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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소리에 여름이 익어가는 시골집 대청마루에선 하루 종일 스피커가 쟁쟁거렸다.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인 60년대 초반에는 유선방송에서 송출하는 라디오 스피커가 집집마다 있다시피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였지만 음향기기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당시에는 라디오 스피커가 유일한 문화의 통로이자 중요한 오락의 수단이었다.

당시 인기프로그램은 연속극과 더불어 '전설따라 삼천리' '재치문답'등이었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기프로가 '히트 송' 코너였다. '이주일의 히트송'인지 '가요 톱 텐'인지 정확한 타이틀을 기억할 수는 없으나 팬들의 투표에 의해 한 주의 인기가요 순위를 매기는 이 프로는 청취자의 주요 관심사였다. 20위부터 인기가요를 간간이 들려주다가 10위부터는 순위에 든 가요를 모두 송출했는데 그때마다 이미자의 노래는 거의 1위 자리를 독차지하다시피 하였다. 아무리 인기가요라 해도 1위에 머무르는 기간은 길어야 4주 정도였는데 이미자의 노래는 8주 이상을 롱런하였다.

이미자의 출세를 예견한 '동백아가씨'는 1964년 출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1위 자리를 오랫동안 지켰고, 그 뒤를 이어 '울어라 열풍아' '황포돛대' '기러기 아빠' 등이 채널을 점령하였다. 전축과 음반을 살 형편이 안 되었던 시골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미자의 노래 말을 번개같이 베껴 불렀다. 불행히도 이미자의 노래 중 '동백아가씨'를 비롯하여 여러 곡이 왜색조라는 이유로 금지되었으나 사람들의 입을 일일이 막지는 못했으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이런 노래들을 상당히 좋아 했으니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자의 노래가 이렇게 히트한 것은 우선 가수로서 천부적 소질을 타고 난 그의 재능에 있는 것이지만 그의 노래는 시대상을 잘 반영하면서 서민의 아픔을 어루만져 나간데 더 큰 원인이 있는 듯하다. 1인당 국민소득 200~300달러에서 턱걸이을 하고 있을 때, 이미자의 노래는 고단한 서민들의 삶을 보듬어 주었고 구겨진 삶을 다림질해 주었으며 가슴에 뚫린 마음의 상처까지 땜질해주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엘레지의 여왕' '국민 가수'라는 여러 칭호가 붙었다. '동백 아가씨'는 무려 50년을 불렀는데 늙기는커녕, 아직도 상록수인양 우리가슴에 살아 있다. 폭발적인 가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여과장치를 통해 나오는, 찌꺼기가 없는 순백의 소리는 늘 우리들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영혼을 사로잡았다. 지난 주말, 충북일보 주최로 열린 '이미자 효 콘서트'에선 그의 진면목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목소리는 여전히 청정했으며 가창력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가 듬으로 해서 원숙미까지 보태어 졌다.

이미자가 최고의 가수라고 해서 탄탄대로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히트송의 금지조치 등덜컹거리는 인생의 굽이에서 그는 '동백아가씨'처럼 울다가 '여자의 일생'처럼 인생살이에 널린 삶의 조각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나라 최고 가수의 자리를 지켜왔다. "팬들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저도 무너졌을지 몰라요" 콘서트 도중 사회자인 김동건 씨의 질문에 그는 '팬들의 사랑'을 유독 강조했다. 스타라고 해서 요란 떨지 않고, 이웃집 아줌마처럼 수더분하고 겸손한 그의 모습에 팬들은 더욱 친밀감을 갖는 것이다.

한국에 이미자가 있다면 일본엔 엔가(演歌)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加藤和枝)가 있다. 1937년, 한국계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히바리는 '강물의 흐름처럼' '브루라이트 요코하마' 등 1천500곡의 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한 일본의 대표적 가수다. 2차 대전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일본이 허우적거릴 때, 히바리의 노래는 일본인의 상처를 봉합하며 일본이 재건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굳이 양자를 비교할 것은 없지만 히바리가 일본인에게 미친 영향보다 이미자가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은 더욱 크다고 판단된다. 이미자는 가요생활 50년 동안 무려 2천300여곡에 달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의 히트송은 '동백 아가씨'를 비롯하여 '여자의 일생' '황혼의 블루스'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서울이여 안녕' '아씨'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가 지난 3월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중가수로 국민의 가슴을 울리고 즐겁게 했던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사회자인 김동건 씨는 "50주년 콘서트에 이어 100주년 콘서트도 청주에서 열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인생은 유한하나 예술은 끝이 없는 것이다. 그 목소리 앞으로도 영원히 간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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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