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은 국가나 도로 등 공적인 사업을 위해 보수없이 국민에게 노역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역은 획일성을 지니면서 곧잘 형평성의 문제를 야기했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마자 이 부분의 개선책을 직접 언급한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은 왕정(王政)으로서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에서는 그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고 그 부역(賦役)을 면제해 줄 것이다.'- 인용문 중 '환과고독'은 맹자가 처음으로 언급한 표현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해 묻자 맹자는 이렇게 답한다. "늙어 아내 없는 이를 홀아비(鰥), 늙어 남편이 없는 이를 과부(寡), 늙어 자식이 없는 이를 외로운 사람(獨), 어리고 아비 없는 이를 고아(孤)라고 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 궁벽한 백성들로서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일반어가 된 고독은 사실은 가족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것이 발전해 '몹시 외롭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록에 한 신하가 부역과 관련된 상소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장령 곽은(郭垠)과 헌납 양면(楊沔)이 아뢰기를, "날씨가 추울 때에 수리도감(
대곡 성운(成運·1497~1579)은 본래 한양에 거처하고 있었으나 형 '우'가 을사사화의 참화를 당하자 우리고장 보은을 찾았다. '공(성운 지칭)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일찍이 세속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 형 우(禹)가 을사사화에 비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가 그 인품과 같아서 한가롭고 아담하여 서호처사(西胡處士)의 운치가 있으니…'- 속리산을 찾은 성운이 마냥 은둔만은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문집에는 거유 조식(曺植·1501~1572) 등과 교유한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다음은 조식에게 보낸 한시 한 수다. '높은 기러기 날개 치며 남쪽 향해 날아가니(冥鴻矯翼向南飛) / 때는 바야흐로 가을 바람 낙엽질 때라(正値秋風木落時) / 땅에 가득한 벼와 기장을 닭과 오리는 쫓아다니지만(滿地稻梁鷄鶩豚) / 푸른 하늘 구름 밖에서 스스로 기심을 잊네(碧天雲外自忘機)'- 익히 알다시피 그의 대표 문집은 대곡집(大谷集)이다. 그러나 이 문집은 성운 자신이 완성한 것은 아니다. 사연이 다소 깊다. 아들이 편집에 나섰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그 손자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됐다. 성운은 아들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청원상주 고속도로를 상주 방향으로 타고가다 보면 보은 삼승면에 이르러 오른쪽 방향으로 우뚝 솟은 산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속리산과 구병산 사이에 위치하는 금적산(金積山·652)이다. 세간에서는 보은군의 최고봉인 천황봉(1,058m)을 '지아비산', 구병산을 '지어미산', 그리고 금적산을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들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봉수대는 옥천 청산의 박달라산에서 받은 신호를 북쪽의 용산점 봉수대로 전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 봉수대 흔적은 많이 사라지고 주변에 송신탑이 위치하고 있다. 학문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논어 헌문 편은 위기지학이 무너진 풍토를 한탄하고 있다. '옛날의 배움은 자기를 위한 것이었다(古之學者爲己). 요즘의 배움은 남을 위한 것이 되고 있다.(今之學者爲人)' 조선시대 때 위기지학에 충실했던 인물의 한 명으로 명재상 황희(黃喜·1363~1452)가 꼽히고 있다. 그는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주위로부터 두루 존경을 받았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이황은 타고난
조선시대 시문선집의 대표적인 것으로 동문선(東文選)이 있다. 서거정이 대표저자로 시(詩)가 4분의 1이고 나머지는 문장이 차지하고 있다. 이것 외에 이름이 같은 2개의 동문선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다. 1518년(중종 13)에 신용개(申用漑), 김전(金詮), 남곤(南袞) 등이 편찬한 것과 1713년(숙종 39) 송상기(宋相琦) 등이 편찬한 것도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續東文選),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으로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책이름을 동문선이라고 한 것은 중국의 '문선'(文選)을 따랐다는 뜻으로, 목차도 그것에 준하고 있다. 동문선은 관료·귀족의 미의식에 맞춰, 이른바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화려하고 숭엄한 문체로 쓰여진 것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철저하게 상층 지배층 중심의 시문을 의식적으로 실었다. 교서를 보면 조선시대 역대 왕들도 이 문체를 선호했다. 우리고장 출신으로, 동문선에 시를 남기고 있는 인물로 정수곤(丁壽崑·1452∼1486)이 있다. '찬 하늘의 짧은 해가 가벼운 북을 던지듯(寒天短日擲輕梭) / 나그네는 출새가를 길게 읊조린다(客子長吟出塞歌) /(…)/ 10년의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방대한 규모로 유명하다. 59권 42책으로, 저술 기간만 30년에 이르고 있다. 그는 부친 이광사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할 때까지 이 책에 매달렸다. 특히 그가 추구했던 객관주의 역사 의식은 지금도 사계의 표본이 되고 있다. 그는 역사 저술의 기본 태도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견지했다. 서술은 하되 작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흔히 연려실기술에는 야사 모음집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이긍익은 수집한 각종 야사를 글로 남기되 반드시 출처를 명기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관은 하나도 첨가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술이부작'이다. '연려실'은 그의 서실(書室)이름으로, 중국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명아주 지팡이에 불을 붙여 방안을 밝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이긍익은 우리고장 청원 문의의 덕천사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유희령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 유흥룡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 우신언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 정응창 호는 유항(柳
조선시대 임금 중 재위 기관이 가장 짧았던 인물은 인종(仁宗·1515∼1545)이다. 임금이 된지 8개월만에 병사했다. 야사에 계모 문정왕후(1501~1565·명종의 생모) 독살설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어느날 인종이 문정왕후가 거처하고 있는 대비전을 찾았다. 이때 그녀가 그에게 떡을 건냈고, 인종은 이를 받아 먹은 후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못가서 숨을 거뒀다는 것이 독살설의 전모다. 인종은 재위기관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원시키는 등 친사림파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다. 인종의 친사림파적인 정책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도 많이 작용했다.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여론정치의 일환으로 상소권이 주어져 있었다. 이와 관련, 당시 유생들은 세번의 상소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격정적인 내용이 자뭇 인상적이다. '아아,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망하게 하려고 합니다. 조광조처럼 어진 사람이 있어도 억울하게 죽었고 (…)신들은 땅에 엎드려 마음 아파하면서 천심(天心)이 마침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도(道)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조광조 한 사람이 죽자 온 세상이 취제하여 곧고 바른 말과 행실
이준경(李浚慶·1499~1572)의 광주이씨 가문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한 부침을 겪었다. 이준경의 증조부 이극감은 무오사화와 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간신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밀고할 때 그는 그의 직속 상사였다. 이준경의 조부는 세좌(世佐)다. 그는 인수대비가 며느리 폐비윤씨(연산군 생모)에게 사약을 내릴 때 형방승지로서 이를 운반했다. 연산군이 가만둘리 없다. 그는 거제도로 이배되던 중 지금의 경남 사천에 이르러 자살 하명을 받고 스스로 목을 맸다. 이준경의 부친은 수정(守貞)으로, 그를 포함해 4명의 아들이 연좌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당시 사관이 이렇게 적었다. '왕이 이씨종친(광주이씨)이 강성한 것을 근심하여 모두 없애 종자도 남기지 않으려 하였다'- 이수정은 슬하에 윤경(潤慶)과 서두에 언급한 준경 등 두 아들을 뒀다. 이들도 연좌법에 따라 우리고장 괴산으로 유배됐다. 이들의 괴산 유배생활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실각하면서 자유의 몸이 됐고, 이후 충주의 사촌형 이연경(李延慶) 밑에서 수학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벼슬길에 나간 이준경에게도 첫 시련이 찾아왔다. 1549년 그는 충주 이홍윤 역모사건과 관련해 우리고장
우리나라 상례(喪禮)는 생각보다 복잡한 면이 있다. 문상(問喪)은 타인의 상사(喪事)에 대하여 슬픈 뜻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조문(弔問), 조상(弔喪)도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상례 중의 하나로 '심상'(心喪)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상복을 입지 않은 채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는 스승을 위한 상례였으나 재가한 어머니 또는 계모, 적모(嫡母)를 위해 할 수 있다. 적모는 자신을 낳지 않았으나 법적인 어머니를 말한다. 조선시대 때 '심상' 때문에 목숨을 잃은 고위 관료가 있다. 매우 유능한 관료였으나 연산군이라는 시대성을 잘못 만나면서 뜻을 펴지 못하고 중도에 목숨을 잃어여만 했다. 정성근(鄭誠謹·?∼1504)이라는 인물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성근은 승지에 오르는 등 성종의 은혜를 입었고, 따라서 그가 승하한 이후에도 심상의 자세를 가졌던 모양이다. 조선의 국시가 유교인 만큼 이는 어찌보면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연산군에게는 이같은 모습이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생모 폐비윤씨의 죽음과 관련해 연산군의 가슴 속에는 항상 아버지 성종에 대한 증오의 마음이 쌓여 있었다. 실록 곳곳에서 그런 흔적이 발견된다. 성종
# 금요일△ 청주 우정 산악회 (011-464-1434)* 4일 = 설악산 울산바위* 11일 = 광주 무등산* 18일 = 구미 금오산* 25일 = 신시도 대각산* 31일~4월1일 = 한산도 망산△ 청주 무궁화 산악회 (010-3423-2783)* 4일 = 서울 관악산* 11일 = 완주 종암산* 18일 = 서울 북한산* 25일 = 고창 방장산△ 청주 금요 산악회 (011-487-5556)△ 청주 의정 산악회 (016-864-3259)# 토요일△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12기 (043-277-2114)* 26일 = 대청호둘레길 3구간 △ 청주 웰빙산악회 (010-9919-0602)* 5일 = 거창 의상봉* 12일 = 영동 백화산* 19일 = 진도 남망산* 26일 = 광양 쫓비산△ 사람과산 산악회 (010-9573-3651)* 5일 = 영월 잣봉* 12일 = 사패산~도봉산* 19일 = 진도 남망산* 26일 = 광양 쫓비산△ 산내음 산악회 (010-5485-9160)△ 해맑은산꾼들 산악회 (010-6473-4488)* 5일 = 창녕 영취산* 12일 = 영암 월출산* 20일 = 사량도 칠현산* 26일 = 양산 대운산△ 청주토요 산악회 (010-2432-7152)
오늘날 간통은 결혼의 파기, 즉 이혼을 전제로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성립한다. 조선시대 때는 부부 상호간의 고소 여부와 관계없이 적발 즉시 처벌 대상이 됐다. 이때 부인이 간통을 저질렀다면 그 부인과 간부(姦夫)는 곤장 90에 처했졌고, 또 흥분해서 간통 현장에서 부인과 간부를 죽였다 해도 비난 대상이 되지 않았다. 남녀 차별적 요소도 많아 남편이 다른 여자와 정을 통했다 하더라도 그 여자가 혼인한 여자만 아니라면 첩으로 삼으면 그만이었다. 반면 여성들에게는 평생의 족쇄가 채워졌다. 특히 양반 부녀자들의 경우 '자녀안(恣女案)'이나 '유녀적(遊女籍)'이라는 것에 이름이 올라 평생 간음한 여성으로 낙인 찍히거나 관노비가 돼야 했다. 이처럼 조선 정부는 간통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접근했다. 얼마전에 민발(閔發·1419∼1482)이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1469년 남이옥사가 일어났다.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 未平國), 바로 그 사건이다. 이때 민서(閔敍)라는 인물이 주살됐고, 그의 아우가 바로 민발이다. 그도 연좌제에 의해 극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았으나 충주로 유배되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계유정난 때 수
'독대'(獨對)는 임금과 신하의 은밀한 만남이었기 때문에 자주 문제가 됐다. 문장가로 유명한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상소를 올린다. "옛 제도에 따라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날마다 차례를 돌려 대답하게 하시어 더욱 말할 길을 넓히시어, 아랫사람의 심정을 다 아룀으로써 신하의 사특하고 정직함을 살피시면 매우 다행이겠나이다."- 변계량이 건의한 것은 독대의 반대개념인 이른바 '윤대'(輪對)였다. 윤대는 글자 그대로 문관은 6품 이상, 무관은 4품 이상의 관리가 임금 앞에 나아가 직무에 답변하는 것을 말한다. 윤대는 임금의 근무 강도를 고려해 하루 5명을 넘기지는 않았다. 연산군 때 한 신하가 윤대에 나아갔다. 얼마전에 강원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연산군 시절에도 비슷한 폭설이 내렸던 것 같다. '윤대를 받았다. 내섬시부정 박삼길(朴三吉)이 아뢰기를, "(…) 강원도에 한 길 이상의 많은 눈이 내려서 노루·사슴들이 한 곳에 모여 서서 많이 굶어 죽었고 살아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박삼길의 윤대는 계속 된다. 아래 인용문에 나오는 '여수'는 군대의 우두머리를, '패두'는 인부 열 사람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노가다 십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9기)'가 올해도 이어졌다. 올바른 산행 문화 보급을 구호로 지난 2007년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다. 지난해부턴 클린마운틴에서 클린마운틴 아카데미로 이름을 바꿨다.올해는 '대청호 둘레길'로 눈을 돌렸다. '레저토피아 탐사대(대장 김웅식)'가 지난 2008년부터 100여 차례 현장답사를 벌여 개발한 트레킹 코스다. 충북지역 12개 구간 120여㎞에 대청호반길 4구간 40여㎞를 더했다.26일 산을 사랑하고 걷기를 좋아하는 시민 30여명과 한국전력 충북지역본부 직원 15명이 등산화를 동여맸다.코스는 '청원 문의 현암정~현암사~구룡산~문의대교~국태정(팔각정)~작두산~갈림봉(무사골고개/덕은이)~수여리(문의영화마을)'로 이어지는 대청호 둘레길 1구간(10.3㎞).사전 준비 운동은 필수다. 김웅식 대장의 지도에 따라 근육 곳곳을 풀어준다. 올바른 걷기·호흡·스틱사용 요령을 배웠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산행의 목적으로 삼지 마라. 길을 따라 걸으며, 보고 듣고 느끼는 자체가 목적이다"라는 김 대장의 명언을 가슴에 새긴 뒤 첫 걸음을 뗐다.높낮이는 완만했지만, 길 자체는 다소 험하다. 아직 트레킹 코스가 완전히 개발되지 않았기
조선시대 농서로는 농사직설,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세종 때 정초, 변효문이 공동으로 지은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농법을 처음으로 다룬 농서로 유명하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농서로, '중요한 것을 새롭게 취한 책'이라는 뜻의 촬요신서(撮要新書)가 있다. 상·하 두 권으로 이뤄진 이 책은 농업과 함께 주역, 세시적인 내용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러나 농업적인 내용을 훨씬 많이 다루고 있어, 주로 조선 전기의 농서로 분류되고 있다. 이 책은 세종 때 지어졌다. 내용은 '경가'(耕稼·갈고 씨뿌림))와 '잠상'(蠶桑·누에)으로 크게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사고의 모든 출발점이 주역, 그중에도 음양오행과 직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다수 내용은 웃음이 큭큭! 나올 정도이나 어떤 내용는 지금의 농업 재배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논밭 갈이를 할 때 가을갈이는 깊게 하고 봄갈이나 여름갈이는 얕게 해야 한다.' '보리에는 눈이 좋은 바 겨울에 눈이 많이 안 내리면 여물지를 낳는다'. '나무심는 길일: 갑술, 병자, 정축, 기묘, 계미, 임진일이 길하고 병술, 임술일의 2일은 흉하여 마땅하지 않다.' '잠신(蠶神)에게 제사함: 정월 오(午)일 원유
미원면 운암리와 옥화리 일대 달천변에 펼쳐진 아홉곳의 경승지중 제1경인 청석굴은 옛날 우리 선조의 생활상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동굴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찍개와 볼록날, 긁개등이 발견된 곳으로 더운 여름철에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인근 물가에선 아이들 물놀이 하고 종종 다슬기 잡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여름철 피서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상당산성 백오십리길은 청석굴을 시작으로 한남금북정맥 산줄기와 합류 선두산과 선도산, 상당산을 거쳐 구녀산과 좌구산을 돌아 미동산과 청석굴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60여km의 숲길 투어 코스이다. 선두산, 선도산, 상당산과 이티봉, 구녀산 좌구산등 한남금북정맥 산줄기가 주를 이루는 고도감으로 만만한 산행은 아니지만 청주를 중심축으로 증평, 낭성, 미원등 도심과 인접해 있어 탈출로에 대한 부담이 없어 좋다. 종주개념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해도 상당산성, 좌구산 휴양림, 열티고개등 구간 조정이 용이하다. 빼어남 보다는 소박하고 번잡함보다는 호젓함이 대세인 요즘 사람들은 복닥거림을 벗어나 비로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느낌을 경험할 수 있는 상당산성 백오십리길이다. 반나절만에 돌아오신 친구 엄마의 손에 들린 소쿠리에는 올갱이
조선시대 때 충북에는 보은(후에 군으로 승격), 제천, 회인, 연풍, 음성, 청안. 진천, 영춘, 영동, 황간, 청산 등 11현(縣)이 존재했다. 이들 현에는 종6품 외관직인 현감이 파견됐다. 현감의 임기는 6년으로 관찰사의 3배에 해당했다. 이처럼 현감 임기가 의외적으로 길었던 것은 중앙 관료들의 지방근무 기피현상과 관련이 있다. 자원자가 많지 않다보니 임기를 길게 하는 방법이 택해졌다. 조선 세종 때의 우리고장 영동 현감으로 곽순(郭珣)이라는 인물이 부임해 왔다. 이 즈음 영동지역은 계속된 가뭄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었던 모양이다. 곽순의 하직 인사를 자리에 세종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한다. '영동 현감 곽순(郭珣)과 신천현감 박기명(朴基命)이 하직을 고하니, 불러들여 보고 곽순에게 이르기를, " 그 도에는 근래에 실농하여 백성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니, 항상 구휼을 더하여 형벌을 삼가고 농사를 장려하라" 하고…'- 그러나 영동지역의 식량난은 조정에서 보기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 같다. 곽순은 올린 상언에는 "10명 중 8,9명이 굶고 있다"고 적혀 있다. 상언(上言)은 신하가 사사로운 일로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을 말한다. 간관(諫官)이 올리는 상소(
얼마전에 충주 팔봉서원과 음성 지천서원에 제향된 인물로 김세필(金世弼·1473∼1533)을 소개한 적이 있다. 생전의 그는 두번의 사화(史禍)를 겪었다. 그는 폐비윤씨(연산군 생모) 묘의 이장 문제로 연산군에게 밉보이면서 거제도로 유배됐다. 1차 유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산군이 종종반정으로 실각하면서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났다. 그는 기묘사화 때 또 한번의 고초를 당했다. 왕도정치를 지지했던 그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된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간언하다 매를 맞고 유춘역(留春驛)이라는 곳으로 유배됐다. 그는 중도에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고향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어떤 사학자는 이때를 충주사림의 절정기로 보고 있기도 하다. 이연경, 이자, 노수신 등이 이 언저리에 등장한다. 그 평화는 아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늦게 얻은 자식으로 김저(1512∼1547·3남)가 있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어사로 파견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 일파를 공격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때 이조좌랑이라는 직책으로 있으면서 "소윤이 너무 많은 사
조선시대 '예무이적'(禮無二嫡)의 논리가 있다. 이는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 아내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때문에 첩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서자가 돼야 했다. 이 논리는 이른바 종모법(從母法)을 통해 세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부계가 양반이라도 모계가 천인이면 그 자식도 천인으로 취급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그 반대인 종부법(從父法)도 한시적으로 시행됐다. 이는 어머니가 첩이라도 아버지가 양인이면 그 자식도 양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보면 좋은 의미로 보일수 있으나, 이 경우 양인이 된 첩의 자식은 부역을 의무적으로 져야했다. 왕족출신 서자인 이몽학(李夢鶴·?∼1596)이 시국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이몽학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사료에는 잘 기술돼 있지 않다. 그는 1596년(선조 29)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함락하고, 이어 청양 등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에 돌입하였다. 그러자 당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성문을 닫은 채 방어에만 급급했다. 이때 사태를 반전시킨 벼슬아치가 신경행(辛景行·1547∼1623)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우연찮게 난을 진압하는데 일정부분 공을 세우게 된다. '목사 홍가신은
얼어붙은 강물위에 서서 바라보는 추소리의 병풍바위는 하나의 거대한 수석전시장 같다. 띠벽지를 두르듯 드러난 바위뿌리와 그위에 비틀듯 뿌리내린 소나무 한자락 풍류와 시상이 머무는 듯한 추소정 한폭의 산수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아름드리 둥그나무 아래로 내려서며 '설마' '진짜로·' 기대와 우려의 반신반의 속에 얼어붙은 강물위로 내려서는 대원들의 얼굴엔 파르르 긴장된 빛이 역력하다. 수정처럼 맑은 빙판이 미끄러운건 둘째치고라도 "찌이익" "빠지직" 간간이 들려오는 얼음판 갈라지는 소리에 심장이 멎을듯 놀라는 대원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마지막 얼음판 기행을 예감한다.푸른 물길이 휘감아도는 계절이면 꿈도 꾸지 못했을 기막힌 원근법을 확인이라도 하듯 병풍바위를 끼고돈 뒤 탈출하듯 뭍으로 올라서니 박장섭씨 내외분이 운영하시는 수정가든이다. 잠시 쉬었다 가라며 권하는 따뜻한 커피한잔이 고맙다. 김유순님이 꺼낸 삶은계란의 퍽퍽함이 눈에 걸리셨는지 기꺼이 내어주시는 김장김치 또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였다. 행복전도사란 듣기좋은 말투도 보기좋게 포장된 행동도 아닌 사람냄새 나는 정인 것 같다. 때아닌 방문객에게 퍼부어대는 개들의 왕왕거림조차 수다스러운 산골마을의 일상
우리나라 안경은 임진왜란 때 유입됐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몇해전 조선시대 김성일이 사용하던 실물 안경이 그의 후손들에 의해 공개됐다. 김성일은 황윤길과 함께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인물이다. 이듬해 귀국한 두 사람은 상반된 보고서를 내놨다. 정사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반면 김성길(金誠一)은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시는 짧은 기간이나마 동인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보고 내용중 동인인 김성일 것이 채택됐고,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에 사망했다. 그렇다면 그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안경을 썼을 확률이 높다. 이와 관련 국내 안경광학과 한 교수는 "일본이 아닌 중국을 거쳐 유입된 것 같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안경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정조실록에서 그 내용을 접할 수 있다. 정조는 그러나 안경쓰는 것 자체에 대해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전회에 구수복이라는 인물을 소개했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조좌랑이라는 직책에서 파직되어 우리고장 보은 지역을 일시적으로 찾았다. 지면 관계상 모두 소개하지 못했지만 이 대목에는 곡절이 더 존재한다. 그가 보은 속리산 일대를 찾은 데는 장인의 권유가 먼저 있었다. 문과방목을 보면 그의 장인은 이수(李穗)라는 인물로, 벼슬이 정3품에 이르렀다. 문과방목은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들의 신상을 기록한 사료를 말한다. 당시 구수복의 장인은 보은에 별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기묘년에 공이 이조 좌랑으로 파직되자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의 장인이 딱하게 여겨 보은(報恩)에 있는 별장에 살도록 했더니…'-< 연려실기술> 그러나 구수복의 장인 별장 처가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요즘 명절 풍속도의 하나로 '장인과 사위가 자주 다툰다'는 내용이 신문 지상에 보도된 적이 있다. 여성들이 경제전선에 뛰어들면서 처가의 발언권이 강해진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같은 현상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도 비슷한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후에 농장의 종이 싫어해서 장인에게 헐뜯기를, "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장차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장인이
조선시대 양반가 남자들은 자신의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서자와 얼자, 즉 서얼(庶孼)을 심하게 차별했다. 서자는 양인(良人) 첩의 자손을, 얼자는 천인(賤人) 첩의 자손을 일컫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가 뿌린 '씨앗'이라고 해도 양반의 숫자가 많아지면, 양반 전체의 기득권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이처럼 서얼 차별의 근원에는 조선 양반들의 집단적 이기심이 깔려 있었다. 모든 양반들이 서얼 차별제도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의식있는 일부 관료는 능력있는 인물은 서얼을 따지지 말고 과감히 발탁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 중종 때 두 명의 관료가 같은 주제를 놓고 서로 다른 내용을 상소한다. '김정국이 아뢰기를, "서얼에 대해서는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으니 고쳐서는 안 됩니다. 전에는 서경(署經)할 적에 그 선조(先祖)가 미천하면 서경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구수복이 아뢰기를, "서얼은 법이 이미 그러하지만, 어진이가 있다 하더라도 과거에 구애되어 포부를 펴지 못하니, 이것도 사람을 쓰는 길에 방해가 됩니다"'- 인용문 중 서경은 인사 등이 있을 경우 왕의 재가 있은 후 대간도 함께 서명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종의 왕권견제 행위로 볼 수 있다. 1519년 중
반딧불이의 고장 석탄리 안터마을을 시작으로 수북리와 국원리를 거쳐 도호리 진걸마을까지 가는 대청호 둘레길 9구간은 수북리에서 국원리로 넘어가는 산길과 돌거리 고개이후 도호리를 잇는 강변로로 이루어져 있어 대청호를 가장 호방하게 바라볼 수 있는 구간이자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과 기생 명월이의 설화를 지닌 청풍정과 명월암을 만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반면 대청호 둘레길 10구간은 구간 대부분이 옥천군 군북면 소재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개와 마을길로 이루어져 있어 산높고 골깊은 오지의 사잇길 사이로 펼쳐진 전원 풍경과 한폭의 산수화를 그려놓은 듯한 이백리의 이지당, 추소리의 병풍바위등을 감상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복숭아꽃, 살구꽃 꽃잎이 흐르는 실개천...상상만으로도 '씨익' 미소가 번지는 훈훈한 정경이 덧씌워지는 수북리 화계마을을 지나는 골짜기를 따라 둘레길은 시작된다. 골짜기를 탐닉하듯 파고들던 산길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산책길 같은 숲길이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선 눈발이 날린다. 입추를 넘긴 눈발은 찹찹하다. 막바지 오름길이 녹녹치않다. 며느리재이다. 국원리 늘티마을에서 안내면으로 넘나들던 고개이다. 얼어붙은 강너머 오대리가 희미함 속에 납작…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1906~1967)가 퇴위한 후 가진 직업은 문사관이었다. 문사관(問事官)은 문헌을 관리하거나 죄인의 신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법원, 검찰청의 서기와 비슷하다. 전회에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으로 충주목이 유신현으로 읍호 강등되고, 그에 따른 연좌제로 충청도가 청홍도(淸洪道)로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연좌제는 가족에게 보다 혹독하게 적용됐다. '이홍윤과 배광의·최대관·이휘·이무정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 수종(首從)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모두 교수(絞首)에 처하고, 15세 이하 아들 및 어머니·딸·아내·첩·할아버지·손자·형제·자매, 그리고 아들의 아내와 첩은 공신의 집에 종으로 주었으며, 재산은 모두 적몰(籍沒)하였다.'- 본문중 대명률은 명나라 형법을 일컫는다. 이홍윤을 심문할 때 문사관으로 배석한 관원이 민기(閔箕·1504∼1568)라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료마다 다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기유년(1549)에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5월에 충주(忠州)에서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이 문사관(問事官)이 되었다.…
전회에 유석(劉石)이라는 인물의 패륜사건으로 '충주목'이 '예성부'로 읍호가 강등됐고, 그에 따른 여파로 '충청도'도 '청공도'(淸公道)로 행정지명이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때가 1540년(중종 35)이다. 그로부터 9년 후 충주가 이번에는 다시 유신현(維新縣)으로 읍호가 강등된다. '충청도를 고쳐 청홍도로 만들고, 충주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를 청홍도 관찰사로, 이치를 유신 현감으로 삼았다.'- 청홍도할 때의 '홍'은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에서 왔다. 1547년(명종 2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 벽위에 붙여진 벽서에는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벽서 내용은 상부에 보고 되었고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윤임의 일파를 숙청했다. 그 과정에서 송인수·이약빙·임형수 등도 윤임의 일파로 지목돼 함께 사사했다. 거론된 인물중 이약빙은 우리고장 충주출신이고, 그에게는 홍남, 홍윤 두 아들 형제가 있었다. 그중 홍남은 벽서 사건에 간접적으로 연루됐다는 누명을 받아…
겨울바다 예술기행· 아니, 바다와 예술이 무슨 상관이 있어· 일반적으로 '바다'라는 단어와 '예술'이라는 단어를 짝짓기 시키기란 상당히 생뚱맞지만 그런 통념이 무참히 깨지며 두 단어가 기가 막히게 궁합을 맞추는 곳이 남쪽바다 경남 통영(統營)이다. 쪽빛바다 물결이 너울너울 춤추는 그곳엔 청마(靑馬) 유치환, 꽃의 시인 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의 문학 혼이 물결 따라 춤추고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음악이 뱃고동 따라 울며 비구상 미술의 선구자 전혁림의 예술혼이 캔버스에 또 다른 남쪽바다를 강렬하게 새겨 넣는다. 여기에는 윤이상의 거리도 있고 유치환의 거리도 있다. 가는 곳 마다 예술혼이 발길에 채일 정도다. 역사적으로 보면 문(文)가 무(武)가 쌍끌이 어선으로 박자를 맞추며 통영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으니 문은 앞에서 열거한 위대한 예술혼이요, 무(武)는 거북선 앞세우며 학익진(鶴翼陣)으로 왜적의 판옥선을 물리친 한산대첩의 주인공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이다. 한마디로 통영은 조선시대 해군본부가 있던 곳이다. 통영(統營)이란 지명은 바로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에서 비롯된 것이며 세병관(洗兵館)은 그 관아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