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오늘부터 농암(聾菴) 유수원(柳壽垣·1694-1755)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새로운 주제이지만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난)과 정치·사회적인 흐름이 연결돼 있다. 그는 조선후기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우서》(迂書)라는 실학서를 남겼다. 유수원은 호를 '농암', 즉 귀머거리라고 지을 정도로 신체적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충추 출생, 단양·문의현감 역임 등 우리고장과 큰 인연을 지니고 있으나, 지역 차원의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수원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이다. 그는 형조정랑을 지낸 유성오(柳誠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유상재(柳尙載)이고, 아버지는 유봉정(柳鳳延)이며, 어머니는 김징의 딸이다. 이처럼 유수원家는 명문사족의 DNA를 지니고 있었으나, 문제는 당색(黨色)이 소론 그 가운데서도 준론(峻論)이라는데 있었다. 서인은 숙종대에 이르러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노장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소장파인 소론으로 분화됐다. 이후 소론은 다시 영조에 강경했던 준론(혹은 준소)과 완론(완소)으로 나뉘었다. 유수원은 충청도 충주목에서 유봉정의 맏아들로 출생했으나 유년기는 한양에
[충북일보] 영조 39년(1763) 이번에는 내륙이 아닌 섬 제주도에서 이른바 '심내복(沈來復) 역모사건'이 발각됐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심내복, 조영득(趙榮得), 유동혼(柳東渾), 이익좌(李翼佐), 윤몽정(尹夢鼎), 신정관(申正觀) 등 십 수 명이 결탁,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심내복은 과거 답안지에 역모의 글을 적어낸 심정연의 조카이고, 경술년 사건으로 흑산도에 유배된 심익년의 아들이다. 경술년 사건은 무신란 사건과 관련에 그 잔존세력이 또 다시 국문을 받고 절도 등으로 유배된 사건으로 당시 아버지 심익년은 흑산도로, 아들 심내복은 제주도로 유배됐다. 심문 과정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장사치로 위장시켜 바다를 건너가서 먼저 호남의 고을을 습격하고 거기에서 군기와 군량을 취득한 다음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묘사(廟社)를 범하여 불을 지르고 귀양가 있는 종신 이훈(李壎)을 추대키로 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서두에 거론한 인물은 대부분 연좌죄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를 온 인물들로, 이중에는 신정관이라는 이름도 보인다. 그는 1728년 무시란 때 이인좌에 의해 충청병사에 임면된 신천영(申天永)의 조카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연불만지율'(年不滿之律)이라는 법이
[충북일보] '과거시험 답안지에 정답대신 역모의 글을 써내다.' 이 희대의 사건은 나주괘서 사건이 정리된 영조 31년(1755)에 발생했다. 그것도 임금 영조가 친림하여 과거를 보는 가운데 발생, 당시 조정에 엄청난 충격파를 안겨줬다. "임금이 바야흐로 친림하여 시사(試士)하는데 한 시권(試券)이 처음에는 과부(科賦)를 짓는 것처럼 하다가 그 아래 몇 폭에다가는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씨를 썼는데 모두 난언패설이었다. 고관이 앞으로 나와 그 글을 진달하니, 임금이 열어 보기를 명하였는데…."- 인용문의 시권은 과거시험 답안지를 의미하고 있다. 이날 과거에서는 시권 뿐만 아니라 역모의 내용을 적은 상변서(上變書)도 함께 발견됐고, 이 내용을 본 영조는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또 위소(衛所)의 하리(下吏)가 시권을 축(軸)으로 만들 때 과제(科題)를 쓰지 않은 한 종이를 보았는데 첫 행에 '상변서(上變書)'라 쓰여 있었으나 그의 이름은 없었다.(…)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한과 분노의 감정이 뒤범벅이 된 영조는 "종이 가득히 장황하게 쓴 것이 음참(陰慘)하기가 헤아릴 수 없어 비단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충북일보] 무신란(영조 4년·1728)은 일단락 됐으나 여진은 계속 됐다. 영조 31년(1755) 전라도 나주에서 괘서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월 20일 나주객사 망화루(望華樓)의 동쪽 두번째 기둥에 흉서가 내걸렸다. 괘서에는 "백성들은 곤궁한데 더욱 침학을 당하고 있으니 구제하고자 한다. 군사를 움직일 것이니 백성들은 놀라지 말라"는 내용이 익명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전라감영은 윤지(尹志·1688∼1755)라는 인물을 괘서의 범인으로 자연스레 지목했다. 마을 사람들이 윤지의 짓이라고 수군거렸고, 가노(家奴)들 또한 자기 상전의 짓이라고 진술했다. 윤지는 소론의 가문으로 낙인찍혀 제주에서 10년, 나주에서 20년 등 당시 30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하던 인물이었다. 소론의 영수였던 그의 부친 윤취상(就商·?-1725)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김일경 당여(무리)로 지목돼 국문을 받고 처형됐다, 그는 유배생활이 길어지자 점술사 정수헌(丁壽憲)이라는 인물을 가까이 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나는 시기를 예상해 보는 점을 자주 쳤다. 《추안급국안》이라는 당시 수사 기록에 의하면, 술사 정수헌은 윤지가 '田'자를 고르자 "'口' 자가 '十'자를 머금고 있으니 10년 동안 헛
분무원종공신이 선전된지 1년 후 영조 임금에게는 《서정록》이라는 책자가 올려졌다. 이 책자는 분무원종공신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추가로 공신에 포함시키는 명담을 담고 있다. 공신 제외자들의 불만을 달래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당시 우의정 이태좌(李台佐)는 관료로서 불만을 쏟아냈다. "조정에서 공을 논하여 상(賞)을 행한 것이 이미 충분한데도 군교(軍校)들이 모두들 별단자(別單子)에 들지 못한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있으니, 상을 바라는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영조는 이에 대해 "전례에 따라 만들어 군정(軍情)을 위로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로 《서정록》을 작성하도록 하명했다. 그 결과 무신란의 본산지인 청주지역 등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공신록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또 다시 크게 증가했다. 그 유형은 ①현재의 관품에서 승진하는 경우(가자·加資), ②노비 등 천민의 위치에서 면천되는 경우, ③국가부역을 일정기간 면제받는 경우, ④중인에서 양반이 되는 경우 등으로 분류됐다. ①과 관련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청주(淸州)의 토포 군관 고윤창(高允昌)에게는 가자하며, 군뢰 이왕산(李往山)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라."-. 인용문 가운데 '토포'는…
공신은 국가에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리는 칭호로, 정공신(正功臣)과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구분된다, 정공신은 대개 3등으로 나뉘고, 그 수는 적으면 5~6인 많으면 100여명까지 이르렀다. 정공신은 등급에 따라 공신에게 내려지는 특전·토지·노비 등의 지급 정도가 차이가 있었다. 이에 비해 원종공신은 그 공이 정공신에 미치지 못하나 다소의 공이 있는 자들을 역시 3등급으로 나눠 녹훈하였고 그 수는 적으면 9백여명, 많으면 최대 9천여명에 이르렀다. 조선 태조(이성계) 집권기에 발생한 개국원종공신의 경우 그 수가 무려 1천2백여명에 이르렀고 1등급에게는 토지 30결과 노비 3口가 주어졌다. 전통시대에는 노비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名이 아닌 口로 호칭했다. 이밖에 개국원종공신 2등급에게는 토지 15결, 3등급에게는 물질적인 혜택은 없고 특전만 내려졌다. 그러나 이후로는 원종공신에 대한 토지와 노비의 지급은 없어지고 특전만 3등급으로 나누어 내려졌다. 영조 4년(1728) 무신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에게는 분무공신(奮武功臣)의 공신호가 주어졌다. 분무공신 1등에 오명항(吳命恒·1673~1728), 2등에 박찬신(朴纘新)·박문수(朴文秀)·이삼(李森
"전전하여서 문의의 茂陵亭에 갔었는데, 또한 李愼의 집 앞뒷산에 피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았 습니다. 內外 松谷의 5, 6 촌락이 소요스러웠던 일이 과연 있었습니다. 兵營에서 저를 체포한 것은 제가 이 말을 전한 때문인 것 같은데 이는 너무나 원통한 일입니다. 저는 박취림에게서 들었습니 다만, 言根은 12인을 거쳤습니다."-인용문은 문의 괘서사건 혐의자의 한 명인 우규장이 신문 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그는 향리 출신의 사족으로 '松谷의 5, 6 촌락이 소요스러웠다'고 밝혔다. 그의 공초에서 보듯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산됐으로 최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략 두 가지가 그 이유로 꼽히고 있다. 첫째, 저항을 준비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조직체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괘서 후에 구체적으로 저항을 이끌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둘째, 자금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거사실행을 담보할 수 있는 군사적 뒷받침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지서는 20년 전에 청주에서 일어난 무신란(이인좌의 난)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고, 또 이를 부분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무신란'이라는 명칭을 두 번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이지서가 말하기를, '
1748년(영조 24) 문의 이지서(李之曙) 괘서사건에는 다양한 인물의 군상이 등장하고 있다. 이영손(李榮孫), 박민추(朴敏樞), 박철택(朴哲澤), 박험백(朴驗白), 김재형(金再炯), 순세재(順世才), 오수만(吳遂萬), 오명후(吳命·), 이항연(李恒延), 박취문(朴就文), 이태위(李泰渭), 우규장(禹圭章). 당시 영조는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이들을 친국(親鞫)했고, 거명된 이름들은 그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다. 이영손은 이지서의 아들이다. 박민추는 문의향교를 출입하던 교생(校生), 즉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박철택·김재형 등은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나 신문 과정의 언어 구사력을 보면 사족(士族)으로 추정된다. 박험백은 박민추의 배다른 동생인 서얼이었고, 순세재는 역노(驛奴)였다. 오수만과 오명후는 부자간으로 사족층이었다. 이항연도 문의의 사족이었고 박취문과 이태위는 박민추의 사촌으로 무신란에 참여했다가 도망한 인물들이다. 이지서는 괘서사건을 일으킨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은 첫째는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나라에 해를 끼치게 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인심을 동요시켜 피란하게 되면 부자들의 곡식을 가난한 사람들이 얻어 먹을 수 있
영조 24년(1748) 3월에 발생한 이지서(李之曙) 괘서사건은 궁궐투서→와언 유포→청주 소요→문의 괘서 등의 순으로 전개되었다. 3월 17일 한양도성 궁궐에 괘서가 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4월 중순에는 충청도 청주에 "왜구가 곧 쳐들어온다"는 와언이 유포되면서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피난행렬이 길을 메웠다. 곧이어 청주 인근 문의지역에 "문의 백성들은 어육(魚肉·물고기 밥)이 될 것이다. 倭人 같은데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弓弓이 이롭다"는 비기(秘記)가 유포되면서 고을이 텅 빌 지경이 됐다. 지금까지의 내용 전개는 누군가가 사건을 면밀히 기획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충청감영이 수사에 나섰고 그 결과, 이지서라는 문의지역 50대 사족(士族)이 범인으로 체포됐다.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호서의 요적 이지서(李之曙)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궐에 투서한 적은 끝내 추포하지 못했는데, 여름에 청주·문의 사이에 괘서의 변이 발생하여 몇 고을에 계속 소요가 일었으므로 짐을 싸서 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려(州閭)가 모두 텅 비었다. 이지서가 감영에 의해 기포되었는데,…
[충북일보] 정감록(鄭鑑錄)은 약간 개념이 모호한 예언서이다. 감결(鑑訣),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 등 역대의 비기를 통칭하여 정감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내용의 중심을 이루는 감결만 가리켜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중 정감록의 원전으로 인식되고 있는 감결은 이심(李沁)·이연(李淵)이라는 인물이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과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沁이 말하기를 백두산에서 내로운 맥운이 금강으로 옮아가고 태백산맥에 이르게 되니 산천鍾氣가 계룡산으로 흘러들어가서 鄭氏의 팔백년 도읍지가 될 것이고, 그후에 가야산으로 흘러들어가니 趙氏의 천년 땅이 되고, 다음으로 전주 范氏(범씨)의 육백년 땅이 된다. 송악에 이르면 王氏가 도읍을 부흥할 것이다."- 정감록은 단순 예언서를 뛰어넘어 역성혁명의 구체적 대상, 각 왕조의 교체순서, 왕조의 존속시간 등을 풍수지리를 곁들여 자세하게 설정하여 놓았다. 정감록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존속기간은 300~500년 사이로 18세기에 이르면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는 것으로 예언돼 있다.문의현 이지서의…
1748년(영조 24) 한양도성의 궁궐투서 사건이 일어난 그 해에 청주와 문의현 지역에서는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왜구가 또 처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男負女戴(남부여대대)의 피난민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남부여대는 남자는 짐을 등에 지고, 여자는 짐을 머리에 인다는 뜻이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호중(湖中)에 한 괴인이 있어 요망스런 말을 창도하기를, '왜구가 곧 쳐들어 온다.' 하여, 인심이 소동되는 것은 물론 가족을 이끌고 피하여 달아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하고….'- 인용문 가운데 湖中은 청주지역 일대를 지칭하고 있다. 여느 속담의 표현처럼 발(足) 없는 말(言)이 천리를 갔다. 소문은 경기도 지역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산골짝으로 숨는 사람도 생겨났다. "좌윤 홍상한(洪象漢)은 말하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상하의 인원들이 모두 짐을 꾸려 메고서 서 있는가 하면, 산골짝으로 숨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호중만 그럴 뿐이 아니라 기내(畿內)가 더욱 극심하다고 하니, 마땅히 기포(譏捕)해야 될 것입니다."- 인용문 가운데 畿內는 경기도를 지칭한다. 그러자 영조가 "이는 익명서와 마찬가지이니, 엄히 방지하는 방도가 없을…
[충북일보] 1748년(영조 24)은 무신란(1728)이 일어난지 꼭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3월 임인(18일) 한양도성에서 의문의 투서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보초를 서고 있는 졸(卒)을 부른 후 괘서 하나를 던져 넣고 몇마디 지껄인 후 달아났다. "초혼(初昏)에 어떤 사람이 궐문 밖에서 흥원문(興元門)의 수졸(守卒)을 부르면서 문틈으로 하나의 봉서를 던져 넣고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이선전(李宣傳)에게 전하라." 했는데, 선전관 이택(李澤)이 과연 바야흐로 입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뜯어 보니 그 내용이 매우 요망하고 황당하여…." 인용문에 등장하는 '이선전'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씨 성을 가진 선전'이라는 뜻이다. 선전관의 준말인 선전은 왕을 호위하고 전령을 전달하며 나아가 병졸의 진퇴를 명령하는 무직(武職) 관료로, 정3품의 당상관이었다. 괘서를 엉겁결에 건네받은 수졸이 이 과정에서 긴급체포되었고, 그 이유는 인용문 내용이 매우 요망하고 황당하기 때문이었다. 실록은 이같은 괘서의 경우 그 확산을 우려해 관련 내용을 일체 기술하지 않는 관례를 지니고 있다. 영조는 수졸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범인을 뒤쫓게 하고 당시 좌의정 조현명(趙顯命·1
[충북일보] 보은 이제동(李濟東) 역모사건에는 느닷없이 신필대(申必大)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제동 역모에 가담한 보은 사람 이흥득이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이귀흥이라는 자에게서 들은 얘기라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귀흥이 말하기를, '우리의 무리들이 황간(黃澗)·영동(永同)·청주(淸州)·문의(文義) 등지에 있는데, 청주(淸州)의 신필대(申必大) 같은 이도 여기에 들었다. 네가 우리의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업신여기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듯 신필대는 보은이 아닌 청주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1728년 무신란 끝난지 5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영조 정권을 타도하려 한 것은 역시 가슴에 맺힌 한 때문이었다. 그는 무신란 청주지역 2인자였던 신천영(申天永)의 가까운 혈족이었다. 당색이 남인이었던 신천영은 신숙주의 후손으로 무신란 당시 이인좌로부터 병사(兵使)에 임명되었다. 이는 오늘로 치면 광역단체의 군사업무르르 총괄하는 직책으로, 지역사령관에 해당한다. 신필대는 1728년 무신란 당시 신천영을 따라 난에 가담하였다. 신천영을 그를 직접 영입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체포된 후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뒤에 신필대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1728년 무신난은 보은현감 조문보를 처형하고 공신을 선정하면서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난을 진압하고 죄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반란 가담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금의 충북, 경북, 전북 등의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충북의 경우도 편차가 있어 청주, 충주, 괴산, 진천, 보은, 영동, 황간 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 그러나 이때 발생한 희생자들의 가족 한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응어리가 되어 고스란히 침전되어 있었다. 무신란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 17333년(영조 9) 보은에서 장곡서원(獐谷書院) 사건이 발생했다. 장곡이 어디인지 불분명하나 현재 내북면에는 노루실이 있다. 보은사람 이공형, 이인관, 이귀흥, 이제동, 김두병, 구준좌, 구이후 등 10명은 흉년이 들자 장곡서원에 모여 강도질을 모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공형이 정보가 새 나갈을 것을 우려하여 아우 귀흥을 살해하였다. 이때 마침 김두병이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었고,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역모가 있었음을 드러났다. 다음은 김두병의 원사(爰辭), 즉 심문 과정의 진술 내용이다. "이귀흥과 이인관의 무리가 장곡서원에 모여 모의했는데, 도목 가운데에다 성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은 참가 지역과 참여 인원이 방대하였던 만큼 그 희생도 엄청났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해프닝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이인좌가 안성·죽산 전투에서 오명항(吳命恒·1673-1728)이 이끄는 정부군에 대패하였지만 경상도 지역의 반군세력은 계속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정부군보다 먼저 이인좌의 패배 사실을 경상도 지역에 알린 알린 인물이 당시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이었다. 전투가 일어났을 때 이같은 정보는 피아간의 사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오명항이 영조에게 그를 특별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은 안성의 역적들이 무너진 뒤 즉시 영남에 이문(移文)했는데, 영남의 역적이 패몰한 뒤 그 이문이 안음(安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규획이 진실로 칭찬할 만하니, 마땅히 포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한달 후 졸지에 옥천군수에서 청주목사로 벼락 출세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인좌 반란군이 몰려오자 자기집으로 도망갔다고 체포된 인물도 있었다. 바로 당시 율봉찰방 이제겸(李濟謙)이었다. 그의 이같은 행동으로 인해 율봉역에 있었던 말과 역노들이 고스란히 이인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율봉찰방 이제겸(李
1728년(영조 4) 무신란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조문보(趙文普)가 있다. 그는 노비, 상인 등 하층민이 아닌 보은현감이라는 고위 관료이면서도 무신란에 참여했다. 게다가 그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적인 사표였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직손이었다. 그는 무신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이른바 홍성룡 옥사에 연루되어 옥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칼을 풀어주도록 하는 등 특별히 배려했다. '임금이 묻기를, "조문보는 누구의 집 자손인가"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선정신 문정공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특별히 칼[枷]을 풀어 주도록 하여, 내가 현자(賢者)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칼은 전통시대 죄인에게 씌우던 형틀의 일종으로. 두껍고 긴 널빤지의 한끝에 구멍을 뚫어 죄인의 목을 끼우고 비녀장을 질렀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 옥중에서 쓰고 있던 형틀도 칼이었다. 이처럼 영조가 죄인을 각별하게 대우한 것은 그가 조광조의 직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통을 지닌 조문보가 무신년 역모에 가담한 것은 민원보와 관련이 있다. 민원보(閔元普)는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조총, 환도, 철편 등
1728년 무신란에 가담한 인물로는 김덕삼(金德三)이 있다. 무신란은 정치적으로는 소론+남인이 주도하고, 사회적으로는 노비+상인 등 당시 소외 계층이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괴산에 살던 김덕삼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부호(富戶)였다. 체포된 그는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다 수사관이 낙형(烙刑)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두 차례 형신하고 낙형(烙刑)으로 위협을 베푸니, 김덕삼이 공초하기를,(…) '여기에서 마흔 냥이나 쉰 냥쯤의 돈을 장만하여 주면 일이 이루어진 뒤에 보답을 잘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후 내용을 보면 인용문은 반란에 가담한 어떤 인물이 김덕삼에게 "40~50냥을 꿔주면 사건이 끝난 후 갚겠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50냥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백50만원 정도가 된다. TV 역사 프로그램이 자주 나오는 신병주(건국대) 교수의 이론에 의하면 조선시대 양(兩)-전(錢)-푼(分)의 현재 환율은 각각 7만-7천-7백원 정도가 된다. 따라서 이 공식대로 하면 50냥x7만원=35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김덕삼이 실제 돈을 꿔줬는지는 《영조실록》 등 문헌으로는 최종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장지(
무신란이 발생한지 25일 가량이 지난 1728년 4월 10일. 지금의 괴산송면 집에서 청주로 끌려온 이인좌의 젊은 아내 윤자정(尹紫貞)이 교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4명의 어린 아들을 둔 채 반군 지도자의 아내라는 죄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인자와 이웅좌가 모두 적괴이니 그 아우 이기좌를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이인좌의 아내는 박필현의 아내의 예에 의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그 아이는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으니,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종이 되게 하라."- 같은 날 당시 진짜 진천현감이었던 임상극(林象極·?-?)은 효시되었다. 처형 장소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황상 한양으로 끌려간 후 군기시 앞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어떤 죄 때문에 효시됐는지 사료에는 죄명이 기록돼 있지 않으나 영조실록에 그 죄목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임상극(林象極)의 경우 연호(감號)에 쓴 대원수(大元帥) 관문이라고 한 것은 역률을 쓰더라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으나…."- "역적의 관문(關文)을 봉행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달려간 죄는 청안·진천·회인 세 고을이 처음에 다름이 없습니다."- 두 인용문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단어는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과 관련된 것으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이라는 문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문헌은 이진동(李鎭東)이라는 경상도 안동 유생이 무신란이 일어난지 60년이 지난 시점에 작성했고, 그 목적은 무신년에 창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에서 누락된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60년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실제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정조는 그의 의견을 수용했다. 다음은 이진동이 상언하는 내용이다. 상언과 상소는 형식이 비슷하나 전자는 평민, 후자는 관료가 한다는 점이 다르다. "지난 무신년에 역적 정희량이 영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남 인사들은 죽고 싶도록 부끄러워하고 분해하면서 편지로 서로 깨우치고 격문으로 고하여 집집마다 창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 그런 사람들을 찾던 때에 전부가 누락되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책자로 안동 등 13고을의 창의한 사적을 하나하나 서술해서 아룁니다."- 이 날짜 정조실록에는 무신란이 일어났을 당시에 김중헌(金重憲)이라는 영남인이 우연히 우리고장 청주 객점(주막)에 묵었다가 반란군 지도자를 살해하려다 되레 죽음을 당하였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적이 중헌에게 오형(五刑)을 다 시행하였
[충북일보] 1728년 3월 24일. 청안지역 의병들은 이날 먼동이 터올 무렵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이끌던 무신년 반란군 무리를 완전히 토벌하였다. 그리고 청안현청에서 정중익의 목을 지체없이 베었다. '내가 두 조카와 서종(庶從) 인심에게 말하기를 "종익을 비록 베었더라도 남은 역적이 아직도 많다. 너희들과 더불어 찾아내어 형이 원수를 갚으려 한다"라고 했다.'- 잔당에 대한 의병진의 소탕작전도 그 즉시 진행되어 일부는 즉결처분하고 더러는 옥에 가두었다. 여기에는 힘이 좋고 활을 잘 쏘았던 임필현(林必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께 수색하니 즉 필현이 간청의 장을 보관하는 창고 가운데 숨어 있는데 먼저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범하지 못하자, 내가 몸소 앞으로 나가 필현을 끌어내어 머리를 검으로 쳤다.'- 임필현은 "그대들이 시국이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계책이 망령되어 내놓은 것은 오래지 않아 그 머리와 목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의병들의 설득을 거부하고 말머리를 돌려 정중익에게 돌아갔던 인물이다. 충청도의 작은 고을 청안현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사태가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짜 청안현감
[충북일보] 정황상 의병들의 반격은 1차 전투에서 패한 그날 야간에 준비를 해 다음날 새벽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1728년 3월 23일과 24일 사이다. 장담의 조카 경수(景洙)는 순직한 삼촌을 대신해 청안읍치 인근 마을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장담의 조카 경수로 하여금 연명겸의 집으로 가게하여 사청리(射廳里)와 상용문리(上龍門里), 용문리(龍門里)와 내외룡동(內回龍洞), 외회룡동(外回龍洞)에서 고르게 선발하게 하고 출신(出身)인 閔道昌과 더불어 거느리고 오게 했다.'- 전통용어 '출신'은 과거에 합격을 했으나 아직 임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이후 경수는 매박리(梅朴里)로 가서 종질인 장태화(張太和), 조강동(釣江洞)으로 가서 권대열(權大悅)을 규합하는 등 60여명의 의병을 추가로 모집했다. 인용문에 등장한 마을이름(里)은 '1872년 청안현지도'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 청안현에는 읍내면, 북면, 남면, 동면, 서면, 근서면 등 6개 면이 존재했다. 이중 사청리는 근서면, 매박리, 회용동, 조강동 등은 읍내면에 위치했다. 근서면은 지금의 증평일대, 읍내면은 청안면 읍내리에 해당하고 있다. 의병들은 청안현청 가까이 접근해 북…
1728년 3월 23일. 장담((張潭·?-1728)이 이끄는 청안현 의병들은 무신란 반군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반란군은 청안현청에 주둔하고 있었고, 무리는 가짜현감 정중익(鄭重益)이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 서기를 자처했던 장담은 제일 먼저 청안현의 옥(獄)을 공격했다. '우리형이 먼저 달려가 옥에 이르러 옥문을 부수고 重益에게 잡혀간 한시익을 급히 구출했으나, 이로 인하여 적과 더불어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었으며, 강약이 매우 달랐다.'-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라는 표현에서 보듯 의병과 반군들은 육박전을 하듯 직접 격돌했다. 그러나 전세는 숫자가 적은 의병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의병은 중과부적의 상태에 놓였다. 중과부적은 '적은 사람으로는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으로 《맹자》(孟子)의 〈위지〉(魏志) 에 나오는 표현이다. 전국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을 역설하던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결국 이날 전투에서 의병장 장담은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반
[충북일보] "그대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가짜 청안현감 鄭重益의 반군에 가담한 임필현(林必玄)이 한 이 말은 당시 기층민들의 정서를 대변한 말이었다. 토역일기 상으로 확인되는 반군 인물은 명현(命賢), 석창(碩昌), 몽엽(夢燁), 금립(今立), 시세(時世), 시만(時萬), 세강(世强), 반리(伴里), 임필현, 신평(信平), 차동(次同), 흥석(興石), 귀현(貴玄), 비억(非億), 명이(命伊), 성좌(性佐), 명이(明伊), 막남(莫男) 등 모두 18명이다. 이중 시세, 시강은 형제간이나 가까운 혈족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차동, 흥석, 귀현 등은 당시 청안현의 관노였다. 나머지는 신분을 알 수 없으나 느낌상 막동, 몽엽 등도 관노로 보여지고 있다. 각사등록, 영조무신별등록 등 1728년 무신란을 기록한 다른 기록에는 雄伊, 京元 등의 관노 이름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무신년 반군에 가담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하층민으로 '부역을 제외시켜주고 부역을 삭감시켜준다'는 꾀임에 빠져 참여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조실록에도 등장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난역의 일로 말하면 군사를 모으는 적장이 반드시 신역을 면제하거나 신역을 줄여 준다고 말하므로
이인좌가 파견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청안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현감의 인부(印符)를 빼앗는 것이었다. 인부는 관인(官印)과 병부(兵符)의 준 말로, 임금의 신임장과 동일시 됐다. 관인은 말 그대로 관에서 찍는 도장을 의미하나, 병부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지방관이 군대를 움직일 때면 임금의 교서와 함께 반드시 부절(符節)의 일종인 병부를 맞춰봤다. 부절은 대나무나 옥 따위로 만든 신표로 하나는 조정에 두고 나머지 하나는 지방관에게 주어, 군대의 움직임이 있을 경우 두 조각을 맞춰봤다. 이처럼 조선 정부가 병부제를 운영한 것은 군대가 반란군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5.16 등 근현대의 모든 쿠데타는 군대가 국가권력의 통제권을 벗어나면서 성공했다. 1728년 3월 19일.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인부를 빼앗기 위해 부하 금립(今立), 시세(時世) 등을 진짜 청안현감 이정열(李廷說·?-1728)이 숨어있는 곳으로 보냈다. '19일 사렴이 今立, 時世 등이 고을 원이 印符를 탈취하기 위해, 시각을 정해서 보냈다. 두 역적이 고을 원이 피해서 숨을있는 곳에 가까이 도착하여 검을 빼들고 곧다로 들어가서
[충북일보] 무신란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은 실록에 칼을 잘 다뤘던 인물로 표현돼 있다. 다음은 이인좌가 경기도 죽산전투에서 관군에 사로잡힌 후 진술한 내용의 일부이다. '모의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자객은 반드시 정행민이 보냈을 것이고, 자객이 될 만한 자는 목함경과 정중복·정중익 등 형제이며….'- 청주읍성이 이인좌의 반란군에 점령당할 당시 진짜 청안현감으로 있던 인물은 이정열(李廷說·?-1728)이었다. 그는 반란군이 진격해 오자 관청을 버리고 도주하여 산골짜기에 숨었으나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때가 청주읍성이 반란군 수중에 들어간지 이틀 후인 3월 17일로, 원문은 이렇게 적혀 있다. 聚會軍卒 太半不至: 군졸을 불러 모았으나 태반이 오지 않았다. 勢難守成 姑避其禍: (이정열은) 성(관청)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잠시 동안 그 화를 피하고자 했다. 仍卽棄官而走 鼠伏山谷: 인하여 관청을 버리고 달아나 산곡에 깃들어 납작 숨었다. 官屬無一人從之者: 관 벼슬아치 중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한 마디로 청안현 읍치는 무주공산으로 변했고, 이런 가운데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이 3월 18일 부임했다. '18일 오시에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