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이인좌는 1728년 청주읍성을 점령한 직후 곧바로 휘하의 부하들 중 일부를 주변 고을의 수령으로 파견했다. 훗날 영조 정부에 의해 '위칭', 즉 '가짜 현감'으로 표현된 이들은 이인좌의 격문을 휴대하고 충주, 진천, 목천, 회인, 황간, 보은, 음성 등으로 향했다. 이중 충주만 당시 목사 김재로(金在魯·1682-1759)의 저항으로 인해 온전함을 보존할 수 있었고, 대부분 지역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이인좌는 청안현감으로 정중익(鄭重益)이라는 인물을 파견했다. 그러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거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현지에 머문 기간도 열흘이 채 안 되었다. 목사 김재로가 충주에서 저항했다면, 청안에서는 자체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서 지켜야 한다'는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유교적 忠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때 의병 참가자의 한 사람이 반란군 토벌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討逆日記》(토역일기)를 남겼고, 그 일기 내용이 지난 1997년 이상주(현 중원대 교수) 박사에 의해 일반에 공개됐다. 일기는 당시 청안에 거주하던 장담(張譚·?-1728)이라는 선비가 정중익 반란군에 맞서 아우 헌과 함
[충북일보] 민원보(閔元普), 민덕효(閔德孝), 민백효(閔百孝), 민복효(閔復孝), 민득효(閔得孝), 민관효(閔觀孝), 민성효(閔性孝), 민경효(閔景孝). 1728년 무신란에는 충주목의 남인계열 사족들이 다수 참여했고 이들 중에는 여흥민씨와 그 인척들이 유독 많았다. '김덕유는 충추 사람으로 민암의 사위이고 한세홍의 내구(內舅) 이다. 처음에 민백효에 의해 인좌(引坐)되었으므로 체포해 추문하다가 곧 작처(酌處)했던 것인데, '김덕유가 법망에서 빠져나갔다.'고 충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으므로….'- 이런 여흥민씨 중에는 '효'자 돌림이 다수를 차지했다. 다음 인용문은 그중 민원보의 항렬이 높고, '효'자 돌림은 그 아래임을 보여준다. "충주목에서 보고하여 온 바에 의하면, 역적 민원보의 아들 민복효·민득효는 연좌시켜 교형에 처하였고 어미 이녀(李女)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율문에 '부인의 나이 60세이거나 폐질(廢疾)을 앓는 사람은 논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민원보는 무신란 충주지역 주모자로, 연좌제에 의해 두 아들이 교형에 처해졌고 다만 어미만 고령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했다. 《영조실록》에 민원보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충주지역 인물은…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충북지역 현감들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국록을 먹고 있는 관료의 입장에서 반군을 적극적으로 진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함은 물론 일부는 반군에 협조했다. 당시 회인현감 김도응, 황간현감 이정휘, 진천현감 임상극, 청안현감 이정열, 보은현감 조문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당연히 영조는 이들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따라서 '失臣節也'(신하의 절조를 잃었다)라며 처형을 명령했다. '군문에서 회인의 전 현감 김도응(金道應)과 황간의 전 현감 이정휘(李挺徽)를 효시케 하라고 명하였으니, 도적의 관문(關文)을 도부(到付)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잃었기 때문이다.'- 인용문 중 '도부'는 관찰사가 수령의 보고에 대하여 답하는 공문을 말한다. 따라서 '도적의 관문을 도부하였다'라는 인용문의 표현은 반란군의 수괴 이인좌가 내려보낸 공문을 김도응, 이정휘 등 당시 두 고을 현감들이 접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이인좌 반란군을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영조는 '失臣節也'라는 말로 이 부분을 문제삼았다. 《영조실록》에는 충주지역 반란 인물로 전회에 소개한 민원보…
[충북일보] 환국(換局)은 정권이 급작스럽게 교체되는 국면을 의미한다. 조선 숙종대에 이같은 환국이 경신, 기사, 갑신년에 3차례 일어났고, 그때마다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주고 받았다. 숙종은 경신환국으로 남인, 기사환국으로는 서인, 그리고 갑술환국으로는 다시 남인을 몰아냈다. 결국 서인이 최종 승자가 됐고, 서인은 그후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파됐다. 환국의 소용돌이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기사환국(1689)으로 전라도 정읍에서 먼저 사약을 받았지만 남인의 영수 민암(閔墨+音·1636-1693) 역시 갑술환국(1694)으로 유배지 제주도에서 사사됐다. 민암의 동생이 민희(閔熙·1614-1687)이고, 그 또한 형과 같은 남인의 당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환국의 소용돌이 과정에서 남해안의 궁벽한 곳으로 유배돼 끝내 그곳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멀리 귀양간 죄인 민희가 순천의 배소에서 죽었다. 민희는 탐오하고 방탕하며 용렬하고 고루하므로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나이가 74세이었다.'- 1728년 일어난 무신란과 관련해 청주지역만 많이 부각돼 있으나 우리고장 충주지역의 호응도 무척 강했고, 이를 이끈 인물이 민희의 손자인 민원
[충북일보] 경종의 급서하고 그의 배다른 동생인 영조가 즉위하자 전국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이들 대부분은 영조에 호감을 갖지 않은 세력인 소론과 남인계열의 당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중에는 권서봉(權瑞鳳·?-1728)이라는 인물로 있었고, 그는 이 상소로 인해 유배를 가야 했다. '임금이 오두석과 이삼령 등의 상소를 읽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흉악하고 참혹하다. 저 무리들의 흉악한 상소가 어찌 모두 자기 마음에서 나왔겠는가. 국문할 필요가 없다. 이덕배·오두석·이삼령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이덕표·권서봉(權瑞鳳)·최선·정전·이가운은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권서봉의 유배생활을 그리 길지 않아, 무신란 1년 전인 영조 3년(1727)에 해배됐다. '을사년 이후 이명의는 북변으로 귀양가 있었고 권서봉도 또한 근읍(近邑)으로 귀양가 있었다. 그런데 정미년에 이르러 이명의는 호남으로 이배(移配)되었고 권서봉도 잇따라 방한(放還)되었다.'- 인용문 중 '근읍'은 말 그대로 가까운 읍, 그리고 '방한'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권서봉은 마음의 칼을 갈고 있었고, 이인좌가 이를 놓칠리가 없었다. 이인좌는 사람을
[충북일보] 병마절도사는 조선시대 각도의 최고 무관, 즉 오늘날로 치면 방위사령관으로 종2품의 품관을 지녔다. 우후(虞侯)는 병마절도사를 보필하는 직으로 달리 아장(亞將), 부장(副將)으로 불렸고, 종3품의 품관을 지녔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직손인 이봉상(李鳳祥·1676-1728)이었고, 바로 밑의 우후는 박종원(朴宗元?-1728)으로 상당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급습하던 그날(3월 15일), 병마절도사(혹은 兵使) 이봉상은 질펀한 술자리를 가졌다. 후대의 표현이지만 다산 정약용은 '서원에서 슬픔에 잠겨'[悲西原]라는 한시에서 이렇게 감회를 읊었다. '도적떼는 못가에서 칼날 갈고 있을 때(群盜池邊礪鋒刃) / 원수의 감영에는 풍류 소리 요란하다(元師營中鬧絲竹) / 곤드레 술에 취해 고운 기생 옆에 끼고(紅酒··挾素妓) / 아문에 칼날 미쳐도 나른하여 못 일어나(劍及牙門·不起)'- 그러나 어찌됐건 병사 이봉상은 '국가'라는 제단에 피를 흘림으로서, 지금은 청주시 모충동의 표충사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반면 당시 우후였던 박종원은 처음부터 무장답지 않은 길로 나갔다. 그는 이인좌 반란군이…
[충북일보] 영조태실 터(청주시 낭성면 무성리)의 소유권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로 지난 1930년대 민간인에게 이전됐다는 설을 제기한 사람은 현재 고인쇄박물관이 근무하고 있는 이규상 씨다. 그는 지난 2005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한국의 태실≫(청원군·청원문화원 간)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책 민담편에 의하면 영조 태실터는 청원 부강의 한 부호에 의해 매입됐고, 그는 일대의 만석꾼으로 이름난 김학현이었다. 그는 연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에서 소금배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선친의 묘자리를 좋은 자리에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또 대대손손 후광을 얻는다는 속신을 믿고 영조 태실터를 매입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상여가 들어오던 날 힘을 합쳐 저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김학현은 건장한 남자 50명을 상여꾼으로 사서 무성리 마을로 돌아왔고, 결국 영조 태실터가 있는 태봉산 정상에 일반인 묘가 들어서게 됐다. 이후 김학현은 마을 주민들이 조부모 묘를 파묘할 것을 걱정, 성모재(誠慕齋)라는 건물을 건립했다. 재실은 평지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재실 용도를 겸한 성모재는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의도
[충북일보] 조선 조정은 왕실이나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경우 도감과 의궤청 등 2개의 임시기구를 설치했다. 도감은 행사를 총괄 집행하고 의궤청은 말 그대로 의궤를 제작했다. 의궤는 후세를 위해 행사의 전말과 경과, 소요된 재용과 인원, 의식절차와 행사 후의 논상(論賞)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을 일컫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궤는 어람용, 의정부, 예조, 사고(史庫) 보관용 등 5~9부가 제작됐다. 영조의 태실을 가봉할 때 만든 의궤도 존재하고 있고, 현재의 명칭은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이다. 이 의궤는 우연찮게 발견됐다. 충북도 문화재계와 청원군청은 지난 1981년 영조 태봉과 관련된 석부재가 일제 감정기에 파괴된 채 산 아래 계곡에서 나뒹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현장조사에 나섰다. 이때 당시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태봉마을 이장인 이상린씨가 "집안에 내려오는 가보"라며 다락에 있던 고전적을 보여줬다. 영조태실 의궤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봤다. 의궤에 의하면 △가봉에 사용된 석부재는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현암에서 채석됐고 △공사는 1729년(영조 5) 9월 12일에 시작해 그해 10월 15일에 종료됐다. 그리고 이때 충청도관찰사는 도내 각 군현에 인력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왕자가 태어나면 그 태를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하였다. 그리고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후 항아리를 다시 큰 항아리에 담았다. 이어 태실 장소가 정해지면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묻게 했다. 이렇듯 조선왕실은 왕자의 태를 무척 소중하게 여겼고, 그것은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대체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성장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가 모두 태에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자 않을 수가 없다. (…)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九經에 정통하며, 단상(團爽)하여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징되는 것이다." 인용문 중 '구경'은 주역, 시전, 서전, 예기, 춘추, 효경, 논어, 맹자, 주례 등 9가지 경전, '단상'은 얼굴이 시원스럽게 생긴 것을 말한다. 왕실이 왕자의 태를 반드시 명당 자리에 묻으려 한 것은 무병장수 기원 외에 명당을 선점,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 태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르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충북에는 경종 태실(충주시 엄정면), 영조 태실(청주시 낭성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 영장(營將)이었던 남연년(南延年·1653~1728)은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천복동(天卜洞)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인근에는 초록바위, 맹골, 곰 이야기 등 구전이 많이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노래기 중말 동쪽에 있는 초록바위는 남연년이 어릴적에 무예를 닦던 곳이다. 또 남연년이 부친을 여의고 맹골 묘에서 아우 남극년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매일 범이 찾아와 벗이 돼 주었다. 이밖에 남연년이 황해도 병마우후로 있을 때 곰(熊)이 고향 마을에 들어와 사람을 해쳤다. 그러자 그가 단기(單騎)로 고향으로 돌아와 곰을 화살로 잡아 그 가죽으로 상자를 만들었다는 구전이 존재하고 있다. 남년연에 대한 이같은 구전은 영조대의 현양사업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일부는 사료에 바탕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김원행(金元行·1702-1772)이 있고, 그의 문집으로 《미호집》(渼湖集)이 존재한다. 그는 《미호집》 제 20권에서 남연년에 대해 △'부모를 섬길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났다' △'곰을 퇴치한 일로 군영의 장졸들이 공의 용맹함에 감복하였다' △'공이 적들에게 사로잡혀 '관덕당'(觀德堂)으로…
[충북일보] 역사에 있어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가들이 "만약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자주 한다. 그가 재위 24년 동안 보여준 개혁과 대통합 그리고 민본(民本) 정치는 분명히 봉건왕조 조선을 구원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정조의 민본정신은 그가 생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백성을 '만천'(萬川)에 비유하고, 자신은 그 위에서 만천을 비추는 명월(明月)로 생각했다. 이처럼 정조는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지고지순한 왕정을 추구했다. 정조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회만 생기면 궁궐 밖으로 행차를 했다. 1백회 이상을 기록한 그의 행차는 백성들의 민원을 집적 현장에서 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했던 호문(好文) 군주답게 《홍재전서》( 弘齋全書)라는 시문집을 184권 100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남겼고, 제 19~25권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제문이 실려 있다. 이중 제 21권에는 1728년 무신란 때 청주읍성에서 희생된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 등을 추모하는 글인 '삼충사 치제문'이 들어 있다. 먼저 이봉상에…
[충북일보] 영조는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의 1728년 무신란 희생자 유족에 대해 마치 속도전을 벌이듯 '보상과 위로'에 나섰다. 이는 역적은 가차없는 응징을 하고, 충신은 국가가 보훈한다는 의도였다.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에게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을 기복시켜 일체로 승품하고 복수장(復讐將)이라 칭호하여 군영으로 나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3월 20일은 1728년 무신란이 발발한지 닷새밖에 되지 않고, 또 반란의 수괴 이인좌가 아직 체포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영조가 아직 반란의 구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청주읍성 희생자의 아들을 승품한 것은 고도의 심리전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이인좌는 3월 24일 경기도 안성 장항령(獐項嶺·사진)·죽산 일대에서 체포됐고, 그로부터 7일후 군기시 앞에서 처형됐다. 영조는 그로부터 2년 후 이번에는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궁궐로 초청해 위로를 하기도 했다. '충신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순국, 효충하여 대절(大節)을 높이 세웠음을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있으나, 당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참모 홍림(洪霖) 등이 저항을 거의 못하고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그만큼 이인좌 반란군의 기습작전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 '곧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소문이 청주목과 경기도 일대에 쫙 퍼져있었다. '윤순이 아뢰기를, "무신년에 신이 감호사로 내려갈 때에 용인·광주·양지·죽산·청주에서는 술을 많이 빚어 놓고 역적들의 군사를 기다리는 자가 있다고 했는데…."'- 《영조실록》을 보면 지금의 사단장격인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은 이인좌의 참모 목함경(睦涵敬)에게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목함경을 문초하니, 목함경이 공초하기를,(…) "이배가 병사(兵使)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에게 대문 안에서 베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때 닭이 울자 이인좌가 신에게 환도와 군복을 주었습니다. 낱낱이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인용문의 병사는 이봉상, 신은 목함경 등을 의미하고 있으나 청주읍성 4대문 중 어느 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봉상은 첫닭이 울 때 쯤 목함경에 의해 대문 안에서 살해당한 것은 분명하다. 남연년을…
[충북일보] 청주시 수동에 충북도기념물 제 17호인 표충사(表忠祠)가 위치하고 있다. 한자 '表'가 동사로 쓰이면 '나타내다', '밝힌다' 등의 뜻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표충'은 '忠을 밝힌다'라는 뜻이고, 따라서 전국에는 사당 표충사가 많이 존재한다. 밀양에는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있고, 우리고장 옥천에도 같은 이름의 조헌 표충사가 있다.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 등이 청주읍성에서 희생됐다. 청주 수동의 표충사는 이들 3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사당 옆에는 기생 해월(海月)의 열녀각이 위치하고 있다. 그녀는 홍림의 애첩이었다. 표충사는 1728년 무신란이 진압된 직후부터 당시 조정 차원의 건립이 검토됐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라 사호했다.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임(洪霖)에게는 호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그러나 사당 표충사가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731년(영조 7)이었다.…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지금의 홍성) 등 4개 목(牧)이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이 4개 목을 충청도의 계수관으로 활용해 이른바 강등 지명을 만들었다. 가령 우리고장 충주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충청도'에서 '충' 짜를 빼고 '공청도'나 '홍청도' 등으로 작명했다. 목사에게는 정3품의 관품이 주어졌다. 충청도관찰사가 종2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낮지 않은 벼슬이다. 따라서 목사에게는 '당상관'의 예우가 주어졌다. 당상관은 직역하면 마루 위라는 뜻으로, 임금과 같은 마루 공간에서 국사를 논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밑은 당하관이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목사는 박당(朴金+堂)이라는 인물이었다. 문집을 포함한 현존하는 사료에는 그에 대한 인물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면 《경종실록》을 보면 그가 청주목사로 부임하기 전에 임천군수를 역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1728년 3월 15일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 성문을 돌파할 당시 취침 중에 있다가 관노의 고함을 듣고 처자, 인부(印符) 등을 버리고 담장을 넘어 탈출했다. '처음에 박당이 잠을 자고 있던 중 급창(及唱)이 적이 이르렀다고 고하자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의 충청도관찰사는 권첨(權詹·1664-1730)이었다. 그는 안동이 본관으로, 조선 관료사회에서 외직의 꽃인 관찰사에 거푸 역임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1724년 전라도관찰사, 1727년 충청도관찰사에 역임됐다. '권첨을 충청감사로 삼았다. 권첨과 정사효(鄭思孝)는 다 이광좌(李光佐)가 천거하였다.'- 인용문에 권첨과 정사효의 이름이 함께 거론된 것은 얄궂은 운명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신란 당시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 권첨은 전술한대로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둘의 우유부단함이 공통적으로 문제가 됐다. 당시 박필현이 전주읍성을 공격할 때 처음의 밀약과 달리, 마음이 변해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인물이 바로 정사효이다.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사전에 밀약이 있었던 점은 향후 신문과정에서 엄청난 죄값으로 작용했다. 권첨은 앞서 밝힌대로 1827년 8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그 즉시기 아닌, 해를 넘겨 부임했다. 그것도 교구(交龜)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인좌 반란군에게 충청감영 관할인 청주읍성을 점령당했다. 교구는 신구 관찰사가 직인을 교환한다는 뜻으로,
이인좌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운징(李雲徵)의 아들로 명문사족의 후예였다. 그의 처가 쪽도 명문으로, 그의 아내 윤자정(尹紫貞)은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의 손녀이다. 두 집안 모두 남인 계열인 것을 감안하면 당색에 따라 혼인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인좌는 아내 윤자정과 사이에 중명(中明)·仁明(인명)·문명(文明)·화명(化明) 등 네 아들을 뒀다. 딸도 뒀을 가능성이 있으나 사료에는 아들 이름만 등장한다. 무신란 때 4명의 아들이 어렸던 것으로 봐, 당시 이인좌 나이는 30대 초~중반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내 윤자정도 거의 같거나 20대 후반의 나이였을 것이다. 이인좌는 청주목 송면(지금의 괴산 청천)의 집을 떠난지 정확히 21일만인 1728년 3월 27일 한양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역죄로 능지처참됐다. 이인좌의 젊은 아내 윤자정은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4월 9일 송면 집에서 청주옥(그림)으로 끌려나와 대역죄인의 아내로써 신문을 받았다. 당시 청주옥은 지금의 남문로 영프라자 자리 쯤에 위치했다. 이인좌는 분명히 박필현과 함께 1728년 무신란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그러나 아내 윤자정은 "마지못해 거사를 했노라"는 식으로 남편 이인
1728년(영조 4) 무신란을 가리켜 청주지역에서는 '신천영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신천영(申天永·?-1728)의 당시 역할과 비중이 크다는 의미다.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 이인좌와 신천영이 내통했거나 사전 공모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다만 이인좌는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점령한 후 곧바로 신천영을 가병사(假兵使), 즉 임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했다. "권서봉을 청주 원으로 삼고 안성에 왔고, 가병사는 신경제의 손자 ·신천영으로 정했습니다."- 고령신씨 신숙주의 후손인 신천영 가문은 연산군 무렵에 청주 상당산성 동쪽인 낭성면과 가덕면 일대로 낙향, 대과급제 24명·진사 80명을 배출한 명문 사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8년 무신년의 난에 신천영 뿐만 아니라 아버지 신은, 숙부 신필회, 동생 신석영, 신익영, 사촌 신필대 등 문중 구성원 대부분이 가담, 영조와 노론세력 타도를 외쳤다. 무신란과 관련해 의외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 한때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1617- 1680)다. 그는 신천영의 5대 조부인 신식(申湜·1551-1623)의 외손자가 된다. 이는 신천영 문중이 선대로부터 남인의 당색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숙종대 청주지역의 남인세력들은 사사
1728년 3월 15일,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공격할 당시에는 월례(月禮), 해월(海月) 등 2명의 기생 이름이 등장한다. 월례는 관기였고, 해월은 충청병영 소속 홍림(洪霖·?-1728)의 첩이었다. 그날 이인좌 반란군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상여꾼으로 위장해 청주읍성에 다다르자 안에서 성문을 열어준 인물이 있었다. 이봉상의 참모 양덕부(梁德溥)와 기생 월례였다. 두 사람은 이인좌에 포섭돼 내통하던 관계였다.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이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로 외치며 영부로 돌입하니, 영기 월례 및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 양덕부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당시 청주를 주둔지로 하고 있던 충청병영은 병마절도사(달리 兵使·종2품) 이봉상(李鳳祥·1676~1728), 바로 밑인 영장(營將·정3품)은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 등의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해월은 세 사람 중 군관 홍림의 첩이었다. 그날 홍림은 청주읍성 밖에서 취침하고 있다가 변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군관 홍림(洪霖)이 변을 듣고는 돌입하여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말하기를, "내가 진짜 절도사다." 하니, 적이 끌어내어 항복하라 협박했으나, 그는…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 영조가 특히 마음 아파한 부분이 있었다. 반란의 주동자들이 하나같이 명문가의 후손들이었다. 같은 지배층임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칼을 겨눴다. 이인좌는 한 때 남인의 영수였던 윤휴의 외손이었고, 청주 신천영(申天永)은 신숙주의 후손, 정행민이라는 인물은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후손이었다. 무신란은 반노론 세력들이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일으킨 반란으로 충청도는 이인좌, 호남은 박필현, 영남은 정희량이 맡았다. 정희량(鄭希亮?-1728)은 정온(鄭蘊·1569-1641)의 직손이었고, 그의 외가쪽 사위가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尹拯)이다. 정온은 대사간, 대제학을 지낸 남인계 인물이고, 윤증은 정치와 학문적으로 우암 송시열과 자주 대립했다. 정희량은 명문가의 후손답게 경제력이 비교적 풍족했다. 실록은 이에 대해 '온 도에서 그 호부(豪富)함이 알려졌으며, 장획(臧獲)과 전택(田宅)이 매우 많았다.'(영조실록 4년 3월 27일자)라고 기록했다. 장획은 잘 쓰지 않는 말로 노비를 일컫는다. 그는 부석사 근처에서 할아버지묘를 이장하는 것처럼 위장한 후 동전과 곡식을 비축하고 반군을 모병했고, 반란에 쓰일 깃발을
이인좌 등 반노론 세력은 무신년(1728년)에 정변을 일으켰지만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거사에 성공할 경우 밀풍 군 탄(坦·?∼1729)으로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굳이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데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밀풍군의 할아버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인조의 장남)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 회(檜)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은 북인의 지원을 받아 보위에 올랐으나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협력한 인조반종에 의해 실각, 제주도로 유배를 간 끝에 사망했다. 당시 서인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광해군의 폐모살제, 즉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증살(방에 불을 때어 죽임)한 점이었다. 바로 이 부분에 방점이 찍힌다.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는 노론과 소론이 분당하기 전으로, 동당(同黨)인 서인이었다. 남인들도 협력자 위치이기는 했으나 신권력 창출에 협력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무신난을 일으킬 당시 반노론 세력들에게는 그런 권력에의 향수가 있었다. 이들은 거사 직전 밀풍군을 찾아가 의사타진을 했던 것으로 실록은 기록했다. 이인좌는 관군에 체포 된 후의 신문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이유익·한세홍
1728년 무신란은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해 일으킨 정치적 성격의 반란이다. 청주목 송면(지금의 괴산군 청천면 송면)의 이인좌는 무신란 때 가장 먼저 기병해 국가시설인 청주읍성 감영과 상당산성을 점령했고, 또 수도 한양으로 진격했다. 따라서 무신란은 이인좌가 주동자가 돼 총괄 기획을 한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꼭지점의 주동자는 박필현(朴弼顯·1680-1728)이라는 인물로 볼 수 있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인좌는 관군에게 생포된 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신이 봄에 동성 5촌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박필현은 재작년 상주로 이사할 때 보아 잘 압니다. 모의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죄과를 모두 박필현에게 떠넘기는 진술로도 볼 수 있으나, 《영조실록》 4년 3월 19일자에도 '박필현이 비록 읍재(邑宰)로 나가 있지만, 사실상 괴수(魁帥)이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인용문중 읍재는 태인현감을 일컫고 있다. 박필현은 소론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경종이 급서, 권
1728년 무신란 1년 전의 《영조실록》에는 다소 의아한 내용이 실려 있다. '형혹성(熒惑星)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니, 이는 병상(兵象)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무신의 변란(變亂)이 있었다.'- 인용문중 △형혹성은 화성 △태미원은 북쪽하늘 삼원(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의 하나로 천자가 다스린다는 공간 △병상은 반란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현재와 미래의 상황이 동시에 기록돼 있는 등 모순된 문장구조를 하고 있다. 사관은 국왕이 승하하면 평소 기록해 놓았던 사초(史草)를 기초로 실록 작성에 들어간다. 따라서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사관 주관이 한 문장에 표현될 수 있다. 위 모순은 이 때문에 가능했다. 아무튼 이 인용문은 멀지 않아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꽤나 퍼져있었음을 반증한다. 이인좌의 신문 내용을 기록한 공초(供草)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신이 봄에 동성 5촌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후술하겠지만 박필현은 1728년 무신란의 또 다른 주동자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인좌보다…
1728년에 일어난 무신란은 영조가 보위에 오르면서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소론과 남인세력이 막후에서 연합, 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설명된다. 이들은 반란의 명분으로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이 있고 △그런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노론 김춘택(金春澤·1670∼1717)의 아들이라는 이른바 '영조 김씨설'을 퍼트렸다. 영조 어머니 숙빈최씨는 본래 김춘택의 묘지기인 최씨의 딸로 무수리로 입궁, 숙종의 눈에 들어 영조를 낳았다. 이처럼 '소론+남인' 연합의 非노론 세력은 사실 여부를 떠나 영조의 정통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당시 정국 전반의 지형이고 이인좌(李麟佐·?∼1728)가 반란을 도모한 데는 가족사가 먼저 작용했고, 그 열쇠말(키워드)은 경신환국과 외조부 윤휴(1617-1680) 그리고 갑술환국과 조부 이운징(李雲徵·?∼1717)이다. 이인좌의 외조부 윤휴는 한때 송시열과 친분이 두터웠다. 특히 19살 때 10년 연장자이던 송시열을 속리산 복천암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우암이 "30년 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일찌기 높은 학문적 경지를 이뤘다. 그러나 예송논쟁
"10일 청주에서 모인 자는 양반이 거의 2백 명이나 되어 하나하나 그 성명을 기억할 수가 없고, (…) 이인좌가 신으로 하여금 가서 영장(남연년 지칭)을 잡아오라 하기에 신이 남문에 앉아서 군사를 보내 붙잡아 오게 해서 신이 붙잡아 가지고 이인좌에게로 갔습니다." 1878년 무신란에 청주사족이 2백여명이나 가담한 것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향촌의 지배층이었던 것은 맞으나 당시 중앙정치 지배세력인 노론계에 속하지는 않았다. 청주지역은 구래로 당색(黨色)이 강한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숙종대 3대 환국을 거치면서 지역의 공기도 달라졌다. 노론과 반노론계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향전(鄕戰)이 시작됐다. 충북대 사학과 고수연 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1665년(현종 6) 송시열은 청주목 신항서원 위패에 대한 위차을 조정했다. 직전까지 경연, 박훈, 송인수, 이색 등이 배향돼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지역 연고가 없는 서인의 영수였던 이이를 주향으로 하고 나머지 8위는 병향했다. 이후 묘정비가 세워지고 1689년 송시열 사후에는 민원진, 권상하 등 골수 노론계 인물이 신항서원 원장직을 맡았다. 그러자 고령신씨, 교하노씨, 진주유씨 등 청주지역 남인들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