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천민계급이 하나로 양수척(楊水尺)이 있다. 달리 수척(水尺)·화척(禾尺)·무자리라고도 불렀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후삼국시대 압록강 밖으로 망명했던 후백제 잔민, 여진 또는 거란 계통의 북방 귀화인 설 등이 있으나 아직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없다. 양수척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도살, 광대 등의 직업을 갖는 등 한반도 집시처럼 살았다. 특히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왜구(倭寇)로 가장, 민가와 관청을 노략질 하기도 했다. 또 거란군이 고려에 쳐들어올 때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등 그 이미지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양수척은 조선시대에도 고민거리였다. 세종대왕이 온건책을 내놓았다. 명칭도 이때부터 지금도 사용하는 백정으로 바뀌게 된다. '병조에서 계하기를, (…) 비옵건대, 칭호를 백정(白丁)이라고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을 많이 점령한 사람의 밭을 나누어 주어서 농사를 본업으로 하게 하고…'- 세종이 온건책만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강경책도 병행했다. 누범으로 개전의 정이 뚜렷하지 않은 양수척에 대해서는 극형을 마다하지 않았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백정 약로(若
1394년(태조2) 6월 14일 갑자기 대간과 형조에서 올라온 상소 한 장이 궁궐 분위기를 삽시간에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대신들이 내시 이만(李萬)이 남대문 밖에서 목이 달아나고 세자빈궁 현빈유씨가 자기 집으로 쫓겨난 이유가 무엇이냐고 왕에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대간과 형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가만히 보건대 내수(內竪) 이만(李萬)이 참형을 당하고, 현빈 유씨(柳氏)가 내쫓겨 사제로 돌아갔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의심하고 두려워함이 그치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좌우(左右)의 친근한 사람을 법사에 내려 국문해서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없애게 하소서."'- 이에 대해 태조 이성계는 이들을 다짜고짜 순군옥에 가둬버렸다. 순군옥(巡軍獄)은 고려시대 도적질이나 난을 일으킨 사람을 잡아 가뒀던 곳이다. 이 순군옥은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다가 태종 14년 의금부로 대체됐다. 모두 7명의 신하가 갖혔다. '임금이 노하여 우산기 상시 홍보(洪保)·좌습유 이조(李·)·사헌중승 이수·시사 이원(李原)·형조정랑 노상(盧湘)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었다.'- 조선시대가 일인지하의 전제정치로 흐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왕권을 견제하
마패(馬牌)는 중앙 벼슬아치가 공적인 업무로 지방 출장을 나갈 때 역마(驛馬)를 징발할 수 있는 징표를 말한다. 한쪽 면에 연호·연월일과 '상서원인(尙瑞院印)', 또 다른 면에는 가용할 수 있는 말의 수를 새겼다. 상서원은 옥새와 병부 등 여러가지 패를 관리하던 곳으로 6부 중 이조에 속했다. 암행어사와 마패는 눈익은 조합이다. 역졸이 마패를 들고 '암행어사 출두'라고 크게 외치는 모습이 사극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조선시대 마패법 실시를 처음 건의한 인물은 이응(李膺·1365∼1414)이다. '마패법을 세워 아뢰었다. 병조 판서 이응이 아뢰었다. "처음에 마패를 상서사(尙瑞司)에 속하게 하여 이를 무겁게 하였으나, 이제 정부에서 포마(鋪馬)를 발하는데…."'- 그는 장수하지 못하고 50나이에 졸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유난히 길(路)과 관련된 업무를 많이 처리했다. 마패가 땅길에 관련된 것이라면, 세곡(稅穀) 운반은 물길과 관련이 깊다. 실록에는 이응이 물길과 세곡을 함께 언급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경상도 세곡을 남해, 서해 등을 거치는 해로 운송을 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해로 운송은 거센 바람이 문제가 된다.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보고 신륵사는 남한강변 봉미산 아래 있다.영동 고속도로 따라 여주 I.C로 나가 좌회전 하면 장호원 쪽이고, 우회전 하면 여주읍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여주 가는 37번국도 따라 여주시내로 조금가면 전봉리로 명성황후 민비의 생가로 가는 길이다.민비는 1851년에 이곳에서 아버지 민치록과 어머니 이 씨 사이에 태어나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이 씨와 살아오다가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폐비되었다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면서 왕궁으로 돌아 간 자리 감고당으로 이사하여 십육 세에 고종황제의 비로 간택 되었다.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을 겪은 흥선대원군이 부모와 외척이 없는 왕비를 물색하던 중에 자기의 처 민 씨와 먼 친척이 되는 민비를 왕비로 간택 하였다.그러나 똑똑한 민비와 대원군의 갈등 끝에 견제하여 갈등의 세월을 살아오다가 민비가 1895년 일본의 낭인에 의하여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살해되었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고종은 비명에 간 민비를 위하여 생가 터 위에 고종의 친필로 쓴 탄광구리비(誕降舊里碑)와 각을 광무 8년에 세워 주었다. 생가 터가 거의 폐가되어 내려오던 중 1995년 원형 그대로 복원 수리하고 그 집 앞…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유자광과 임사홍이 꼽힌다. 이중 임사홍(任士洪·?∼1506)은 갑자사화를 주도, 정국을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임사홍이 본래부터 간신 기질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효령대군(세종의 형)의 손녀 사위가 되는 등 문벌집안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세 아들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임사홍은 이때까지만 해도 관료직을 무난히 수행, 정치적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우승지(정3품)로 있던 임사홍이 성종에게 우리고장 청주와 관련된 계목을 올렸다. 계목은 중앙 관부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의 일종을 말한다."청주에 사는 전 훈도 경연(慶延)은 효로써 어버이를 섬겨서 생존했을 때의 봉양과 사망했을 때의 장례에 있어서 각기 성경(誠敬)을 다하였으므로, 향당에서 칭송하며 사모하고 있습니다."-향당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 자치조직으로, 달리 유향소라고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지역 유지들의 모임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보고가 있은 후 성종이 직접 경연을 궁궐로 불러 올렸던 모양이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간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물고기를 구하였으니, 너의 효심(孝心)이 실로 지극하다. 그러나, 물에
봉작(封爵)은 왕자·외척·공신에게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의 명예 칭호를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다섯 단계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5등 봉작제'라고도 한다. 동서양은 물론 우리에서도 조선 초기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태종대 이르러 중국의 명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사대(事大)에 어긋난다고 판단, 봉군제를 채택하게 된다. 봉군제는 '○○君'으로 칭하는 것을 일컫는다. 크게 보면 '봉군'도 봉작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의미는 다소 다르다. 봉작제는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 부활된다. 주체 의식이 복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회에 한상경(韓尙敬·1360~1423)이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한명회에게 큰할아버지가 되는 한상경은 일반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청주한씨 문중으로부터는 높은 추앙을 받고 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옥새를 넘겨받아 이를 태조 이성계에게 건넨 인물이 바로 한상경이다. 그는 효심도 남달랐다. 한상경은 자신의 병이 깊어지자 부모보다 먼저 죽을까봐 노심초사했다. "내가 병이 있은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다만 먼저 죽어서 늙은 어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자
경대수 한나라당 충북도당 위원장경대수(53·사진) 한나라당 충북도당위원장이 취임 한 달을 맞았다. 최근 정치판도가 급변하고 있는 가운데 그 영향이 지방에까지 미치고 있다. 충북은 10·26재보궐선거에서 충주시장 재선거를 치른다. 이미 충북도당은 제천·단양(송광호)과 충주(윤진식)를 탈환해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번 충주시장 재선거에서 승리하면 말 그대로 충북 북부권을 석권해 남으로 중부4군과 청주·청원을 공략할 전략기지를 마련하는 셈이다. 내년 대선을 향한 10·26재보궐선거, 내년 4·11 총선에 대한 경 위원장의 도전 전략을 들어본다. -충북도당위원장에 취임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간 도당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충북에서 저희 한나라당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새삼 느끼고 있다. 충북에서만큼은 한나라당이 집권당이 아니라 정말 야당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 충북도민들의 신뢰와 사랑을 되찾아 진정한 집권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도당위원장으로서 주어진 역할과 책무를 다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오세훈 전 서울시장에 이어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 대한 파문으로 정치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10·26 충주시장 재선거…
지리적으로 이름없는 남쪽산(1097m)과 북쪽산(105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 810m로, 저수령(850m)에 이어 백두대간 충북 고개중 두번째로 높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를 남북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곳도 지난주 소개한 고치령과 마찬가지로 충북과 경북의 도계가 영로 정상에 위치하지 않는다. 경북땅이 고개 정상을 넘어 북쪽으로 약간 더 들어와 있다. 따라서 북쪽사면 고개 밑에는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가 위치하고 있다. 이는 영춘 의풍리 일대가 조선시대 순흥도호부에 속했던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상도 순흥도호부는 금성대군 역모사건 후 행정구역 자체가 해체돼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후 1687년(숙종9) 옛 행정지위를 회복했으나 의풍 일대는 영춘현 소속으로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영춘을 생활권역으로 하고 있다. 경사도는 남쪽사면이 훨씬 가파르고 굽이가 많다. 특히 고갯길 바로 옆에는 낭떠러지가 곳곳에 위치, 운전대를 잡은 초행자는 어깨에 힘이 잔뜻 들어가게 된다. 마구령은 정상 일부를 제외하고 양사면 모두 포장돼 있다. 그러나 위 모습 때문에 산사람들로부터 '백두대간의 차마고
칠거지악(七去之惡)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존재하던 제도로, 조선시대 이혼의 근간이 됐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부정한 행위를 하는 것, 질투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밖에 나병·간질 등의 유전병을 가진 경우, 말이 많은 것, 도둑질 행위 등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이유는 봉건적 가족제도의 필연성에서 나왔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함은 불효의 표현이고, 아들이 없음은 가계 계승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일이며, 부정한 행위는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종대에 이맹균(李孟畇·1371∼1440)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관료로서는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질투심이 강한 부인이씨 때문에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질투심이 병적으로 강했던 부인 이씨는 집안의 종을 의심, 그녀를 죽였다. 의정부에서 이를 인지, 세종에게 직접 보고를 한다. '의정부에서 사인(舍人) 이인손(李仁孫)을 시켜 아뢰기를, "이맹균의 처 이씨가 죄 없이 집 여종을 죽였으므로, 전하께서 듣고 깜짝 놀래시어 곧 헌부(憲府)로 하여금 논핵하게 하였는데…'- 아내의 질투는 칠거지악의 네번째에 해당한다.…
충북일보가 주최한 '41차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행사가 지난 27일 부산 태종대 일원에서 펼쳐졌다. 이날 행사에는 충북일보 임·직원과 시민 등 150여명이 참가했다.이날 낮 12시 75호 광장에 모인 참가자들은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김웅식 교수에게 산행에 알맞은 걷기 요령, 산행 시 마음가짐 등에 대해 배웠다.김교수는 "발의 뒤꿈치는 정력을 좋게 하고 엄지발가락을 자극하면 뇌에 영향을 줘 집중력이 좋아지기에 발 모양을 '11자'로 해 걷는 것이 좋다"는 조언과 함께 "단순히 관광을 왔다는 생각보다는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적극적으로 행사에 동참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75호 광장에서 감지해변길을 향해 걷는 해안선 트래킹 코스는 하늘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푸른 바다의 정취로 참가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해안절벽을 개조해 만든 코스라 가파른감이 없진 않았지만 한 폭의 그림 같은 바다의 풍경을 따라 걷는 길인만큼 참가자들은 힘든 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 연신 탄성을 자아내며 씩씩하게 길을 걸어갔다.감지해변 산책로엔 이름 모를 꽃들과 푸르른 나무들이 가득했다. 유난히 더운 날씨였지만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하고 청량한 바닷바람에 온몸을 적셨던…
◇히로세 데이조(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교수)=가해와 지배의 입장에 있던 일본의 역사기술 내용은 한국과 북한·중국 등에서 자주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의 교과서는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지 않고 있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 일본정부는 그 기술 내용을 시정할 필요가 있다. 속도가 더디기는 하지만,정보화·국제화의 진전에 따라 한·일 양국의 교과서 내용은 서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35년전에 일본에서 한국사를 배운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 강하다. 과거에는 정부의 의향만을 따르며 자국민만을 대상으로 삼아 폐쇄적이었던 교과서는 정보의 공개,사료 공개,번역서의 확대,공동연구의 증대, 인터넷의 확대 등에 따라 '타자의 시점'으로부터 늘 검증받게 됐다. ◇김형목(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지배층은 항상 역사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자국 중심의 역사교육은 객관성·합리성을 배제한 채 '뜬구름' 같은 왜곡과 미화를 일삼는다. 한국사의 과도한 '외인론(外因論)'은 역사적 사실과 현격한 거리감을 준다. 역사교육도 '순진한' 한국과 '교활한' 일본으로 대비시킨다. 그러면서도 선린우호를 강조하는 등 어린이들에게 혼란을 심화시키고 있는 점을
"한국과 일본 양국의 미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도 경제도 아닙니다. 다음 세대들이 참된 친구가 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선 '같은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김능진 독립기념관장(62·사진)은 부임한 지 20여일밖에 되지 않은 대학교수 출신이지만 '일본'이나 '독립운동'과 인연이 깊다. 우선 김 관장의 친할아버지인 김병우(金炳宇· 1879 ~ 1936) 선생은 3·1운동 당시 안동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2년간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다. 아버지는 만주로 도망을 가는 바람에 투옥을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부를 포함,집안 어른 3명이 투옥된 기간을 합치면 4년 6개월이나 될 정도로 반일 성향이 강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주위 어른들에게서 "일본 사람은 모두 나쁘다"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사귄 일본인 친구들은 모두 마음이 따뜻했다. 대학교수 시절,김 관장을 집을 예고없이 방문해 자고 간 일본인 교수 3명은 그 후 제자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할 때면 가장 먼저 독립기념관을 방문하는 보은(報恩)을 베풀기도 했다.김 관장은 "앞으로 3년 임기 동안 내·외국인에게 사랑받는 독립기념관을 만들고…
29일은 '경술국치'라고도 불리는 한일병합조약 (韓日倂合條約) 이 체결된지 101년을 맞는 날. 최근 한·일 양국 사이에는 독도·역사 교과서 문제 등으로 또 다시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이에 독립기념관은 지난 24~25일 양국 역사교육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임진왜란'과 '한일병합조약'을 주제로 학술 워크샵을 열었다. 양국 초등학교 교사 4명이주제 발표를,교수 등 전문가 6명은 토론을 했다 .◇제1주제:임진왜란에 대한 한·일 초등역사교육의 현황과 과제△요시다(효고현 야부시이자소학교 교사)=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경서적 교과서에는 임진왜란과 관련해 6줄이 서술돼 있다. 구체적 제목은 별도로 제시되지 않고 '오사카성(大阪城)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제목 아래 일부 내용으로 기술돼 있다. '침략'이라는 말은 본문과 별도로 따로 제시하고 있다. 또 일본문교출판 교과서에는 '히데요시의 조선출병과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제목 아래 8줄이 서술돼 있다. 이 교과서에는 '침략' 대신 '조선 출병'이라고 표현돼 있다. 일본 교사들은 '임진왜란'을 일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싸움은 쌍방이다. 서로 전체를 바라보는 시
이성계가 '칼'로 조선을 건국했다면, 정도전은 그 '머리'에 해당한다. 정도전을 조선 건국의 총설계사로 부르는데는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먼저 '조선경국전'(1394·태조3)을 지어 이성계에게 바쳤다. 조선왕조의 헌법으로 불리는 조선경국전은 국호(國號)부터 관리선발까지 국가 운영에 대한 내용을 망라적으로 담았다. 그는 또 한양 천도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등 수도 경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숭례문 등 한양 4대문 이름도 그가 지었다. 그러나 그는 의원내각제와 성격이 비슷한 신권(臣權)정치를 추구했다. 일종의 권력분점인 셈이다. 여기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수복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사병혁파가 거론됐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후에 태종)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국정을 쥐락펴락 하는 것이자, 2인자 위치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기습을 받고 희생됐다. 정도전은 아들을 많이 뒀다. 이들도 유탄을 피할 수 없었다. 세 아들이 살해되거나 자살했다. '도전이 아들 4인이 있었는데,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급함을 구원하러 가다가 유병(遊兵)에게 살해되고, 정담(鄭湛)은 집에서 자기의 목을 찔
임금의 행차 때 어가(御駕) 주위에서 왕을 모시는 사람 또는 그런 행위를 호종(扈從)이라고 한다. 이때의 '扈'는 '따르다', 從은 쫓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호종이라는 표현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용례감찰사에서 방을 붙여 이르기를, "호종하는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고 웃고 이야기하거나 조복(조회 때 입는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하였다.'- 융복은 철릭과 주립으로 된 옛 군복으로 평시에는 무신만 입었다. 철릭은 허리에 주름이 잡히고 큰 소매가 달렸다. 당상관(정3품 이상)은 남색이고 당하관은 분홍색이다. 주립은 한자로 '朱笠'이라고 쓴다. 말 그대로 무인들이 쓰던 붉은 갓을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중국 국경인 의주까지 피난갔다.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선조가 내세운 논리는 '나라를 빼앗기면 나중에 도로 찾을 수 있지만 임금이 죽으면 나라도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종전이 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86명의 신하를 1~3등급으로 나눠 공신으로 녹훈했다. 이른바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 얼마전에 성달생(成達生·1376∼1444)이라는 인물을 가볍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조선 무과 수석 합격생 1
남쪽 국망봉(1,421m)과 북쪽 형제봉(1,17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는 760m다. 청원-보은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피반령이 360m인 점을 감안하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를 정남-정북으로 연결하고 있다.(대동여지도 참조) 고치령은 여타 백두대간 고개와 행정적으로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백두대간 고갯길 정상을 사이에 두고 충북과 경북의 도계(道界)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이곳 만큼은 경북도계가 고개 정상을 넘어 백두대간 북쪽 사면까지 들어와 있다. 따라서 고치령(古峙嶺) 정상과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사이에는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가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경북의 도계 조형물(사진 참조)도 백두대간 북쪽 사면에 세워져 있다. 충북으로서는 썩 기분좋은 모습은 아니다. 고치령 영로는 남북사면 모두 S자형 굴곡을 많이 지니고 있다. 경사도는 경북 사면이 다소 가파른 모습이어서, 승용차 브레이크를 자주 밟게 된다. 반면 충북 사면은 5월에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응달이 짙게 지고 있다. 대간(大幹)인 만큼 마루금(능선)은 분수령 역할을 정확히 하고 있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그 유명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1445)의 상소문이다. 요약하면, "왜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십니까" 정도가 된다. 현재 초정약수에는 세종대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초정약수 지칭)에서 급급하게 하시어'라는 구절이 동상 설립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최만리 상소문은 그가 혼자 올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록의 서두에는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이라는 복수의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상소에 동참했던 나머지 이름들이 세종에 의해 하나씩 거명된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실록의 행간을 보면 세종은 지극히 논리적인 성격으로 화를 좀처럼
#용화사의 기록들*용화사 용화보전용화사 사적에 의하면 용화사 미륵보전에 봉안된 원래 불상들은 개울가 절터에 방치되어 있었다. 1902년에 현재 용화사 자리에 봉안된 것을 1972년 법당에 안치하고 1990년대 현재의 미륵보전이 완공되면서 일곱 분의 부처님을 봉안하였다가 네 분을 극락전이 신축되면서 모셔오게 되었다. 창건 당시 미륵전과 설교전은 각각 15평이었고 산신각, 칠성각, 행곽, 요사채 등을 갖춘 큰 절이었는데 6·25전쟁으로 법당이 전소되었다. 이로 인해 미륵불 군상이 노천에 방치되어 오다가 1972년 미륵보전을 완성, 보호하여 왔다. 그러나 시멘트 건물로 벽면과 천장이 부식되어 1991년 증축을 위해 미륵보전 중창불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92년 용화사 칠존미륵석불 보호를 위한 기초 공사와 목재공사가 시작됐다. 1996년 용화보전을 완성, 2008년 극락전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미륵부처님 두상 뒤 나한상과 고려시대의 용화사 전신 사뇌사보물 제985호인 칠존미륵석불을 보니 그 중 한가운데 위치한 여래 입상이 높이가 3.2m로 당당한 체구와 삼도가 뚜렷한 만도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가사를 입고 불상 뒷면에 나한상
한때 목욕물에 하반신만을 담그는 반신욕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신욕을 일본 목욕문화라고 알고 있다. 꼭 그렇지도 않은 면이 있다. 조선시대 임금 중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숙종 등이 온천을 자주 찾았다. 이중 숙종의 목욕 방법은 좀더 독특했다. 실록을 보면 그는 항상 배꼽 아래만을 목욕물에 담갔다. '오시(午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5백 바가지 감고, 배꼽 아래를 각 이각(二角) 동안 담갔다.'- 숙종이 왜 반신욕을 했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 정황상 배꼽 윗부분에 피부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이각'(二角)은 30분 정도의 시간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1시간의 1/4을 '일각'이라고 불렀다. 온천은 아니지만 세종대왕은 격무로 얻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고장 청원 초정약수를 찾았다. 1444년(세종 26) 때의 일이다. 이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최만리·?~1445)가 그 유명한 상소문을 올리게 된다. "왜 여기까지 와서 나라에 급한 것도 아닌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느냐"고 강하게 따진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초수리)에 거동하시는 데도 (…) 계달하는 공무에…
성종은 보위에 무사히 오르자 그 고마움으로 74명의 공신을 선정했다. 이른바 좌리공신(佐理功臣)이다. 1등은 신숙주·한명회 등 9명, 4등은 황효원·김순온 등 45명이었다. 이중 황효원(黃孝源·1414∼1481)에 대한 인물평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는 형조참판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인 1460년의 일이다. 이때 황효원은 우리고장을 매우 잘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관찰사 황효원에게 유시하기를, "경이 내가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몸받아서 마음을 다하여 어루만지며 사랑하여 선정의 명성이 널리 퍼졌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이민(吏民)이 상서하여 경을 남겨두기를 청하므로 내가 실로 은혜를 가상히 여겨 민정을 어기지 않고 경을 그곳에 남겨두겠다."'- 임기가 다 되어 이임을 해야 하나 도민들의 간청에 의해 충청감사로 다시 남겨두겠다는 뜻이다. 세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효심'까지도 배려를 한다. 그는 충청도에서 가까운 경상도 상주 인물이었다. '경(卿)은 비록 늙은 어미가 있지마는 길이 멀지 않으므로 경(卿)이 마음대로 내왕하면서 서로 만나도록 할 것이니, 더욱 힘써서 공(功)을 나타내도록 하라"…
해발 696m로, 북쪽의 소백산 제 2연화봉(1,357m)과 도솔산(1,316m) 사이에 위치한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를 서북-동남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역시 이곳에 떨어진 빗물은 최종 도착지가 다르다. 경북사면의 빗물은 영주 남원천, 내성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반면 충북사면의 빗물은 단양 죽령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들어 충주호에 합류한다. 고개 경사도는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을 준다. 충북사면은 고갯마루에서 8부 능선까지는 비교적 완만하나 고개 밑에 이를수록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이다. 경북사면은 경사가 급하면서 굴곡이 심한 모습이 다소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나타난다. 그 구절양장 모습은 희방사 계곡 입구에 이르서야 끝이 난다. 죽령 경북사면은 옛길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지난 2007년 국가명승 제 30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충북사면은 농로로 포장되면서 옛길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같은 죽령 고갯길이면서 충북 사면은 명승에서 제외됐다. ◇지리지 속의 죽령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제 2호 고갯길이다.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 5년조는 '춘삼월에 죽령을 열었다'(春三月 開竹嶺)고…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사관(史官)이 됐고, 이때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었다. 이것이 발단이 돼 일어난 것이 조선시대 첫번째 사화인 무오사화(연산군 4년·1498)다. 김종직은 단종을 죽인 수양대군 세조를, 의제(초나라 회왕)를 죽인 항우(項羽·bc232~202)에 비유해 세조를 은근히 비난했다. 스승 김종직의 시신이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됐고, 사관 김일손은 "파당을 만들고 세조를 무고했다"는 죄로 연산군에 의해 능지처참됐다. 김일손은 성격이 강한 것으로 구전되나 낭만적인 모습도 많이 발견된다. 그가 우리고장 남한강 물길을 따라 내륙여행에 나섰다. '한 고개를 넘어 단양 지경에 들어서면 장회원이 된다. 그 아래에서 말고삐를 늦추면 점점 아름다운 지경으로 들어가는데, 홀연히 쌓인 돌무더기가 우뚝 솟고 총총한 봉우리가 첩첩이 푸르러 좌우가 아득하고 동서로 현혹되어 아무리 교력(巧歷)이라도 셀 수가 없다.'- 장회원은 지금의 장회루를 말한다. 이곳에 서면 구담봉, 옥순봉, 단구협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구담봉은 기암이 거북을 닮았다고 해서, 옥순봉은 희고 푸른 바위들이 힘차게 솟아올라 마치 죽순과 같다하여 불여진 이름이다. 단구
조선시대 사관(史官)은 매일 임금의 거둥이나 관리들의 잘잘못을 기록했다. 바로 사초(史草)다. 사관들은 이 사초를 매달마다 1책 혹은 2책으로 묶었고, 그해 마지막 달에 왕에게 책수만을 보고했다. 이렇게 사초가 책으로 묶어진 것은 시정기(時政記)라고 불렀다. 비밀을 생명으로 하는 사초는 실록을 편찬하는데 기초사료로 사용됐다. 종이는 펄프가 나오기 전까지 귀한 존재였다.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록이 편찬돼 제구실이 끝난 사초는 세초(洗草)라고 해서 물에 빨아 먹물을 뺀 후 다시 사용됐다. 조선시대 모든 왕들은 사초를 보고 싶어했다. 우리나라 역대왕 중 최고의 성군은 단연 세종대왕이다. 그는 인품이나 능력면에서 나라를 가장 잘 이끌었다. 그러나 세종대왕도 인간인 이상 사초를 무척 보고 싶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당시 몇몇 대신들이 "어떠한 경우든 사초만은 안된다"고 버텼고, 세종은 짜증섞인 반응을 보인다. "지금 친히 관람하고자 하는 것은 착하고 악한 행실의 자취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년의 왕위에 오를 때에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몰래 서로 이야기한 말을 대부분 사신(史臣)이 알지 못한 것이 많다. (…) 사신이 어찌 능히 임금과…
행정적으로 충북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와 경북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를 남북으로 연결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북쪽의 도솔산(해발 1,1314m)과 남쪽의 황정산(1,07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850m이다. 산세는 경북 사면이 훨씬 가파르고 굽이가 매우 심하다. 속리산 말티고개 정도는 아니지만, 이른바 구절양장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반면 충북사면은 영로 아래가 가파른 편이지만,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경사도가 완만하다. 따라서 충북사면서 고갯길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마치 고원지대를 지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얼마전까지 이곳에 소백산 관광목장이 운영됐었다. 백두대간인 만큼 마루금(능선) 자체가 분수령 역할을 한다. 북쪽 사면의 물은 남조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반면 남쪽사면의 물은 한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저수령의 어원은 경상도 사면에서 생겨났다. 저수령 중턱 쯤에는 저수골, 안골 등의 마을이 현존하고 있다. 저수골에서 저수령의 지명이 생겨났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단양과 은풍(지금의 예천군 하리면) 사이에 도로를 의미하는 선이 남북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 그리고 선과 백두대간이 종횡으로 교차되는 지점에 '故峴'이라는 고개 이름이 표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조나라 혜문왕은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희귀한 구슬을 갖고 있었다. 원래 한 신하의 애장품이었으나 강제로 빼앗았다. 강대국 진나라의 소양왕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는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성(城)과 구슬을 맞바꾸자고 청했다. 혜문왕은 소양왕의 속내가 뻔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했다. 이때 그 유명한 인상여(印相如)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진나라로 가 화씨지벽을 일단 소양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구슬을 받아 쥔 소양왕은 "과연 훌륭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15성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인상여가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소양왕이 이를 무심코 내주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인상여의 다음 말이 이어진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했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인상여는 구슬을 무사히 조나라로 도로 가져올 수 있었다. 여기서 '완벽귀조'라는 표현이 생겨났고, 그 준말이 '완벽'이다.…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