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은 공공녹지로서 자연지(自然地)나 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후생적 조경지로 정의된다. 전자를 자연공원, 후자를 도시공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공원이 역사적으로 언제 출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근대공원은 중세 이후 영국의 왕후·귀족이 소유·독점 사용하던 수렵장이나 대규모 정원을 19세기 중반에 일반에게 공개한 것에서 비롯됐다.청주의 근대적 의미의 공원은 일제 강점기 때 등장했다. 일본인 오쿠마온보(大雄春峰)가 1923년에 쓴『청주연혁지』에는 '서공원'(현 사직동 충혼탑 자리·사직산)과 '동공원'(현 당산 일대·명장사 뒷산))에 대한 설명이 동시에 등장한다. 따라서 최소한 1920년대 초반부터청주에도 공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공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먼저 『청주연혁지』는 서공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무렵에는 청주에 공원이 없었기 때문에 鈴木 장관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땅을 깍아 도로를 개척하고, 여러 종류의 수목을 재배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돌을 운반하여 벤치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오처옥(吳妻屋)을 설계하여 휴식장소로 삼도록 하였는데, 동공원과 함께 성대하게 설비되어 있었다. 櫻井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재향군인들
단양은 산이 많고 들이 적기 때문에 쌀 생산량이 매우 적었다. 이런 환경에서 전세(田稅)를 쌀 등 현물로 내는 것은 고욕이 아닐 수 없다. 쌀 생산량이 적다보니 타지에서 쌀을 사다가 전세를 내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를 해결한 인물이 당시 관찰사 이석규(李錫奎)다. '단양군의 전세(田稅)·대동미와 군포(軍布) 등을 영원히 전량 돈으로 대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도백 이석규가, 산간 고을에서는 쌀과 베가 매우 귀하여 멀리 타도에서 사와야 하고 수송의 길도 험하여 매양 전복된 배가 많다는 이유로 돈으로 대납하기를 청하니, 묘당에서 복계(覆啓)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그의 충청도 관찰사 재임시절에 연풍현에서 이희윤(李喜允)이라는 인물에 의해 전패(殿牌)훼손 사건이 일어났다. 전패사건이 빈발한 탓인지 순조실록은 이 사건을 소략으로 기록했다. '공청감사 이석규가 연풍현의 전패를 가지고 변을 일으킨 죄인 이희윤을 처형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순조실록은 20여일 뒤 또 하나의 관련 기사를 기록해 놓았다. 이희윤의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풍현에 전패를 가지고 변을 일으켰던 죄인 이희윤의 아들…
조선시대 우리고장의 전패훼손 사건은 충주, 황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빈번히 발생했다. 조선후기가 되면 전정, 군정, 환정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서민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전패 훼손사건은 음성, 단양, 연풍, 괴산 등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의 훼손 사건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정치적,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다. 이는 사건이 나름대로 독특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먼저 음성현 객사의 전패훼손 사건이다. 현종실록 3년(1662) 2월 4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음성현에서 전패를 도난당했다고 감사가 계문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그 읍만 혁파하고 수령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서 간악한 백성이 계획적으로 수령을 몰아내는 일을 막도록 하소서." 하니 (…) 이에 상이 따랐다." '수령을 골탕 먹이려는 전패훼손 사건이 너무 자주 일어나니 고을만 강등시키고 수령을 파직하지 말아달라'는 건의 내용이다. 현종은 이를 수용, 당시 수령은 파직하지 않았으나 음성현은 10년 동안 그 이름이 사라졌다. '호서의 음성현(陰城縣)을 혁파하였는데, 전패(殿牌)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성현 전패훼손 사건을 기점으로 전패에 대
국왕을 상징하던 전패(殿牌)는 조선후기 들어 각종 사건에 휘말렸다. 그 사연은 정치적인 동기, 개인 비리에 의한 훼손 등 매우 다양했다. 조선시대 최초의 전패 훼손사건은 효종 6년(1655)에 전라도 나주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주에는 경현서원이 존재했고, 그 운영권이 전패 훼손사건의 발단이 됐다. 비(非) 서인계가 서원(書院)의 원장이 되자 당시 나무목사 정기풍(鄭基豊·1594~?)은 이를 옹호했다. 그는 본관이 초계로 1642년 신계(新溪·지금의 황해도 신계군) 현령으로 재직하던 중, 암행어사 정치화를 통해 그의 선정이 보고되어 임금으로부터 의복을 하사받을 정도로 유능한 관료였다. 또 우리 고장과도 인연이 있어 1650년(효종 1)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재직하던 중 문학(文學·정5품)에 임명되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 나주의 서인 집단은 이를 빌미로 목사 정기풍을 축출하려 했다. 전패가 훼손되면 그 책임의 일부가 목사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미리 계산한 사건이었다. 전패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지능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일성록 헌종 11년(1845)에 관련 기록이 적혀 있다. 이 때는 우리 고장 청주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한다. 청주사람 박용수는 유한원이
조선 조정은 국가차원에서 두 개의 위패를 관리했다. 하나는 궐패(闕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패(殿牌)이다.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 조정은 황제국인 명나라를 향해 정초, 황제생일, 동짓날 등에 절올리는 의식은 망궐례를 행했다. 이때의 위패는 '궐패'(闕牌)라고 불렀다. 궐패가 국외용이라면, 전패는 국내용이었다. 조선 조정은 또 전국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殿(전)'자를 새긴 나무 패를 봉안했다. 바로 전패이다. 고려 시기까지의 객사는 말 그대로 공무로 출장온 관료들의 숙박 장소로 사용됐다. 조선 조정은 지방에서도 국왕 권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15세기 후반 무렵부터 이 객사 내부에 전패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사극을 보면 '전하'(殿下)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원래 이 전하는 신하가 임금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자신의 방문을 알리는 이른바 '인기척 표현'이다. 감히 신하가 임금을 부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전패나 전하의 '전'은 일국의 최고 통치권자를 상징했다. 전패는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매우 엄격하였다.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부터 처음 들어온 담배는 특유의 중독성을 발했다. 17세기 후반의 하멜은 표류기의 일부를 이렇게 기록했다. '현재 조선인들은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이들까지도 4,5세 때에 이미 이를 배우기 시작하여 그래서 남녀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국왕 중에서도 '골초 임금'이 등장했다. 정조가 지은 문헌 중에 '남령초 책문'이라는 것이 전해지고 있다.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오로지 이 남령초에서만 도움을 얻었다. 화기(火氣)로 차가운 담(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를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편안히 잘 수 있었다.' 뒤에는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붓방아를 찧을 때에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고뇌를 편안하게 누그러뜨리는 것도 그 힘이다'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가 번역한 글이다. 그런 정조는 '백성들에게 담배의 혜택을 주겠다'는 사명감에 불탓다. 말 그대로 전국민의 흡연화로, 역시 '책문'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이 풀이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을 보면, 천지의 마음을 엿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 따라서 남령초를 월령에 싣고 의
담배는 포르투갈어 '토바코'(TOBACCO)가 일본에서 '다바코', 그리고 이 '다바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담바구'로 불리다가 '담배'로 정착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토바코'에 대해서는 △서인도제도의 섬이름이라는 설 △그곳 원주민이 사용하던 담뱃대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정설화된 것은 없다. 이밖에 담배는 조선시대에는 남령초(南靈草), 연초(煙草), 다연(茶煙) 등으로도 불렸다. '남령초'는 남쪽의 신령스러운 풀, '연초'는 연기나는 풀, '연다'는 연기나는 차라는 뜻이다. 담배의 원산지는 어디이고, 또 우리나라에는 언제·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왔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담배의 원산지는 중아메리카로,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 담배에 약효능이 있다고 생각해 유럽으로 가져갔다. 이것이 유럽에서 한반도로 유입 경로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포르투칼-필리핀-일본-조선 순으로의 전래설, 둘째는 비단길-청나라-조선 유입설, 셋째는 두 가지 모두, 즉 한반도 남북으로부터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첫 번째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경우 담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들어왔다는 설이 보다 유력해 진다. 조
음악, 무용, 기예가 어울리는 일본 전통연극으로 가부키(歌舞伎)가 있다. 16∼17세기 에도시대에 서민 예술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고려대 최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 가부키에 임진왜란 제 1차 진주성 전투의 맹장으로, 우리고장 괴산 출신인 김시민이 '모쿠소'라는 캐릭터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주도의 조선관민이 보여준 필사의 항전은 적인 왜군에게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때문에 당시 왜군들은 김시민을 '모쿠소'라고 불렀다. 이때의 모쿠소는 '진주목사' 할 때의 '牧使'(목사)를 일본식으로 발음이고, 표기는 '木曾'으로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입신출세를 다룬 작품으로 '다이코키'(太閤記)가 있다. 이 다이코키에 '모쿠소'가 실리면서 일본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됐고, 그 영향으로 가부키에 조선군의 맹장이자 충신이면서,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전복하려는 원귀 캐릭터로 그려지게 됐다. 모쿠소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가부키 작품은 지카마츠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혼쵸산고쿠시(本朝三國志·초연 1719년 2월 14일)이다. 여기에서 모쿠소는 조선에서 가장 신뢰받는 장군으
임진왜란 당시 같은 성(城)에서 8개월의 시차를 두고 '2차 전투'가 발생한 것은 진주성이 유일하다. 1592년 음력 10월에 벌어진 7일 밤낮의 진주성 1차 전투에서 조선인은 1천여명, 일본군은 1만3천여명이 사망했다. 이처럼 왜군의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무리하게 성벽으로 기어오르다 진주성 안 조선인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김시민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을 종이에 싸서 풀로 묶어 성 위에 감춰두게 하고 대포 및 대석(大石)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女墻) 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인용문 뒤에는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이르는 곳마다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여 일단 공격을 완전히 좌절시켰다.'(〃)라고 기록돼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진주성 1차전투 패배에 대해 극도의 분노와 함께 복수를 곱씹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진주성 1차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왜군 정병이 육지에서 당한 최초의 대규모 참패였다. 그 후유증이 매우 심해 호남 진출에 실패했고, 또…
시호(諡號)는 왕이나 왕족 그리고 신하들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를 가리킨다. 이 시호는 그때마다 무원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용할 3백여자의 글자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 이중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공(恭)·양(襄)·정(靖)·양(良)·효(孝)·충(忠)·장(莊)·안(安)·경(景)·장(章)·익(翼)·무(武)·경(敬)·화(和)·순(純)·영(英) 등 120자 정도였다. 즉 시호는 이들 글자의 조합인 셈이다. 조선시대 시호는 4글자로 된 사자성어 형태로. 그 뜻이 어느정도 정해져 있었다. 가령 문(文)에는 박학호문(博學好文·널리 배운 것이 많고 글 읽기를 좋아한다), 충(忠)은 위신봉산(危身奉上·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다), 무(武)는절충어모(折衝禦侮·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다)의 뜻이 담겨져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만이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지닌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조영무(태종), 남이(세조), 이준(세조), 김시민(선조), 김응하(광해군), 이수일(인조), 정충신(인조), 구인후(효종) 등 9명에 달하고 있다. 이중 우리고장과 연고를 갖고 있는 인물로 적지 않아, 남이는
우리고장 충주 출신인 이수일(李守一·1554∼1632)은 비교적 늦은 29살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그는 밀양부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남도병마절도사, 길주목사겸 방어사,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는 등 무관의 요직을 섭렵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초기전투(예천·용궁)를 제외한 야인토벌과 반란군 진압 등의 싸움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뒀다. 특히 그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겸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찌르고 한성을 수복, 그 공으로 진무공신 2등과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논할 때 그 실체를 '솔선수범'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매우 많다. 이수일 장군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도 분명히 그만의 리더십이 작용했다. 현존하는 여러 문집이나 관찬자료 등에는 이수일 장군의 생전 행적을 읊은 시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고, 그 리더십의 공통점은 여러 곳에서 인(仁), 즉 '어짐'으로 표현돼 있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명으로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가 있다. 그는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을 남겼고, 그 안에 '계림부원
조선 후기에 보이는 대상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진경산수화가 유행했다. 그 이전까지는 중국화풍의 관념산수화가 유행했으나, 이는 미술 사대주의의 다름이 아니었다. '진경주의' 정신은 미술만이 아닌 문장에서도 시도됐고, 담헌 이하곤도 이를 의식적으로 추구했다. 따라서 "담헌은 문장을 윤택하게 하거나 조탁하는 것은 올바른 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문학 평론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물빛은 산 그림자 거꾸로 모사해 내고(湖光倒寫峰頭月) / 물에 비친 하늘 산그림자 다시 비추어내네(山影橫侵水底天) / 위아래로 점하나 공명 가린 것 없으니(上下空明無點·) / 바로 내 몸이 옥호에 있는 신선이 아닐까.(直疑身世玉壺仙).'- 담헌은 달빛, 나무그림자, 일렁이는 밤물결 등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지극히 쉬우면서 조탁없는 시어로 묘사했다. 담헌은 1972년 10월 장인 송상기를 뵙고 완위각이 있는 진천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남원 광한루를 찾았다. 전통시대 겨울 여행은 조금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담헌은 특유의 산수애호 사상과 역마살(驛馬煞)적인 성격을 앞세워 그해 12월 한겨울에 광한루를 찾았있다. 여기에도 달과 함께 조탁없는 쉬운 시어들이…
진천군 초평면 연담리와 문백면 은탄리 사이의 하천에는 '소두머니'로 불리는 독특한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한자로는 '牛潭'(우담)으로 적는다. 소두머니는 물이 맑고 깊은 가운데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마치 해수욕장을 연상케 하고 있다. 또 동쪽과 서쪽으로 길게 뻗은 산이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어 명승의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일대는 산의 끝이 용의 머리같이 생긴데다가 마치 내를 건너는 형상이라 하여 도용(渡龍)골로도 불리우고 있다. 진천군에서는 이같은 전설을 바탕으로 매년 농다리에서 '소두머니 용신놀이'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나 전설의 출처는 연담-은탄리 하천의 소두머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이같은 명승을 그냥 지나칠리 없다. 조선 순조-고종 연간의 인물로 정해필(鄭海弼·1831-1887)이 있다. 그는 송달수(宋達洙)의 제자로, '조암집'을 저서로 남겼다. 그가 이런 시를 남겼다. '깊은 물 맑고 푸른데 산을 뚫은 듯(一泓澄碧穿雲山) / 조그마한 배는 역류에서 가볍게 출렁이도다(漁·輕·溯中間) / 도인을 따르는 곳에 진정한 낙이 있구나(道人隋處得眞樂) / 반나절이나 고기떼 새떼 오락가락하는 한가로운 곳 왕래하도다(牛餉管來魚鳥閒)'. 청주대 정종진 교수는
이하곤(1677-1724)의 장인 송상기는 대제학, 대사헌, 예조·공조판서 각 1번 그리고 이조판서를 무려 5번이나 역임하는 등 숙종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다. 특히 그 전에 충주목사, 충청도관찰사 때 선정을 베푸는 등 우리고장과도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충주목사 송상기(宋相琦)가 상소하여 백성의 일의 절급(切急)한 상황을 진달하고 청하기를, "한전(旱田)에 급재(給災)하고, 적곡(·穀)을 거두는 것은 3분의 1을 율(率)로 하며, 갑술년8709) 이전의 포흠은 한결같이 모두 탕척하고, 양진창(楊津倉)의 적곡은 전미(田米)로써 대봉하며…"'- 양진창은 충주읍성 북문 부근에 존재했던 국립창고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신임사화 때 화를 입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경종(장희빈의 아들)의 건강이 악화되자 누구를 후계자로 옹립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소론과 노론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소론이 "노론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를 하고 있다"고 공격,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 등 노론계 대신들이 대거 축출됐다. 이른바 신임사화로, 여기에는 이하곤의 장인 송상기도 포함돼 있었다. 이하곤은 장인 송상기가 당시 67살 노구의 몸으로 강진에 유배되
이하곤의 진천 두타산 아래로의 낙향은 여느 선비들과 다른 면이 있었다. 조선 선비들의 낙향은 일반적으로 은거, 안빈낙도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하곤의 낙향은 자연과 함께 숨쉬는 산수애호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는 유배중에 있는 장인 송상기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세상에 모든 화려한 영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연만을 바라보며 書史(서사)를 오락거리로 삼고 구름과 달을 좆으며 새와 물고기를 벗삼아 여생을 마치기만 바랄 뿐입니다.'- 문집 '두타초' 행간을 살펴보면, 이하곤은 47세(1723년·경종 3) 때 완전히 내려오기 전까지 진천으로의 낙향과 상경을 반복했다. 따라서 그의 중간 낙향은 엄밀한 의미로 '하향'(下鄕)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는 진천으로 하향하면 완위각 인근의 자가소유 누정 뿐만 아니라 지금의 괴산 청천면 낙영산을 즐겨 방문했다. 그리고 멀게는 남원 광한루와 장인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도 찾아갔다. 그는 그때마다 시와 산문을 남겼고, 그 자체가 '이하곤 개인史'가 되고 있다. 이하곤의 부친 이인엽은 주천(지금의 초평천) 가에 증조 오촌(梧村) 이대건과 조부 벽오(碧梧) 이시발의 호에서 하나씩 취하여 '쌍오정'(雙梧亭
두타초 책 14에는 '題李一源所藏鄭선元伯輞川渚圖後'(제이일원소장정선원백망천저도후)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와 관련, 이하곤(李夏坤·1667-1724)과 친구 신정하(申靖夏·1681-1716)가 주고 받는 말로 먼저 이하곤의 말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는 병이 있어 남의 집에 소장된 것도 반드시 내가 모아둔 후에야 그쳤소. 근래 그렇지 못하였으니 기호가 이미 쇠퇴했다고 생각했소.(…) 내 집의 완위각에 단지 수 십 폭의 옛그림이 있는데 근래 제인의 필적은 가지고 있는 것이 전혀 없으니….' 이에 대해 친구 신정하는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느데 또 욕심을 내면 탐욕스러운 것'이라는 투로 답한다. '재대가 수장한 것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거두어 진천으로 돌아갈 때에는 수레에 실음 서화가 꼬리를 물고 길에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도 이제 이 화첩에 대해 틈새를 보며 갖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많이 있으면서도 더욱 욕심을 내는 자입니다.' 인용문 중에 '이 화첩'이라는 표현, 제목 중에는 '鄭선元伯輞川渚圖後'라는 내용이 보인다. 바로 이 대화는 겸재 정선(鄭··1676∼1759)의 '輞川渚圖'라는 그림을 둘러싸고 이하곤이…
이하곤의 낙향 의지 중심에는 역시 그의 진천 장서각인 '완위각'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완위각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장서돼 있었다. 아들 이석표(李錫杓·1704-?)가 아버지 이하곤을 추념하면 '담헌행장'을 지었다. 이렇게 적었다. "유독 서적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책을 파는 사람을 보면 심지어 옷을 벗어 책을 사니, 모아놓은 것이 거의 만권에 이르렀다. 위로는 경사자집에서 아래로는 패관소설, 의서, 점술서, 불가서, 도가서 등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행장은 죽은 사람의 문생이나 친구, 옛날 동료, 아니면 그 아들이 죽은 사람의 성명, 관향(貫鄕)·관작(官爵)·생졸연월·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인용한 문장 중에 '만권'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와 관련 일각에는 증조부인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에게 고서 수 천권을 받았다'는 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서지 전문가들은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현재 종손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700여책을 조사한 결과, 증조부 이시발의 장서인(藏書印)이 찍힌 것은 단 1권이고, 나머지 모두는 이하곤의
이하곤의 진천 낙향은 스승 김창협에 대한 변무소(옹호하는 소) 사건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와 관련 실록에는 두 유형의 내용이 기술돼 있다."전 부솔 이하곤은 명가의 자제로서 언론과 행동을 더욱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인데, 흉당(凶黨)과 일을 같이할 수 없음과 외척과 연명(聯名)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여 사론에 속아 따랐으니, 사부의 수치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 당시 정원 조지빈(趙趾彬)이 아뢰는 말이다. 인용문의 포인트는 '외척과 연명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라는 문장에 있다. 당시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은 이하곤과 가까운 촌수가 된다.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집권했다. 그러나 즉위 3년차의 경종은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못할 상황이었고, 그런 까닭에 권력은 이미 노론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조지빈이 외척을 걸고 넘어진 것은 그 같은 권력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는 사관의 주관적인 의견인 사론(史論)도 등장한다. 이렇게 썼다. "일찍이 김창협(金昌協)을 사사하였기 때문에 그 소에 참여하였던 것이며, 처의하는 데는 실수함이 없었다. 당시 상황에 개탄하며
담헌 이하곤(李夏坤*1677-1724) 집안이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일대에 세거를 하기 시작한 것은 증조부 이시발(李時發·1569-1611)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시발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두타산 아래의 땅을 하사받았다. 이시발은 지금의 청주 오근장 출신으로, 서계 이득윤 밑에서 수학했다. 조부 이경억(李慶億·1620-1673)과 부친 이인엽(李寅燁·1656-1710)도 잇달아 급제, 벼슬이 좌의정과 대제학에 이르는 등 명문가 명성을 이어갔다. 이하곤은 1677년(숙종 3) 서울에서 부친 이인엽과 모친 임천조씨와의 사이에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담헌은 문중 농장이 진천에 있는 까닭에 서울과 진천을 자주 오르내렸다. 두타초 등 그가 남기 문집을 보면, 담헌은 그의 나이 25살, 29살 때 진천을 일시적으로 찾았고, 35살 때는 가족을 거느리고 하향했다. 담헌은 이때부터 초평 일대를 거주지로 삼았고, 완위각도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그가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32세 되던 숙종 34년(1708)에 과거에 응시, 진사과에 장원 급제했다. 그러자 담헌에게는 '익위사세마', '세자익위사부솔' 등의
조선후기 문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이하곤(李夏坤·1677∼1724)은 우리고장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에 사설 도서관의 일종인 완위각(宛委閣)건립하고 엄청난 양의 책을 보관했다. 완위각은 달리 만권(萬券)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뜻에서 '만권루'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완위각에는 이하곤이 수집한 당시 고서화류도 많이 보관돼 있었다. 따라서 완위각은 서적을 단순히 수집하고 장서한 것이 아니라 당시 선비들의 문화적 공간이었다. 특히 강화학파로 불리는 소론계 인사들이 많이 찾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건물 이름을 짓는데 적지 않은 정성을 쏟았다. 자신의 철학, 아니면 중국 고사에 관련해 작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완위각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것도 bc 2천년 무렵의 중국 하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사는 아니지만 중국 사서 중의 하나로 '오월춘추'(吳越春秋)가 있다. 이 사서에 따르면 하우씨(우임금 지칭)는 자주 찾아오는 홍수를 어떻게 다스릴까 고민을 하다 황제중경이 지은 책을 보게 됐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구의산(九疑山) 동남에 하늘기둥처럼 완위산(宛委山)이 있는데 적제(赤帝)는 그 산 위의 궁궐에 살고…
추석이 얼마남지 않았다. 우리 선조들은 망자의 죽음을 두 번 확인했다. 바로 '고복'(皐復) 또는 '초혼'(招魂)으로 불리는 부르는 의식이다. 전통시대에는 임종을 마치면 고인의 옷을 가지고 마당으로 나아가거나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 고인의 성명을 왼 다음 복~ 복~ 복~ 자를 긴소리로 세번 불렀다. 고 노무현 대통령 전통장례식 때도 김명곤 전 문광부 장관이 '해동조선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복~복~복~'이라고 외친 바 있다. 복!복!복 할 때의 복은 한자 '돌아올 復' 자 이다. 즉 육체를 떠나 북쪽으로 가고 있는 혼령에게 미안한 마음에, 죄스런 마음에 다시 돌아오라는 간절한 주문을 담고 있다. 제사나 차례에서는 '북쪽' 방향은 굉장히 중요하다. 바로 '북쪽'에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북망산', '북망산천'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제사나 차례 지낼 때는 지방이나 신주가 모셔지는 방향이 '북쪽'이 된다. 차례도 제사의 일종이나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제사는 특정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것이고, 차례는 자신이 모시는 모든 조상을 명절날 한꺼번에 모신다는 점이 다르다. 또 제사는 돌아가신 날 자시(11시~
1895년(고종 32). 단반령과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한 백성들이 유생을 중심으로 봉기했다. 그 유명한 을미의병으로, 우리고장 제천지역도 중심지의 하나였다. 제천출신 의병중에 정운호(鄭雲灝·1862~1930)라는 인물이 있다. 제천지역 명군가의 종손이었던 그는 34세 나이로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가담했다. 그는 문재가 뛰어나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고향 제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제천팔경'이라는 칠언율시를 지었다. 팔경시의 제목은 '의림지 낚시하는 늙은이'(林湖釣·), '백련사 돌아가는 중'(蓮寺歸僧), '대암의 노니는 물고기'(·巖遊魚), '관란정의 우는 여울'(瀾亭鳴灘), '한벽루 가을 달'(碧樓秋月) 등이다. 나머지 세 개의 시는 '능강의 봄 돛단배'(綾江春帆), '옥순봉 기암'(玉筍奇巖), '월악산 늦단풍'(月岳晩楓) 등이다. 이중 제 5경시인 '한벽루 가을달'은 다음과 같은 운율로 일대 풍광을 노래했다. '물 가까이 한벽루는 비취빛을 둘러 희미하게 보이고 / 맑은 하늘 밝은 달은 가을을 따라 돌아가네 / 가을바람 불어 명주(明酒)에 그림자를 만들고 / 옥로(玉露)는 빛을 더해 객의 옷을 씻누나 / 청초호(靑草湖) 밝아 물고기 헤아릴 만하고 / 금병
증평군 증평읍 '죽리'는 행정구역상 '죽1리'와 '죽2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지금은 '죽1리는 '죽리', 죽2리는 '원평마을'로 부르고 있으나 법정지명은 여전히 '죽리'이다. 이곳 지명이 '대竹' 자의 '죽리'가 된 사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1914년 일대를 대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죽리(竹里)로 작명했다. 이후 인구수가 늘면서 법정명은 '죽리' 그대로 유지됐으나 행정명은 '죽1리'와 '죽2리'로 분화됐다. '죽2리'. 문자로 표기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소리로 호칭하면 다소 심각한 현상이 발생한다. 문법상 '죽이다'에서 파생한 '죽이리'에는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지(will)가 들어가 있다. 따라서 "어디 살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죽이리 삽니다"라고 답을 하면, 상대방은 난감해 할 것이 분명하다. 지난 2006년 죽리(竹里) 주민 중 죽2리 마을대표 임태정 씨가 증평군청을 방문해 "죽1리와 죽2리를 한자로 쓸 때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말로 말하면 '죽일리'와 '죽이리'가 돼 어감이 않 좋다"며 개명을 희망했다. 그 결과, 행정명은 앞서 언급한대로 '죽리'와 '원평마을'로 바뀌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일제가…
조선시대 충북지역 대부분의 지역에는 고을을 대표하는 누정(樓亭)이 존재했다. 청주에는 망선루, 충주 경영루, 단양 이요루, 황간 가학루, 청풍 한벽루, 음성 의송정, 옥천 적등루, 진천 연정(蓮亭), 보은 삼산루, 청산 백운정, 문의 사산루, 괴산 존빈루 등이 유명했다. 이들 누정에는 한시도 함께 남겨져 있는 경우가 많아 인문학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괴산 존빈루(尊賓樓)에는 조선전기 서거정과 쌍벽을 이뤘던, 우리고장 충주출신의 이승소(李承召·1422 -1484)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제목은 '괴산의 존빈루에서 판상의 시에 차운하다'(槐山尊賓樓次板上韻)이다. 차운(次韻)은 타인의 시에 화답하면서 운자(韻字)를 그 차례대로 두며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장정에다 단정까지 모두 거쳐 지나오니(過盡長亭與短亭) / 푸른 산속 깊은 곳에 외로운 성 하나 있네(翠微深處有孤城) / 높은 누각 뾰족하여 하늘 바람 내려오고(高樓矗矗天風下) / 가는 비는 자욱하여 작은 시내 생겨나네(細雨··澗水生).- 철언절구인 이 한시는 비교적 길어 뒷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한들대는 버들가지 묘한 춤춰 보여주고(柳拂腰肢呈巧舞) / 눈썹 같이 비낀 산은 한가한 정 자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 대부분의 고문헌은 증평 좌구산의 한자를 '거북이 앉아 있는 모습의 산'이라는 뜻으로 '坐龜山'이라고 기록했다. '좌구산은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坐龜山在縣南十里)- 이때의 고을은 지금은 증평읍에 밀려 면이 된 청안현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문헌은 좌구산의 한자를 '개 狗' 자를 쓰고 있다. 이와 관련해 증평군지는 '아버지 김치와 관련이 있다'고 그 유래를 적었다. '김치는 광해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칭병을 하고 좌구산 아래 밤티골(율리)로 낙향했다. 어느 날 김치에게 심기원(沈器遠)이라는 인물이 찾아와 능양군(후에 인조)를 왕으로 추대하려는데 거사 일자를 점쳐달라고 물었다. 이에 김치가 목욕재개하고 점을 쳐보니 성공하는 괘가 나왔다.'- 이어지는 내용은 '김치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는데 동편 좌구산에서 개가 세번이나 크게 짖었다. 이에 일행은 누군가 염탐하런 온 것을 눈치채고 현장을 피했고, 그래서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후 김치는 이 산을 개가 짖음으로 큰 일이 성공했다는 뜻에서 개 狗 자의 좌구산으로 부르도록 했다'라고 적었다. 이 구전은 △김치가 점을 매우 잘 쳤고 △인조반정에 간접적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