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충암 김정(金淨)의 후손들이 충암이 남긴 고서와 고문서를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했다. 기탁 목록에는 김정의 문집인 충암집,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 만동묘정비 탁본, 경주김씨족보 초고본, 송시열이 제주도에 지은 농맹혹문정의통고 등이 포함돼 있다. 김정은 1486년 지금의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1살인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사약을 받고 짧은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일부 한문학자를 제외하고 그를 크게 주목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명현 조광조와 '절친'의 관계였다. 따라서 중종 때의 개혁 정책은 거의 두 사람에 의해 주도됐다. 도교를 관장하는 관청인 소격서(昭格署)가 이때 폐지됐고, 대신 숨은 인재를 천거 형식으로 선발하는 현량과(賢良科)가 도입됐다. 특히 그는 '국왕도 현인·철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기(修己), 즉 자기수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현철군주론이라고 한다. 그는 연산군의 학정이 군주의 자질미달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됐다. 중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유학(幼學) 윤세정 등이 상소하
비례부동(非禮不動),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옥조빙호(玉藻氷壺), 만절필동(萬折必東), 충효절의(忠孝節義). 괴산 화양구곡에 암각 글씨로 새겨진 표현들로, 모두 우암 송시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중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뜻인 비례부동은 첨성대 초입에 새겨져 있다. 첨성대는 화양구곡 제 6곡에 해당한다. 바로 옆에는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비례부동 글씨를 쓴 인물이 숭정황제임을 알게 하고 있다. 숭정은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이다.우암이 중국의 여러 황제 중 유독 명나라 의종의 친필을 화양동에 새긴 것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수암 권상하가 스승 우암의 유언을 받들어 세웠던 만동묘에는 명나라 의종 외에 신종의 위패가 봉안됐다. 신종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잘 돌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대신 환관들이 정사를 대신 봐주는 환관정치가 판을 쳤다. 그러나 신종은 조선전쟁, 즉 임진왜란에 대해 관심이 무척 컸다. 사가에서는 그 이유를 이른바 '속방' 개념으로 보고 있다. 이는 속국과는 다른 개념으로, 중국은 천자의 나라가 되고, 주변국은 그 천자의 권력을 존중하는 질서에 따라 외교관계를 맺고 교
행궁(行宮)은 임금이 장기 출타를 할 때 임시로 머무는 별궁을 말한다. 달리 '행재소' 또는 '이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병을 치료하거나 민정을 살피기 위해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때 단기간 출타할 때는 막사에서 지내지만, 장기간 출타를 할 때는 별궁을 급조했다. 초정약수는 세계 3대 광천수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특유의 톡 쏘는 느낌은 다른 약수와 크게 구분되는 편이다. 몇해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초정약수 성분을 조사했다. 그 결과, 초정약수의 톡쏘는 느낌은 탄산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성원리는 다음과 같다. 지하 깊은 곳의 마그마는 메탄, 유화수소, 이산화탄소, 질소 등의 기체 성분을 갖고 있다. 이중 이산화탄소가 지하 심층수와 만나면서 만들어낸 것이 탄산수이다. 톡 쏘는 맛은 탄산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초정약수의 이산화탄소 분압은 다른 약수보다 매우 높은 편이라고 한다. 초정약수의 알싸한 맛에는 철 성분이 관여를 한다. 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탄산수는 용출되는 과정에서 암석층을 만나게 된다. 이때 암석층내 철성분이 탄산수에 녹아 들어간 후 지표로 용출하게 된다. 여기서 알싸한 맛이 발현된다. 초정일대…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파리하여 우습게 생기었지만 마음만은 명랑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으로 시정간(市井間)에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바보온달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온달이 실제 바보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나, 대체로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보고 있다. 그 근거는 평강공주와 결혼할 당시 그의 관등이 '大兄'이었기 때문이다. 대형은 고구려 조정의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직위다.5~6세기 무렵의 고구려 조정에는 이른바 '국내성파'와 '평양파'가 존재했다. 사가들은 위와 같은 정황을 들어 온달 가문이 본래는 '국내성파'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장수왕의 평양천도 때에 '평양파'가 득세했고, 여기에 온달 가문은 정변에 휘말리면서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조정이 어떤 필요성에 의해 '국내성파'를 껴안으면서 온달도 중앙정계에 복귀했고, 이것이 설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라는 것이다.이때의 어떤 필요성은 남쪽에서는 나제연합군이 한강유역에 쳐들어왔고, 북서쪽 국경에서는 돌궐이 동진해오는 것을 의
중원고구려비(국보 제 205호)는 높이 2.3m, 폭 55cm로, 글자 한 개의 크기가 대략 3.5cm 정도 된다. 광개토대왕비와 마찬가지로 사면 모두에 글자가 새겨진 4면비다. 본래 예서체 한문 글자가 400여자 정도가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되나 마모가 심해 현재는 25% 정도인 100여자 정도만 판독이 가능하다. 중원고구려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등장해 있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甲寅'이라고 쓰여진 日간지이고, 또 하나는 '신유년'이라는 年간지다. 이를 근거로 건립연대를 추정한 결과, 전자는 장수왕37년(449), 후자는 장수왕 69년(481)이 된다. 현재 두 가지 설중 '449년설'이 보다 많이 인용하는 편이다. 비의 성격은 발견 당시에는 척경비설이 유력했다. 즉 국경을 새로 개척하고 세운 비로 봤다. 그러나 비문이 보다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판독되면서 지금은 사실상 '회맹비'(會盟碑)로 굳어졌다. 회맹비는 어떤 사건이 원인이 돼 양자 사이에 임금과 신하, 또는 형과 동생의 관계를 비문으로 새긴 것을 말한다. 중원고구려비 비문에는 '세세위원 여형여제'(世世爲願 如兄如弟)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직역하면 '영원토록 형제같이 지내기
'영결편지'는 곧 죽을 사람이 산 사람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를 말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국문을 받기 위해 귀양지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숙종의 사약을 받고 전북 정읍에서 죽었다. 이때 수제자 권상하에게 남긴 영결편지에는 '괴산 화양동에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제사 공간인 만동묘(萬東廟)를 세워라'라는 유언이 들어 있었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도운 인물로,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표현된다. 재조지은은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도움을 준 은인이라는 뜻이다. 의종은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이 북경으로 처들어오자 처첩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징산에서 자살한 인물이다. 제천 한수에서 달려온 권상하는 유언에 따라 숙종 29년(1703)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라는 큰 사당을 건립하게 된다. 이때의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이름으로,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충절의 표현이다. 우암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으로 화양동 석벽에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엄청나게 큰 글씨를 새겼다. 애각(崖刻)이라고 한다. 민정중이라는 인물이
역사 이래로 청주·청원은 같은 생활권역에 속했다. 생물학적인 비유를 하면 자웅동체가 된다. 그런 청주가 미군정하인 지난 1946년 6월 1일부터 '청주부'와 '청원군'으로 분리됐다. 행정적으로 이산가족이 됐다. 이때의 '부'(府)는 행정상 '시'(市)와 거의 비슷한 지위를 지닌다. 미군정이 왜 이같은 행정적 조치를 취했는가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인구가 갑자기 늘었거나 도시적 변동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일단 지방자치 확대 일환, 당시 최고 수장인 충북도지사의 사전요청, 도청 소재지가 위치한 청주에 대한 배려 등 3가지를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는 청주·청원이 분리된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으로 서울특별시헌장을 채택한다. 이 경우 행정 위계나 흐름상 청주·청원 분리는 서울특별시헌장 다음에 와야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청주·청원은 그보다 두 달 이른 그해 6월에 분리됐다. 충북도지사의 사전요청 건도 분리된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충북도지사는 윤하영(1889~1956)으로, 그는 미군정의 입맛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그는 1
조선시대 김만균이라는 인물은 현종이 청나라 사신 접대 장소인 모화관에 갈 때 임금을 모시는 것을 거부했다. 병자호란 때 할머니가 청나라 군사에게 안 좋은 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승지 서필원이 할머니에 대한 의리는 사적인 것이고, 임금을 모시는 것은 관리된 자의 공적인 도리라며 그를 비난했다. 승지는 지금의 청와대 고위직에 해당한다. 현종도 화가 나 "임금을 우습게 알고 모욕한다"며 그를 하옥시켰다. 그러자 옥천출신 우암 송시열이 임금의 처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임금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공적 임무일 뿐이며, 조-손 간의 의리는 사적인 것 같으나 실은 인륜을 밝혀 인심과 천리를 유지하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므로 오히려 장려할 일이지 죄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김만균은 곧 풀려날 수 있었다. 조선 임금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사림이 등장하고, 이들이 도학(道學) 정치를 추구하면서 왕권의 위상과 행사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사림은 이른바 세도권(世道權)을 내세워 번번히 왕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세도권은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 외척의 세도(勢道)와는 다르다. 사림의 지지를 등에…
국보 제 198호인 단양 적성비는 그 발견 경위가 다소 극적이다.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 박물관팀은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지난 1978년 1월 6일 단양 적성 일대를 방문한다. 간밤에 눈이 내렸기 때문에 단원들은 등산화에 묻은 진흙을 자주 털어내야 했다. 이때 한 단원이 한 뼘 정도 노출된 돌부리에 진흙을 터는 순간 암석 표면에 '큰 大', '방패 干' 등의 한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1천5백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적성비가 잠을 깨는 순간이었다. 한반도 남동쪽에 치우쳐 위치하던 신라는 늘 영토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백두대간은 신라의 방어선도 됐지만 서진, 북진을 하는데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따라서 신라는 아달라왕때 계립령(156년)과 죽령(158년)을 개척한 후 상당 기간동안 백두대간을 넘지 못했다. 신라가 그런 웅크림 끝에 백두대간을 넘어와 세운 비가 단양 적성비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죽령을 넘어와 고구려를 공격, 죽령 바깥쪽~고현 안쪽의 10개 군을 공취했다'고 적고 있다. 적성비는 당시 활약한 인물로 우산국을 점령했던 이사부,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 김유신 할아버지 김무력 등을 적어놓고 있다. 단양 적성비가 정확히 언제…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첩 사이에서 난 자식을 '서얼'(庶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와 '얼'에는 구별이 있다. 서자는 양반 아버지와 평민 어머니 사이에서, 얼자는 양반과 노비 사이에서 난 자식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서얼을 차별하지 않았으나 주자학을 수용한 조선은 달랐다. 서얼은 가정에서도 천하게 여겨졌고 관직에 등용되기도 어려웠다. 조선시대 때 팔도 감사(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인물이 단 2명 존재한다. 바로 함부림(1360~1410), 반석평(1472~1540)이다. 이중 반석평은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도 역임하는 등 조선전기 단연 행정의 달인이었다.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 반석평의 묘가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반석평은 분명히 서얼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팔도감사와 육조판서를 모두 거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얘기가 전해진다.반석평은 그의 나이 13살 때 아버지 반서린을 잃는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 회미장씨는 반석평 등 3형제를 데리고 서울로 이주를 한다. 이때 회미장씨는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삯바느질 등 온갖 고생을 한 것으로 문중사는 전하고 있다. 이후부터는 다소 혼선이 일어난다.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
신라장적(新羅帳籍)은 1933년 일본 황실 유물 창고인 정창원에서 고려불경 화엄경론을 수리하던중 우연히 발견됐다. 특히 신라장적은 통일신라시대의 서원경, 즉 지금의 청주 일대를 조사 대상으로 한 촌락 문서여서 더욱 애착이 가고 있다. 신라장적에는 서원경 일대 4개 촌락이 등장한다. 이중 지명 사해점촌(沙害漸村)과 살하지촌(薩下知村)은 유관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1개는 '서원경 직속의 OOO촌' 정도만 쓰여 있고, 또 다른 지명은 그 부분이 멸실됐기 때문에 촌락명을 전혀 알 수 없다. 이중 '서원경 직속 OOO'촌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촌락 위치는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는 지금의 청주시 외곽인 연기군이나 내수읍 초정 정도로 보고 있다. 반면 또 다른 학자는 당시 1개 촌이 지금의 1개 면 정도가 된다고 가정, 지금의 청주시내 어느 곳 쯤으로 비정하고 있다.신라장적은 인문지리적인 요소 외에 통계학적으로도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4개 촌의 통계를 합산한 결과, 당시 4개 촌락에는 총 462명이 생존했다. 이중 양인 즉 평민이 437명, 노비가 25명 가량이었다. 보다 면밀히 분석한 결과, 당시 노비는 인간적인 권리와 의무를…
조선시대 때 제천 청풍을 관향(본관)으로 가진 왕비로는 명성왕후, 효의왕후 등 2명이 존재했다. 명성왕후(1642∼1683)는 현종의 비이면서 숙종의 어머니가 된다. 10살 때 세자빈이 되어 가례를 올리고 8년 후 정비가 됐다. 이때 청풍의 행정적 지위가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됐다고 얼마전에 밝힌 바 있다. 효의왕후(1753∼1821)는 영조에 의해 세손빈으로 책봉되어 10살 때 정조와 가례를 올렸다. 두 여인은 혈육적으로도 매우 가까워 명성왕후가 효의왕후의 고모가 된다. 그러나 같은 청풍김씨 출신의 왕비이면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명성왕후를 평할 때 '지능이 비상했지만 성격이 과격했다'는 표현이 뒤따라 다닌다.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이른바 '홍수의 변'이다. 이때의 홍수(紅袖)는 붉은 옷소매, 즉 나인(궁녀)를 의미한다.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는 후사를 이을 아들(후에 숙종)이 한 명밖에 없었다. 반면 현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 등 3명의 아들을 뒀다. 당시 이들을 '삼복'이라고 불렀다. 이때문에 명성왕후는 자칫 인평대군 쪽이 힘을 합해 외아들을 해치고, 그후 삼복 가운데 한 명을 임금으로 추대할지 모른다는 강박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청풍명월'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와 대화를 나누던 중 조선팔도 사람의 기질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경상도 사람은 큰 산과 험한 고개처럼 선이 굵고 우직하다는 뜻에서 '태산준령'(泰山峻嶺), 강원도는 큰 바위 아래에 있는 부처님처럼 어질고 인자하다 뜻에서 '암하노불'(巖下老佛), 전라도는 바람결에 날리는 버드나무처럼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풍전세류'(風前細柳)로 표현했다.또 충청도는 맑은 바람과 큰 달처럼 부드럽고 고매하다는 뜻에서 '청풍명월', 경기도는 거울속의 미인처럼 우아하고 단정하다는 뜻에서 '경중미인'(鏡中美人), 황해도는 거친 돌 밭을 가는 소처럼 묵묵하고 억세다는 뜻에서 '석전경우'(石田耕牛)로 표현했다.이밖에 평안도는 숲 속에서 나온 범처럼 매섭고 사납다는 뜻에서 맹호출림(猛虎出林), 함경도는 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맹렬하고 억척스럽다는 뜻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표현했다.많은 사람들이 '청풍명월'과 제천 '청풍'의 관련성을 사실로 여기고 있다. 청풍명월 할 때의 '청풍'과 지명 '청풍'은 한자표기가 다르지 않다. 때문에 제천시는 제천을 '청풍명월의 본향(
누각과 정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 루'(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워둔 채 비우고 2층에 마루를 깐 고건축물을 말한다. 관아 부속건물로 많이 지어졌다. 이에 비해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졌다.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그러나 누각과 정자는 공통점도 있다. 벽과 문이 없다는 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누허즉 능납만경'(樓虛則能納萬景)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의역하면 '누각이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취경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는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우리고장 제천에 한벽루( 寒碧樓)라는 멋진 누각이 존재하고 있다. 보통의 누각은 조망성이 좋은 곳에 독립적으로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비해 한벽루는 누각 본채 외에 작은 누각을 함께 거느리고 있다. 전문용어로 '날개 익'(翼) 자를 써서 '익랑'이라고 한다. 남원 광한루, 밀양…
태종은 재위 3년(1403) 조운선 대침몰 사고가 발생하자 그 대책으로 세곡을 육지로 운반하는 방안, 배를 임대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게 된다. 이중 하륜이 건의 한 육지로 운반하는 방안이 채택되면서 경상도 세곡도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로 집하됐다. 그러나 목계나루 가흥창이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세조 때였다. 그 이전에 인근 금천창이 짧은 기간 가동됐다. 세조가 가흥창은 본격 가동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그는 세종 때 일시 실시되던 사설조운이 신권(臣權)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이를 혁파했다. 그러나 이때의 가흥창은 창고를 지니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까지 가흥창은 주위를 울타리 등을 이용해 둘러치는 정도였다. 그러자 창고 건립 여부를 둘러싸고 대신들 간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성종 21년(1490)의 실록을 보면 통례원 봉례 한증이 이런 말을 한다. 통례원은 조선시대 때 국가의식을 총괄하던 기구를 일컫는다. "가흥창(可興倉)에 전세(田稅)를 수납할 때에 주위를 둘러 치거나 위를 덮을 물건을, 세를 내는 인민(人民)에게 바치게 하기 때문에 인민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창
조선후기까지 충주 목계나루 건너편에는 가흥창이라는 국가 조창이 위치했다. 조창은 조세로 받은 세곡을 운송전 일시 보관하던 창고를 말한다. 이 영향으로 목계나루는 내륙 최대의 항구 역할을 하면서, 여기에 딸린 장터는 항상 장똘뱅이들로 북적였다. 목계나루의 번창은 아무래도 수계 입지와 관련이 있다. 일대는 수량이 풍부하고 공간이 넓기 때문에 배가 접안하고 또 물류 창고가 들어서기에 매우 좋은 입지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덕흥창이라는 국가 조창이 운영됐다. 조선도 덕흥창을 가흥창으로 이름을 바꾼 후, 그 조운 기능을 계승했다. 가흥창의 위상은 조선 태종때 조운선 침몰 사고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체 9개의 국가 조창이 운영됐다. 이중 6개는 바닷길이고, 충주 가흥창, 원주 흥원창 등 3개는 내륙 강길을 이용했다. 그러던 중 태종 3년(1403)에 경상도에서 거둔 세곡을 싣고 남해안을 따라 운항하던 34척의 배가 거친 파도에 모두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부분이 태종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임금이 듣고 탄식하기를, "책임은 내게 있다. 만인을 몰아서 사지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
어제 진천 농다리(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 얘기를 잠깐했다. 농다리는 통돌이 석축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위에 놓인 널돌이 상판 기능을 하고 있다. 굳이 교각 대신 '석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기둥 역할을 하는 '통돌'이 현대적 의미의 교각은 아니기 때문이다. 농다리는 이름이 독특하다. 특히 '농'자가 바로 와닿지 않는다. 농다리 할 때의 '농'은 '대바구니 籠' 자를 쓰고 있다. 운동경기 농구도 '대바구니 籠' 자이다. 이 경우 농다리는 '대바구니 모양을 한 다리'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농다리는 대바구니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 이 부분은 籠의 또 다른 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전에서 이 한자를 찾으면 가구를 뜻하는 '롱'의 훈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농다리 할 때의 '농'은 '장롱'(欌籠)을 의미한다. 농다리에 사용된 돌은 사각형 모양으로, 마치 장롱을 여러 개 쌓아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농다리가 지네 모습을 닮은 데서 '농' 자가 왔다고 말하고 있으나, 지네의 한자는 '농'이 아닌, '지네 오'(蜈) 자이다. 농다리의 재료적인 면도 조금은 독특하다. 우리나라 다리는 징검다리→통나무다리→형교→돌다리→콘크리트교-철교 순으로 발
경대승 외에 충북 출신이면서 고려 최고 권력자 위치에 오른 인물이 또 있다. 진천출신 임연(林衍·?~ 1270)이다. 고려 초기의 진천(상산) 임씨들은 왕권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는 왕실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진천출신 임명필의 딸(후에 숙목부인)은 왕건의 29명 왕비 중 10번째 부인이 됐다. 그리고 역시 진천출신 임희의 딸은 2대 혜종의 정비(후에 의화왕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10세기 전후의 일이다. 임연은 이보다 훨씬 늦은 13세기 인물로, 직전의 무신 집권자인 김준(金俊·?~1268)의 눈에 들어 고속승진을 한다. 고려사는 경대승을 제외한 다른 무신 집권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어제 밝힌 바 있다. 임연도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고려사는 임연에 대해 '벌의 눈매에 표범의 소리를 닮았고, 기와를 지붕 위로 던지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두 사람의 초기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남의 처를 간하여 죄를 받게 된 임연을 구해준 사람이 김준이었다. 이에 임연은 김준을 아버지로, 그리고 김준의 동생인 김승준을 숙부라고 불렀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는 최충헌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를 함께 죽이는 쿠데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귀주대첩의 강감찬, 동북9성을 개척한 윤관은 무신처럼 보여지나 그렇지는 않다. 고려는 전쟁이 일어나면 그 군사 지휘권을 문신에게 주었다. 고려 무신들은 늘 이것이 불만이었다. 그러던중 문신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나이든 무신인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고, 뺨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은 극도로 흥분, 문신들을 대거 살육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려사는 이에 대해 당시 이들이 "문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 할지라도 종자를 남기지 말라"며 개성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고 적고 있다. 이들은 피로 정권을 잡은 후 일본 막부정치처럼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1백년 동안 자신들이 직접 통치를 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 의종은 살해되고, 나머지 2명의 왕은 폐위돼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도 엄청난 살육전이 진행됐다. 정확히 11명의 무신이 등장해 이중 6명이 타살로 권력을 잃게 된다. 1번 타자는 이의방이다. 그러나 그는 정중부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런 정중부도 청주출신 경대승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후 최충헌은 이의민, 김준은 최의, 임연을 다시 김준을 죽이면서 권력지도가 바뀌었다. 무신정권 마지막 타자인 임유무는 원종의 밀명을 받은 홍규
서리를 제외하고 정부수립 후 현재까지 총 40명의 총리가 배출됐다. 현 정운찬 총리가 40대에 해당한다. 이중 장면, 백두진, 김종필 씨는 총리직을 두번씩 수행했다. 장면은 2, 7대 백두진은 4, 10대 김종필은 11, 31대 때 총리직을 수행했다. 지역감정 여부를 떠나 충북은 계속 '총리 무배출道'로 남아 있다. 반면 군장성이 많았던 이북 출신은 4공화국까지 총 10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그 다음은 서울 7명, 전북 5명, 충남 5명 등이 뒤를 잇고 있다. 반면 전남, 충북, 제주는 지금까지 1명의 총리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제주는 박충훈 씨가 4공화국 때 총리서리직을 수행했으나 정식 총리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고장 진천 출신이면서 조신시대 때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을 무려 8번 역임한 인물이 있다. 바로 최석정(崔錫鼎·1646~1715)으로, 단연 조선시대 최다 영의정이다. 병자호란때 주화파로 잘 알려진 최명길이 그의 할아버지가 된다. 그가 어떻게 8번이나 영의정에 올랐는지는 사료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총명하고 박식했으나 주장하는 논리는 그다지 각박하지 않았다'. 이로 미뤄 그가 온
우덕순(禹德淳·1880~1950)을 가리켜 안중근 의사와 결사적 동지 관계였다고 말한다. 그만큼 안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사살하는데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행동을 같이 한 인물이 우덕순이다. 둘의 만남은 우연찮게 이뤄진다. 안중근 전기에 들어있는 우덕순 자전 회고록은 '1907년 애국동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곧 친숙해 졌다. 그와 나는 동갑인데 내가 2월생이고, 안은 5월생이다'라고 적고 있다. 두 사람이 거사 직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장면은 매우 비장하다. 안중근과 우덕순 두 사람에게 거사자금과 권총을 건네 준 사람은 유진율과 이강이라는 동지였다. 이때 유. 이 두 사람이 "지금 삼천리 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하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떨궜다고 우덕순은 회고록을 썼다. 이쯤해서 두 사람은 △먼저 이토히로부미를 쏘고 △다 쏘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를 것 △될 수 있는대로 생포되어서 억울한 사정을 외국에 선전할 것 등을 결의하게 된다.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아닌 우덕순이 저격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하얼빈 경비가 워낙 심하자 실패할 확률을 줄이기 위해, 안
고구려 온달이 아단성 전투에서 사망한 것은 서기 590년이다. 김유신은 이보다 5년 늦은 서기 595년에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진천태수였던 김서현이고, 어머니는 진흥왕 조카인 만명부인이다. 삼국사기는 둘에 대해 '눈이 맞아 중매도 없이 야합했다'고 적고 있다. 사실 공자의 부모도 야합을 해 공자를 낳았다.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3대 직손이다. 그런 그가 왜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게 됐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신라 조정은 가야를 정복한 후 이른바 사민정책을 쓰게 된다. 사민정잭은 반란이나 역모 등을 우려해 정복지 주민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거나 근무시키는 정책을 말한다. 김유신 아버지인 김서현이 경주가 아닌, 진천태수로 부임하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가야에서 귀순한 것은 고맙지만 전쟁이 나면 네가 먼저 싸워라' 의미가 담겨 있다우륵은 본래 대가야, 강수는 임라가야 사람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도 당시 신라 조정의 사민정책에 따라 변방 충주로 옮겨와 살게 된다. 이를 두고 혹자는 "총알받이 의미가 있다"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김유신이 언제까지 진천에서 자랐는지 사료상 확인되는 것이 없
박팽년은 사육신 중에서도 주모자급에 속한다. 사육신은 처음에는 명나라 사신 환영회가 벌어지는 창덕궁에서, 별운검 유응부 등을 시켜 세조를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이 배치되지 않으면서 거사가 미뤄진다. 별운검은 임금이 거둥할 때 칼을 차고 좌우에서 호위하는 벼슬아치를 말한다. 박팽년 등은 두 번째 거사일을 '권가'가 개최되는 날로 연기한다. 권가는 씨뿌릴 때쯤 열리는 친농의식의 하나로, 전례적으로 임금이 직접 주재했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김질이라는 인물이 역모 사실을 밀고하면서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붙잡힌다. 당시 박팽년이 세조를 '상감'이 아닌 '나으리'로 부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사실상 가문의 대가 끊기는, '멸문지화'를 당한다. 아버지 박중림과 박팽년의 다섯 형제, 그리고 아들 3명 등 9명이 극형을 당했다. 그리고 어머니, 처, 제수는 노비로 강등돼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대신 김질은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영달을 누린다. 그런데 당시 세조의 분노는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박팽년은 혹독한 고문 때문에 국문을 시작한지 7일만에 옥중에서 죽었다. 그럼에도 세조는 "시체를 거열(車裂) 하고
대략 70~12만년 전의 전기 구석기에는 자갈돌을 한번 떼어낸 외날 찍개류가, 12~3만5천년전의 중기 구석기에는 자갈돌을 두 번 이상 다음은 다면 석기류가 주로 사용됐다. 이밖에 3만5천~8천년 전의 후기 구석기에는 좀더 작고 날카로와진 슴베찌르개와 좀돌날이 주로 사용됐다. 호미 뒷부분과 비슷한 슴베찌르개는 석기를 나무에 창처럼 꽂은 것을, 좀돌날은 날카로운 돌파편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이융조(한국선사문화원장) 전 충북대 교수가 이끄는 발굴팀이 지난 80년대 단양 수양개 지역에서 찍개, 긁개, 찌르개, 슴베찌르개, 좀돌날몸돌 등 다량의 구석기 유물을 발굴한 바 있다. 한반도를 포함한 전세계 구석기 석기는 공통적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 △무딘 것에서 날카로운 것 △두꺼운 것에서 얇은 것으로의 변화했다. 실제 단양 수양개 구석기 연모를 측정한 결과, 중기 구석기의 찍개는 평균 12㎝, 후기 구석기의 좀돌날몸돌은 평균 5.1㎝의 길이를 나타냈다. 대략 2배 차이를 보인다. 이는 인류가 '작고 날카로운 것이 보다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데 수십만년이 걸렸음을 의미한다. 현재 그 원인과 관련해 손의 진화설과 두뇌 발달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
박순하면 잘 몰라도, '함흥차사'의 유래는 모두 알고 있다. 바로 함흥차사의 주인공이 우리고장 음성의 인물인 박순(朴淳, 1523~1589)이다. 과거 방송됐던 사극들은 박순의 죽음을 매우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박순이 장기를 두면서 귀환을 간곡히 청하자 드디어 환궁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를 호위하던 군사들이 이성계가 환궁을 하면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 박순을 죽인다. 그 직전 이성계는 부하 군사들의 요청에 못이겨 "박순이 용흥강(지금의 영흥)을 건넜으면 살려두고, 건너지 못했으면 죽여도 좋다"고 명령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순은 영흥으로 오는 도중 배탈이 났고, 그래서 뒤늦게 배에 오르려는 순간 이성계의 군사들의 추격을 받아 죽음을 맞게 된다. 박순의 처는 장흥임씨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녀은 자결을 하게 된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자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한 후 앉은 자세로 자결한다. 그러자 당시 나라 안에는 '부사어충 처사어열'(夫死於忠 妻死於烈), 즉 남편은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열부로 죽었다는 나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위 내용을 '함흥차사'의 유래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과장되거나 사실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