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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충북지사는?

도민의 눈물을 닦아준 최대 구호기관
1949년 설립 후 휴암동 시대까지 승승장구
올 들어 최대 위기… 성영용 회장 역할론 대두

  • 웹출고시간2012.11.27 20:04:0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충북적십자사 전경.

"국민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대한적십자사 충북지사 건물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문구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적십자사는 재해·재난 등 각종 사고로 눈물범벅이 된 국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국내 최대 구호기관이다.

충북의 뿌리는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9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한적십자사 청주지사가 북문로 1가에 설립됐다. 적십자 회원들은 전쟁으로 피바다가 된 충북 곳곳을 누비며 구원활동을 했다.

1951년 개설된 청주적십자의원은 1973년 폐원될 때까지 병원비가 없는 도민들을 위해 사랑의 인술을 펼쳤다. 1954년 청소년적십자 설립에 이어 1958년 청원 북이면과 진천 덕산면, 괴산 청안면에 전국 최초로 농촌지역 탁아소가 건립됐다. 1972년부턴 문화동 시대가 열렸다. 이후 1983년 충주봉사관, 1990년 제천봉사관, 2008년 보은봉사관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사세를 확장한 충북적십자사는 구호활동의 범위를 점점 넓혔다.

1960년대 충북적십자사의 구호활동 모습.

1968년 언청이 성형수술 사업, 1980년 수해 이재민 긴급구호, 1993년 청주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사고 구호, 1995년 충주호 유람선 화재 구호, 2002년 태풍 '루사' 피해지역 구호, 2005년 영동 천태산 산불 긴급구호, 2006년 태풍 '에위니아' 피해지역 구호 등 도민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들의 손을 잡아줬다.

충북적십자사와 공생 관계인 충북혈액원도 발전을 거듭해왔다. 1979년 충북도립의료원에 헌혈실, 검사실 등의 기본적인 시설을 갖추고 직원 3명으로 출발한 충북혈액원은 1981년 청주병원, 1985년 문화동 사옥으로 이전하면서 전문적 인력과 장비를 구축했다.

1997년 청주 성안길 헌혈의 집, 1998년 충북대 헌혈의 집, 1999년 충주 헌혈의 집, 2004년 충주대 헌혈의 집, 2008년 청주대 앞 헌혈의 집을 잇따라 개소하면서 현재는 연간 10만여명의 헌혈자수를 자랑하고 있다.

37년간 문화동 시대를 걸어온 충북적십자사와 충북혈액원은 2009년 4월 휴암동 시대를 열며 새로운 탄생을 알렸다.

거침없이 지난 62년 세월은 달려온 충북적십자사. 그동안 너무 많은 체력을 소비해서일까. 올해 들어 자꾸만 휘청거리고 있다.

지난 8월 차기 회장 선출 문제로 충북도와 유례없는 갈등을 빚더니 이번엔 회비 모금 방식을 놓고 전공노와 대립각에 서게 됐다. 일부에선 "광역단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대가"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중요한 건 어떻게 매듭을 짓느냐다. 그것이 충북도 추천 인사를 물리치고 당선된 성영용 28대 충북적십자사 회장의 역할이다.

/ 임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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