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전어(錢魚)는 가을 이후가 제철로, 지금이 그런 시기에 해당한다. 전어의 어원이 재미있다. 백과사전은 전어에 대해 '등쪽에 갈색 반점의 세로줄이 여러 개 있고 아가미 부근에는 커다란 흑색 반점이 존재한다'고 쓰고 있다. 바로 전어는 흑색 반점이 '동전'〔錢〕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어와 관련된 속담으로 '봄 도다리, 가을 전어' 그리고 '가을 전어는 깨가 서말이다' 등이 있다. 전어는 산란기인 봄에서 여름까지는 맛이 없지만, 가을이 되면 체내에 지방질이 축적된다. 따라서 생선으로 구울 때 지글거리며 특유의 냄새가 난다. 그 내음이 매우 고소하기 때문에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가던 며느리가 돌아온다"라는 속담도 생겨났다. 최근 모 방송인이 고소를 많이 한다고 해서 '고소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선시대에도 상소를 많이 하는 '상소남' 선비들이 적지 않았고, 그중에는 조헌(趙憲·1544-1592)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조헌은 임진왜란 가능성을 예상하고 전쟁 발발 1년전 도끼를 메고 한양 궁궐로 올라가 그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했다. 지부상소는 나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도끼로 쳐달라는 의미를 지닌다
[충북일보]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젓가락 페스티발'이 청주 예술의 전당과 백제유물전시관 등에서 내달 17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 이어령 조직위 명예위원장(전 문화부장관)은 국제 학술심포지엄에서 "젓가락의 종주국을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어느 나라가 더 젓가락 문화를 보존하고 젓가락 정신을 잘 알고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현재 젓가락 문화는 한·중·일 삼국과 베트남·타이·미얀마 등 동아시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지만, 그 기원은 대략 3천년전 중국에서 제사와 관련해서 태동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갑골문의 '鄕' 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손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갑골문 존재하던 시기, 즉 중국 은나라(BC1600~BC 1046) 때는 젓가락이 사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중국 역사에 젓가락이 처음 등장한 것은 춘추전국시대(BC 770~BC 440년)였다. 당시 제관(祭冠)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을 옮길 때 감히 손으로 함부로 쥘 수 없어 젓가락을 사용했다. 이후 중국의 지배층들이 이 같은 모습을 모방해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젓가락을 사용하면 정인(淨人·깨끗한 사람), 그렇지
[충북일보] 농업은 전근대 사회를 통틀어 국가재정의 밑바탕을 차지했고, 따라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리 시설의 개설과 유지·보수는 국정의 우선순위를 차치하였다. 수리시설 가운데 제언(堤堰)은 벼 재배와 불가분의 관계인만큼 그 등장 시기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이 듣던 수산제·벽골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대국가 단계인 삼국시대 들어서면 제언에 대한 기록이 부쩍 증가한다. 이는 삼국이 공통적으로 미곡을 조세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인공 제언을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받는 논을 '오답(奧沓)'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수리시설이 발달하면서 고려시대에는 산전(山田)이 개간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저습지와 연해지 개발이 가능해졌다. 조선시대 역시 제언은 축조와 관리에 많은 비용과 노동력, 그리고 기술이 투입되었고, 따라서 제언의 건설 및 유지 관리는 보통 국가가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문헌과 지도에는 제언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를 보면 당시 관내에는 남일면, 북강내일면, 산외일면, 북강외일면, 북강외이면, 북강내이면, 수신면(현 천안시), 서강외이면, 서강외일면, 서강내이면, 남이면 등에 11개의
[충북일보] 조선시대 전국 각도에서는 식년시(式年試), 즉 3년마다 한번씩 문과 초시에 해당하는 향시(鄕試)를 치뤘다. 이때 과거 시험장의 감독관은 관찰사나 도병마사가 맡았다. 그러나 응시생이 많은 지역에는 서울에서 경시관(京試官)이 파견됐다. 조선 선조~인조 대의 인물로 김시양(金時讓·1581-1643)이 있다. 그의 호는 하담(荷潭)으로 비인현감을 지낸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그가 광해군 대에 충홍도 경시관이 돼 우리고장에 파견됐다. 당시 충청도는 어떤 역모사건이 있었는지 도명(道名 )이 '충홍도'로 개호돼 있었다. 그는 이때 향시의 제목으로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를 냈다. 이 표현은 맹자 '군시신여초개 신시군여구수(君視臣如草芥 〃)의 뒤 부분이다. 해석하면 '임금이 신하를 초개와 같이 보면, 신하도 임금을 원수같이 본다'는 뜻이 된다. 초개는 풀과 티끌이라는 의미로, 임금은 절대 권력을 지녔지만 신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뒷부분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만을 취하면 국왕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응시생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등 시험장에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충홍도의 경시
[충북일보]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의 이성산성(已城山城)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굴산성(屈山城)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해졌다. 옥천군과 국강고고학연구소는 최근 발굴 성과를 발표, "이성산성의 서쪽 성벽 25m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성벽의 흙에서 섞여 나온 유물로 미뤄 5세기 신라 토성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성산성은 해발 115∼155m의 구릉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천1백40m이다. 이밖에 성벽의 너비는 하단부를 기준으로 최대 15.4m이고, 높이는 약 3.5m에 이르고 있다. 굴산성에 대한 역사시록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8년조에는 "정월에 이찬 실죽을 배하여 장군으로 삼고, 일선 땅의 정부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굴산의 두 성을 고쳐 쌓았다(春正月 拜伊·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ㆍ屈山二城)"라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는 "기산현은 본시 굴현으로서, 경덕왕이 기산으로 개명했고 지금은 청산현이다"(耆山縣 本屈縣 景德王改名 今靑山縣)라고 기록했다. 두 문헌기록은 △신라가 소지마립간 때 굴산성을 개축하였고 △그 굴산성은 청산현에 위치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굴산성은 문헌
조선시대 색(色)의 물질은 얻는 것은 국가대사의 하나였다. 건축물의 외관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재위 16년(1740)에 종묘의 신탑(神榻)을 모두 당주홍(唐朱紅)으로 고쳐 칠하라고 명하였다. 신탑은 위패를 올려놓는 상, 당주홍은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한 붉은색 안료를 의미한다. 그러자 예조참판 이익정(李益炡)이 "각실의 신탑을 처음에는 번주홍(燔朱紅)으로 칠하였는데 수개(修改)할 때마다 당주홍으로 고쳤으므로 각실의 신탑은 그 색이 같지 않습니다"(영조실록 16년 4월 19일자)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영조는 "달라서는 안 되니, 모두 당주홍으로 고쳐 칠하고 이 뒤로는 정식(定式)으로 삼으라"(〃)라고 하명하였다. 위패를 모신 공간은 가장 신성한 제례의식 공간이고, 따라서 변색이 잦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지방정부도 색물질을 얻는 것을 무척 중요시하였다. 조선시대 청주목 월경지의 하나로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에 주안향(周岸鄕)이 위치했다. 마치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와 같은 모습으로 주안향은 문의현을 뛰어넘은 곳에 위치하였다. 대전시 동구의 대청호 일대가 대체로 그 지역이다. 주안향은 구한말까지 그대로 존속됐고,…
[충북일보] 지난 1998년 청주 명암동에서 출토된 '단산오옥명 고려 먹'(丹山烏玉銘 高麗 墨)이 보물 제 1889호로 지정되었다. 이 먹은 당시 청주시 동부우회도로 건설공사를 하던 과정 중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되었다. '단산오옥'은 '단산'과 '오옥'의 합성어다. 단산(丹山)은 단양의 옛 이름으로,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단양군(丹陽郡)으로 승격되는 1318년(고려 충숙왕 5)까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옥(烏玉)은 먹의 별칭인 오옥결(烏玉O)의 약칭이다. 따라서 단산오옥은 '단양 먹(丹陽 墨)'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발견 당시 이 먹은 무덤 주인의 머리맡 부근 철제가위 위에 반으로 조각난 채 놓여 있었고, 단산오(丹山烏) 아래 일(一)자만 보였다. 그럼에도 '一'을 '玉'자로 추정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충주목 단양군 조는 단양의 토산을 설명하면서 '墨 最良 號爲丹山烏玉'라고 기술하였다. 의역하면 '단양의 먹, 최고 품질로 단산오옥으로 불려진다'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도 《세종실록》 지리지와 똑같은 문장으로 기술돼 있다. 고려시대 단양에서 최고 품질의
[충북일보] 괴산은 고려시대에는 괴주(槐州)로 불리었다. 지금의 지명 괴산(槐山)은 조선 태종대에 등장하였다. 본래 '州'(주) 자 지명은 '牧'(목) 이상에만 붙이는 행정 위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고려 후기들어 '주'자 인플레이션 현상이 강하게 일어났다. 고려의 국사(국사)나 왕사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 '주' 자를 붙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시들도 중국을 갔다온 후 그 기념으로 자신의 출생지에 '주'자 지명을 끌어다 붙였다. "혹은 환시(宦寺)가 중국에 들어가 입시하였다가 사명을 받들고 환향하거나, 혹은 중이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고을은 내가 난 땅이라.' 하여, 권세를 타서 요구하고 청하여, (…) 혹은 군과 현을 승격하여 주를 만드니, 이 때문에 군과 현의 이름이 날로 뛰어오르게 되었으나…."- 선초의 태종은 이같은 주자 지명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메스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괴주는 지금의 괴산으로 개명됐다.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한 곳은 천(川) 자가 붙었으나 괴산처럼 산이 많은 곳에는 山자가 붙여졌다. 전자의 예로는 우리고장 제천·옥천·진천 등이 해당된다. 현재 괴산군은 감물면·문광면·불정면·사리면
[충북일보]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그는 1864년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이때 국내 입국해 있던 천주교 선교사 가운데 일부가 "천주교도의 힘을 빌어 한 · 불 · 영 3국동맹을 체결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이 조언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장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나갔다. 그는 왕권유지 차원에서 천주교 탄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는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을 내렸고, 그 결과 프랑스 선교사 9명과 국내 신자 8천여 명이 학살을 당하는 대참극이 발생하였다. 바로 병인박해다. 병인년의 박해로 신자들은 산속이나 오지로 피신해 다니다가 수많은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병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같은 사실이 중국 천진에 주둔해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알려지면서 그 보복으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다.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국내 숨어지내던 인물로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erron·1827-1903) 신부가 있었다. 그는 리
[충북일보] 조선시대 10여명의 희생자를 낸 옥천 권대전 역모사건(일명 정한 역모사건)은 조흥빈(趙興賓)이라는 인물의 고변(밀고)으로 시작됐다. 권대진에게는 '낙'(絡)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는 조흥빈의 아들 '완'(浣)에게 권대진의 역모를 흘리며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이 기회를 놓히지 말라"는 식으로 동참을 꼬드겼다. "지금 호남과 영남에 8대장이 있는데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 네가 나와 같이 행동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니, 절대 전파시키지 말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조흥빈의 아들 '완'은 무시무시한 대화가 잘 믿기지 않았는지 며칠 뒤 발설자인 권대진을 직접 찾아가 사실 여부를 다시 확인했다. 권은 성공을 확신했는지 역모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낙이 간 뒤에 신이 동생 조희빈과 함께 대진을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대진이 말하기를 '우리 집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는데, 참기(讖記) 가운데에 백마장군에 관한 설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 집이 일어나는 좋은 징조이다.' 하고, 8대장에 관한 이야기는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권대진의 역모 의도를 재차 확인한 조완은 이를 아버지(조흥빈)에게 알렸고, 그가
[충북일보] 조선 인조 때의 옥천지역 역모사건과 관련해 권대진, 정한, 양천식 위로로 서술을 했다. 그러나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추안급국안 등을 종합하면 당시 역모사건에는 총 32명이 연루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옥천 10명, 합천 6명, 나머지는 전라도, 경상도, 청주 등이다. 청주에서는 조철이라는 인물이 당시 역모사건에 가담했다. 옥천 가담자가 가장 많은 것은 권대진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가장 컸음을 의미한다. 옥천 가담자 가운데 권대진, 권락, 권계, 권순, 영이, 박선검, 박준검 등 7명은 처형됐다. 권락, 권계는 권대진의 아들이고 권순은 조카이다. 이밖에 영이는 권대진가의 노비이고 박선검, 박준검 권대진가의 보인이었다. 보인은 대신 병역의무를 지는 것을 말한다. 권락, 권계 형제는 아버지(권대진)의 역모 도모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양천식·양정식 및 이찬희 등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도당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성을 치기로 약속이 되었다.' 하고….'- 인용문의 '그
[충북일보] 우리고장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을 현혹한 인조조의 떠돌이 요승 양천식(楊天植)은 출가와 환속을 3번씩이나 반복할 정도로 생활 자체가 불안정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역시 3번씩이나 개명하는 등 뭔가를 감추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 '양병(楊丙)이라고 하는 자는 바로 양천식이며, 양팽(楊彭)은 바로 양정식이다. 병 등은 세 번이나 그 이름을 바꿨는데,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했다.' 하고….'- 인용문의 양정식은 양천식과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제간으로 출가와 환속을 함께 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나, 양천식은 외견상 관상(觀相)과 풍수(風水)를 보는데 능했다. 권대진이 첫 만남부터 양천식에게 설득당한 것은 이 때문으로 파악된다. 양천식은 권대진을 보자 "백마장군이 될 관상"이라고 유인하는 말을 던졌다. 민속에서는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인물을 '백마장군'으로 호칭하고 있다. 의 공손찬(公孫瓚)이나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을 백마장군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선검(先儉)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자칭 관상을 잘 본다는 어떤 승려가 대진의 집에 와 관상을 보고 매우 좋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철…
[충북일보] 인조 9년(1631) 2월에 정한(鄭澣·?-1631)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지금의 충북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 등이 합천인 정한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같은 옥천인 조흥빈(趙興賓)이 고변[밀고]하면서 일어났다. '옥천인(沃川人) 조흥빈이 정원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상이 그 글을 빈청(賓廳)에 내리는 한편, 금부도사를 보내 권대진·권계·권락·권순·정담·양천식·양정식·이찬희·정후엄, 박선검·박후검 등 16인을 잡아오게 하고, 국청을 설치하여 국문하였다.'- 이 사건의 성격은 잔존하던 대북파들이 자파 인물을 국왕으로 옹립, 세력을 복원하려는데 있었다. 당시 당색이 대북(大北)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천인 권대진은 '출신'(出身) 신분으로, 스스로를 중병영장 혹은 권천총(權千摠)으로 칭했다. 출신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한 유생을 일컫는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1575-1641)은 대북의 지지를 얻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에 의해 실각, 강화도로 유배된 끝에 제주도로 이배됐다. 당연히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이끌던 대북
[충북일보] 나말여초에 극성을 부렸던 왜구는 정규 군인에 가까운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공민왕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기 위해 백두대간에 원관(院館)을 세운 후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초점'(草岾)을 통해 운송토록 했다. '초점'이 새재와 조령의 지명어원이 됐다. 순우리말 '새'는 풀을 의미하고, 그 사례로는 '이엉새'와 '억새'가 있다. 지붕 위에 얻는 풀이 '이엉새'이고, 억센 풀이 '억새'이다. '조령'은 순우리말 '새'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지금도 조령 문경 사면의 지명은 '초곡'(草谷) 또는 '푸실'로 부른다. '초곡'은 '푸실'을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는 '풀실'이었으나 ㄹ음 탈락현상으로 '푸실'이 됐다. '풀'은 '草,' '실'은 골짜기(谷)라는 의미다. 《고려사》에는 2인자 신돈(辛旽·?-1371)이 수도를 개경에서 우리고장 충주로 몰래 옮기려다 공민왕에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신돈은 충주가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안전하고, 또 남한강 물길을 통해 경상도 세곡을 용이하게 운반할 수 있는 점을 고려했다. 조선 초기의 정부는 강경책보다는 온건책을 구사하여 부산포·내이포(지금의 진해)·
[충북일보]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와 1755년(영조 31)의 유수원 역모사건은 30년 가까운 시간차가 나고 있으나 그 뿌리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론대 비노론의 정치적 대결이었다. 이때의 비노론은 소론과 남인들의 정치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지난 회를 끝으로 영조 연간을 휩쓸었던 두 정치적인 사건을 성깃성깃 하게 살펴봤다. 그 와중에 엄벙둠벙 하면서 빼먹은 인물이 있다. 황진기(黃鎭紀)라는 인물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선전관(宣傳官)이라는 중앙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그해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 선전관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무반직으로 종9~정3품의 품계를 지녔으나, 그가 어느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김일경(金一鏡·1662∼1724)의 문인(제자)으로 추정되는 만큼 골수 소론계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이명언(李明彦) 부자와 함께 밀서(密書)를 꿰맨 호복(胡服)을 입고 역모를 도모하였는데,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청나라로 망명했다. 흔치 아닌 망명사건이 발생하면서 영조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당시 조정은 망명한 황진기(黃鎭紀)가 처벌된 무리와 연락, 후에 다시 2차 역
[충북일보] 조선 영조-순조 연간을 산 인물로 성대중(成大中·1732-1809)이 있다. 그는 서얼 출신이었으나 영조 탕평책의 일종인 서얼통청운동에 의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박제가·박지원 등 당대 실학자들과 교유했다. 서얼청통(庶孼通淸)은 서얼이 청요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청요직(淸要職)은 홍문관·예문관·춘추관 등 지위는 그리 높지 않지만 학식과 덕망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직책이었다. 성대중의 저서 가운데 《청성잡기》(靑城雜記)가 있다. '청성'은 그의 호이다. 청성잡기에는 조서후기 심약이라는 인물과 기생 첨섬(翠蟾)에 얽힌 이야기가 등장한다. 취섬은 함양 출신 기생으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서울로 뽑혀갔다. 그녀가 서울에서 지낸 지 몇 년 만에 협객과 한량들 간에는 취섬이 사는 골목을 모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취섬이 서울 생활을 마치고 함양에 돌아올 때 심약이 이웃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녀를 소실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뒤 심약이 그의 형 심악의 역모에 연루되어 먼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됐고, 그러자 취섬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곳까지 따라가 정성을 다해 심약을 섬겼다. 심약이 남해로
[충북일보] 한때 국가 개혁을 위해 귀머거리가 된 자신과 필담(筆談)을 나누던 일국의 지존. 유수원(柳壽垣)은 그 지존(영조) 앞에서 처음에는 춘천 교영계 역모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부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답변을 기록한 실록 기사는 '마침내 형신하니, 유수원이 승복하여 공초하기를'(영조실록 31년 5월 25일자)로 시작된다. 형신은 죄인을 형구(刑具)로 고문하면서 신문(訊問)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조사 방법을 일컫는다. 이 단계는 심한 고문이 아닌 주로 정강이 부분을 때렸다. 과도한 고문으로 인한 살인을 예방하기 위한 방책으로 국문도 하루 세 차례 이상 형신을 할 수 없었다. '무릇 형신은 하루에 한 차례를 넘지 못하며, 추국에서는 두 차례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심문의 첫 단계로,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고문의 강도는 급속히 강해졌다. 심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유수원은 이렇게 답했다. "신은 신치운·박사집과 친밀하게 사귀어 침체된 바가 신치운과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제(調劑)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성상을 비방하고 아래로는 조제한 여러 신하를 욕하여 몰래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왔습니다."- 유수원의 입
[충북일보] 1755년(영조 31)에 발생한 춘천 교영계(敎英契) 역모사건의 명단에 어찌된 이유에서 인지 유수원(柳壽垣)의 이름이 등장했다. 당연히 유수원은 국문장으로 끌려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반란·모역 등의 중대 범죄가 발생할 경우 왕의 명령에 의해 임시 심문기구인 국청(鞠廳)을 설치하고 죄를 캤다. 이때의 '鞠' 자는 '국문할 국' 자이다. 국문은 대개 2종류로 분류됐다. 임금이 친히 심문을 하면 친국(親鞫), 임금이 빠진 채 의금부·사헌부가 심문을 하면 정국(庭鞫)이라고 불렀다. 모반 등 국왕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은 주로 친국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의금부 당상관 ·사헌부 및 사간원의 관원, 좌 ·우포도청의 대장 등이 배석했고, 이 가운데 대신 한 사람을 위관(委官)으로 명하여 시행하였다. 송강 정철도 정여립사건 때 위관을 맡았다가 두고 두고 영남사림(동인)의 원망을 산 바 있고, 실제 그 때문에 적지 않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조는 내사복에서 유수원을 친국했다. 내사복은 본래 임금의 말과 수레를 전담 관리하던 관청이나 때때로 친국 장소로도 사용됐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유수원·조재민(趙載敏) 등에게 물었는데, 조재민은…
[충북일보] 유수원은 그의 나이 50살이 되는 해인 1744년(영조 20) 벼슬길에서 물너났다. 이후 10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초야에 묻혀 야인 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가 노론이 득세하면 시기인 점을 감안하면 타의에 의해 야인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이 실록에 다시 등장한 것은 1755년(영조 31) 5월 무렵이었다. 이 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정답대신 영조를 부정하는 글을 써내는 심정연(沈鼎衍·?-1755)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란)에 연루돼 처형된 심성연(沈成衍)과 심익연(沈益衍)이 그의 형들이었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심정연은 자라면서 형들의 얘기를 들었다. "익명서는 과연 신이 만들었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바로 신의 원수입니다. 신은 심성연과 심익연의 아우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훈척(勳戚)인 사람과 임금의 권우(眷遇)를 받는 사람은 모두 미워하여…."-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뒤에 교영계(敎英契)라는 춘천지역의 사당조직이 자리잡고 있음이 밝혀졌고, 당시 훈장은 유봉성(柳鳳星)이라는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훈장은 일정 수준의 학식과 교
숙종대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것은 젊은 서인들이 남인에 대한 정치 보복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유교의 도리이 맞느냐, 안 맞느냐를 논쟁하는 사문(斯文) 시비가 일어났다. 그러나 경종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소론은 창당정신을 저버리고 노론에 대한 극심한 정치 보복을 자행했다. 이것은 노론도 마찬가지여서 승리한 자가 충(忠)이 되고, 패비한 자는 역(逆)이 되면서 공존의 정치는 사라지고 독존만이 횡행하였다. 숙종~경종 연간은 사화의 절정기였다. 1721년(경종1)에는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노론은 연잉군(후에 영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조선시대에는 두번의 왕세제가 탄생했다. 태종 이방원이 정종 때, 그리고 영조가 경종 때 세제로 책봉됐다. 노론은 나아가 병약하며서 후사가 없는 경종을 대신해 연잉군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리청정은 왕이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세자나 세제가 왕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을 일컫는다. 경종은 이를 수용했지만 조태구(趙泰耉·1660-1723), 유
[충북일보] 충주목 출신 유수원(柳壽垣·1694-1755)의 주장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이다. 조선의 교육은 서원과 서당이 중심이었지만 구한말이 되면 그 명칭이 달라진다. 변천사를 살펴보면 1895년 '소학교', 1906년 '보통학교', 1941년 '국민학교' 등의 명칭이 등장했다. 일제는 '충량한 일본국의 신민(臣民), 곧 국민(國民)'을 만들려는 교육적 목적으로 1941년 3월 '보통학교'를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 명칭은 반세기 넘게 사용되다가 1996년 3월 1일부터 지금의 '초등학교'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까지 생존했던 그가 초등학교라는 명칭을 구사했을리는 없다. 그는 '나이 4-5세', '15세 이전' 등 학령(學齡)의 개념을 구사했다. 그의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은 중국과의 비교에서 출발한다. 유수원은 중국의 교육관습 가운데 공부를 하다가 그쪽에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농(農)ㆍ상(商)ㆍ공(工)으로 전환하는 것을 무척 높이 샀다. 한 마디로 모두가 선비가 되려는 것은 국가적으로 손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들의 나이 4~5세가 되면 곧 글방 선생에게 나
[충북일보] 한국의 자본주의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다. 일부 사학자는 구한말에 자본주의 맹아(싹)가 움트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내지 자본주의 내적 발전론이다. 반면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군은 일제가 자본주의를 이식했다고 보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그러나 충주목 출신이면서 단양군수를 지낸 유수원의 《우서》(迂書) 일고나면, 적어도 구한말의 한반도에서 자본주의의 '새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유수원은 점포 자본주의라는 매우 독특한 이론을 주장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점포를 육성·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이다. 그는 《우서》에서 '마판자(馬販子)와 배부상(背負商)들이 하루가 다하도록 분주히 다녀도 별로 팔지 못하고, 서울 입전(立廛)의 상인들이 눈이 빠지도록 손님을 기다려도 팔을 내젓고 지나가는 사람이 10이면 8~9나 되니, 이로써 보아 비록 공상(工商)을 성행시키고자 해도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우서 제1권)라고 자문했다. 인용문의 마판자는 말짐장수, 배부상은 등짐장수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영세 규모로는 상업을 번창시킬 수 없다고 봤다. 나아가 그는 점사(점포)가 있어야
유수원이 언제부터 귓병을 앓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나일 30대 중반 무렵일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무신란(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본격적인 탕평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조는 소론의 경세가인 유수원을 경상도사, 태천(지금의 평북)현감 등에 잇따라 임명했다. 그러나 유수원은 귓병과 노모 숙환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청각 상실로 인한 실의를 《우서》 저술 등으로 극복했다. 《우서》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유수원의 또 다른 저서로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이 있다. 관료 선발에 대한 내용을 다룬 이 책은 1741년(영조 17)에 쓰여졌다. 특히 그 내용이 탕평책과 관련돼 있으면서 영조의 즉각적인 주목을 받았다. 영조는 유수원을 경연(經筵) 에 참석하게 했다. 경연은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유교 경전이나 국정 현안을 논의하던 제도를 일컫는다. 영조와 유수원 사이에 대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의 유수원은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로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임금이 말을 하면 배석한 신하가 한자로 써서 유수원에게 보이고, 유수원 역시 답변을 붓으로 한자를 써보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임금이 유수원을 소견하였다. 유수원은 유봉휘(柳鳳輝)
[충북일보] 조선의 실학파는 대략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학파와 상업을 중시하는 중상학파로 대별된다. 유형원·이익·정약용 등은 중농학파, 유수원·박지원·박제가·홍대용 등은 중상학파로 분류된다. 중상학파는 달리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불렀다. 이용후생은 중국 고문헌 《상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하고 있다. 중상학파와 이용후생학파는 달리 북학파라고 칭했다. 북학파의 북학은 청나라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알기 쉬우나 그렇지는 않다. 『맹자』의「등문공장구(騰文公章句)」에서 유래했다. 남쪽의 낮은 문명 지역에 살던 초나라 사람인 진량(陳良)이 북쪽의 선진 문명을 배웠다는 의미에서 '북학'(北學)이란 표현이 생겨났다. 박제가가 자신의 실학서를 《북학의》(北學議·1778)로 이름지은 것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와 유수원의 《우서》는 모두 조선후기 중상주의를 대표하는 실학서이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대륙을 방문하고 와서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롤모델로 했다. 이에 비해 유수원의 《우서》는 스스로의 탐구와 직관을 바탕으로 서술했으면서도 한층 진보적인 상업이론을 담고 있다. 유수원이 《우서》
[충북일보] 조선시대 사간원 소속의 정언(正言)은 정6품으로 관품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그러나 임금에게 간쟁과 봉박을 하는 것이 주된 임무로, 권력은 막강했다. 따라서 정언으로 벼슬을 시작하면 고속 승진이 보장되면서 관료들 사이에 엘리트 코스로 인식됐다. 간쟁은 임금의 옳지 못한 처사나 잘못에 대해 직언하는 행위, 봉박은 임금의 잘못된 지시를 되돌려 공박하는 것을 일컫는다. 뿐만 아니라 정언은 임금과 국정을 논하는 자리인 경연에 참여했고, 인사문제와 법률 제정에도 관여했다. 유수원이 문과에 급제하고 처음 나간 벼슬자리가 정언이다. 그는 정언이 된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영의정이자 소론의 거두인 조태구(趙泰耉)를 공격했다. "조태채(趙泰采)가 복법(伏法)될 때는 감히 천 리 길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짐바리에 가득하게 부의물을 보냈으니, 만약 일분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차마 했겠습니까. 결단코 조적(朝籍)에 둘 수 없으니, 빨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베풀게 하소서."- 조태채라는 인물이 죄를 지어 사형(복법)을 당했는데, 그런 범법자에게 어찌 부조를 짐바리 가득히 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조태구와 조태채는 사촌간이다. '사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