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무신란(戊申亂)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반란군이 우리고장 청주읍성(그림)을 유혈 점령하면서 발생했다. 《영조실록》은 하루 전인 3월 14일자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때 도하(都下)에 근거없는 풍문이 날로 흉흉하여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들고 서 있어 조석 사이도 보장할 수 없는 듯하였고, 남산(南山) 아래 일대에는 가족을 이끌고 피해 도망하는 사부(士夫)들이 많아서 나룻터에 길이 막혔으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함은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미 대규모 국가 반란이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한양도성 안에 쫙 퍼진 모습이다. 이는 한양도성 안에도 무신 반란군과 내통하는 자가 많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같은 날짜 《영조실록》에는 '남산 아래에 사는 나라를 원망하는 많은 부류들은 그 역모를 서로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도 보이고 있다. 소론의 지지를 받고 보위에 오른 경종(景宗·1688~1724)이 재위 4년 게장을 먹은 후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급서했다. 그러자 노론의 후원을 받던 왕세제 연잉군(후에 영조·1694~1776)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대 반노론(소론+남인)으로 정치 지형이 급변했다. 이에 반노론 세력은…
음성군은 지금은 인구 10만명에 2읍 7면의 비교적 큰 군세(郡勢)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06년 전까지는 달랐다. 지금의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금왕읍, 감곡면, 생극면, 삼성면, 대소면, 맹동면 등 군 북부와 서부지역은 충주목에 속했다. 소이면도 1914년 전까지는 충주목 소파면(蘇坡面)과 사이포면(沙伊浦面)에 속하던 지역으로, 지금의 면이름은 두 곳에서 한 글자씩을 조합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쇄잔했던 음성군의 모습을 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충주 병제천(幷梯川)에 이르기 7리, 서쪽으로 충주 건천(乾川)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청안(淸安)에 이르기 26리, 북쪽으로 충주 석적산(石積山)에 이르기 19리이다. 호수가 1백 71호요, 인구가 7백 26명이다.' 현의 중심지인 읍치(邑治)에서 가까운 곳은 7리, 멀어야 26리 정도면 이웃 고을의 경계에 도달하고 있다. 고을의 인구도 8백명을 넘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현의 지위를 지녔던 괴산군 청안은 지금은 면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과거 한 때는 다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웃 음성현을 흡수, 대읍의 위세를 지닌 적도 있었다. '전에 과천(果川)을 금천현
전통의학은 침(鍼)의 종류에 대해 '구침'(九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침의 종류가 참침·원침·시침·봉침·피침·호침·장침·대침·원리침 등 아홉가지 된다는 뜻이다. 관련 사전에 의하면 이중 대침(大鍼)은 관절질환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대침은 9분야(九野)를 상징하고 몸 전체에 있는 병사(病邪)가 관절 부위에 머물러 있는 병을 치료한다. 길이는 4촌으로 관절 속에 있는 물(水)을 빼내는 데 쓰인다.대침은 호침보다 긴 것으로, 침을 불에 달구어 놓는 번침(燔鍼)에도 쓰인다. ≪황제내경≫에 나오는 '수자(火+卒刺)'라는 것도 바로 이 화침을 말한다. 조선 인조대에 번침을 잘 놓는 침의로 이형익(李馨益·?-?)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출신인 그는 1632년(인조 10) 침술로 명성(名聲)이 있어, 도성으로 불려가 이듬해부터 인조가 죽을 때까지 번침을 시술한 공으로 현령을 지냈다. 그 후 인조가 죽자 책임을 지고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651년(효종 2)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趙氏)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치료를 위해 왕의 특별 명령으로 사면되었다. 《인조실록》에는 번침을 잘 놓는 침의로 반충익(潘忠翊)이라는 인물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여자로 변한 곰인 웅인(熊人)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금강수계에 위치한 공주 곰나루(熊津)에도 비슷한 내용의 전설이 존재한다. 먼 옛날 공주 연미산 아래에 암곰이 살았고, 성장해서는 시집을 가고 싶어했다. 어느날 어부가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오는 것을 보고 곰이 다가갔다. 이때 어부가 두려움 때문에 기절하자 동굴로 업고 와 극진히 간호했다. 그후 어부는 곰기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으며 탈출을 궁리했으나 곰이 동굴 입구를 큰 돌로 막고 나가므로 할 수 없이 곰과 살게 됐다. 마침내 곰이 잉태하여 새끼를 낳자 어부는 곰을 돌봐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곰이 방심을 했고 어부는 탈출에 성공했다. 어부가 없어진 것을 안 곰은 강가에서 되돌아올 것을 애걸했으나 어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곰은 새끼를 죽이고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 뒤부터는 금강에 풍랑이 자주 일어 나룻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빈발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위령제를 지내자 나룻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단군신화와 곰나루 전설은 세부 전개는 다르지만, 곰과 인간이 결합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점에서 큰 얼개는 같다. 사학자들은 이를 역사적 사건이 신화로 상징된…
조선 광해군 때 발생한 강변칠우(江邊七友) 사건은 '칠우'가 우리고장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강탈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칠우(七友)는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으로, 모두 명문가의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적자가 아닌 서자들인 까닭에 중앙 관계에 진출할 수 없었고, 그러자 시와 술로 불만을 달래다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심문하는 과정에서 대북파에 의해 역모로 조작, 칠우중 박치의를 제외한 6명이 전격 처형됐다. 그러나 훗날 심문에서 박정민이라는 인물이 "5월 5일 충원(忠原)에서 군대를 모아 정씨(鄭氏)를 추대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광해군 8년 6월 24일자)라고 진술, 완전한 조작으로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충원'은 우리고장 충주, '정씨'는 난세에 출현한다는 선인(仙人)을 일컫는다. 광해군이 박치의 체포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이중에는 '현상금+관직 수여'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때 박치의에게 현상금을 걸고 잡아들이려 하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엄하게 독촉했는데, 잡는 자에게는 바로 아경(亞卿)의 직을 제수하고 정훈(正勳)에 녹용하겠다고까지 현상하였다.' 인용문 중 '아경을
조선시대 삼사의 하나로 홍문관이 있고, 그 수장은 정2품의 대제학(大提學)이었다. 이런 대제학들 사이에는 '주문연'(主文硯)이라는 벼루를 주고 받는 아름다운 전통이 존재했다. 굳이 벼루를 주고 받은 것은 대제학이 '문'(文)을 총괄하는 최고의 벼슬자리였기 때문이다. 《증보문헌비고》 권221 직관고는 주문연과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주문연은 남곤(南袞)으로부터 이행(李荇)에게 전해진 뒤 서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덕형(李德馨)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 그런데 명(明)나라 군대가 이를 얻어서 가져다가 단지를 괴는 돌로 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이 보고서 도로 가져와 홍문관(弘文館)에 둠으로써 다시 전해지게 되어 이이첨(李爾瞻)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이이첨이 패(敗)하게 되자 다시 잃어버렸는데, 신흠(申欽)이 대제학으로 있을 적에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으로 다시 큰 벼루 하나를 만들어 '전심연(傳心硯)'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 남아 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대한제국기인 1903~1908년 사이에 고종황제의 칙명(勅命)으로 편찬된 2백50권 분량의 책이다. 따라서 주문연은 △임진왜란…
≪쇄미록·王+肖尾錄≫의 저자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서울 태생이나 그의 일기에는 우리고장 황간의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외가가 황간이기 때문으로, 그는 성장기를 황간에서 보냈다. 오희문은 1591년(선조 24) 11월 황간의 외가를 방문하고, 또 장흥·성주 등에 있는 노비의 신공도 받을 겸 두 명의 종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중도에 임진왜란을 당해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그 과정을 10년 가까이 기록한 일기가 《쇄미록》으로, 1601년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연구논문을 보면 그의 일기에는 총 24명의 노비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은 상전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삿일, 누에치기, 물품교역, 편지와 안부전달, 상전의 나들이길 수행, 밥짓기, 땔감나무 마련 등 집 안팎의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다. 이와 관련 오희문은 '막정'이라는 노비가 죽자 "살아서는 몸을 바치고 죽어서는 재산을 바치니 공이 있는 노비'라고《쇄미록》에 적었다. 이 문장은 조선시대 노비들도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노비가 죽으면 그 재산은 주인의 것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사료에는 외거노비들 중에서 재산을 축적하는 경우가 더러
청주 중앙공원의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사진)이 수개월 동안의 보수작업을 마치고 시민들에게 다시 본모습을 드러냈다. 충청병영이 있던 지금의 중앙공원 일대에는 병영과 관련된 건물이 여러 동 존재했었다. 충청병마절도사의 처소인 청진당, 도서실격인 후당과 반시당, 병사의 집무소인 운주헌, 지휘소인 통군루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병마절도사영문 한 채만 남아 있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 15호인 병마절도사영문은 지난 1988년까지 '청녕각'(淸寧閣)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던 것을 이상주와 박상일 씨 등의 고증 노력으로 구 청원군청 내의 청주동헌이 '청녕각'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같은 오인은 한자의 사용 용례만 살폈다면 바로 확인될 수도 있었다. 한자 '閣'(각)은 규모를 꽤 갖춘 집이나 2층으로 이뤄진 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개 섬돌을 통해 대청으로 올라가는 구조이다. 이에 비해 한자 '樓'(누)는 2층 구조로, 오르는 계단이 사닥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2층 건물인 충청병마절도사 영문이 '청녕각'으로 불렸던 것에는 당연히 의심이 뒤따랐어야 했다. 현재 충청병마절도사 영문은 중앙공원 정문의 바로 우측에 진입로와 평행한 방
유석(劉石)의 시역(弑逆) 미수사건 때문에 충주목이 예성부로 강등된 것(그림)은 처음부터 문제점이 많은 정책적 판결이었다. 유석이 강원도 원주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는 결과적으로 충청도와 충주목이 입었다. 충주의 지식인이 가만있지 않았다. 유생 허초(許礎)라는 인물이 승정원 앞으로 상언(上言)을 했다. 상언은 관원으로서가 아니라 사인(私人)으로서 자기 주장을 올린다는 점에서 상소와 차이가 있다. 허초는 장문의 상언에서 충주목 강등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유석은 전일 비록 본주(충주목 지칭)에 살기는 하였으나 그의 아비와 마찬가지로 맹인으로서 구걸하러 다니고 일정한 거주지가 없었기 때문에 본주에 호적 대장이 없었고, 유석이 아비를 따라 구걸하러 다닌 기간은 어림잡아 4∼5년이었습니다.'- 허초는 또 절차상의 잘못도 지적했다. '유석은 후에 원주 서면(西面) 강천리(江川里)에 사는 양인(良人) 이금산(李今山)의 딸에게 장가들어 살다가 극악 무도한 죄를 저질러 원주 관아에 수금되어 처결되었으니 이는 곧 원주 사람입니다. 그런데 추안(推案)에 본주 태생이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읍호를 강등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율에 의하면 한번 읍호가 강등되면
조선시대 충주지역에서는 공교롭게도 청주와 같은 8번의 읍호강등 사건이 일어났다. 발생 순서대로 살펴보면 △유석 사건(1539년·중종 19) △이홍윤 사건(1549년·명종 4) △유인발 모반사건(1613년·광해군 5) △안집중 모반사건(1628년·인조 6) △채문영 모반사건(1644년·인조 22) △유수원 모반사건(1755년·영조 3) △이인좌의 난 가담(1728년·영조 4) △채수영 모반사건(1765년·순조 1) 등이다. 충주의 첫번째 읍호강등은 1539년 6월에 일어났고, 그 이유는 유석(劉石)이라는 인물의 시역(弑逆) 미수사건 때문이었다. '시역'은 지금으로 말하면 존속살인으로 부모나 임금을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조정은 이를 강상윤리를 위반한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해 매우 엄중하게 다스렸다. 『중종실록』은 사건전개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지난 경자년 원주(原州) 사람 유석(劉石)이 자기 아비를 살해하기 위해 매우 추운 겨울에 강가 바위 위로 아비를 꾀어 와서 물속으로 밀어넣고서, 혹 살아날까 우려하여 대나무 막대로 머리와 뺨 등을 마구 난타하여 막대도 부러졌고 출혈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침몰하여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고종의 친부이다. 그와 친척인 사이로 이하전(李夏銓·1842~1862)이라는 인물이 있다. 미리 말하면 이하응은 일부러 '바보짓'을 해서 세도정치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이하전은 '바보짓'을 하지 않아 안동김씨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리면서 제주도로 유배된 끝에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의 나이 채 피어나지도 못한 21살이었다. 1862년(철종 13)년 7월 당시 오위장(五衛將) 이재두(李載斗)가 "김순성(金順性)과 이긍선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했다. 오위장은 오위도총부 소속이면서 오위의 군사를 거느리던 으뜸 벼슬로, 정3품의 품계를 지녔었다. 김순성은 체포됐고 곧 국문이 시작됐다. 이와 관련, 『철종실록』은 '김순성이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라고 서술했다. 그는 혐의가 잘 입증되지 않았는지 곧 풀려났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이유호(李儒虎)를 대질시켰을 적에 정유성(鄭裕誠)의 분소(分疏)가 너무도 명백했으므로, 온갖 요악한 짓을 한 김순성도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부당하게 죄에 걸린 정상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특별히 방송(放送)시키소서." 하니,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이 있었고,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그 이후 국정 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김조순에게 돌아가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부패한 정치로 평가받는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1826년(순조 26). 나라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덩달아 청주는 어수선했다. 그해 4월 김치규(金致奎)라는 인물이 청주읍성 북문에 시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적은 괘서를 과감히 실명으로 투척했다. 그런 어수선함이 가시기도 전에 그해 10월 비슷한 성격의 괘서투척 사건이 청주읍성에서 또 일어났다. 범인을 잡고 보니 요언은 정상채(鄭尙采)라는 인물이 처음 만들어 냈고, 이를 괘서에 적어 투척한 인물은 아전출신 박형서였다. 따라서 훗날 이 사건은 '박형서 역모사건'으로 명명됐다. 조선시대 아전은 달리 향리로도 불렸던 중인계층으로 관청의 일을 보는 등 식자층에 속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늘 쪼들렸다. 사회나 국가에 대해 제도적으로 원한이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괘서가 그렇듯이 박형서 것도 미래에 대한 허왕된 내용인 도참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①홍경래는 죽지 않았다느니, 서적(西賊)은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②병화가…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회원들은 지난 27일 겨울산행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쌓인 눈을 밟으며 76차 산행을 떠난 곳은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경북 상주시가 맞닿아 있는 속리산이었다.한국 팔경(八景) 중 하나에 속하는 속리산은 눈으로 뒤덮여 우리에게 설경을 선물했다.20여명의 회원들은 겨울산행의 필수 준비물인 아이젠을 부착하고, 문장대 1코스인 경북 상주시에 위치한 화북탐방지원센터를 시작으로 2시간만에 문장대에 도착했다.산행하는 내내 쌓인 눈을 밟으며 주변 설경을 감상하는 회원들의 입에선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3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문장대에 오르니 설산과 운무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회원들은 정상에서 각자 챙겨온 점심을 나눠 먹으며 배를 채운 뒤 하산을 시작했다.하산은 속리산에서 가장 먼저 개척됐다는 문장대코스.세심정을 지나 법주사로 가는 코스다.생각보다 단조롭고 길어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설경이 주는 즐거움에 회원들은 지루할 틈 없이 하산을 했다.함우석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교장이 회원들의 안전을 든든히 책임져 회원들은 안심하고 겨울산의 백미를 만끽했다.함 교장은 "8년 전 클린마운틴의 첫 산행 장소
1804년(순조 4) 청주목이 다시 서원현으로 강등되고 충청도는 광역행정 지역은 공충도바뀌있다. 청주목에 거주하는 한해옥(韓海玉)이라는 사람이 대역죄에 해당하는 흉언(凶言)을 지어냈기 때문이었다. '이조에서 청주목을 서원현으로 강등시키고 충청도를 공충도로 바꿀 것을 아뢰었으니, 죄인 한해옥이 거주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청주에서 일어났던 여러 역모사건과 달리 한해옥 건은 그 전모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16자로 이뤄진 흉언'이라는 것만 『순조실록』을 통해 확인된다. "본래 효경의 뱃속에 항상 귀역의 마음을 품고 있던 차에 이번 여름 역적 권유·정재민 무리들의 국옥(鞫獄)이 있고 난 연후에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오다가 감히 제멋대로 후매하는 계획을 짜서 소회를 읊은 16자의 흉언을 지어냈으니, 견준 것은 망측하였고 그 뜻은 음흉·사특하였습니다.'- 인용문 중 '효경'의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이라는 짐승을 말한다. 즉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됐다. '귀역'은 귀신과 수상곤충의 일종인 물여우를 일컫는 표현으로 음흉한 사람을 일컫고 있다. 정리하면 △권유 무리의 사건이후 그…
1777년(정조 1) 청주목이 다시 서원현으로, 그리고 충청도는 공충도로 행정지명이 바뀌었다.(사진) 홍상범(洪相範·?-1777)이 역모를 도모했고, 그 어머니인 효임(孝任)의 태생지가 청주때문이었다. 홍상범의 역모사건은 그 아버지인 홍술해(洪述海·1722-1777)의 유배가 발단이 됐다. 그는 황해도관찰사 재직중 부정한 돈 4만냥, 세곡 2천5백석, 소나무 2백60 그루를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위리안치됐다. 이 유배형은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주로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상범이 아버지의 치죄에 불만을 품고 거주지인 전주에서 상경, 홍인한·정후겸 등 벽파(僻派)와 제휴,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 '찬'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였다. 아버지를 유배지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직접 정조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벽파는 정조의 탕평책을 반대한 당시의 정치집단으로 세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홍상범의 역모 기도는 사전에 발각되어 그 뿐만 아니라 아우 필해·지해·찬해 및 조카 상간 등도 함께 주살당하였다. 주살은 죄를 물어 사형시켰다는 뜻으로, 그 방법은 다양했다. 홍술해의
조선시대 청주는 역모사건이 일어나면 '청주목'에서 '서원현'으로 읍호 강등을 당했다. 청주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역모는 숙종6년(1689)의 박상한(朴相漢) 기우제 제문 사건이다. 17세기는 조선뿐만 아니라 전지구가 기상이변을 겪었다. 기상학자들이 '소빙기'라고 말할 정도로 1만년이래 지구의 기온이 가장 낮았다. 청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소빙기에 따른 가뭄이 찾아왔고 따라서 청주목은 자연재해를 주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게 됐다. 이때 제문을 작성한 사람이 유생 박상한이다. '하늘이 가물게 하는 가뭄은 오히려 기도해 물리칠 수 있으나, 나라에서 가물게 하는 가뭄은 누구로부터 이것을 풀 것인가. 오로지 이러한 가뭄은 가물게 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았고, 사람이 스스로 가물게 한 것이니, 기도해 물리칠 바가 없다.'- 인용문 중 '나라에서 가물게 하는 가뭄은 누구로부터 이것을 풀 것인가'라는 부분이 특히 문제가 됐다. '나라에서 가물게 하는가뭄', 이 대목이 당시 임금 숙종이 정치를 잘못한다고 비유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해석됐다. 다음 문장도 문제가 됐다. '사람이 생각에 없어서 스스로 하늘을 단절하였고, 나라에서는 정사(政事)가 없어서 이미 백성
목은 이색(李穡·1328~ 1396)의 영정은 전국적으로 최소 7곳 존재하고 있다. 우리고장 청주시 주성동의 목은영당을 비롯해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충남 서천시(그림), 예산군 삽교읍, 부여군 홍산면, 서울 종로구 수송동,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등에 위패와 함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처럼 이색이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은 빼어난 문장실력과 함께 성리학적인 요소도 작용했다. 그는 우왕의 사부이자 권근(權近·1352~1409)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색은 이런 환경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이념·통치적으로 본궤도에 오르는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이색은 충남 한산 출신이고 주로 수도 개성에서 생활했으며 경기도 여주의 여강에서 졸했다. 그는 고려말 청주옥에 잠깐 갖혔던 것을 제외하고는 청주에 장기체류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우리고장 청주를 소재로 빼어난 시를 여러 수 남겼다. 다음은 '돌아가기를 생각하다'라는 시다. 청주에 놀러 왔다가 개성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유포에 가을 기운 깊고 비가 잠깐 개니(柳浦秋深雨乍晴) / 수촌과 산중 별장 경치가 더욱 깨끗하네(水村山墅景彌淸) / 천심은 다 드러나서 나락 풍년이 들었고(天心盡露嘉禾熟) / 시
고려 관리들의 최고 바람은 은퇴 후 별장의 일종인 '별서'(別墅) 생활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의 전원생활를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일면이 있어, 시대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목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이정호 교수에 따르면 이규보, 이색 등 고려 문인들이 남긴 각종 문집에는 별서생활에 대한 동경심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별서는 '4가지를 갖췄다'는 뜻에서 '사가재'(四可齋)로 개명했다. '사가'는 밭, 뽕나무, 샘, 땔나무를 갖췄다는 뜻으로, 그 자체가 별서생활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전집』에 관련 내용이 전해진다. '밭이 있으니 갈아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뽕나무가 있으니 누에를 쳐서 옷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샘이 있으니 물을 마시기에 가하고, 나무가 있으니 땔감을 만들기에 가하다.'- 이규보는 이어지는 내용을 '내가 이 집에 거하면서 만일 전원의 즐거움을 얻게 되면 세상일을 팽개치고 옷을 떨쳐 입고서는 옛동산으로 돌아가 늙으면서 태평성세의 농사짓는 늙은이가 되리라'(〃)라고 적었다.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로는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이 있고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사진)에는 일지홍(一枝紅), 봉황지(鳳凰池), 이름없는 기녀 등 청주의 기생도 다수 등장한다. 수양대군 세조가 쿠데타(계유정난)를 일으킬 때 오른팔과 왼팔 역할을 한 인물이 한명회와 권람이다. 한명회는 당시 청주목 땅(지금의 천안시 수신면), 권람은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잠들어 있는 등 우리고장과 인연이 깊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수양대군을 만나기 전 청주를 찾았고, 이때 권람은 일지홍이라는 기녀를 좋아하게 됐다. 그러나 몇년 뒤 권람이 다시 청주를 찾았을 때 일지홍은 저승으로 간 뒤였다. 권람은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을 이렇게 읊었다. '지난 무오년에 놀던 일 생각하면(憶昔來遊戊午年) / 일지홍의 요염한 자태 선비의 간장 녹였지(一枝紅艶惱儒仙). / 오늘 다시 찾아오니 감개가 무량하나(今日重遊還有感) / 가련하다 외로운 무덤 인간을 등졌구료(可憐孤塚隔寒烟).'- 권람은 그후 동시대 문신 강중(剛中·김수온의 자)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고, 이때 청주기생 일지홍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김수온은 "나도 청주 율봉역의 봉황지라는 기녀를 좋아했는데 몇년 뒤 다시 찾으니 이승에 없었다"라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김수온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927)에는 충북과 연고가 있는 기녀들이 10여명 등장한다. '한지와 봉매', '전목과 충주기생 금란', '보은현감 성원제와 춘절', '윤현과 청주기생', '송상현과 김섬' 등은 본란에 소개됐거나 비교적 널리 알려진 편이다. 이에 비해 '배극렴과 설매', '신광수와 영춘기생 계화', '충주 교리석(校理石) 전설', '서원기생 일지홍', '송인과 서원기생' 등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진천 인물 배극렴(裵克廉·1325~1392)은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공양왕을 폐한 공으로 조선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됐다. 『조선해어화사』에 의하면 당시 정승 배극렴이 연회석상에서 기생 설매(雪梅)에게 "들으니 너는 동쪽에서 먹고 서쪽에서 잔다더구나. 오늘은 노부(老夫)를 위해 천침(薦枕)하는 것이 어떨까"(제 31장)라고 유혹의 말을 던졌다. 노부는 배극렴 자신, 천침은 첩이나 시녀 등이 잠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자 설매는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자는 천한 기생의 몸을 가지고 王씨를 섬겼다가 李씨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는 것이 사리에 꼭 맞습니다"(〃)라고 독설했다. 모시기는 모
도내에서 구한말~일제 강점기를 산 역사적 인물로는 단재 신채호의 지명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인물로 괴산출신 이능화(李能和·1869∼1943)가 있다. 이능화는 당시 괴산군 이도면 수진리(현 괴산읍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원긍(李源兢·1849-1919)은 문과에 급제한 후 경상도관찰사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1990년대 후반에야 시작됐다. 권평 씨는「이능화와 조선기독교及외교사」(1999, 연세학술논집)에서 이능화의 생애 마디를 ①어린시절(1869-1889), ②외국어 공부 시기(1889-1897, ③외국어 교수 시기(1897-1910), ④한국종교사 연구 시기(1912-1920), ⑤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수관 또는 편수위원 역임(1921-1937) 등으로 분류했다. 그는 ①에 대해 '이 시기의 이능화는 한문을 공부하며 과거를 준비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가학으로 공부를 한 셈으로 훗날 수많은 한문전적의 분석과 방대한 한문저술의 초석이 이때 이뤄졌다'고 밝혔다. ②에 대해서는 '상경하여 영어, 중국어, 불어 등 3개 국어를 배워 능통하게 된다. 그가 양반의 자제로서 외국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한지(韓祉·167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월악서소』(月嶽書疏)라는 저서를 남긴 문장가이자, 청렴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이른바 '팔포'(八包)의 법을 엄히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팔포는 조선시대 때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여비(旅費) 등으로 쓰기 위해 가져가는 8개의 포대를 말한다. 각 포대에는 인삼 10근씩이 담겨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사신들은 이 팔포를 당나라 사행길에 가지고 가 여비 또는 물품구입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여비를 풍족히 쓰는 것 외에 당나라 물품을 구입, 국내에 들여와 되팔면 적지 않은 차익이 발생했다. 대신 인삼자원은 고갈됐다. 이를 과감히 금지시킨 인물이 바로 한지였다. 그는 1727년(영조 3)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팔포의 법을 엄히 지켜 역관(譯官)이나 비록 대관(大官)이라도 이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의 청렴강직한 성품은 관료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윤리적인 것에도 같이 적용됐다. 조선시대 관찰사(감사)는 임기 2년이 기본으로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대개 홀몸으로 부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관찰사 등 당시 외관들이 합법적으로…
몇해전 청주 상당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충북 도민헌장탑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난 적이 있다. 관리가 어렵고 시대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상당공원 도민헌장탑은 '시멘트+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적어도 3년에 한 번씩 흰색 페인트칠을 해야 한다. 탑을 설계·시공한 청주출신 김경화(전 공주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조각가는 이에 대해 "도민헌장탑을 만들 당시인 1970년대에는 국내 조각가들 사이에 석재를 다루는 기술력이 현재처럼 발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탑에 새겨진 글과 조각 형상에서 비롯되고 있다. 도민헌장탑의 글은 탑 전면과 뒷 공간의 부속 조각 등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탑 전면에 새겨진 글 내용은 전회에 밝힌 바 있다. 탑 부속 조각의 글은 전면의 슬로건을 풀어쓴 것으로, 주장은 비슷하다. '이러한 전통은 가즈런히 오늘에 전승되어 우리 품성의 바탕이 되고 행실의 기조가 되어 교육과 문화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거니와 온후 순박한 인심 속에서 소극적이고 피동적이며 보수에 흐르기 쉬운 도민기질을 하면 된다는 신념아래 부지런히 일하고 협동단결하여 남보다 앞서가려는 적극적인 기질로 일신시켜 가고
중앙공원에 이어 청주시민들이 즐겨찾는 곳은 상당구 수동 283-3번지 위치한 상당공원이다. 상당공원은 1만9백여㎡의 그리 크지 않은 면적으로, 공원내 주요 시설로는 충북도민 헌장탑, 한병수(韓鳳洙, 1883~1972) 동상, 충북 4.10학생혁명 기념탑 등이 있다. 그러나 상당공원은 지난 1930년대에 조성된 중앙공원과 달리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상당공원은 지난 1974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됐다. 청주 향토문화대전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 금수장 여관과 동아극장 등이 있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암산(牛岩山·338m)을 가린다고 하여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했다. 상당공원은 지난 1979년 충북도민헌장탑이 건립되면서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도민헌장탑은 공원의 많은 면적으로 차지하고 또 도심 중앙에 우뚝 솟아 있어 단번에 시민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러나 도민헌장탑에는 언제, 누가 이 탑을 세웠고 또 조형물이 의미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한 줄의 설명문도 만날 수 없다. 현 충북도민헌장탑은 1979년 전국소년제천 청주대회를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기념물로 세워졌고, 당시 충북지사는 정종택 씨였다. 당시 충북체육은 소년체전 7연패를 하는 등 전국의 부러움을…
청주 중앙공원은 조선시대는 청주목 관아,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충북도청이 위치하던 자리였다. 중앙공원은 충북도청이 지금의 문화동 자리로 이전하면서 조성됐지만, 공원 건립을 위한 공간 확보는 1911년부터 시작됐다. 일제는 1911년 4월 이른바 시구(市區)의 개정, 즉 도시계획에 착수했다. 『청주연혁지』를 보면 일제는 사방의 성벽을 허물도록 하고 그 돌을 이용하여 새롭게 하수도를 건설하고 일직선으로 석교에서 북문으로 통하는 간선도로를 개수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본정통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종횡에 가로를 계획하여 가로 세로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함으로써 바둑판의 모양과 유사한 시가지를 만들게 되었고, 1915년(대정 4)에 이르러서는 그 대부분의 공사를 준공하였다.(55쪽) 그 이전에 충북도청이 1908년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해 오면서 청주읍성 관아의 각 건물에는 과(果)들이 분산 배치됐다. 본건물인 근정전(勤政殿)에는 지방, 통군루에는 회계과, 공손수(압락수) 아래의 건물에는 학무과, 근정전의 동쪽에 있는 건물에는 재무과가 배치됐다. 1922년에 편찬된 『대청주』라는 자료를 보면 일제는 이때부터 서공원과 동공원 외에 별도의 공원을 청주 도심이 조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