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의 뗏목을 타고 대교를 건너 무심천을 따라 걸었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희미한 달빛이 무심천 물에 잠겨 고즈넉하게 흐르고 있다. 피안의 세계로 가려면 물 위에 뗏목을 타고 용화의 강 언덕을 넘어야 한다. 이곳이 반야의 세계, 용화보전이 있다. 용화사엔 무심천 강 언덕과 물이 있고 용화보전이 있다. 용화세계는 도솔천 내원궁으로 미륵부처님이 계시다.미륵부처님은 용화 세상을 꿈꾸는 모든 중생들에게 희망의 불로 신앙되어 왔다. 오늘도 도솔천 천상에 보살로 계시며 56억 7만 년 뒤에 세상에 내려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이시다. 미륵 신앙이란 지난 날 석가모니 부처께서 불법을 듣고 수행을 계속한 제자 중 한 사람이 미래에 성불한다는 약속을 받고 도솔천에 있으면서 수행을 계속하여 세상에 내려와 성불하고 중생을 교화시킨다는 미륵보살님을 근거로 부연한 미륵삼부경을 토대로 발생된 신앙이다.이는 미륵보살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공덕을 닦고 선을 행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 내원궁에 미륵보살을 만나고 미래의 세상을 쫓아 염부제(閻浮提)로 내려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삼일의 마음 수양은 천 수례
전회에 우리고장 충주와 질긴 인연을 가진 인물로 이순몽을 소개했다. 그는 친구 황상(黃象)의 애첩인 월하봉이라는 기생과 사통했다. 그 결과, 자신은 물론 월하봉의 머리가 빡빡 깎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상이 이를 알고 반인(伴人)과 노복(奴僕)을 거느리고 가서 순몽과 월하봉을 잡고 모두 그 머리를 바싹 깎았으므로, 명하여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상종(類類相從) 중에 친구를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온 말이 '그 친구의 그 친구'라는 표현이다. 이순몽의 친구 황상에게도 궁금증의 시선이 쏠린다. 황상 역시 무신 출신이다. 그는 세종 연간에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 휘하의 중군장으로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도 친구 이순몽과 마찬가지로 '육봉'(肉棒)을 잘못 휘둘러 망신을 당하게 된다. 가뭄이 크게 들자 태종이 전국적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황상이 이를 어겼다. 그것도 기생까지 끼고 술을 마시다 관원에게 적발됐다. '전 소감 황상을 영흥부로 귀양보내었다. 이때에 크게 가물어서 금주령이 엄하였는데, 황상이 의순고별좌로서 주모(酒母)의 집에 들어가 기생을 대하고 술을 마시다가 헌부(憲府)에 적발되었다.'- 유배형이
조선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은 경주 등 전국 5곳에 보관돼 있었다. 세종 연간에 이를 보수하기 위한 작업이 한양에서 실시됐다. 이때 영남대로를 따라 올라온 경주의 어진이 우리고장 충주에 일정기간 머물게 된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임금의 초상화는 매우 극진하게 다뤄졌다. 특히 창업자 이성계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때문에 당시 조정은 어진을 안전하게 운송할 중앙 고위관료를 전국에 파견했다. 이때 경주에 파견돼 충주까지 올라온 인물이 판중주원사 이순몽(李順蒙·1386∼1449)이었다. '판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을 경주에, 예조 판서 김종서(金宗瑞)를 전주(全州)에 보내어 태조(太祖)의 쉬용을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으니, 이는 장차 고쳐 그리기 위함이었다.'- 판중추원사는 귀에 익숙치 않은 관직명이지만 품계가 꽤나 높았다. 조선전기에는 정이품이었으나, 세조 12년에 판중추부사로 고치고 종일품으로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이순몽은 무신 출신으로 남으로는 대마도, 북으로는 여진족을 정벌하는 등 가는 곳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따라서 태종과 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여기에는 그의 아버지 이응(李膺·1365∼1414)이 좌명공신에 오른 점도 크게
행정적으로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남북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종전까지 백두대간은 충북과 경북을 동-서 방향으로 연결했다. 그러나 남한 백두대간은 계립령(鷄立嶺·하늘재)에 이르러 변곡점을 맞는다. 충북의 지형은 마치 오른쪽(동쪽)으로 고개를 돌린 누에(蠶)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계립령이다. 때문에 이곳부터의 백두대간은 충북과 경북을 남북으로 연결하게 된다. 주변 산세는 북쪽으로는 포함산(962m), 남쪽으로는 탄항산(857m)이 바싹 위치하고 있다. 계립령이 그 사이를 여우목 모습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해발 525m다. 백두대간인 만큼 이곳에 떨어진 빗물은 남북으로 갈리게 된다. 북쪽의 물은 동달천, 송계계곡으로 거쳐 충주호로 흘러든다. 남쪽의 물은 신북천, 조령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경사도는 남쪽은 밋밋하고 북쪽은 다소 가파른 편이다. 그러나 해발고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어느 표현처럼 '하늘'에 닿을 정도는 아니다. 미륵리사지에서 고개 정상까지는 1.8㎞ 정도로, 1시간 남짓 걸린다. 계립령 옛길은 지난 2008년 국가명승 제 49호로 지정됐다. 공식 명칭은 '충주 계립
제천 청풍면에 한벽루( 寒碧樓)라는 멋진 누각이 있다. 보통의 누각은 조망성이 좋은 곳에 독립적으로 세워진다. 이에 비해 한벽루는 누각의 본채 외에 날개 건물인 '익랑'(翼廊)을 거느리고 있다. 한벽루의 역사는 의외로 깊어 고려시대에 처음 신축됐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고려시대 청풍은 '군'(郡)이 아닌 '현'(縣)이었다. 중앙 관료가 직접 파견되지 않고 이웃 수령의 통치를 받았다.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청풍현 출신인 '청공'이라는 스님이 왕의 스승, 즉 왕사가 됐다. 제 27대 충숙왕(忠肅王·1294~1339) 때의 일이다. 청풍 한벽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누각으로, 이때 행정 지위도 '현'에서 '군'으로 승격됐다. 한벽루는 경관이 빼어난 곳에 위치하다 보니 하륜, 정인지, 이황,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묵객들이 자주 찾았다. 이중 하륜은 한벽루 중수기를 남겼다. 조선초기 문신인 하륜(河崙·1347∼1416)은 우리 고장이 아닌, 지금의 경남 진주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벽루 중수기를 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중수기 행간에 그 힌트가 들어 있다. '내가 옛날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정군은 바야흐로…
범종각 옆 요사채에는 스님들이 참선을 하고 있어 근엄한 침묵이 흐르고 그 옆 위로 삼성각이 있다.경내의 모든 시선을 모으게 하며 서있는 3층 석탑에는 8각의 이중 기단을 갖추고 3층 석탑을 올렸는데 8각 기단이 매우 특유한 기법으로 불상대좌처럼 기단 위에 불상을 안치한 모양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높직한 지대석 방형 위에 하층 기대석을 마련하고 각 면에 안상을 조각했다. 갑석 위 굄대에는 단조로운 복련을 조각하여 별석을 놓았으며 그 위에 키가 높은 8각의 중대석을 놓고 소담한 양련을 조각한 8각 상대석을 얹었으며 방형 굄돌을 만들어 몸돌에 맞추었다.이같은 형식은 일반 탑과는 달리 불상의 대좌 기단 형식으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이 탑의 탑신부는 일반 석탑의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몸돌은 위 지붕돌과 각각 1매로 짜였으며 우주가 새겨져 있다.돌들의 키가 높아 전체 균형이 큰 느낌을 준다. 상륜부엔 노반만 남아 있으며 3층 지붕돌과 상륜부가 손상되어 거룩한 문화재의 손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높이가 4.1m인 3층 석탑은 보물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탑 앞 작지도 크지도 않은 대적광전으로 들어갔다. 비로자나 좌불상이 지권인의 자세로 육계
조선시대 때 양반가 아녀자가 간통을 하면 '자녀안(恣女案)'이나 '유녀적(遊女籍)'이라는 것에 이름이 올랐다. 평생 간음한 여성으로 낙인찍혀 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일부 가문에서는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우려, 자살을 종용하기도 했다. 1530년(중종 25)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우리고장 황간현을 다소 부정적으로 적었다. "옛날 현(縣)이 승격되기 전에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적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들짐승이 맘대로 뛰놀고 도둑들이 노략질하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는 자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야만 비로소 다니곤 했다."- 이를 전후해 이은(李山+言)이라는 인물이 황간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조선시대 판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황간읍성이 이때 축조됐다. '이은이 전 삼사좌윤으로서 비로소 이 고을 감무가 되어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개탄하고 이것을 힘써 없앴기에 호구(戶口)가 날마다 늘고, (…) 이에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쪼개어 이 성을 쌓아서 며칠 안 되어 공사가 완성되어, 백성들은 성에 보전하게 되고, 성은 덕에 보전하게 되었으니, 이후(李侯)의 공이 더욱 빛남이 있도다.'-
여수 돌산도 신기항에서 배를 탄지 20여분뒤 도착한 금오도에 대한 첫인상은 조심스레 내놓는 맑은 샘물 한바가지 같은 청량감이었다. 고종 21년(1884)까지 봉산(왕실의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쓰일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기 위해 민간인의 거주를 금지하였던 산)으로 지정되어 있던 곳으로 태풍으로 인한 소나무들의 소실로 봉산의 기능을 잃게되자 주민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말그대로 청정 섬 금오도다. 우리나라에서 21번째로 큰섬으로 알려진 금오도는 그 모양이 자라를 닮아 '자라오(鰲)'자를 써 금오도이지만 정작 이곳 주민들에게는 섬의 숲이 검게 보인다 하여 '거무섬'으로 더 알려져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울창한 숲과 함께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함구미 마을 뒷산부터 시작된 '비렁길'은 해안선을 따라 조성이 되었으며 두포를 거쳐 직포까지 8.5km의 걷기 길이 펼쳐진다. '비렁길'은 '벼랑길'을 뜻하는 이 지역의 사투리 답게 온전히 두발로만 걸어야할 작은 섬길은 까마득한 절벽과 넘실대는 바다. 울창함이 드리운 숲길까지 그야말로 섬 둘레길이다. 금오도는 '비렁길'외 매봉산(대부산)과 옥녀봉을 잇는 등산로가 있고 해안을 따라 이어진 굽이길은…
1623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倧·후에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그 결과, 광해군은 서인으로 강등돼 강화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대북파 이이첨 등 수십 명은 참수됐고,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됐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0여명은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나눠가졌다. '이첨은 한찬남·백대형·정조·윤인·이위경 등과 함께 먼저 형을 받았고, 이원엽·이홍엽·이익엽은 먼저 참형되었으며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리고 정몽필 등 여러 총신들과 유희분·유희발 등은 차례로 참형을 받았고, 정인홍·이강·원종·신광업 등은 추후하여 형을 받았다.'- 인용문 중에 유희분(柳希奮)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위하여 대북에 속한 언관·유생들을 동원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카가 유효립(柳孝立·1579∼1628)이라는 인물이다. 그도 연좌법에 따라 우리고장 제천으로 유배됐다. 유효립은 그러나 순응보다 모반을 결심했다.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의 작은아버지 유희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가문이 풍비박산됐다. 또 그는 권좌에서 쫓겨난 광
# 금요일△청주우정산악회(011-464-1434)* 5일 : 문경 대야산* 12일 : 남해 설흘산 * 19일 : 홍성 오서산* 26일 : 밀양 억산△청주무궁화산악회(010-3423-2783)* 5일 : 홍선 백우산* 12일 : 홍천 북계산 * 19일 : 양평 용문산* 26일 : 단양 황정산△청주2030산악회(010-2466-3822)* 5일 : 영월 배향산* 12일 : 단양 시루봉* 19일 : 정선 만지산* 26일 : 정기총회△청주 의정산악회(016-864-3259)* 5일 : 지리산 둘레길 1구간-구룡폭포* 19일 : 설악산 십이선녀탕△청주에이스 금요산악회(011-487-5556)* 12일 : 진안 덕태산* 26일 : 문경 운달산# 토요일 △해맑은산꾼들(010-6473-4488)* 6일 : 정읍 입암산* 13일 : 지리산 칠선계곡* 20일 : 가평 유명산* 27일 : 정선 비선대△백두오름산악회(010-6486-1055)* 6일 : 거창 금원산* 13일 : 진안 명도봉* 20일 : 거제 망산* 27일 : 밀양 구만산△청주산사랑 산악회(010-3423-8505)* 6일 : 차마고도 옥룡설산* 13일 : 문복산 계살피계곡* 20일 : 지리산 비경산행* 27일 :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를 고갯길 양사면으로 갖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주흘산(1106m·북)과 조령산(1017m·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난 이는 넓게 본 것으로, 좁게 보면 마패봉(927m·북)과 치마바위봉(835m·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사면은 고갯길 정상까지 거리가 짧고, 동쪽사면은 반원 모양으로 돌아 저능부로 빠진다. 따라서 서쪽사면이 다소 가파르게 느껴지고 있다. 백두대간인 만큼 서쪽과 동쪽 사면의 빗물은 최종 목적지까지 동행하지 않는다. 서쪽사면의 물은 연풍천에 모여 충주 달천으로 흘러든다. 반면 동쪽사면의 물은 조령천에서 만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충주목과 문경현 사이에 직선이 그어져 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 1866)의 당시 지도제작 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강이나 하천과 달리 구불구불한 도로는 직선으로 긋고, 그 위에 10리마다 점표시를 했다. 따라서 조령은 문경-연풍-충주를 연결하고 있는 고갯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충주를 연결하는 길로 표시돼 있다. 조령은 예로부터 한반도 최고의 요충지로 꼽혀왔다. 대
우리고장 제천 인물인 김식(金湜·1482~1520)은 조선시대 최장거리 도망자로 유명하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김식은 단지 조광조와 절친하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야 했다. 처음에 외딴섬으로 유배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형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도움으로 형량이 감경, 경북 선산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러나 유배기간 중 신사무옥이 일어나면서 그에게 진짜 절도안치 형이 떨어졌다. 그는 형량이 지극히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최운은 거제도로 이배되기 직전 탈출을 감행했다. 고된 행로가 시작됐다. 김식은 경북 선산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부근까지 이동했다. 그러나 김식은 도망자 생활에서 오는 육체·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유숙할 곳이 없어 산골짜기를 경유하여 지리산에 가려고 거창현 수도산 남쪽에 이르렀는데 밥을 먹지 못한 지가 수일이었다. 하루는 고제원(高梯院) 동북편 산기슭에 머물면서 고사리를 캐어다가 먹으려고 우음산을 시켜 마을 집에서 불을 구해 오라고 보낸 후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맸다. 경진년 5월 16일이었다.'- 앞서 김식은 도망자 생활 중에 자기를 숨겨줄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가는…
조선시대 후궁들은 왕의 총애와 왕자 생산 여부에 따라 종4품에서 정1품까지 8등급으로 분류됐다. 가장 높은 등급은 정1품인 빈(嬪)으로 희빈 장씨에게서 그 예를 만날 수 있다. 태종의 정비는 원경왕후 민씨로 4남4녀를 뒀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남편(이방원)이 선수를 쳐 정도전을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륙 중국에는 이른바 '일취구녀제'가 존재했다. 왕비를 포함해 9명을 후궁을 거느닐 수 있다는 뜻이다. 태종도 이 제도를 크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종의 바람기는 정도 이상으로 심했다. 9명의 후궁을 둔 것으로 전해지나, 일부 사료는 17명까지 언급하고 있다. 태종의 바람기를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일부는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계속 늘렸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민씨의 불만은 계속 쌓였고, 결국 친정 남동생인 민무질·민무구 형제가 사사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같은 흐름 중에 한 신하가 감히 태종의 바람기를 질타하는 상서를 올렸다. 방문중(房文中)이다. "정비(靜妃)와 명빈(明嬪)이 각각 양전을 설치하여, 빈으로서 적비(嫡妃)와 나란하게 함은 신(臣)의 이해할 수 없는 첫째이요,
지리한 장마 끝에 찾아온 불볕더위의 광기는 거의 살인적이다. 날마다 덧씌워지는 '폭염경보'속에 열기로 가득찬 도심은 가만히 있어도 푹푹 찐다. "이런 날씨에 어딜 가려고요·" 걱정스레 바라보는 시선들을 뒤로 하고 나름 씩씩하게 나서 보지만 걱정이 앞서는건 사실이다.운천동과 사직동을 잇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 둘레길은 시작된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예술의전당 너른 광장과 체육회관 그리고 야구장과 종합운동장이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배드민턴 라켓을 메고 가는 사람들까지 '폭염경보' 따윈 상관없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은 언제든 어디서든 활기차다.체육관앞에서 서청주 방향으로 난 플라타나스 가로수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시계탑 오거리다. 키다리 시계탑의 시간은 여전히 제멋대로다. 게다가 빽빽하고 화려한 도심속에 묻힌 키다리 시계탑은 더없이 작고 초라하다. 30여년전 '사직동 시계탑'은 청주시의 상징중 하나였다. 호출기, 휴대폰이 없던 시절 '이정표' 혹은 '만남의 장소'로 각광을 받을 정도로 모르는 사람 없었던 시계탑이지만 세월과 함께 방치된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지 오래이다. 모충동으로 연결되는 도로 양옆으로 형성된 아파트숲은 하늘마
얼마나 울었을까. 그 울음의 깊이를 소슬한 가을밤은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늘에는 촘촘히 빛나는 별들이 무진장 쏟아질 것 같아 내 마음마저 아슬아슬하다. 초승달은 무엇이 그리 애달픈지 붉게 물들었고 산과 내와 들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람이 내 살갗에 닿자마자 새파랗게 몸을 떨었다. 한낮의 햇살이 머물고 간 들꽃세상도 고단했던지 온 몸이 축 늘어진 채 말이 없었다. 소달구지에 몸을 싣고 논두렁 밭두렁을 오가는 자글자글 주름살 많던 촌로도, 지게를 지고 뒷산으로 땔감 구하러 올라가던 검게 그을린 청년도, 마을 앞 시냇가에 모여 앉아 빨래하며 수다 떨던 아낙네도, 물살을 가로지르며 산과 내를 오르내리던 산제비도 어둠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저 속에 수많은 소리가 부서지고 다시 태어나고 합창할 것만 같은데 그 무엇도 들리는 게 없었다. 적막강산, 고립무원이다. 다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눈물 훔치며 보냈을까. 저 많은 대자연이 촐랑대며 몸부림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어 발버둥 쳐보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초라하고 무의미한 나의 삶이 계속된다면 세상과의 인연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리없는 눈물, 소리없는 아우성, 소리없는 몸
기축옥사(1589·선조22)는 학문적으로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기존의 주장을 따를 경우 주인공 정여립은 모반준비 단계에서 도참사상을 교묘히 이용했다. '전날에, "목자(木子=李)는 망(亡)하고 전읍(奠邑=鄭)은 흥(興)한다"는 동요가 떠돌아 다녔는데 여립이 이것을 옥판(玉板)에 새겨서 중 의연(義衍)을 시켜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 두게 한 후, 뒤에 산 구경 갔다가 우연히 이것을 얻은 것처럼 꾸몄다.'- 그는 계룡산을 구경하고 어느 폐암(廢庵·중없는 절)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여놓기도 했다. 정감록은 '이씨의 한양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백 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정여립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도 정씨 성을 가졌다. 다음은 그 문제의 시다. '남쪽 나라 두루 다녔더니( 客行南國遍) / 계룡산에서 눈이 처음 밝도다(鷄岳眼初明) /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躍馬驚鞭勢) / 고개 돌린 용이 조산(祖山)을 돌아보는 형국이니(回龍顧祖形) / 아름다운 기운이 모였고(蔥蔥佳氣合) / 상서로운 구름이 나도다(··瑞雲生) / 무기(戊己) 양년에 좋은 운수가 열릴 것이니(戊己開亨運) / 태평 세월을
지리적으로는 조령산(1,017m)과 갈미봉(783m) 사이에 위치한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를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해발 548m이다. 백두대간인 만큼 영로 정상을 기준으로 빗물이 동서로 나눠진다. 서쪽 사면의 물은 연풍 이화천, 괴산 괴강, 충주 달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반면 동쪽 사면의 물은 문경 초천, 곡천 등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해발고도가 비교적 높은 만큼 고개 경사도 다소 가파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개가 말목처럼 서서히 높아지고 있어 유장한 느낌을 갖게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조선시대 경상도 사람들은 문경에서 충청도 방면으로 넘을 때 3개의 고갯길을 택할 수 있었다. 이른바 조령삼로이다. 제일 북쪽의 고개는 계립령(일명 하늘재)으로 충주로 연결됐다. 다음은 조령(일명 문경새재)으로 역시 충주로 통했다. 나머지 하나는 이화령이다. 그러나 이화령은 충주가 아닌, 연풍을 거쳐 괴산으로 향하는 고갯길이었다. 대동여지도 역시 충청도 연풍현과 경상도 문경현을 연결하는 선 위에 이화현(伊火峴)이라는 고개이름을 적어놨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화현은 인근 조령에 비해서는 통행량이…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고 부른다. 사용 빈도는 낮지만 신어(神御), 성용(聖容),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도 같은 표현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어진은 의외로 많지 않다.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어진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중 태조 어진은 보물 제 931호, 영조 어진은 932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철종 어진은 1/3 가량이 소실됐음에도 불구하고 보물 1492호로 지정돼 있다. 어진 중 유일하게 군복(軍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화려한 색채와 세련된 선도 돋보이고 있다. 현재 태조 어진은 서울이 아닌 전주 경기전 단 1곳에만 보관돼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태조 어진은 전란 등을 우려해 전국 5곳에 분산·보관했다. 보관하던 전각도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이 각각 달랐다. '의정부가 이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의 전직(殿直)은, 청하옵건대, 영흥 선원전(璿源殿) 의 전직의 예에 따라 감사의 천망(薦望)대로 임명해 보내되, 전주와 경주에는 토관(土官)이 없으니…'- '전직'은 전각을 지키는 사람을 말한다. 인용문 중에 집경전이 보인다. 이 전각은 처음에
폭군 연산군(燕山君·1476~1506)이 처음부터 폭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집권 3년차까지는 조세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정을 나름대로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생모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엄씨의 모함으로 내쫓진 끝에 사사(賜死)당한 것을 알고부터는 희대의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광기 중 음탕한 짓에 해당하는 내용을 당시 사관이 사론(史論)으로 적었다. '왕이 음탕이 날로 심하여, 매양 족친 및 선왕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녹수(綠水) 및 괴는 궁인을 시켜 누구의 아내인지를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 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이같은 유형의 내용은 연산군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연산군일기는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라고 했다고 적었다. 정력과 관련된 내용이다. 연산군의 성격은 음탕함을 넘어 폭력성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즐겨하던 실록 속의 형벌 내용으로는 포락, 착흉, 촌참, 쇄골표풍(碎骨瓢風) 등이 있다. 포락은 불구덩이에 떨어뜨려 죽이는 것을, 착흉은 가슴을 뽀개는 것을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같은 자가 없다."-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대신에게 어린 왕자(단종)를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기회를 틈타 수양대군은 1453년 한명회 등 권력에서 소외돼 있던 자들을 포섭, 원로대신을 무력으로 공격·살해했다. 바로 계유정란이다. 세조의 역사는 이들을 정난공신이라고 적었다. '정난'(靖難)은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정난의 공을 논하여 세조(수양대군 지칭)·정인지·한확·박종우·김효성·이사철·이계전·박중손·최항·홍달손·권남·한명회를 1등으로 삼고… 인용문 중 박종우(朴從愚··∼1464)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이후 평안도 도체찰사로 나가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도체찰사는 왕명에 따라 민정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는 직책으로 정1품의 품계를 지녔다. 박종우의 간접적인 유품인 완문, 계하사목,교첩 등이 우리고장 충주의 운봉박씨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완문은 충훈부에서 내린 것으로, 정난공신 박종우의 공적을 인정하고 박흥래가 그 자손임을 확인하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으로 백제 시대에 이르러 상당현(上黨縣),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 칭하고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5소경중의 하나인 서원경으로 승격,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청주로 지명을 개칭하였다' 역사는 먼지 속에서 진실을 찾는 것. 맑은 고을 청주(淸州)의 역사적 계보이다. 지독한 장마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후두둑' 쏟아질듯 내려앉은 음산함은 한낮인데도 어둡다. 커다란 장우산에 구멍 숭숭 뚫린 샌들에 반바지 우중과 맞서기 위한 준비물치고는 소박하다. 문암생태공원 캠프장에 들어서자마자 콧끝을 파고드는 삼겹살 냄새. 비가 오는데도 텐트안 일가족의 아침시간은 도란도란 정겹다. 지난 1994~2000년 7년간 청주시와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생활쓰레기를 매립해 온 문암쓰레기 매립장은 가족공원, 웰빙공원, 생태공원 등 테마공원으로 조성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이곳은 농구장 등 운동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조깅코스와 야생 수목원, 어린이 놀이터, 인공 폭포 등이 꾸며져 있다. 도심지 인근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이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으면서 이용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
소낙비가 내린 이후로 해 길어지고 청산이 더욱 우거졌다. 산 넘어 흰 구름 하릴없이 흐르고 또 흐르며 대자연은 석양 노을과 함께 깊어만 갔다. 마을 사람들은 논농사 밭농사 한창이고 구릿빛 얼굴에는 스멀스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골목길마다 소달구지 바쁜 걸음 재촉하고 아낙네는 새참 머리에 이고 논두렁 밭두렁을 오고갔다. 누렁이는 촐랑대고 시냇가 풀 뜯어 먹던 얼룩빼기 황소는 졸음에 겨운지 꾸뻑꾸뻑 세월만 낚는다. 노인들은 팽나무 아래에서 조근조근 얘기를 나누고 염소 떼 풀어놓고 풀밭에서 소꿉놀이하는 어린 아이들의 풍경이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좋고 서정이 뚝뚝 떨어지는 풍경화를 닮았다고 하면 또 어떤가. 그렇게 여름이 가고 귀뚜라미 처량하며 소슬한 바람으로 가득한 가을이 오고 있었다. 더위에 지친 옥수수 잎사귀 와삭거리고 수수밭에 알 찬 곡식 머리 숙이며 고추잠자리 코발트블루 하늘을 날던 초가을에 스무 살 청년은 몸과 마음이 심드렁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다른 하루가 와도 되레 무기력과 자괴감에 빠져 일어설 기운마저 잃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 옆에서 종 만드는 재주를 어깨너머로 배운 게 후회막급이었다. 그 때 팔촌형이 내 팔을 붙잡
행정적으로 충북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를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남쪽 대야산(930m)과 장성산(916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의 산세가 높은 만큼 불한령(弗寒嶺)의 해발고도는 비교적 높다. 510m이다. 고개 양사면도 비교적 가파른 편이고, 그 길이도 '연료가 많이 소모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편이다. 특히 청천 관평리에서 올라가는 충북쪽 사면이 더 가파르다. 백두대간인 만큼 마루금(산능선) 자체가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쪽 사면의 경우, 이제부터는 금강수계가 아닌 남한강수계가 등장한다. 서쪽의 물은 괴산 선유동-화양동-달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유입된다. 반면 동쪽의 물은 문경 선유동-영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는 백두대간 대야산 위에 '불한령'(不寒嶺)을 표시해 놓았다. 참고로 한자 '不'과 '弗' 자는 같은 뜻으로 '不'이 약자가 된다. 그러나 두 지역을 연결하는 선은 그어져 있지 않다. 이는 조선시대 불한령이 공로(公露)가 아닌 상로(商路)로 주로 이용됐음을 의미하고 있다. 대동지지(1861·철종)는 괴산현의 토산품으로 옻(漆), 지치(
국어사전에서 감옥(監獄)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는 설명구를 만날 수 있다. '대한 제국 때 형벌의 집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융희 원년(1907)에 감옥서를 고친 것이다'라는 부연 설명이 뒤따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감옥'이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감옥은 일본식 표현이다. 갑오경장 무렵에 감옥이라는 표현이 들어오면서 토종어 '옥'을 물리치고 대중성을 획득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감옥'이라는 표현이 수입되자 경무청 산하 전옥서(典獄署)를 감옥서(監獄署)로 바꿨다. 이후 '서' 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지금의 '감옥'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감옥은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표현이다. 감옥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옥을 살핀다'는 뜻이 된다.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앞으로 '감옥'이라는 말 대신 '교도소'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주시가 과거 읍성터를 발굴조사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명문이 새겨진 성돌 외에 우물터, 성벽 기초석 등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이제 시작인 만큼 더 많은 발굴 성과가 기대되고 있다. 청주읍성은…
도피안사를 찾아 철원에 갔다.지형이 듣기보다는 넓은 지평선 같은 평야였다.황금물결 벼이삭이 고개 숙인 길가에 고추잠자리가 살랑거리고 코스모스 길가에는 바람이 가을을 입 맞추고 있다.이 가을 속에서 어느덧 철원 동송읍을 지나 민가가 없는 군부대 사이를 지나 제5검문소로 직진하면 도피안사이다.입구 피안의 다리에 이르니 노을 진 하늘에 흰 구름 몇 조각이 오가더니 아름다운 황혼 빛을 토해낸다. 황혼 빛은 불국의 세계이다. 불국의 세계는 피안의 뗏목을 타고 가는 길이다.천 년 전 도선국사가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철원 동송읍 대마리에 속세를 넘어 이상의 세계에 도달하는 피안의 뗏목 도피안사를 만들어 놓았다.도피안사는 나지막한 화계산 자락에 양쪽 산줄기가 끌어안은 형태로 피안교를 입구로 하여 문을 열어 놓았다.진리가 있는 입구 피안의 다리를 건너 오르면 약간 언덕진 경사에 노송들과 전나무 등나무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군악대 합주에 맞추어 열병을 해주고 어디서 왔는지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나 우리를 안내 해 주듯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주차장 숲 속 도토리나무가 있는 곳으로 사라진다.주차장 옆으로 도피안사를 알리는 돌 솟대에 가로로 새긴 현판을 세워놓고 그 옆 안내판이 도피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