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영조는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의 1728년 무신란 희생자 유족에 대해 마치 속도전을 벌이듯 '보상과 위로'에 나섰다. 이는 역적은 가차없는 응징을 하고, 충신은 국가가 보훈한다는 의도였다.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에게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을 기복시켜 일체로 승품하고 복수장(復讐將)이라 칭호하여 군영으로 나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3월 20일은 1728년 무신란이 발발한지 닷새밖에 되지 않고, 또 반란의 수괴 이인좌가 아직 체포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영조가 아직 반란의 구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청주읍성 희생자의 아들을 승품한 것은 고도의 심리전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이인좌는 3월 24일 경기도 안성 장항령(獐項嶺·사진)·죽산 일대에서 체포됐고, 그로부터 7일후 군기시 앞에서 처형됐다. 영조는 그로부터 2년 후 이번에는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궁궐로 초청해 위로를 하기도 했다. '충신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순국, 효충하여 대절(大節)을 높이 세웠음을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있으나, 당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참모 홍림(洪霖) 등이 저항을 거의 못하고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그만큼 이인좌 반란군의 기습작전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 '곧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소문이 청주목과 경기도 일대에 쫙 퍼져있었다. '윤순이 아뢰기를, "무신년에 신이 감호사로 내려갈 때에 용인·광주·양지·죽산·청주에서는 술을 많이 빚어 놓고 역적들의 군사를 기다리는 자가 있다고 했는데…."'- 《영조실록》을 보면 지금의 사단장격인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은 이인좌의 참모 목함경(睦涵敬)에게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목함경을 문초하니, 목함경이 공초하기를,(…) "이배가 병사(兵使)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에게 대문 안에서 베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때 닭이 울자 이인좌가 신에게 환도와 군복을 주었습니다. 낱낱이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인용문의 병사는 이봉상, 신은 목함경 등을 의미하고 있으나 청주읍성 4대문 중 어느 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봉상은 첫닭이 울 때 쯤 목함경에 의해 대문 안에서 살해당한 것은 분명하다. 남연년을…
[충북일보] 청주시 수동에 충북도기념물 제 17호인 표충사(表忠祠)가 위치하고 있다. 한자 '表'가 동사로 쓰이면 '나타내다', '밝힌다' 등의 뜻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표충'은 '忠을 밝힌다'라는 뜻이고, 따라서 전국에는 사당 표충사가 많이 존재한다. 밀양에는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있고, 우리고장 옥천에도 같은 이름의 조헌 표충사가 있다.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 등이 청주읍성에서 희생됐다. 청주 수동의 표충사는 이들 3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사당 옆에는 기생 해월(海月)의 열녀각이 위치하고 있다. 그녀는 홍림의 애첩이었다. 표충사는 1728년 무신란이 진압된 직후부터 당시 조정 차원의 건립이 검토됐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라 사호했다.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임(洪霖)에게는 호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그러나 사당 표충사가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731년(영조 7)이었다.…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지금의 홍성) 등 4개 목(牧)이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이 4개 목을 충청도의 계수관으로 활용해 이른바 강등 지명을 만들었다. 가령 우리고장 충주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충청도'에서 '충' 짜를 빼고 '공청도'나 '홍청도' 등으로 작명했다. 목사에게는 정3품의 관품이 주어졌다. 충청도관찰사가 종2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낮지 않은 벼슬이다. 따라서 목사에게는 '당상관'의 예우가 주어졌다. 당상관은 직역하면 마루 위라는 뜻으로, 임금과 같은 마루 공간에서 국사를 논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밑은 당하관이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목사는 박당(朴金+堂)이라는 인물이었다. 문집을 포함한 현존하는 사료에는 그에 대한 인물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면 《경종실록》을 보면 그가 청주목사로 부임하기 전에 임천군수를 역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1728년 3월 15일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 성문을 돌파할 당시 취침 중에 있다가 관노의 고함을 듣고 처자, 인부(印符) 등을 버리고 담장을 넘어 탈출했다. '처음에 박당이 잠을 자고 있던 중 급창(及唱)이 적이 이르렀다고 고하자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의 충청도관찰사는 권첨(權詹·1664-1730)이었다. 그는 안동이 본관으로, 조선 관료사회에서 외직의 꽃인 관찰사에 거푸 역임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1724년 전라도관찰사, 1727년 충청도관찰사에 역임됐다. '권첨을 충청감사로 삼았다. 권첨과 정사효(鄭思孝)는 다 이광좌(李光佐)가 천거하였다.'- 인용문에 권첨과 정사효의 이름이 함께 거론된 것은 얄궂은 운명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신란 당시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 권첨은 전술한대로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둘의 우유부단함이 공통적으로 문제가 됐다. 당시 박필현이 전주읍성을 공격할 때 처음의 밀약과 달리, 마음이 변해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인물이 바로 정사효이다.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사전에 밀약이 있었던 점은 향후 신문과정에서 엄청난 죄값으로 작용했다. 권첨은 앞서 밝힌대로 1827년 8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그 즉시기 아닌, 해를 넘겨 부임했다. 그것도 교구(交龜)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인좌 반란군에게 충청감영 관할인 청주읍성을 점령당했다. 교구는 신구 관찰사가 직인을 교환한다는 뜻으로,
이인좌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운징(李雲徵)의 아들로 명문사족의 후예였다. 그의 처가 쪽도 명문으로, 그의 아내 윤자정(尹紫貞)은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의 손녀이다. 두 집안 모두 남인 계열인 것을 감안하면 당색에 따라 혼인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인좌는 아내 윤자정과 사이에 중명(中明)·仁明(인명)·문명(文明)·화명(化明) 등 네 아들을 뒀다. 딸도 뒀을 가능성이 있으나 사료에는 아들 이름만 등장한다. 무신란 때 4명의 아들이 어렸던 것으로 봐, 당시 이인좌 나이는 30대 초~중반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내 윤자정도 거의 같거나 20대 후반의 나이였을 것이다. 이인좌는 청주목 송면(지금의 괴산 청천)의 집을 떠난지 정확히 21일만인 1728년 3월 27일 한양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역죄로 능지처참됐다. 이인좌의 젊은 아내 윤자정은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4월 9일 송면 집에서 청주옥(그림)으로 끌려나와 대역죄인의 아내로써 신문을 받았다. 당시 청주옥은 지금의 남문로 영프라자 자리 쯤에 위치했다. 이인좌는 분명히 박필현과 함께 1728년 무신란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그러나 아내 윤자정은 "마지못해 거사를 했노라"는 식으로 남편 이인
1728년(영조 4) 무신란을 가리켜 청주지역에서는 '신천영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신천영(申天永·?-1728)의 당시 역할과 비중이 크다는 의미다.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 이인좌와 신천영이 내통했거나 사전 공모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다만 이인좌는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점령한 후 곧바로 신천영을 가병사(假兵使), 즉 임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했다. "권서봉을 청주 원으로 삼고 안성에 왔고, 가병사는 신경제의 손자 ·신천영으로 정했습니다."- 고령신씨 신숙주의 후손인 신천영 가문은 연산군 무렵에 청주 상당산성 동쪽인 낭성면과 가덕면 일대로 낙향, 대과급제 24명·진사 80명을 배출한 명문 사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8년 무신년의 난에 신천영 뿐만 아니라 아버지 신은, 숙부 신필회, 동생 신석영, 신익영, 사촌 신필대 등 문중 구성원 대부분이 가담, 영조와 노론세력 타도를 외쳤다. 무신란과 관련해 의외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 한때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1617- 1680)다. 그는 신천영의 5대 조부인 신식(申湜·1551-1623)의 외손자가 된다. 이는 신천영 문중이 선대로부터 남인의 당색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숙종대 청주지역의 남인세력들은 사사
1728년 3월 15일,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공격할 당시에는 월례(月禮), 해월(海月) 등 2명의 기생 이름이 등장한다. 월례는 관기였고, 해월은 충청병영 소속 홍림(洪霖·?-1728)의 첩이었다. 그날 이인좌 반란군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상여꾼으로 위장해 청주읍성에 다다르자 안에서 성문을 열어준 인물이 있었다. 이봉상의 참모 양덕부(梁德溥)와 기생 월례였다. 두 사람은 이인좌에 포섭돼 내통하던 관계였다.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이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로 외치며 영부로 돌입하니, 영기 월례 및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 양덕부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당시 청주를 주둔지로 하고 있던 충청병영은 병마절도사(달리 兵使·종2품) 이봉상(李鳳祥·1676~1728), 바로 밑인 영장(營將·정3품)은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 등의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해월은 세 사람 중 군관 홍림의 첩이었다. 그날 홍림은 청주읍성 밖에서 취침하고 있다가 변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군관 홍림(洪霖)이 변을 듣고는 돌입하여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말하기를, "내가 진짜 절도사다." 하니, 적이 끌어내어 항복하라 협박했으나, 그는…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 영조가 특히 마음 아파한 부분이 있었다. 반란의 주동자들이 하나같이 명문가의 후손들이었다. 같은 지배층임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칼을 겨눴다. 이인좌는 한 때 남인의 영수였던 윤휴의 외손이었고, 청주 신천영(申天永)은 신숙주의 후손, 정행민이라는 인물은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후손이었다. 무신란은 반노론 세력들이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일으킨 반란으로 충청도는 이인좌, 호남은 박필현, 영남은 정희량이 맡았다. 정희량(鄭希亮?-1728)은 정온(鄭蘊·1569-1641)의 직손이었고, 그의 외가쪽 사위가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尹拯)이다. 정온은 대사간, 대제학을 지낸 남인계 인물이고, 윤증은 정치와 학문적으로 우암 송시열과 자주 대립했다. 정희량은 명문가의 후손답게 경제력이 비교적 풍족했다. 실록은 이에 대해 '온 도에서 그 호부(豪富)함이 알려졌으며, 장획(臧獲)과 전택(田宅)이 매우 많았다.'(영조실록 4년 3월 27일자)라고 기록했다. 장획은 잘 쓰지 않는 말로 노비를 일컫는다. 그는 부석사 근처에서 할아버지묘를 이장하는 것처럼 위장한 후 동전과 곡식을 비축하고 반군을 모병했고, 반란에 쓰일 깃발을
이인좌 등 반노론 세력은 무신년(1728년)에 정변을 일으켰지만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거사에 성공할 경우 밀풍 군 탄(坦·?∼1729)으로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굳이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데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밀풍군의 할아버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인조의 장남)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 회(檜)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은 북인의 지원을 받아 보위에 올랐으나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협력한 인조반종에 의해 실각, 제주도로 유배를 간 끝에 사망했다. 당시 서인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광해군의 폐모살제, 즉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증살(방에 불을 때어 죽임)한 점이었다. 바로 이 부분에 방점이 찍힌다.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는 노론과 소론이 분당하기 전으로, 동당(同黨)인 서인이었다. 남인들도 협력자 위치이기는 했으나 신권력 창출에 협력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무신난을 일으킬 당시 반노론 세력들에게는 그런 권력에의 향수가 있었다. 이들은 거사 직전 밀풍군을 찾아가 의사타진을 했던 것으로 실록은 기록했다. 이인좌는 관군에 체포 된 후의 신문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이유익·한세홍
1728년 무신란은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해 일으킨 정치적 성격의 반란이다. 청주목 송면(지금의 괴산군 청천면 송면)의 이인좌는 무신란 때 가장 먼저 기병해 국가시설인 청주읍성 감영과 상당산성을 점령했고, 또 수도 한양으로 진격했다. 따라서 무신란은 이인좌가 주동자가 돼 총괄 기획을 한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꼭지점의 주동자는 박필현(朴弼顯·1680-1728)이라는 인물로 볼 수 있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인좌는 관군에게 생포된 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신이 봄에 동성 5촌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박필현은 재작년 상주로 이사할 때 보아 잘 압니다. 모의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죄과를 모두 박필현에게 떠넘기는 진술로도 볼 수 있으나, 《영조실록》 4년 3월 19일자에도 '박필현이 비록 읍재(邑宰)로 나가 있지만, 사실상 괴수(魁帥)이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인용문중 읍재는 태인현감을 일컫고 있다. 박필현은 소론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경종이 급서, 권
1728년 무신란 1년 전의 《영조실록》에는 다소 의아한 내용이 실려 있다. '형혹성(熒惑星)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니, 이는 병상(兵象)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무신의 변란(變亂)이 있었다.'- 인용문중 △형혹성은 화성 △태미원은 북쪽하늘 삼원(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의 하나로 천자가 다스린다는 공간 △병상은 반란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현재와 미래의 상황이 동시에 기록돼 있는 등 모순된 문장구조를 하고 있다. 사관은 국왕이 승하하면 평소 기록해 놓았던 사초(史草)를 기초로 실록 작성에 들어간다. 따라서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사관 주관이 한 문장에 표현될 수 있다. 위 모순은 이 때문에 가능했다. 아무튼 이 인용문은 멀지 않아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꽤나 퍼져있었음을 반증한다. 이인좌의 신문 내용을 기록한 공초(供草)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신이 봄에 동성 5촌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후술하겠지만 박필현은 1728년 무신란의 또 다른 주동자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인좌보다…
1728년에 일어난 무신란은 영조가 보위에 오르면서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소론과 남인세력이 막후에서 연합, 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설명된다. 이들은 반란의 명분으로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이 있고 △그런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노론 김춘택(金春澤·1670∼1717)의 아들이라는 이른바 '영조 김씨설'을 퍼트렸다. 영조 어머니 숙빈최씨는 본래 김춘택의 묘지기인 최씨의 딸로 무수리로 입궁, 숙종의 눈에 들어 영조를 낳았다. 이처럼 '소론+남인' 연합의 非노론 세력은 사실 여부를 떠나 영조의 정통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당시 정국 전반의 지형이고 이인좌(李麟佐·?∼1728)가 반란을 도모한 데는 가족사가 먼저 작용했고, 그 열쇠말(키워드)은 경신환국과 외조부 윤휴(1617-1680) 그리고 갑술환국과 조부 이운징(李雲徵·?∼1717)이다. 이인좌의 외조부 윤휴는 한때 송시열과 친분이 두터웠다. 특히 19살 때 10년 연장자이던 송시열을 속리산 복천암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우암이 "30년 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일찌기 높은 학문적 경지를 이뤘다. 그러나 예송논쟁
"10일 청주에서 모인 자는 양반이 거의 2백 명이나 되어 하나하나 그 성명을 기억할 수가 없고, (…) 이인좌가 신으로 하여금 가서 영장(남연년 지칭)을 잡아오라 하기에 신이 남문에 앉아서 군사를 보내 붙잡아 오게 해서 신이 붙잡아 가지고 이인좌에게로 갔습니다." 1878년 무신란에 청주사족이 2백여명이나 가담한 것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향촌의 지배층이었던 것은 맞으나 당시 중앙정치 지배세력인 노론계에 속하지는 않았다. 청주지역은 구래로 당색(黨色)이 강한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숙종대 3대 환국을 거치면서 지역의 공기도 달라졌다. 노론과 반노론계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향전(鄕戰)이 시작됐다. 충북대 사학과 고수연 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1665년(현종 6) 송시열은 청주목 신항서원 위패에 대한 위차을 조정했다. 직전까지 경연, 박훈, 송인수, 이색 등이 배향돼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지역 연고가 없는 서인의 영수였던 이이를 주향으로 하고 나머지 8위는 병향했다. 이후 묘정비가 세워지고 1689년 송시열 사후에는 민원진, 권상하 등 골수 노론계 인물이 신항서원 원장직을 맡았다. 그러자 고령신씨, 교하노씨, 진주유씨 등 청주지역 남인들
조선시대 무신란(戊申亂)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반란군이 우리고장 청주읍성(그림)을 유혈 점령하면서 발생했다. 《영조실록》은 하루 전인 3월 14일자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때 도하(都下)에 근거없는 풍문이 날로 흉흉하여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들고 서 있어 조석 사이도 보장할 수 없는 듯하였고, 남산(南山) 아래 일대에는 가족을 이끌고 피해 도망하는 사부(士夫)들이 많아서 나룻터에 길이 막혔으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함은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미 대규모 국가 반란이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한양도성 안에 쫙 퍼진 모습이다. 이는 한양도성 안에도 무신 반란군과 내통하는 자가 많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같은 날짜 《영조실록》에는 '남산 아래에 사는 나라를 원망하는 많은 부류들은 그 역모를 서로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도 보이고 있다. 소론의 지지를 받고 보위에 오른 경종(景宗·1688~1724)이 재위 4년 게장을 먹은 후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급서했다. 그러자 노론의 후원을 받던 왕세제 연잉군(후에 영조·1694~1776)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대 반노론(소론+남인)으로 정치 지형이 급변했다. 이에 반노론 세력은…
음성군은 지금은 인구 10만명에 2읍 7면의 비교적 큰 군세(郡勢)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06년 전까지는 달랐다. 지금의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금왕읍, 감곡면, 생극면, 삼성면, 대소면, 맹동면 등 군 북부와 서부지역은 충주목에 속했다. 소이면도 1914년 전까지는 충주목 소파면(蘇坡面)과 사이포면(沙伊浦面)에 속하던 지역으로, 지금의 면이름은 두 곳에서 한 글자씩을 조합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쇄잔했던 음성군의 모습을 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충주 병제천(幷梯川)에 이르기 7리, 서쪽으로 충주 건천(乾川)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청안(淸安)에 이르기 26리, 북쪽으로 충주 석적산(石積山)에 이르기 19리이다. 호수가 1백 71호요, 인구가 7백 26명이다.' 현의 중심지인 읍치(邑治)에서 가까운 곳은 7리, 멀어야 26리 정도면 이웃 고을의 경계에 도달하고 있다. 고을의 인구도 8백명을 넘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현의 지위를 지녔던 괴산군 청안은 지금은 면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과거 한 때는 다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웃 음성현을 흡수, 대읍의 위세를 지닌 적도 있었다. '전에 과천(果川)을 금천현
전통의학은 침(鍼)의 종류에 대해 '구침'(九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침의 종류가 참침·원침·시침·봉침·피침·호침·장침·대침·원리침 등 아홉가지 된다는 뜻이다. 관련 사전에 의하면 이중 대침(大鍼)은 관절질환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대침은 9분야(九野)를 상징하고 몸 전체에 있는 병사(病邪)가 관절 부위에 머물러 있는 병을 치료한다. 길이는 4촌으로 관절 속에 있는 물(水)을 빼내는 데 쓰인다.대침은 호침보다 긴 것으로, 침을 불에 달구어 놓는 번침(燔鍼)에도 쓰인다. ≪황제내경≫에 나오는 '수자(火+卒刺)'라는 것도 바로 이 화침을 말한다. 조선 인조대에 번침을 잘 놓는 침의로 이형익(李馨益·?-?)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출신인 그는 1632년(인조 10) 침술로 명성(名聲)이 있어, 도성으로 불려가 이듬해부터 인조가 죽을 때까지 번침을 시술한 공으로 현령을 지냈다. 그 후 인조가 죽자 책임을 지고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651년(효종 2)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趙氏)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치료를 위해 왕의 특별 명령으로 사면되었다. 《인조실록》에는 번침을 잘 놓는 침의로 반충익(潘忠翊)이라는 인물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여자로 변한 곰인 웅인(熊人)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금강수계에 위치한 공주 곰나루(熊津)에도 비슷한 내용의 전설이 존재한다. 먼 옛날 공주 연미산 아래에 암곰이 살았고, 성장해서는 시집을 가고 싶어했다. 어느날 어부가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오는 것을 보고 곰이 다가갔다. 이때 어부가 두려움 때문에 기절하자 동굴로 업고 와 극진히 간호했다. 그후 어부는 곰기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으며 탈출을 궁리했으나 곰이 동굴 입구를 큰 돌로 막고 나가므로 할 수 없이 곰과 살게 됐다. 마침내 곰이 잉태하여 새끼를 낳자 어부는 곰을 돌봐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곰이 방심을 했고 어부는 탈출에 성공했다. 어부가 없어진 것을 안 곰은 강가에서 되돌아올 것을 애걸했으나 어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곰은 새끼를 죽이고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 뒤부터는 금강에 풍랑이 자주 일어 나룻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빈발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위령제를 지내자 나룻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단군신화와 곰나루 전설은 세부 전개는 다르지만, 곰과 인간이 결합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점에서 큰 얼개는 같다. 사학자들은 이를 역사적 사건이 신화로 상징된…
조선 광해군 때 발생한 강변칠우(江邊七友) 사건은 '칠우'가 우리고장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강탈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칠우(七友)는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으로, 모두 명문가의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적자가 아닌 서자들인 까닭에 중앙 관계에 진출할 수 없었고, 그러자 시와 술로 불만을 달래다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심문하는 과정에서 대북파에 의해 역모로 조작, 칠우중 박치의를 제외한 6명이 전격 처형됐다. 그러나 훗날 심문에서 박정민이라는 인물이 "5월 5일 충원(忠原)에서 군대를 모아 정씨(鄭氏)를 추대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광해군 8년 6월 24일자)라고 진술, 완전한 조작으로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충원'은 우리고장 충주, '정씨'는 난세에 출현한다는 선인(仙人)을 일컫는다. 광해군이 박치의 체포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이중에는 '현상금+관직 수여'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때 박치의에게 현상금을 걸고 잡아들이려 하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엄하게 독촉했는데, 잡는 자에게는 바로 아경(亞卿)의 직을 제수하고 정훈(正勳)에 녹용하겠다고까지 현상하였다.' 인용문 중 '아경을
조선시대 삼사의 하나로 홍문관이 있고, 그 수장은 정2품의 대제학(大提學)이었다. 이런 대제학들 사이에는 '주문연'(主文硯)이라는 벼루를 주고 받는 아름다운 전통이 존재했다. 굳이 벼루를 주고 받은 것은 대제학이 '문'(文)을 총괄하는 최고의 벼슬자리였기 때문이다. 《증보문헌비고》 권221 직관고는 주문연과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주문연은 남곤(南袞)으로부터 이행(李荇)에게 전해진 뒤 서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덕형(李德馨)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 그런데 명(明)나라 군대가 이를 얻어서 가져다가 단지를 괴는 돌로 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이 보고서 도로 가져와 홍문관(弘文館)에 둠으로써 다시 전해지게 되어 이이첨(李爾瞻)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이이첨이 패(敗)하게 되자 다시 잃어버렸는데, 신흠(申欽)이 대제학으로 있을 적에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으로 다시 큰 벼루 하나를 만들어 '전심연(傳心硯)'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 남아 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대한제국기인 1903~1908년 사이에 고종황제의 칙명(勅命)으로 편찬된 2백50권 분량의 책이다. 따라서 주문연은 △임진왜란…
≪쇄미록·王+肖尾錄≫의 저자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서울 태생이나 그의 일기에는 우리고장 황간의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외가가 황간이기 때문으로, 그는 성장기를 황간에서 보냈다. 오희문은 1591년(선조 24) 11월 황간의 외가를 방문하고, 또 장흥·성주 등에 있는 노비의 신공도 받을 겸 두 명의 종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중도에 임진왜란을 당해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그 과정을 10년 가까이 기록한 일기가 《쇄미록》으로, 1601년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연구논문을 보면 그의 일기에는 총 24명의 노비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은 상전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삿일, 누에치기, 물품교역, 편지와 안부전달, 상전의 나들이길 수행, 밥짓기, 땔감나무 마련 등 집 안팎의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다. 이와 관련 오희문은 '막정'이라는 노비가 죽자 "살아서는 몸을 바치고 죽어서는 재산을 바치니 공이 있는 노비'라고《쇄미록》에 적었다. 이 문장은 조선시대 노비들도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노비가 죽으면 그 재산은 주인의 것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사료에는 외거노비들 중에서 재산을 축적하는 경우가 더러
청주 중앙공원의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사진)이 수개월 동안의 보수작업을 마치고 시민들에게 다시 본모습을 드러냈다. 충청병영이 있던 지금의 중앙공원 일대에는 병영과 관련된 건물이 여러 동 존재했었다. 충청병마절도사의 처소인 청진당, 도서실격인 후당과 반시당, 병사의 집무소인 운주헌, 지휘소인 통군루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병마절도사영문 한 채만 남아 있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 15호인 병마절도사영문은 지난 1988년까지 '청녕각'(淸寧閣)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던 것을 이상주와 박상일 씨 등의 고증 노력으로 구 청원군청 내의 청주동헌이 '청녕각'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같은 오인은 한자의 사용 용례만 살폈다면 바로 확인될 수도 있었다. 한자 '閣'(각)은 규모를 꽤 갖춘 집이나 2층으로 이뤄진 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개 섬돌을 통해 대청으로 올라가는 구조이다. 이에 비해 한자 '樓'(누)는 2층 구조로, 오르는 계단이 사닥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2층 건물인 충청병마절도사 영문이 '청녕각'으로 불렸던 것에는 당연히 의심이 뒤따랐어야 했다. 현재 충청병마절도사 영문은 중앙공원 정문의 바로 우측에 진입로와 평행한 방
유석(劉石)의 시역(弑逆) 미수사건 때문에 충주목이 예성부로 강등된 것(그림)은 처음부터 문제점이 많은 정책적 판결이었다. 유석이 강원도 원주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는 결과적으로 충청도와 충주목이 입었다. 충주의 지식인이 가만있지 않았다. 유생 허초(許礎)라는 인물이 승정원 앞으로 상언(上言)을 했다. 상언은 관원으로서가 아니라 사인(私人)으로서 자기 주장을 올린다는 점에서 상소와 차이가 있다. 허초는 장문의 상언에서 충주목 강등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유석은 전일 비록 본주(충주목 지칭)에 살기는 하였으나 그의 아비와 마찬가지로 맹인으로서 구걸하러 다니고 일정한 거주지가 없었기 때문에 본주에 호적 대장이 없었고, 유석이 아비를 따라 구걸하러 다닌 기간은 어림잡아 4∼5년이었습니다.'- 허초는 또 절차상의 잘못도 지적했다. '유석은 후에 원주 서면(西面) 강천리(江川里)에 사는 양인(良人) 이금산(李今山)의 딸에게 장가들어 살다가 극악 무도한 죄를 저질러 원주 관아에 수금되어 처결되었으니 이는 곧 원주 사람입니다. 그런데 추안(推案)에 본주 태생이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읍호를 강등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율에 의하면 한번 읍호가 강등되면
조선시대 충주지역에서는 공교롭게도 청주와 같은 8번의 읍호강등 사건이 일어났다. 발생 순서대로 살펴보면 △유석 사건(1539년·중종 19) △이홍윤 사건(1549년·명종 4) △유인발 모반사건(1613년·광해군 5) △안집중 모반사건(1628년·인조 6) △채문영 모반사건(1644년·인조 22) △유수원 모반사건(1755년·영조 3) △이인좌의 난 가담(1728년·영조 4) △채수영 모반사건(1765년·순조 1) 등이다. 충주의 첫번째 읍호강등은 1539년 6월에 일어났고, 그 이유는 유석(劉石)이라는 인물의 시역(弑逆) 미수사건 때문이었다. '시역'은 지금으로 말하면 존속살인으로 부모나 임금을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조정은 이를 강상윤리를 위반한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해 매우 엄중하게 다스렸다. 『중종실록』은 사건전개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지난 경자년 원주(原州) 사람 유석(劉石)이 자기 아비를 살해하기 위해 매우 추운 겨울에 강가 바위 위로 아비를 꾀어 와서 물속으로 밀어넣고서, 혹 살아날까 우려하여 대나무 막대로 머리와 뺨 등을 마구 난타하여 막대도 부러졌고 출혈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침몰하여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고종의 친부이다. 그와 친척인 사이로 이하전(李夏銓·1842~1862)이라는 인물이 있다. 미리 말하면 이하응은 일부러 '바보짓'을 해서 세도정치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이하전은 '바보짓'을 하지 않아 안동김씨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리면서 제주도로 유배된 끝에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의 나이 채 피어나지도 못한 21살이었다. 1862년(철종 13)년 7월 당시 오위장(五衛將) 이재두(李載斗)가 "김순성(金順性)과 이긍선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했다. 오위장은 오위도총부 소속이면서 오위의 군사를 거느리던 으뜸 벼슬로, 정3품의 품계를 지녔었다. 김순성은 체포됐고 곧 국문이 시작됐다. 이와 관련, 『철종실록』은 '김순성이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라고 서술했다. 그는 혐의가 잘 입증되지 않았는지 곧 풀려났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이유호(李儒虎)를 대질시켰을 적에 정유성(鄭裕誠)의 분소(分疏)가 너무도 명백했으므로, 온갖 요악한 짓을 한 김순성도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부당하게 죄에 걸린 정상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특별히 방송(放送)시키소서." 하니,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