 길이다. 비 많은 여름철이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고립무원이지만 그나마 강 건너 세상과의 끈을 이어주는 고마운 길이다. 비가 많이 오면 다리가 잠기기 때문에 그때를 대비하여 이용할 수 있는 배도 항시 마련되어 있지만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보완의 끝은 없다. 그래서 지금 그곳엔 크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지고 있다. 그와함께 번듯함과 편리함과 맞바꾼 고향마을의 정취는 허물을 벗듯 진화를 한다. 옛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래서 늘 짠하다.청마리의 들목은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휴게소 아래 금강변으로 내려서면 강을 건너는 잠수교가 있다. 이 잠수교를 건너 강을 따라 하류로 가다보면 원당교 다리가 나온다. 원당교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난 575번 도로를 따라 가면 강건너 마을이 청마리 마티마을이
누각과 정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 루'(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워둔 채 비우고 2층에 마루를 깐 고건축물을 말한다. 관아 부속건물로 많이 지어졌다. 이에 비해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졌다.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그러나 누각과 정자는 공통점도 있다. 벽과 문이 없다는 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누허즉 능납만경'(樓虛則能納萬景)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의역하면 '누각이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취경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는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우리고장 제천에 한벽루( 寒碧樓)라는 멋진 누각이 존재하고 있다. 보통의 누각은 조망성이 좋은 곳에 독립적으로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비해 한벽루는 누각 본채 외에 작은 누각을 함께 거느리고 있다. 전문용어로 '날개 익'(翼) 자를 써서 '익랑'이라고 한다. 남원 광한루, 밀양…
태종은 재위 3년(1403) 조운선 대침몰 사고가 발생하자 그 대책으로 세곡을 육지로 운반하는 방안, 배를 임대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게 된다. 이중 하륜이 건의 한 육지로 운반하는 방안이 채택되면서 경상도 세곡도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로 집하됐다. 그러나 목계나루 가흥창이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세조 때였다. 그 이전에 인근 금천창이 짧은 기간 가동됐다. 세조가 가흥창은 본격 가동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그는 세종 때 일시 실시되던 사설조운이 신권(臣權)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이를 혁파했다. 그러나 이때의 가흥창은 창고를 지니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까지 가흥창은 주위를 울타리 등을 이용해 둘러치는 정도였다. 그러자 창고 건립 여부를 둘러싸고 대신들 간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성종 21년(1490)의 실록을 보면 통례원 봉례 한증이 이런 말을 한다. 통례원은 조선시대 때 국가의식을 총괄하던 기구를 일컫는다. "가흥창(可興倉)에 전세(田稅)를 수납할 때에 주위를 둘러 치거나 위를 덮을 물건을, 세를 내는 인민(人民)에게 바치게 하기 때문에 인민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창
조선후기까지 충주 목계나루 건너편에는 가흥창이라는 국가 조창이 위치했다. 조창은 조세로 받은 세곡을 운송전 일시 보관하던 창고를 말한다. 이 영향으로 목계나루는 내륙 최대의 항구 역할을 하면서, 여기에 딸린 장터는 항상 장똘뱅이들로 북적였다. 목계나루의 번창은 아무래도 수계 입지와 관련이 있다. 일대는 수량이 풍부하고 공간이 넓기 때문에 배가 접안하고 또 물류 창고가 들어서기에 매우 좋은 입지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덕흥창이라는 국가 조창이 운영됐다. 조선도 덕흥창을 가흥창으로 이름을 바꾼 후, 그 조운 기능을 계승했다. 가흥창의 위상은 조선 태종때 조운선 침몰 사고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체 9개의 국가 조창이 운영됐다. 이중 6개는 바닷길이고, 충주 가흥창, 원주 흥원창 등 3개는 내륙 강길을 이용했다. 그러던 중 태종 3년(1403)에 경상도에서 거둔 세곡을 싣고 남해안을 따라 운항하던 34척의 배가 거친 파도에 모두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부분이 태종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임금이 듣고 탄식하기를, "책임은 내게 있다. 만인을 몰아서 사지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
어제 진천 농다리(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 얘기를 잠깐했다. 농다리는 통돌이 석축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위에 놓인 널돌이 상판 기능을 하고 있다. 굳이 교각 대신 '석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기둥 역할을 하는 '통돌'이 현대적 의미의 교각은 아니기 때문이다. 농다리는 이름이 독특하다. 특히 '농'자가 바로 와닿지 않는다. 농다리 할 때의 '농'은 '대바구니 籠' 자를 쓰고 있다. 운동경기 농구도 '대바구니 籠' 자이다. 이 경우 농다리는 '대바구니 모양을 한 다리'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농다리는 대바구니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 이 부분은 籠의 또 다른 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전에서 이 한자를 찾으면 가구를 뜻하는 '롱'의 훈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농다리 할 때의 '농'은 '장롱'(欌籠)을 의미한다. 농다리에 사용된 돌은 사각형 모양으로, 마치 장롱을 여러 개 쌓아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농다리가 지네 모습을 닮은 데서 '농' 자가 왔다고 말하고 있으나, 지네의 한자는 '농'이 아닌, '지네 오'(蜈) 자이다. 농다리의 재료적인 면도 조금은 독특하다. 우리나라 다리는 징검다리→통나무다리→형교→돌다리→콘크리트교-철교 순으로 발
어느 도시 어느 길을 가든 만나게 되는게 버스정류장 팻말인데 유독 그곳에 팻말에 눈길이 머문 것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모양의 작은 나무판에 예쁜 글씨로 새겨진 버스정류장 팻말은 마치 유치원생들을 위한 교육자재용 그림판처럼 작고 예뻤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예쁜 팻말만 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만든 주민들의 마음이 더 신선하고 정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뒤 나에게 있어 그마을에 대한 다른 평가 기준은 없어졌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예뻐 보였고 다 괜찮아 보였다. 생각만으로도 '빙긋' 미소짓게 하는 편안함과 정겨움이 묻어나는 마을...지난해 가을 우연히 들르게된 옥천군 안남면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대청호 둘레길 7구간은 편안함과 정겨움이 담긴 굼뜬 얼굴로 반기는 안남면 연주리에서 시작하여 청마리 말티까지 9.9km 거리에 달하는 트래킹 코스이다. 안남면 연주리와 종미리 미산마을을 지나는 구간만 제외하고 나머지 구간은 내내 금강따라 걷는 강변길이다. 강을 가운데 두고 강변길 따라 이족 저쪽으로 형성된 마을은 종미리, 지수리, 가덕리, 합금리, 청마리등이 가까운듯 먼듯 이웃하고 있다. 유장하게 1000리를 흘러가는 금강은 대부분의 구간에서 옛 강의 정취를
# 금요일△ 우정 산악회 (011-464-1434)* 2일 = 진해 벚꽃* 9일 = 여수 영취산* 16일 = 가평 가덕산* 23일 = 예천 매봉* 30일 = 밀양 운문산△ 청주 네파 금요 산악회 (011-487-5556)* 9일 = 강화 고려산* 22일 = 거문도 불탄봉 / 백도 해상관광△ 2030 산악회 (016-821-7519)* 2일 = 백아산* 9일 = 대부산* 16일 = 관악산* 23일 = 용산봉* 30일 = 관음봉△ 청주 의정산악회 (016-864-3259)# 토요일△ 산/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011-9844-4552)* 3일 = 경남 진해 응산시루봉* 10일 = 경북 경주 남산, 금오산* 17일 = 전남 진도군 조도, 돈대산* 24일 = 경북 달성 시슬산△ 청주 웰빙산악회 (010-9919-0602)* 3일 = 경남 창원시 정병산, 비음산, 대암산* 10일 = 완도 상황봉* 17일 = 전북 순창 강천산* 24일 = 경북 비슬산△ 청주 산사랑 산악회 (010-3423-8505)* 3일 = 주작·덕룡종주* 10일 = 응봉산, 설흘산* 17일 = 연인산, 명지산 종주* 24일 = 선유도 트레킹△ 사람과산 산악회 (011-9062-5994)* 3일 =
경대승 외에 충북 출신이면서 고려 최고 권력자 위치에 오른 인물이 또 있다. 진천출신 임연(林衍·?~ 1270)이다. 고려 초기의 진천(상산) 임씨들은 왕권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는 왕실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진천출신 임명필의 딸(후에 숙목부인)은 왕건의 29명 왕비 중 10번째 부인이 됐다. 그리고 역시 진천출신 임희의 딸은 2대 혜종의 정비(후에 의화왕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10세기 전후의 일이다. 임연은 이보다 훨씬 늦은 13세기 인물로, 직전의 무신 집권자인 김준(金俊·?~1268)의 눈에 들어 고속승진을 한다. 고려사는 경대승을 제외한 다른 무신 집권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어제 밝힌 바 있다. 임연도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고려사는 임연에 대해 '벌의 눈매에 표범의 소리를 닮았고, 기와를 지붕 위로 던지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두 사람의 초기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남의 처를 간하여 죄를 받게 된 임연을 구해준 사람이 김준이었다. 이에 임연은 김준을 아버지로, 그리고 김준의 동생인 김승준을 숙부라고 불렀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는 최충헌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를 함께 죽이는 쿠데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귀주대첩의 강감찬, 동북9성을 개척한 윤관은 무신처럼 보여지나 그렇지는 않다. 고려는 전쟁이 일어나면 그 군사 지휘권을 문신에게 주었다. 고려 무신들은 늘 이것이 불만이었다. 그러던중 문신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나이든 무신인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고, 뺨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은 극도로 흥분, 문신들을 대거 살육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려사는 이에 대해 당시 이들이 "문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 할지라도 종자를 남기지 말라"며 개성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고 적고 있다. 이들은 피로 정권을 잡은 후 일본 막부정치처럼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1백년 동안 자신들이 직접 통치를 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 의종은 살해되고, 나머지 2명의 왕은 폐위돼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도 엄청난 살육전이 진행됐다. 정확히 11명의 무신이 등장해 이중 6명이 타살로 권력을 잃게 된다. 1번 타자는 이의방이다. 그러나 그는 정중부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런 정중부도 청주출신 경대승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후 최충헌은 이의민, 김준은 최의, 임연을 다시 김준을 죽이면서 권력지도가 바뀌었다. 무신정권 마지막 타자인 임유무는 원종의 밀명을 받은 홍규
지난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전국 20개 국립공원을 대상으로 인지도 조사를 한 결과 속리산국립공원은 81.2%를 기록해 설악산(96.6%), 지리산(94.6%), 한라산(88.3%), 내장산(82.6%)에 이어 5번째로 인지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이는 국립공원 전체 평균 인지도 63.1%보다 18.1% 높은 결과이고 92.5%의 인지도를 나타낸 2008년 보다는 다소 떨어졌으나 71.2%의 인지도를 나타낸 2007년보다는 월등하게 인지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보은군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5년 62만명으로 떨어졌던 보은 법주사지구 속리산 탐방객은 2007년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개통이후 68만명으로 다소 회복된 이후 지난해에는 73만여명(속리산 전체 140만명)으로 바닥을 다지며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앞서 살펴보았듯이 속리산국립공원의 인지도는 매우 높은 편이나 아직 전성기때 만큼의 탐방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현재의 관광트랜드에 맞춰 특색있는 관광개발이 절실한 상황이다.이에 보은군, 속리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법주사 등이 속리산 관광활성화를 위한 모색을 몇 년 전부터 시작해 이를 차분히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으며 이의 성공여부는 속리산 관광활성화
서리를 제외하고 정부수립 후 현재까지 총 40명의 총리가 배출됐다. 현 정운찬 총리가 40대에 해당한다. 이중 장면, 백두진, 김종필 씨는 총리직을 두번씩 수행했다. 장면은 2, 7대 백두진은 4, 10대 김종필은 11, 31대 때 총리직을 수행했다. 지역감정 여부를 떠나 충북은 계속 '총리 무배출道'로 남아 있다. 반면 군장성이 많았던 이북 출신은 4공화국까지 총 10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그 다음은 서울 7명, 전북 5명, 충남 5명 등이 뒤를 잇고 있다. 반면 전남, 충북, 제주는 지금까지 1명의 총리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제주는 박충훈 씨가 4공화국 때 총리서리직을 수행했으나 정식 총리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고장 진천 출신이면서 조신시대 때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을 무려 8번 역임한 인물이 있다. 바로 최석정(崔錫鼎·1646~1715)으로, 단연 조선시대 최다 영의정이다. 병자호란때 주화파로 잘 알려진 최명길이 그의 할아버지가 된다. 그가 어떻게 8번이나 영의정에 올랐는지는 사료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총명하고 박식했으나 주장하는 논리는 그다지 각박하지 않았다'. 이로 미뤄 그가 온
우덕순(禹德淳·1880~1950)을 가리켜 안중근 의사와 결사적 동지 관계였다고 말한다. 그만큼 안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사살하는데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행동을 같이 한 인물이 우덕순이다. 둘의 만남은 우연찮게 이뤄진다. 안중근 전기에 들어있는 우덕순 자전 회고록은 '1907년 애국동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곧 친숙해 졌다. 그와 나는 동갑인데 내가 2월생이고, 안은 5월생이다'라고 적고 있다. 두 사람이 거사 직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장면은 매우 비장하다. 안중근과 우덕순 두 사람에게 거사자금과 권총을 건네 준 사람은 유진율과 이강이라는 동지였다. 이때 유. 이 두 사람이 "지금 삼천리 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하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떨궜다고 우덕순은 회고록을 썼다. 이쯤해서 두 사람은 △먼저 이토히로부미를 쏘고 △다 쏘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를 것 △될 수 있는대로 생포되어서 억울한 사정을 외국에 선전할 것 등을 결의하게 된다.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아닌 우덕순이 저격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하얼빈 경비가 워낙 심하자 실패할 확률을 줄이기 위해, 안
연간 140만명의 탐방객이 찾는다는 속리산 국립공원의 관문은 법주사지구(보은), 화양동지구(괴산), 화북지구(상주), 쌍곡지구(괴산,문경)이다.속리산 국립공원을 지역별로 보면 괴산군이 전체면적의 46.8%에 해당하는 128.644㎢, 보은군이 28.8%인 79.013㎢, 상주시가 17.9%인 49.142㎢, 문경시가 6.65%인 17.742㎢로 면적별로 보면 괴산군이 속리산관광의 중심지여야 하지만 속리산하면 보은 법주사지구를 연상하게 된다.보은 법주사 지구가 속리산관광의 중심지가 된 것은 만수계곡, 서원계곡등 탁월한 경관에 힘입은 점도 있지만 역시 정이품송과 속리산에 자리잡고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법주사가 큰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그러나 법주사를 중심으로 한 속리산 관광은 지난 2002년 211만명의 탐방객을 정점으로 2004년 110만, 2006년 66만, 2008년 68만, 2009년 73만명으로 급격한 감소세를 보인 이후 조금씩은 탐방객 수가 증가하고 있지만 10여년전 전성기의 명성에는 못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이렇게 법주사를 중심으로 한 속리산 관광활성화를 가로막고 있는 난제는 탐방객들에게 유익한 관광 콘테츠를 제
속도전의 화려한 뒤안길을 서성이는 도시인들이 막연하게 꿈꾸는 자유와 희망의 언어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싶어하는 도보여행이다. 도착하기 위해 걷는 것도 빨리 가기 위해 걷는 것도 아니다. 오르다가 지치면 내려오고 걷다가 싫증나면 돌아서면 된다. 최근에 그러한 도시인들의 입맛을 당기는 도보여행지에 대한 관심과 참여 또한 날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중 청풍명월 산경탐사대가 발굴 탐사중인 대청호 둘레길은 대청호 주변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청호 물막음으로 인해 형성된 호반 풍경은 곳곳에 아름다운 풍광들을 그려놓는다. 산과 강 그리고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풍경 속엔 속도감도 화려함도 억지스러움도 없다. 스스로 채워지고 덜어내는 조율이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어울림이 있고 사라지고 남겨지는 자연스러움이 있을 뿐이다.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가족, 연인, 벗 그도 아님 추적추적 내리는 비 스치고 지나는 바람 투명한 햇살조차 기꺼이 동무되어 걷다보면 사색과 교감 대화와 이해 그리고 다시 열리기 시작하는 소통의 출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걷는 이유다.툭 터질듯한 꽃망울들의 속시끄런 설레임이 궁금해 들고나는 잦은 문턱이 싫지않은 봄날 또다른 설레임의
△ 산사에 궁이사천왕 석등에서 동쪽으로 솟을삼문이 달린 담 안에 조그마한 건물 선희궁이 있다. 솟을삼문은 유교적 건축물로 주로 사당에 위치한다.이 건물은 조선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 씨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원당이었다. 제사를 지내 오던 중 영빈 이 씨의 위패를 서울로 모시고 간 후 법주사의 큰 스님들 영정을 모신 조사 각으로 쓰다가 대웅전 서쪽에 진영각을 다시 마련하고 옮겨가 현재 건물은 비어 있다. △ 대웅보전 영역 선희궁 옆에 대웅보전이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 다포집으로 보물 915호 이다. 높이가 19m나 되는 대웅보전은 밖에서는 2층으로 보이나 안에는 통 층으로 기단 계단석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임진란 화재로 중창하고 고종 때 다시 해체 중수하여 오다가 근래에 건물이 기울러져 다시 크게 중수했다.3단으로 쌓은 기단위에 댓돌을 한단 더 올리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3단의 기단 가운데에 널찍한 답 돌을 마련 양쪽 둥글둥글한 소 맷돌에 넓적한 돌 3장으로 좌우로 나누웠다.이 소맷돌 계단을 오르면 양쪽에 돌로 만든 원숭이 두 마리가 사실적으로 조각 하여 놓은 것은 불경에 원숭이가 부처
몇 년 전 재미있게 보았던 한 드라마가 문득 기억난다. 조선시대 최고의 거부이자 무역상으로 당시 모든 상인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던 순조 때의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상도라는 드라마다. 특히 중국 인삼 무역상들이 조선 인삼을 헐값에 구매하기 위해 담합을 하여 가격 인하를 조장하였는데 당당히 그들 앞에서 자신의 피 같은 인삼을 태워버려 결국 더욱 비싼 값에 팔았던 그의 역설적이고 놀라운 상술이 이미지처럼 매우 인상 깊게 기억되었다. 미천한 장돌뱅이에서 고위 관직에 오른 임상옥, 그는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財上平如水)"며 말년에 불우 이웃에 모든 재산을 환원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재물도 그렇게 공정하게 배분돼야 된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의 상도의 의미였다. 그렇다면 현실을 어떨까· 현실세계의 돈은 물처럼 골고루 흐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재에도 중국 인삼 상인과 같은 담합이나, 대기업의 협력기업에 대한 납품단가 인하 역시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상도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할까· 진정한 상도를 지켜나가기 위해선 공급자와 수요자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이해관계에 있어 한 쪽에게만 부당한
고구려 온달이 아단성 전투에서 사망한 것은 서기 590년이다. 김유신은 이보다 5년 늦은 서기 595년에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진천태수였던 김서현이고, 어머니는 진흥왕 조카인 만명부인이다. 삼국사기는 둘에 대해 '눈이 맞아 중매도 없이 야합했다'고 적고 있다. 사실 공자의 부모도 야합을 해 공자를 낳았다.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3대 직손이다. 그런 그가 왜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게 됐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신라 조정은 가야를 정복한 후 이른바 사민정책을 쓰게 된다. 사민정잭은 반란이나 역모 등을 우려해 정복지 주민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거나 근무시키는 정책을 말한다. 김유신 아버지인 김서현이 경주가 아닌, 진천태수로 부임하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가야에서 귀순한 것은 고맙지만 전쟁이 나면 네가 먼저 싸워라' 의미가 담겨 있다우륵은 본래 대가야, 강수는 임라가야 사람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도 당시 신라 조정의 사민정책에 따라 변방 충주로 옮겨와 살게 된다. 이를 두고 혹자는 "총알받이 의미가 있다"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김유신이 언제까지 진천에서 자랐는지 사료상 확인되는 것이 없
박팽년은 사육신 중에서도 주모자급에 속한다. 사육신은 처음에는 명나라 사신 환영회가 벌어지는 창덕궁에서, 별운검 유응부 등을 시켜 세조를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이 배치되지 않으면서 거사가 미뤄진다. 별운검은 임금이 거둥할 때 칼을 차고 좌우에서 호위하는 벼슬아치를 말한다. 박팽년 등은 두 번째 거사일을 '권가'가 개최되는 날로 연기한다. 권가는 씨뿌릴 때쯤 열리는 친농의식의 하나로, 전례적으로 임금이 직접 주재했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김질이라는 인물이 역모 사실을 밀고하면서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붙잡힌다. 당시 박팽년이 세조를 '상감'이 아닌 '나으리'로 부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사실상 가문의 대가 끊기는, '멸문지화'를 당한다. 아버지 박중림과 박팽년의 다섯 형제, 그리고 아들 3명 등 9명이 극형을 당했다. 그리고 어머니, 처, 제수는 노비로 강등돼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대신 김질은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영달을 누린다. 그런데 당시 세조의 분노는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박팽년은 혹독한 고문 때문에 국문을 시작한지 7일만에 옥중에서 죽었다. 그럼에도 세조는 "시체를 거열(車裂) 하고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