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亡者)의 공간인 무덤을 부르는 명칭은 능(陵)·원(園)·총(塚)·분(墳)·묘(墓) 등 다소 다양하다. 능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 원은 세자나 세자비 또는 왕의 종실무덤을 일컫는다.총은 규모가 크고 어떤 특이한 유물이 출토됐지만 매장자, 즉 묘주를 알 수 없는 경우에 붙인다. 가령 금관이 나왔으니까 '금관총'으로 부르는 경우다.분은 옛무덤이지만 특이함이 발견되지 않는 평범한 무덤을 가리킨다. 이때는 지역명을 따서 'OO리 몇호분' 식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것 외의 평범한 무덤은 '묘'(墓라)고 불렀다.증평읍 율리 산 8-1에 백곡 김득신(金得臣·1604-1684)과 그의 아버지 김치(金緻·1577-1625)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묻힌 김득신은 생전에 아버지 묘를 살피기 위해 좌구산 아래 율리(밤티골) 산길을 자주 왕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시는 밤티골이 배경이 된 '율협'(栗峽)이라는 칠언절구다.'산기슭 시냇가에 돌로 만든 대(山畔溪頭石作臺) / 올라서 바라보니 석양이 눈앞에 펼쳐지네개(登臨斜日兩眸開) / 시흥이 일어나 자주 붓을 들며(詩因有興頻抽筆) / 근심을 덜기 위해 빈번히 술잔 기울이네(酒爲銷愁每把盃) / 나그네의 혼은 꿈속에서
증평 율리 삼거리에서 좌구산 방향으로 달리면 삼기저수지가 나오고, 여기서 더 진행하면 율리 마을회관이 나타난다. 이 마을 뒷산에 백곡 김득신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증평군청 자료는 백곡의 묘에 대해 '김치(김득신 부친)의 상여가 좌구산과 구녀산 사이로 난 분젓치(옛 영남통로)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상여의 만장이 날아가서 이곳에 앉는지라 명당이라고 생각한 후손들이 이 자리에 묘를 썼다'고 구전을 옮겨 놓았다. 김득신 묘의 봉분은 높이 1.6m이고 묘지둘레는 20m로, 봉분 앞에는 상석과 묘비석, 동자석이 놓여있다. 김득신 묘 바로 위에는 조선 중기 최고의 주역 연구가이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김치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김씨 부자는 한남금북정맥 최고봉인 좌구산 산록에서 나란히 영면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김득신은 17세기 인물치고는 꽤나 장수한 편이었다. 생몰연대가 '1604∼1684년'이니까, 약 80년 동안 생존했다. 이와 관련, 증평군지는 백곡에 대한 설명문 말미를 '저서로 백곡집(栢谷集)·종남총지(終南叢誌)가 있다. 유학출신으로 서울에 거주했다. 묘소는 증평군 증평읍 율리에 있다'라고 의외로…
괴산읍 농촌리 괴강가에 자리잡고 있는'취묵당'에는 누정 이름을 적은 편액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취묵당 중수기'와 '취묵당' 단어가 들어간 한시가 걸려 있어 이 누정이 취묵당임을 알게 한다. 취묵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통칸마루 사방에 난간이 설치돼 있다. 그리고 4개의 기둥에는 '용호'라는 주련(柱聯) 시가 걸려 있다. 주련은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로, 기둥(柱) 마다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생기복덕(生氣福德), 덕담(德談) 등의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붙이거나 그 내용을 얇게 새겨서 걸기도 한다. 또 오언이나 칠언의 유명한 시나 자작한 작품을 써서 거는 경우도 많다. 한 구절씩을 적어 네 기둥에 걸면 시 한 수가 완성된다. 취묵당에 걸린 백곡의 주련시 '용호'의 내용이다. '고목에는 찬 안개가 감돌고(古木寒煙裏) / 가을 산에 소나기 흩뿌리네(秋山白雨) / 저무는 강물에 풍랑이 일어나니(暮江風浪起) / 어부는 서둘러서 뱃머리를 돌리누나(漁子急回船).- 18세기 인물인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이 시에 대해 '효종이 "당인(唐人)에게 부끄럽지 않다"며 화공을 시켜 이 시를 써주고는 대
팔영(八詠)은 8곳의 경치를 읊었다는 뜻이다. 김득신이 '괴협취묵당팔영'의 제 1, 2영에서 일대의 서경을 노래했다면 제 3영은 생활의 정감을 노래했다. '우리 집은 강위에 있는데 / 문밖에 상선이 정박했네 / 달 밝은 백사장에 닻을 내리고 / 안개 낀 옛 골짜기에 돛을 내렸네 / 한수(漢水) 입구에서 바람을 타고 가 / 탄금대 곁에서 노를 두르리네 / 내일 고기와 소금을 팔면 / 촌민들 수 없이 모이겠지.'- 김득신의 생활공간이자 창작 장소인 취묵당 앞의 괴강으로 서해안 상선(商船)이 거슬러 올라와 소금과 고기를 팔고 있다. 인용문 중 '한수'(漢水)는 남한강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도 괴산 불정면 목도강변에서는 백중이 되면 매년 황포돛배의 정박 행사가 재현되고 있다. 제 3영은 그것을 문헌적으로 고증하는 시로 봐야 할 것 같다.제 4영은 괴강가에서 밤중에 물고기 잡는 모습이 마치 소설을 쓰듯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십분 발휘된 시로 볼 수 있다. '오래된 나루의 어부들의 횃불 / 초저녁부터 밝게 빛나네 / 여울머리에선 잠든 해오라기 놀라고 / 물 밑에선 물고기 숨고 달아나네 / 반딧불은 백사장 가에서 반짝이고 / 별빛은 선궁(仙
김득신은 괴강가의 취묵당짓는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창동(蒼童)을 시켜 작은 소나무를 베어내고 큰 소나무만 남겨두며, 작은 돌은 뽑아내고 큰 돌은 끊으며 썩은 흙은 제거하여 더러온 고을을 청소하니 기이한 형세와 경치가 번갈아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곳엔 마땅히 당우를 지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청당태수에게 청해 목수를 얻어 재목으로 쓸 약간을 베어서 두 칸 당을 지었다.'- 인용문 서두의 창동은 청년같은 소년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괴산임에도 불구하고 청당(청안현) 태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다소 이채롭다. 백곡은 이렇게 완성된 취묵당을 통해 멀고 가까운 곳의 경치를 확보했고, 이에 크게 만족해 했다. '성불산이 잇달아 솟아 있는 것, 남녘과 동녘까지 이어진 교외, 이탄 광탄의 급류, 물가에 늘어선 나무, 어촌마을이 벌려 있는 것, 구름이 일어나고 새가 날아가는 것, 고리가 노릴고 사람이 다니는 것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니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기쁘기가 예쁜 선녀가 손톱으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것만 같은 뿐만 아니다.'- 김득신은 처음에는 괴강으로의 낙향 생활에 불안함을 보였으나 얼마안가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으면서 일대 근·원경을 소재로…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가 지난 26일 72번째 여행을 떠났다.이날 산행은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교장 함우석 충북일보 주필과 김웅식 산행대장(산행환경문화원), 이종윤 전 청원군수, (사)희망충북 그린스타트, 오창산단 LG 사원 등 30여 명이 함께했다.여행지는 상당산성백오십리숲길 이티재~구녀산~좌구정~좌구산 천문대 3시간 산행 구간.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위치한 숲길이다.출발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김 대장은 "오늘은 산을 깨끗하게 한다는 산행 의미 보다 나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를 갖자"며 "안전이 최우선이다. 안전한 산행을 마치자"고 했다.시원하게 뚫린 청주 율량동~증평 신도로를 타고 오전 9시20분 이티재에 도착했다.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에 하나둘 우비를 입고 하얀 시루떡처럼 안개가 켜켜이 쌓인 이티재를 오르기 시작했다.초보 등산객을 농락하듯 가파른 오르막 길이 눈이 닿는 끝에까지 이어져 있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 길 끝에 닿으면 저 만치 평지가 보이고 평지 끝에는 또 끝 없는 오르막이다.초보 등산객에겐 만만치 않는 코스지만 시원하게 내리는 비는 후끈한 몸이라도 식혀줘 더운 날 보다는 수월한 산행이 이어졌
김득신의 문집인 백곡집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만날 수 있다. '괴강에 머문 지 4년이 넘는데, 철에 따라 경물로 시를 지으니 시주머니가 넉넉하네'(槐江泥滯四年强 時物供詩富錦囊). '명성을 다투고 이익을 탐함은 내 일이 아니니, 괴강에 돌아가 모래밭에 앉아 낚시질하리'(爭名貪利非吾事 歸去槐江坐釣沙).그는 취묵당 주변의 괴강가 일대를 철따라 다양하게 시의 소재를 얻을 수 있는 공간, 명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편히 할 수 있는 곳 등으로 표현했다. 다음 시도 백곡이 괴강가를 봄날의 흥취에 마음껏 젖을 수 있는 곳, 또 뒷산이 되는 개향산을 빼어난 명승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괴협에 봄기운이 돌아 홀로 돌아오니, 시골 흥취가 느긋하여 막을 수 없네'(春生槐峽獨歸來 野興悠悠不可哉). '꿈 속의 넋이 또한 개향산의 빼어남을 알아, 울긋불긋한 벼량을 밤마다 올라가네'(夢魂亦識香山勝 翠壁丹厓夜登). 그러나 김득신이 처음부터 괴강가 일대를 마음의 안주처로 흡족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취묵당과 초당을 지어 은거를 시작한 뒤에도 벼슬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했음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출처는 모두 백곡집이다. '이 몸이 어찌
김득신은 여러 정황상 목천현 백전(栢田·지금의 천안신 병천면 가전리)에서 태어나 20대까지 보냈고, 그 이후는 한양에서 생활한 것으로 여겨진다. '병자피난초작'(丙子避難初作)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난리통에 한 번 서울 집 떠나온 뒤로 / 홀로 깊은 시름 안은 채 삼처럼 어지럽구나 / 깊은 골짜기 쌓인 음기에 봄이 더디니 / 작은 매화가 추위에 움츠려 피지 못하네 /.../ 홀로 하늘가 한 구석에 떠도는 이 내 신세 / 병란에 소식 끊기어 깊은 시름만 안고 있네 / 두 장모와 최모 박모 친구들 잘 있는지 / 서로 만난다면 한스러움 금방 그칠텐데 /.../'- 김득신은 그의 나이 32살 때 병자호란(1636년)을 만나 영남지역으로 피난했다. 이 시는 그때 지은 흔치 않은 장시(長詩)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뒤에 이어진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그해 겨울 영남지방에 눈이 무척 많이 왔음을 알 수 있다. '듬성한 수풀 너머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 푸른 절벽에 기댄 절간이 있나보다 / 아이놈과 함께 찾아가려 하지만 / 봄눈이 너무 많이 쌓였으니 어이하리 / 멀리 서울서 온 나그네 / 이별의 정한 가누기 어렵구나 / 이 산 어디에서 봄빛을 찾을꼬 / 찬 골짝…
백곡 김득신은 괴강이 내려다보이는 개향산 언덕에 취묵당을 건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생활공간인 초당(草堂)을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풀 草' 자에서 보듯 이때의 집은 사대부가의 격식을 갖춘 것이 아닌, 작고 허름한 초가로 여겨진다. 김득신이 초당과 관련해 남긴 글은 당시 괴산지역 공간과 자연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먼저 그가 남긴 '초당서'에는 광탄, 방간야, 성불산, 한림, 장군 등의 명사가 등장한다. '성황당 서쪽 광탄 북쪽의 方干野(방간야)와 더불어 성불산이 펼쳐진 곳에는 언덕이 쓸쓸하지만 한림의 옛집이 있고, 남은 터가 활량하지만 장군의 옛 자취를 알 수 있는데 사람이 사는 연기는 끊어졌지만 풍월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인은 천석고황(泉石膏亡+月)과 운림질고(雲林疾痼)가 있어서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붉은 먼지를 떠나니 초헌과 면류관에는 관심이 없고 강호에 백발을 비추며 낚시질함이 소원이다.'- 인용문 중 '한림'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부친 김치, '장군'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조부 김시민을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성불산은 현재도 유통되는 지명으로 괴산 서쪽의 해발 530m 산을 지칭하고 있다. 근래 현 임각수 괴산군
누정의 본래 기능은 취경(取景), 즉 경치를 모으는데 있다. 때문에 전통 누정은 방이 없는 대신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 듯이 탁 트였다. 누정에는 주인의 의도에 따라 누(樓)·정(亭)·당(堂)·대(臺)·각(閣)·헌(軒) 등의 이름이 붙으나 그 구분은 뚜렷하지 않다. 누정의 명칭은 자연, 동식물, 사람 호칭, 역사적인 사건 등과 관련된 것이 많다. 우리고장을 위주로 예를 들면,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의 금호루(錦湖樓)는 금강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동물과 관련된 누정 명칭으로는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의 관어대(觀魚臺)가 있다. 조선 중기의 인물인 민욱(閔昱·1559-1625)은 이곳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뜻에서 '관어대'로 이름지었다.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의 가학루(駕鶴樓)는 누각이 학의 날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구전되고 있다. 추풍령 정상에서 승용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언덕 위의 전통건물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가학루다. 사람 호칭과 관련된 누정으로는 애한정(愛閑亭)과 백석정(白石亭)이 있다. 괴산읍 검승리에 위치하고 있는 애한정은 조선 현종 때 괴산군수였던 황세구(黃
김득신은 현종 3년(1662)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대과 합격생에 걸맞는 직책을 갖지 못하고 성균관 학유(學諭)라는 한직에 임명됐다. 학유는 성균관 소속으로 각종 과거응시의 예비심사일을 처리했고, 태종 때부터는 성균관입학시험에 대한 예비심사도 하였다. 이같은 중요성 때문에 개국 때인 태조 연간에 처음 설치됐다. 학유는 보기에 따라 유생의 사표(師表)가 되는 자리였다. 때문에 세종 때에는 문행(文行)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고 대간(臺諫)의 동의를 얻은 뒤 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유는 정치적인 권력이 발휘되는 관직은 아니었다. 김득신이 한직에 임명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정황상 회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현석(李玄錫)이라는 인물이 쓴 김득신의 묘갈명(비석문)을 보면 그는 이 즈음 우리고장 괴산의 괴강가로 낙향, 그 유명한 취묵당(醉默堂)을 짓는다. 현재 괴산읍 능촌리 김시만장군 사당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취묵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통칸마루에 사방 난간에 설치돼 있다. 지난 2007년 도문화재자료 제 61호로 지정됐다. 묘갈명 등을 참고하면 김득신은 괴강가 우거생활 중에 장령에 임명되나 이번
김득신(金得臣·1604∼1684)의 어릴적 이름은 '자공'(子公)이고, 호는 백곡(栢谷)이다. 백곡이라는 지명은 언뜻 김득신의 만년 우거공간이었던 괴산 어느 잣나무(栢) 골짜기(谷) 쯤을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같은 이름인 진천 백곡을 떠올릴 수 있으나 두 곳 지명과는 무관하다. 김득신의 호 백곡은 목천현 백전(栢田) 마을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다. 백곡의 고조부 김석은 1519년 기묘사화 때 괴산으로 피신했다. 그후 증조부 김충갑이 서원에 유배되었다가 목천현 백전마을에 살던 장인 이성춘(李成春)의 전장을 물려받아 그곳에 정착했다. 그는 목천에 거주하면서 선영이 있는 우리고장 괴산을 왕래했다.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金緻)도 1901년부터 4년 동안 선영의 일 때문에 괴산 방하현(方下峴)에 머물렀던 것으로 나타난다. '취묵당일기'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선친이 괴산 방하연에 들어와 4년 동안 머물면서 묘지를 돌봤다.'(先君入槐州方下峴 留四年爲丘墓矣) 방하연은 백곡이 나중에 취묵당을 세운 괴산읍 능촌리 일대를 일컫는다. 김득신의 과거시험 준비는 생활터전이 있는 백곡에서 주로 이뤄졌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크게 소과와 대과
선조~숙종 연간을 산 인물인 김득신(金得臣·1604∼1684)은 조선 최고의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김득신이 말년을 보낸 괴산 괴강가의 취묵당(醉默堂)에는 그의 독서량을 기록한 '독서기'(讀書記) 편액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떤 책의 독서가 끝나면 그 횟수를 대나무에 새겨 기록으로 남겼다. 취묵당 독서기를 보면, 김득신의 사기의 백이전(伯夷傳)을 1억 1만 3천 번으로 가장 많이 읽었다. 반면 노자전(老子傳)·분왕(分王)·벽력금(霹靂琴)·주책(周策)이라는 책은 2만 번을 읽었다고 기록했다. 또 제책(齊策)·귀신장(鬼神章)·목가산기(木假山記)·중용서(中庸書)는 1만 8천 번, 송설존의서(送薛存義序)·송원수재서(送元秀才序)·백리해장(百里奚章)은 1만 5천 번을 읽었다. 이밖에 획린해(獲麟解)·사설(師說)·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承廳壁記) 등은 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썼다. 이상의 글을 모두 합하면 36편이 된다 억이나 만 단위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나, 그가 조선 최고의 독서광이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독서 방법은 다독과 정독이었다. 그는 많이 읽기도 했지만 정독을 병행했다. 이런 김득신의 독서방법을 주위에서
한자 '샘 泉'(천)은 바위에서 물이 자연스레 용출하는 모습을 상형화했다. 이에 비해 '우물 井'(정)은 물 긷는 시설의 모습을 상형한 것으로, 인공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물과 관련된 표현으로 '시정'(市井)이 있다. 시정잡배(市井雜輩), 시정지민(市井之民) 등에서 그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시정잡배는 시장과 우물가에 모이는 사람의 무리, 시정지민은 시정을 찾은 백성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학자 이익도 '시정지민'이라는 표현에 호기심이 들었는지, 그 어문적인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했다. '시정이란 것은 농상(農商)의 천한 사람을 말한 것이니, 장사꾼은 저자를 주로 삼고, 농사꾼은 우물을 주로 삼는다. 그래서 시정지민(市井之民)이라 이른다."고 생각한다.'- 우물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조 혁거세 거서간(居西干) 5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으며, 여자 아이는 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나 시조가 왕비로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위 내용대로라면 신화 속의 신라 왕실에는 용의 피가 흐르고 있다. 우리고장 증평에도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역사성을 지닌 우물이 있다. '말세우물'이…
조선시대 우리고장 단양의 도담삼봉을 그린 화가로는 정선, 최북, 윤덕희, 김홍도, 이방운 등이 있다. 이들은 각각 '삼도담도', '단구승유도', '도담절경도', '도담삼봉도' '도담도'를 그렸다. 이중 최북(崔北·1720-?)은 자는 유용(有用) 또는 칠칠(七七)이고, 호는 호생관(毫生館)을 가장 즐겨 사용했다. 최북은 조선시대 여러 화가 중 기행을 가장 많이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실경산수화를 그리는 동기는 무척 다양하다. 먼저 임금의 명령으로 산수화를 그리는 경우가 있다. 김홍도가 정조를 명을 받고 단양일대를 그린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경관에 너무 아름다워 집으로 돌아가 화가에게 그림 제작을 주문하는 경우이다. 겸재 정선의 단양지역 그림은 대부분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밖에 화가를 직접 데리고 와서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경우다. 최북이 이광수의 부탁을 받고 그린 도담삼봉도가 '단구승유도'(丹丘勝遊圖)라는 그림이 이에 해당한다. 그림을 보면, 도담삼봉 앞에 2명의 선비가 사공을 대동하고 뱃놀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능수버들이 늘어지고 또 나뭇잎이 초록으로 변하는 등 늦봄의 도담삼봉 경치가 맑은 담채로 그려져 있다. 서두
조선 숙종~영조 연간에 활약했던 문인화가로 이윤영(李胤永·1714-1759)이 있다. 그는 1751년부터 1755년까지 약 5년간 단양 지역에 은거하면서 시·서·화를 남겼다. 특히 그는 단양의 풍광을 너무 좋아해 자신의 호를 '준화재'(濬華齋)에서 '단릉산인'(丹陵山人) 또는 '단구처사'(丹丘處士)로 바꾸기도 했다. 그가 단양 은거를 결심한 것은 멀리는 증조부, 가깝게는 부친의 근무지와 관련이 있다. 그의 증조부는 이행(1657-1702)은 1689년 기사환국 때 같은 노론계 인물인 우암 송시열과 김수항이 사약을 받는 것을 보고 충청도 결성, 즉 지금의 충남 홍성으로 낙향했다. 이 때문인지 이윤영도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 산수를 즐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런 가운데 이윤영은 부친 이기중(李箕重)이 단양군수 발령받은 것을 계기로 단양을 처음 찾았다. 이때 단양의 경치에 반해 훗날 단양을 다시 찾아와 은거하며 '사의적(寫意的) 산수화'를 주로 그리게 된다. 이윤영과 동시대를 산 이운영이라는 인물이 '기년록'이라는 글을 남겼다. "단릉공은 단양의 산수를 매우 좋아해 한두 명의 친구들과 이곳에 복거할 것을 약속하였다. 임신년에 구담에 창하정을 세우고
정선(鄭敾)은 36세 때부터 74세 사이에 총 12권의 화첩을 제작했다. 그중 9권만 현존하고 3권은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03년 '구학첩'(邱壑帖)으로 불리는 새로운 화첩이 발견됐다. 정선의 13권째 화첩으로, 단양 읍내의 정자를 그린 봉서정(鳳樓亭), 도담삼봉을 그린 삼도담(三嶋潭), 단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하선암(下仙岩)이 소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구학첩은 정선이 스스로 그린 것이 아니라, 친구 김광수(金光遂·1696-?)의 부탁을 받고 그린 작품이다. 서인 노론계 문인이었던 김광수는 우리고장 '사군산수'를 유람한 뒤 그 감흥을 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하양(경북 경산의 옛지명)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18세기 초반 친구 정선에게 부탁해 사군산수를 그리게 했다. 겸재는 그림 옆에 자필로 제목을 달았다. 때문에 그의 나이 63세 전후에 제작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 김광수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명 감식가이자 수장가였다. 17세기 후반 인물인 신유한(申維翰·1681-?)은 김광수를 이렇게 평했다. '집안에 모은 고서화와 진기는 모두 천하명품이며 고시문 등도 천하의 기서(奇書)인데, 뜻에 맞는 것이 있으면 가재를 기울여
'사군산수'도 의외로 정치라는 외풍을 탔다. '사군산수'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영남학파, 즉 동인 계열의 인물이다. 조선전기에는 김일손, 퇴계 이황 등 영남학파 문인들이 사군산수를 주로 방문하고 작품으로 남겼다.그러나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충주목사를 역임한 이후로는 호서학파, 즉 서인들이 '사군산수'의 공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작품으로 남기게 된다.송시열 이후 사군산수 공간에는 권상하, 김창협, 김창흡, 김윤겸, 권섭, 권신응, 김광수, 홍중선, 이병연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범서인계 인물들로, 최종적으로는 노론 낙론계 인물이 사군산수의 공간 헤게모니를 장악했다.우암은 청풍관아의 '팔영루'(八詠樓)와 수제자 권상하(權尙夏·1641-1721)가 머물고 있던 '수일암'(守一菴)의 편액을 썼다. 이것이 계기가 돼 팔영루와 수일암은 서인계 문인들의 필수 답사코스로 발전했다. 특히 경기도 지역의 서인계 문인들이 남한강 수계를 이용해 사군산수를 많이 찾았다. 이는 겸재 정선(1676-1759)이 진경산수화로서 사군산수를 많이 그리는 주요 이유가 됐다. 앞서 김창협(金昌協·1651-1708)과 김창흡(
우리고장 북부지역 '사군산수'를 전국적으로 대중화시킨 인물은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었다. 이황은 단양서 가까운 지금의 경북 풍기 출신으로, 우리고장 사군산수에 반해 단양군수를 자청할 정도였다. 17세기 인물 윤순거(尹舜擧·1596-1668)가 지은 '단양산수속기후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구담으로 들어서니 오로, 현학, 채운, 옥순 등 여러 봉우리들이 보였다. 이것 모두 퇴계선생이 새롭게 작명한 것이다."(又一轉而入于龜潭。如五老,玄鶴,彩雲,玉筍諸峯。皆退溪先生命名而新之者。) 이중 지명 옥순봉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매우 자주 거론되면서 대중성을 지니게 됐다. 그 전 지명은 '귀머거리 聾'(농) 자를 쓴 '농암'이었다. 제천의 '금수산'도 퇴계 이황이 작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양군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본래 이름은 백암산이었으나, 1548년 퇴계 이황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 하여, 금수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전까지 사군산수에는 불교식 지명이 많이 존재했다. 이후 사림파가 사군산수의 공간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대거 '비불교식' 지명으로 바뀌었다. 단양읍 단성면 가산리와 대잠리 일대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상선
조선시대 단양, 청풍, 영춘, 제천 등 4개 군현의 산수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는 뜻에서 '사군산수'(四郡山水)로 불렸다. 비교적 풍부한 수량과 기이한 석벽 그리고 계곡·강 주변의 반석 등이 수려한 자연경관을 만들고 있다. 불우했지만 자족(自足)의 마음으로 살았던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사군산수'를 비교적 자세히 서술했다. '영춘·단양·청풍·제천 네 고을은 비록 충청도 지역이지만 사실은 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다. 두메 가운데 강을 따라 석벽과 반석이 많다. 그 중에도 단양이 첫째로 고을이 모두 만첩산중에 있다. 10리 되는 들판은 없으나 강과 시내, 바위와 골(동굴 지칭)의 훌륭한 경치가 있다.'- 문헌상 '사군산수'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인물은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었다. 그는 1602년 충청도 경시관(京試官·일종의 시험 감독관)으로 부임했을 때 단양의 구담, 도담 등을 유람한 후 '사군산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역하면 이렇다. '사군은 산수의 본향이다. 그중에 구담의 경치가 최고인데 모나게 우뚝선 옥순봉과는 급하고 가파르게 달려 서로 잇닿아 있다. 그 아래로는 흐르는 물이 돌아나가고 거센 여울 맑으니 또한 옥이로다.'- 필자의 어설픈 의역
선거벽보에는 후보자의 얼굴 모습, 정당의 상징색, 글자의 크기, 활자체 등 여러 요소들이 표현된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선거벽보를 가리켜 '종합예술의 미학'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 경우 소속정당의 인기가 높으면 정당 표기를 크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늉만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선, 총선, 지방선거 등 모든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슬로건'이다. 정치학자들은 곧잘 선거 때의 슬로건을 '호루라기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호루라기는 음성 메시지를 통해 동일의식을 지닌 사람을 불러 모은다. 피아를 구분하면서 더 많은 같은 편의 사람들을 한 구호 아래로 모이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 일부 선거 전문가들은 "좋은 슬로건 하나는 1백분의 연설이나 천명의 선거운동원보다 낫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때문에 선거 때의 슬로건은 일종의 정치광고이기 때문에 짧고, 명확하며, 그리고 기억하기 좋고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지난 대선(2009년) 때의 슬로건은 'Yes, We can'(그래 우리 할 수 있다'였고, 재선 성공 때의 구호는 'Forward'(앞으로)였다. 한국 정치사도 대선은 물론 충북을 포함한 이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이기철 시인의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중에서) '69차 충북일보 클린마운틴'이 지난달 31일 대청호둘레길 6구간(둔주봉)에서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했다.'세월호 참사'로 두 달 만에 재개된 이날 산행에는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교장 함우석 충북일보 주필과 김웅식 산행대장을 비롯해 자연을 사랑하는 42명이 동행했다. 69차 클린마운틴도 어김없이 대청호둘레길 6구간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늘 아름다운 시를 소개해 주는 곽영희 회원의 시낭송으로 시작됐다. 곽 회원의 시낭송은 둔주봉과의 만남에 들떠있는 참가자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그녀는 오세영 시인의 '바닷가에서'를 낭독하며 참가자들의 지쳐 굳은 몸을 풀어주었다.올 들어 가장 더운 날씨 속에서도 일행들은 옥천군 안남면 소재 안남초를 출발해 둔주봉 정자, 둔주봉(383m), 안피실, 독락정을 둘러보는 약 4시간 동안의 트레킹을 즐겼다.일행들은 둔주봉 정자에서 한반도를…
'바람도 쉬여 넘난 고개 구름이라도 쉬여 넘난 고개 /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래매 쉬여 넘난 고봉 장성령 고개 / 그너머 님이 왓다하면 나난 한 번도 쉬어 넘어가리라.'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사설시조의 하나로, 작자는 미상이다. 시조 중장에 등장하는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래매는 모두 매에 관한 표현들로, 보래매는 보라매의 옛이름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매 종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해주목과 백령진에 매가 많이 나고 전국에서 제일이다. 매는 그 해에 나서 길들여진 것을 보라매하고 하고 야생으로 여러 해 된 것은 '산진이'라 한다. 집에 있으면서 여러 해 된 것은 '수진이'라 하며, 흰 것을 '송골'(松·), 청색인 것을 '해동청(海東靑)이라 한다.' 조선 숙종~영조 때 인물인 강재항(姜再恒, 1689~1756)도 양응자설(養鷹者說)이라는 매와 관련된 문헌을 남겼다. 먼저 이 글은 매사육 방법을 체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매를 날리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날아서 바람을 맞으면 그 기운이 바야흐로 솟아나서 스스로 멈출 수가 없지. 한번 날면 자유자재로 날게 되고 세 번 날면 구속을
단양군 영춘면 하리 온달동굴은 4억5천년 전부터 생성되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동굴내 공간은 지금도 계속 퇴적변화가 진행되고 있고 전체 길이 1천5백20m 중 4백50m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온달동굴은 조선시대에는 석굴(石窟)로 많이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성산 아래에 석굴이 있는데 높이가 11척 남짓이고 넓이가 10여 척쯤 되며 깊숙히 들어가 끝이 없고 물이 철철 나와 깊이가 무릎에 닿는데 맑고 차갑기가 얼음과 같다. 고을 사람이 횃불 10자루를 가지고 들어갔다가 구멍은 오히려 끝나지 않았는데 횃불이 다되어 돌아왔다.' 이밖에 해동지도에는 '남굴'(南窟)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남굴은 남한강의 남쪽에 있는 굴이라는 뜻이다. 조선 정조 때의 인물인 '신광하'(申光河·1729~1796)는 온달동굴을 직접 체험한 후 '사군록'(四郡錄)이라는 기행문을 썼다. '사군'은 제천, 단양, 청풍, 영춘현 등을 일컫는다. 그는 영춘현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아래 강에서부터 배를 끌고 강을 통하여 가시오. 짐을 짊어지고 비탈길을 지나서 굴입구에 이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대개 굴속은 물이 깊어 길로…
성내 시설의 하나인 집수지(集水池)는 인위적으로 물을 모은다는 점에서 샘, 우물, 연못과는 구분되고 있다. 다만 지표수를 모으는가, 아니면 지하수를 집수하는가는 구분이 쉽지 않은 면이 있다. 지표수만을 모으려고 만들었지만 그 벽면이나 바닥에서 지하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축(石築)한 것만을 집수지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역사에 있어 성내 집수지는 5세기 후반부터 등장한다.이후 6-7세기에 가장 많이 축조했고, 8세기 이후는 산성축조 기술의 변화로 급격히 감소했다. (재)울산문화재연구원 황대일 씨가 최근 '야외 고고학' 제 19호를 통해 '고대 산성내 석축집수지의 구조와 변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지금까지 발굴된 전국 25개 산성의 집수지를 대상으로 위치·형태·석축쌓는 유형을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34기(85%)는 계곡, 4기(10%)는 구릉사면, 2기(5%)는 구릉 정상에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수지의 형태는 방형이 14기(35%), 장방형 12기(30%), 원형 역시 12기(30%), 타원형 2기(5%) 2기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석축을 쌓은 유형은 직선형 20기(53%), 계단형 6기(18%), 사선형 12기(29%) 등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