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보 온천은 조선시대에는 '연풍온정'이나 '안부온정'으로 불렸다. 실록을 보면 '연풍온정'이 여섯 번, '안부온정'은 한 번 등장한다. '수안보 온천'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사고'이다. 백과사전의 일종인 이 고문헌에는 '호서의 연풍현 수안보 땅에 온수가 있는데, 수질이 좋아 병자들이 많이 몰린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수안보는 그 지명이 매우 독특하다. 따라서 혹자는 지명 수안보를 물막이 시설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현재 수안보면에는 행정상 8개의 리(里)가 존재한다. 이중에는 '안보리'도 있다. 수안보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 안보리다. 지명 수안보는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 안보리에 마방이 딸린 '안부역'이라는 역이 존재했다. 그런데 안부역 부근은 통행인이 늘 많아 '큰 大' 자를 쓴 '대안보'라고 불렀다. 이후 안보리의 또 다른 곳에서 온정이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대안보'와 구별하기 위해, '물 水' 자를 쓴 '수안보'라고 불렀다는 것이 지명 연구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과거 자료를 추적해 보면 18세기까지 수안보 온천의 주고객은 임금, 왕족, 사대부,
기차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구한말 정치가 김기수(1832년~?)였다. 그는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 1876년 '일동기유'라는 기행문을 쓰게 된다. 그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화륜거(火輪車)를 타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같이 날뛰었다. 차체는 안온하여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며, 다만 좌우에 산천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하므로 도저히 잡아보기 어려웠다" 금년은 한일병합 100주년이면서 또 충북선이 기공식을 가진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충북선은 그러나 조치원역서 봉양역까지 129.2 ㎞ 구간이 한번에 연결되지 않았다. 먼저 조치원-청주 구간이 지난 1920년 11월에 준공됐다. 이후 1923년 5월에는 증평(曾坪)까지, 1928년 12월에는 충주까지의 총 91.7 km가 연장 개통됐다. 충주∼봉양 구간은 광복 후인 1958년에 준공돼 중앙선에 연결됐다. 일제는 한반도 항구와 만주를 연결하기 위해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경원성 등을 X자형으로 차례로 부설한다. 이후 일제는 1920년대부터는 산업용 철도를 깔기 시작한다. 이 X자형 기본축에서 지선망으로 부설된 것이 충북선이다. 충북선 공사를 처음 시작한…
괴산출신 박세무(朴世茂·1487~1544 )선생이 지은 동몽선습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있다. 세자 교육과 관련, 조선시대 역대 임금 중 동몽선습을 가장 잘 활용하고 애용한 사람은 영조였다. 조선왕조실록은 동몽선습에 대해 33번 기술하고 있다. 그중 17번이 영조대에 집중돼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키로 결심한 후 세손 정조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게 된다. 따라서 영조는 당시 증간된 동몽선습에 대해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한다. 다음은 동몽선습과 관련,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영조와 정조의 모습이다. 동몽선습을 잘 읽자 영조가 몹시 흡족해 한다. '임금이 원손에게 시좌하여 동몽선습을 외우라고 명하였다. 원손은 거지가 단정하고 외는 소리가 크며 우렁차니, 우러러보는 사람이 얼굴빛을 바로잡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조의 언급은 계속된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임금이 원손에게 명하여 동몽선습 서문을 강하게 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읽는 소리가 맑고 깨끗하며 아뢰고 대답함이 분명하므로, 임금이 몹시 기뻐하고 여러 신하가 흠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는데, 영사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이는 종사(宗社)의
조선시대 때 학동들이 서당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배운 것이 '천자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배웠던 것이 '동몽선습'이다. 동몽선습은 한자 '아이 동'(童), '어두울 몽'(蒙), '먼저 선'(先), '익힐 습'(習) 자를 쓰고 있다. 의역을 하면 '사리에 어두운 아이를 먼저 가르친다' 정도가 된다. 따라서 굳이 교재 눈높이를 말한다면 지금의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 정도로 볼 수 있다. 그 저자가 우리고장 괴산 출신 박세무(朴世茂·1487~1544) 선생이다. 그는 조선 중종 때 인물로 본관은 함안, 호는 소요당이다. 직필, 직언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주로 외직을 전전했다. 이때의 외직은 지방근무를 말한다. 그러나 박세무 집안은 괴산지역의 대단한 명문가여서 고조 박습은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리고 아버지 박중험은 정종의 외손자 사위, 그리고 아들 박소립은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이밖에 박지겸은 그의 손자로 괴산읍 검승리의 애한정을 건립했다. 책은 크게 경부(經部)와 사부(史部)로 구성돼 있다. 이중 경부에서는 오륜(五倫)을, 사부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와 중국 역사를 사실과 사론(史論)으로 나눠 다루고 있다. 이중 경부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과 땅 사
어윤중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있다. 백두산 정계비는 지금도 종종 언론에 회자된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이 어윤중이다. 1721년 조선의 조태상 등과 청나라 목극동 일행이 현지를 답사하고 백두산 동남쪽 약 4㎞ 지점(해발 2천200m)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양국 간 국경선이 처음으로 획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정계비에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西爲鴨綠 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토문강'이 두만강을 지칭하는지 현재 중국 영토 안의 '토문강'을 지칭하는지는 당시에도 논란거리였다. 이 때문에 1885년(고종 22년)과 1887년 서북경략사로 나간 어윤중은 숙종 때 백두산에 세워진 정계비를 직접 둘러보게 된다. 경략사는 왕의 특명을 받고 변방에 임시로 파견된 관리를 말한다. 이때 어윤중은 비문에 나오는 '동쪽은 토문을 경계로 한다' 할 때의 토문이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 지류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처음으로 영토 담판이 열렸으나 소득없이 끝난다. 이밖에 지금도 종종 기사화 되는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 영유권도 어윤중이 처
개화기 정치인 어윤중(1848~1896)의 고향이 충북 보은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경기도에서 태어났으나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은군 삼승면 선곡1리 가마실 마을에서 보냈다. 이는 그의 조부 어명능이 지금의 남양주시에 거주하고 있던 정약용과 친구였던 점에서 어느 정도 입증되고 있다. 어윤중이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29살 때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간 것이 계기가 됐다. 전라도를 둘러본 후 그가 올린 보고서에는 '도량형 통일이 절실하다'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고종의 눈에 띄면서 그는 측근신하로 성장한다. 그는 동학과 관련해서도 '명해석'을 했다. 1893년 고향인 보은에서 대규모 동학집회가 열리자 고종은 어윤중을 '순무사'로 파견한다. 순무사는 변란 등이 발생했을 때 지방에 파견된 임시관직을 말한다. 신립장군도 순무사 자격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를 수행한 바 있다. 이때 그는 동학도에 대해 처음으로 '민당'(民黨) 즉 '백성의 무리'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종전까지 당시 조정은 '비도'(匪徒) 즉 '나쁜 무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동학도의 주장에 상당부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
집권전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도가 김병학과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기로 밀약했다. 그러나 집권하자 마음이 달라져 고아나 다름없는 여흥민씨 명성황후를 왕비로 간택, 한 살 연하인 고종과 결혼을 시킨다. 이는 외척의 발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의도와 달리 총명했던 명성황후는 사사건건 시아버지와 부딪히며 권력 투쟁을 벌인다. 조선시대 때 대비 즉 임금의 어머니가 섭정을 한 예는 많아도, 아버지가 섭정을 한 것은 고종 때가 처음 이었다. 이것이 구부간 (舅婦間·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 갈등의 단초가 됐다. 이밖에 둘 사이의 개인적인 감정도 작용했다. 명성황후는 결혼한지 5년만에 첫 왕자를 얻게 되나, 그 왕자가 용변을 보지 못하면서 5일 만에 죽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왕자의 약으로 써 보라'며 산삼을 준 사람이 흥선대원군이었다. 명성황후는 이때부터 시아버지 때문에 첫 왕자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명성황후에게 찾아온 첫번째 정치적 시련은 임오군란이다. 명성황후가 개혁정책을 도입하기 전까지 군인들은 차별이나 그리 나쁜 대접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정책 후 월급이 13개월치 밀리고, 여기에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보다 후하게 대우하면서 구
단양군 매포읍 도담리의 남한강 수계 안에는 3개의 기암이 위치하고 있다. 국가명승 제 44호인 도담삼봉이다. 조선 명종 때 단양군수를 지냈던 퇴계 이황은 도담삼봉, 구담봉 등 단양팔경을 예찬했다. 그중에서도 도담삼봉은 단양팔경의 상징적인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물 위로 고개를 내민 것이 고혹적인 자태 그 자체이다. 따라서 지금도 전국 제일의 사진 촬영 장소가 되고 있다. 도담삼봉 아래에는 그리 멀지 많은 과거까지 모래톱이 존재했다. 김홍도의 도담삼봉 그림을 보면 모래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지난 1985년에 충주댐 완공으로, 삼봉의 1/3 가량이 물속이 잠기면서 모래톱이 사라졌다. 따라서 지금은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면서 새들의 유식처가 되고 있다. 도담삼봉 압권은 단연 정자이다. 지금의 도담삼봉 정자가 세워진 시점에 대해 구한말인 순조 때 설과 1950년 설 등이 있으나 둘 다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1972년 단양에 대홍수가 있었고, 그 이후 지금의 도담삼봉 정자가 다시 세워졌다는 점이다. 단양지역 시멘트 생산업체인 성신양회는 정자가 유실되자 지난 1976년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육각형 정자를 세운 후 이를 단양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우와 사당을 혼동하고 있다. 둘은 조상 위패를 모시고 제사만을 지낸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름에서 보듯 약간의 차이가 있다. 상형적으로 보면 '집우'(宇) 자는 처마가 길게 나온 집을 의미한다. 반면 '집당'(堂) 자는 흙토(土)가 들어간 것에서 보듯, 흙을 쌓아올려 만든 집을 말한다. 따라서 보다 공적인 인물이 배향됐을 땐 '사당'보다 '사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주덕에서 충주 방향으로 달리다 달천다리 건너기 전 5백미터 쯤에서 우회전을 하면 용관동 한남군(?~1457, 본명 李王+於) 사우에 도달할수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750년 처음 건립됐고, 1920년에 중수했다. 사육신과 마찬가지로 단종복위를 꾀한 종친이 여섯 명이 있다. 안평, 금성대군 등을 포함해 이들을 '육종영'(六宗英)이라고 한다. 한남군도 그 여섯명 중의 한 명으로, 충남 아산으로 유배된 끝에 1457년 사약을 받게 된다. 그의 어머니가 세종대왕 네 번째 후궁이자 청주를 본관으로 갖고 있는 혜빈양씨다. 혜빈양씨는 본래 궁녀 출신으로 병약한 문종을 보살피던 중 세종의 눈에 들어 네 번째 후궁이 됐다. 그러던 중 세조의 왕위찬탈 사건이…
토정비결은 사주(생년·월·일·시)를 보는 주역과 달리 시(時)는 보지 않는다. 따라서 괘가 주역보다 단순한 편이다. 가령 '동풍해빙(東風解氷) 고목봉춘(枯木逢春)', 즉 '동쪽 바람에 얼음이 풀리고 마른 나무가 봄을 만났도다' 식이다. 다소의 이론이 있지만 토정비결의 저자는 대체로 조선중기 인물인 토정 이지함(1517~1578)으로 추정되고 있다. 토정은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말년에 아산현감을 지냈다. 그러나 충북과도 적지 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특히 그의 인생사 굴곡점이 충북에서 찾아왔다. 토정은 기인 이미지와 달리 이른바 명문가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가 그의 작은 아버지가 된다. 따라서 이지함은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의 후손이면서 당시 충주에 살고 있는 모산수 '이정랑'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즉 처가가 충주였다. 그러나 장인이 이홍윤 역모사건에 연루되면서 그도 이 사건의 유탄을 맞게 된다.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이다. 대윤 윤임과 사돈간으로, 조선 명종 때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충주출신 이약빙에게는 홍남, 홍윤 두 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두 형제는 전답과 노비 상속 문제로 척지는 관계가 되면서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이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