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조선 조정이 왜 진휼정책을 중요시 했는가를 살펴봤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1차적인 목표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재정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밝혔다. 기근에 대한 책임은 1차적으로 수령이 졌다. 따라서 고을주민 구제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곤장을 명령하던 수령이 도리어 곤장을 흠뻑맞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진휼은 그만큼 중요시됐다. '예조 판서 황희(黃喜)가 계하기를, "고양현에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여 승정원주서 이극복(李克復)을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사비(私婢) 모란의 모자(母子) 세 사람이 굶주리어 부종(浮腫)이 났고, 소동(小童) 1명은 굶어 죽었다 합니다." 하니, 의금부에 명하여 현감 김자경(金資敬)을 추핵하니, 곤장 80대에 좌죄(坐罪)하였다.'- 조선 제일의 책사 한명회는 청주가 본향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묘가 천안 수신면(당시 청주목 소속)에 위치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명회의 장소(葬所)는 충청도 청주 땅인데 3일의 노정이 되니 백관이 회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발인하는 날에 각사의 한 관원이 담복으로 먼저 도문(都門) 밖 육조·의정부에서 설전한 곳에 나아가서, 위(位)
조선 정조 때 간행된 '戶口總數'(호구총수·1789)는 당시 전국의 호구와 인구수를 꽤나 정확히 기재해 놓았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총호수는 1백75만2천837가구, 총인구는 7백40만3천606명이었다. 이를 행정 단위별로 살펴보면, 한양 18만9천153명, 평양 10만7천592명, 의주 8만9천970명, 충주 8만7천331명, 전주 7만2천505명, 경주 7만1천956명으로, 충주가 전국 4위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상주, 진주, 길주, 해주, 대구,양주, 강계, 성천, 나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처럼 충주가 대읍(大邑)의 규모를 지녔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충주목이 관할하던 행정 면적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도를 보면 충주의 서쪽 경계는 지금의 음성 금왕, 맹동면 일부까지, 동쪽은 백두대간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문에 충주의 인구 규모는 대동지지가 간행된 1861년(철종1)에도 청주목 인구를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충주 인구는 9만7천명, 청주는 4만6천명이었던 것으로 고산자 김정호는 기록했다. 두번째 이유는 하항(河港) 목계나루의 번창에 있었다. ◇ 충주 조운(漕運)과 왜구 지방의 조
'많은 사람이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며 앓는 돌림병.' 조선시대 사람이 역병(疫病)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이다. 오늘날 전염병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발생 원인에 대한 생각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과학적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역병에 대해 기후와 환경 이상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혼이나 제사밥을 얻어먹지 못한 잡귀들이 천지간을 떠돌아다니다 만들어낸 결과로 생각했다. 때문에 임금은 물론 지방에서도 연례 행사로 제사를 지냈다. 바로 '여제'다. 특히 역질이 만연할 징후가 보이면 봄철에는 청명, 가을철에는 7월 보름, 겨울철에는 10월 초하루에 여제를 지냈다. 역질이 함경도 등 국경지역에서 발병, 사람이 많이 죽을 경우 집단 이주정책을 긴급히 쓰기도 했다. 국경 방어를 위해서는 인적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죄인들은 강제로 이주시켰다. 역질을 옮겨온 원귀를 쫓는데는 군기감이라는 기관도 동원됐다. 군기감은 병기 제조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특히 화약·각궁(角弓)·화포를 만드는 것이 주임무였다. 군기감은 화약이 갖고 있는 뜨거움과 요란한 소리를 이용해 역귀를 쫓으려 했다. '군기감에서…
◇명부전의 목각상석종 부도에서 서쪽 끝에 자리한 명부전 목각상이 아름답다고 하여 이를 알현하기 위해 명부전으로 갔다. 명부전을 드니 새로 채색한 목각상이 있고 십여 년 전에 있었다는 시왕전에 열립하여 있었다는 작은 동자상은 보이지 않는다. 작은 동자들이 붓도 들고, 합장하며 서있던 작고 예뻤던 동자들, 댕기를 땋아 뒤로 늘이기도 하고, 쌍상투를 틀기도 하였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갔으나 다른 곳에 보관 했는지 동자상이 보이지 않아 서운한 기분이 든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봉안한 경우는 지장전이라고 부르고, 시왕을 모신 경우는 시왕전이라 부른다. 시왕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 명의 왕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공간인 명부세계의 주존이므로 지장전을 명부전이라고 한다.◇시인 묵객의 대장각비 서쪽 명부전에서 다시 석종부도 위 숲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대장각기비가 서있다. 신륵사의 뛰어난 풍광 때문인지 문장가나 시인 묵객들이 드나들었다. 그 중 대장각 짓기를 발언한 이곡이 있었고 그 발언을 성취한 이곡의 아들 목은 이색이 있었다. 나웅대사 석종비 보다 4년 늦은 1387년 대장각기 비문을 이숭인이 짓고 권주가 해서로 비문을 썼다. 원래 이
풍수가들은 충주의 풍수가 매우 좋다고 말하고 있다.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들이 넓기 때문이다. 이런 지리(地理)라면 한번쯤 나라의 도읍지가 됐을 수도 있으나 그렇치는 못했다. 풍수가들은 그 이유로 충주가 풍수상 인체의 어깨 쯤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우리 몸의 어깨는 전면이 아닌 후면에 위치한다. 이때 그 기준점이 되는 것이 백두대간이다. 이와 관련 풍수가들은 충주가 백두대간 안쪽, 즉 경상도 북부지역에 위치했으면 도읍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충주를 도읍지로 삼으려 했던 시도는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 후기는 왜구의 극성기였고, 이 때문에 개경의 방어가 불안해지면서 도참설이 횡행하였다. 도참설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것을 적은 책은 비기, 밀기 혹은 비결이라고 부르고 있다. 충주로의 천도는 신돈(辛旽·?~ 1371)이 공민왕에게 알리지 않고 은밀히 추진했다. 신돈은 충주가 내륙의 요새이며 교통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돈이 비밀리에 시중 이춘부를 시켜 충주 천도를 청하니 왕이 크게 노했으나, 신돈이 송경은 해구가 두렵다고 하자 노염을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청원나들목에서 32번 도로를 타고 문의와 대청댐을 지나 신탄진 방면으로 가다보면 미호동 지나 삼정동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호반도로를 따라가면 삼정동, 갈전동, 이현동을 지나 좌측으로 찬샘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 막다른 길에서 만나게 되는 마을이 직동 찬샘마을이다. 허수아비 마을로도 유명한 찬샘마을은 대청호 주변의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녹색농촌체험마을과 팜스테이마을로 선정된 곳으로 모내기·감자 캐기·매실 따기 등 다양한 농사체험과 나비농장에서 나비 생태관찰·개구리 관찰·도룡뇽 관찰 등 생태체험을 할 수 있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 바람결에 일렁이는 직동 찬샘마을의 앞뜰은 가을빛이 한창이다. 삐딱하게 쓴 모자 치켜 올라간 눈 삐뚤어진 코 배시시 웃는 입꼬리 바라보기만 해도 피식 웃음이 나는 우스깡스런 허수아비 줄나라비를 선 마을길을 따라 둘레길은 시작된다. 마을앞을 가로지르는 마을길은 마을을 벗어나며 비포장 숲길로 이어진다. 휘어도는 굽이길인데다 바퀴자욱 선명한 흙길이지만 차량통행도 가능하다. 2.5km에 달하는 숲길은 부수골까지 이어진다. 호수 건너 위치한 청남대 경비를 위해 주둔해 있던 군부대가 있던 곳으로 청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은 표현 중에 '창생'(蒼生)이라는 단어가 있다. '왕의 왕인 지위에 앉아서 억조의 창생을 다스리던 그는…'.(김동인의 '젊은 그들').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문순태의 '타오르는 강') 창생은 직역하면 '푸른 삶'이지만, 지금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영어로는 'The people'로, 창맹(蒼氓)·창민(蒼民)도 같은 뜻이다. 광제창생(廣濟蒼生·널리 백성을 구제함), 여로창생(如露蒼生·아침 이슬과 같이 덧없는 많은 백성)도 여기서 파생됐다. 조선 중기 때 '창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멋진 시를 지은 인물이 있다. 신재 최산두(崔山斗·1483-1536)다. 15세 때 통감강목(通鑑綱目) 80권을 가지고 석굴(石窟)에 들어가 2년간 여러번 독파를 하고 나왔다는 인물이다. '운창에서 도학 궁리 아홉 해를 보냈는데 / 연일 두고 쏟는 빗발 은하 포구 이었는지 / 강산을 온통 수국으로 할라치면 / 창생(蒼生)들은 포구에서 배를 붙들려 하겠지.'- '천자암 장맛비'(天子菴 霖雨)라는 제목의 시로, 창생들도 도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 끝
달천의 한자 표기는 '達川'이다. 여기서 '달래강'이라는 이름도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달천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수달(獺)이 많이 살아서'와 '물맛이 달아서' 등 두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옛부터 달천수계에 수달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토산조에서 당시 충주에서 많이 나는 것으로 철, 해송자(잣), 송이, 활석(일명 곱돌), 수달 등 5가지를 적었다. 후자에 대한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함께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달천의 물맛에 대해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사진 참조)라고 적었다. 택리지는 충주목 조에서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廬山) 폭포의 물맛과 같다고 했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서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들이 예부터 여기에 많이 살았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달천은 예로부터 물이 매우 맑았다. 그러나 청정수가 흐르던 달천은 1592년 피로 물들었다. 한국 전란사 중 가장 참혹한 패배가 이곳에서 일어났다. ◇신립은 왜 새재에 진을 치지 않았나 1592년 4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얼마전 김익수(金益壽·?~?)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일반의 생각과 달리 푸대접 받았던 일반어사로 유명했다. 실록에 실려있는 내용이 너무나 생생, 안쓰러움과 함께 웃음을 나올 정도다. '신은 말을 타고 다니느라 피곤한데다가 밥먹을 겨를도 없어서 기갈이 심했으나 전혀 음식을 공궤(供饋)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도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또 밥을 먹지 못한 채 나왔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김익수가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를 매우 이례적으로 두번이나 역임했다고 밝힌 바 있다. 8도감사를 모두 지낸 인물은 있어도, 특정지역 관찰사를 두번 역임한 인물은 그 사례가 매우 희귀한 편이다. 관찰사는 국왕의 특명을 받은 사신으로, 끊임없이 도내를 순력하면서 1년에 두 차례 수령을 비롯한 모든 지방관리에 대한 성적을 평가, 조정에 보고했다. 이를 '포폄'(褒貶)이라고 부른다. 그가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충청도 지방에서 대홍수가 발생했다. 그 내용
◇대들보 없는 조사당 다층 석탑에서 극락전 좌측으로 돌아가면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이 서있다. 조사당에 나웅, 지공, 무학대사의 초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영정을 다른 곳으로 옮겨 보관하고 지금은 그 영정을 사진으로 찍어 액자에 넣어 조사당에 모셨다.조사당은 대들보가 없는 팔작지붕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아담하고 예쁜 건물로 조선 태조가 무학대사, 지공, 나웅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었다 한다.정면에 띠살문늬, 분합문늬 6짝 문을 달아 벽체에 고정하고 측면 한 짝에 정자 문살 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3면에는 모두 벽을 둘렸다.내외 이출목 다포계 공포형식을 하고 내부를 우물반자로 장식한 통칸 구조를 한 건물 이다.장대석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 대들보가 없다. 측면 간주에 의해서 그 위 대들보가 아닌 대량이 건너가 네 모서리의 추녀 끝을 받치는 재목을 만나 건물을 가구 하였다.조사당 앞에 향나무가 서있는데 600년의 수령으로 무학대사가 은사 나웅스님을 추모하여 심었다 한다. 이는 스승을 그리워하는 제자의 마음으로 후세 제자들의 지표가 되어 오늘도 향나무가 푸르게 서있다.◇조선 초기…
인류의 에너지소비가 날로 증가함에 따라 지구는 자원고갈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현재 에너지 자원의 주종을 차지하고 있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의 경우 경제적으로 채굴이 가능한 매장량은 각각 40년, 230년, 65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또 화석연료의 사용에 따른 대기오염을 비롯한 환경문제는 인류의 성장잠재력을 가로 막고 있다.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지구환경문제와 자원에너지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세계는 신재생에너지 개발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신재생에너지란 기존의 화석연료를 변환시켜 이용하거나 햇빛, 물, 지열, 강수, 생물 유기체 등을 포함하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변환시켜 이용하는 에너지로 총 11개 분야가 지정(신에너지 및 재생에너지 개발·용도·보급 촉진법 제2조)돼 있다.신재생에너지의 특징은 △연구개발에 의해 확보가 가능한 기술주도형 자원이다. △지구 온난화가스 발생의 85%가 화석연료 사용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환경친화적 자원이다. △항구적으로 재생 가능한 비고갈성 자원이다. △장기적인 선행투자와 정부지원이 필요한 공공성이 강한 미래에너지라는 점이 꼽히고 있다.특히 신재생에너지 가운데 태양광산업은 여타 에너지보다 청정하며, 무한 재생가능한 미래의 에너지원
# 금요일△청주우정산악회(011-464-1434)* 7일 : 순창 회문산* 14일 : 지리산 천왕봉 * 21일 : 농경봉~고루포기산* 28일 : 설악산 울산바위△청주무궁화산악회(010-3423-2783)* 7일 : 거제 계룡산* 14일 : 단양 황정산* 21일 : 가평 운막산* 28일 : 보령 만수산△청주2030산악회(010-2466-3822)* 7일 : 영동 백화산* 14일 : 봉화 청량산* 21일 : 완주 천등산* 28일 : 화천 오봉산△청주 의정산악회(016-864-3259)* 7일 : 영월 덕가산* 21일 : 설악산 울산바위△청주에이스 금요산악회(011-487-5556)* 14~15일 : 한라산, 올레길 1구간* 28일 : 광천 오서산# 토요일 △해맑은산꾼들(010-6473-4488)* 1일 : 거제 옥녀봉* 8일 : 인제 가칠봉* 15일 : 포천 소요산* 22~23일 : 설악산 공룡능선* 29~30일 : 울릉도 성인봉△백두오름산악회(010-6486-1055)* 1일 : 봉화 청량산* 8일 : 순창 강천산* 15일 : 창녕 화왕산* 22일 : 고창 선운산* 29일 : 한라산 백록담△청주산사랑 산악회(010-3423-8505)* 1일 : 영남 알프스 종
들판 가득 풍요로움을 노래하는 용평들을 지나 마주한 무심천. 왼쪽으로는 방서교 오른쪽으로는 관평교가 먼발치로 바라다 보인다. 어느쪽이든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살펴보니 방서교와 관평교 중간쯤 물길에 닿을듯 내려앉은 앉음뱅이 다리가 눈에 띤다. 폴짝폴짝 앉음뱅이 다리를 건너 둘레길은 시작된다. '하늘은 파랗고 강물도 푸르고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마음...' 흥얼흥얼 콧노래와 함께 걸음들이 가볍다. 달뿌리풀과 억새의 화려한 군무가 펼쳐지고 겨울 첫손님인 흰뺨검둥오리 가족들 물위를 노니는 무심천변을 따라 걷던 길은 평촌과 운동동으로 이어진다. 잠시 월운천변을 따라 걷는 둘레길은 운동2교를 건너 원봉공원으로 접어든다. 정갈한 숲속 세상이 반긴다. 인근 주민들이 산책겸 운동 삼아 찾는 휴식처로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소미재에서 용암동쪽으로 빠진뒤 보살사 방향으로 난 길을 따른다. 도심에서 한발짝 물러났을뿐인데도 한적한 시골의 정취가 묻어난다. 길가로 즐비한 포도 과수단지에선 포도 수확이 한창이다. 때마침 체험학습 온 유치원생들의 재잘거림이 병아리 같다. 낙가동 소류지에서 둘레길은 왼쪽으로 길을 달리한다. 계속 직진하다보면 막
복정(卜定)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먼저 점(卜)을 쳐서 길지를 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밖에 조선시대 그 지방의 토산물을 강제로 바치게 하던 것을 복정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남에게 억지로 부담지우는 것을 '복정씌운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래했다. 복정은 궁궐의 부족한 물품을 채우는 것이 1차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중국사신 접대용으로도 복정이 자주 하명됐다. '간원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유사(有司)로서는 마땅히 마음을 다해 조처하여 사대하는 성상의 지극한 정성을 우러러 몸받아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신들이 해조(該曹)에서 각도에 분정한 물목을 가져다 보건대…"'- 복정은 강제성을 띄었다. 이는 하명된 양을 채우지 못할 경우 벌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직이라는 중징계도 내려졌다. 그와 같은 일이 우리고장 충청도의 한 병영에서도 일어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충청 병사 김거병은 연소한 무부로서 부임한 뒤로 방비에는 뜻이 없고 오직 군졸을 침어(侵漁)하는 것으로 일을 삼는 데다가 법금(法禁)을 무시하고 가족을 많이 거느리고 가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이번에 조사가 왔을 때 각도에 복정
충북도내 시군 중 한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최북단 단양이다. 단양문화원이 조사를 한 결과, 무려 130여수에 달하고 있다. 이들 한시의 대부분은 단양팔경 등 명승을 노래했다.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의 작품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흔치 않게 유배시를 남긴 인물도 있다. 정철(鄭澈·1536∼1593)과 더불어 조선 시가(詩歌)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1671)다. 그는 85살 생애를 살면서 14년은 유배지, 19년은 은거지, 나머지 8년은 관직에 몸을 담았다. 윤선도는 이 기간중 세 차례의 유배와 두 차례의 이배(유배지를 옮김)를 당해야 했다. 고산은 이때 우리고장 단양을 지나며 '歇馬孔巖'(헐마공암)과 '죽령도중'(竹嶺道中) 등 두 편의 한시를 남겼다. ◇14년을 유배지에서 살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일개 성균관유생 신분으로 이이첨(李爾瞻)·유희분(柳希奮)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거리입니다. 그런데도 이이첨이 또한 감히 변명을 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시 이이첨은 일인지상의 최고 권력자였다
조선시대 어사(御史)는 암행어사와 일반어사로 구분됐다. 암행어사는 글자 그대로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惡政)을 살피던 특명 관직을 말한다. 이들의 임명과 임무는 일체 비밀에 붙여졌다. 암행어사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세조 때였다. 성종실록에 '암행어사'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나, 세조 때 이미 도입됐던 정황이 나타난다. '옛날에 세조(世祖)께서 신에게 분부하기를, '지금 그대들을 보내는 것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옛날 사람의 말에 '고양이를 기르는 집에서는 쥐가 함부로 다니지 못한다' 고 했으니, 암행어사(暗行御史)가 한 번 나간다면 탐관(貪官)이 저절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암행어사 제도는 조선 전기에는 그리 발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신간의 신뢰를 해치는 것이라고 해서 안 좋게 여겼다. 대신 공개리에 활동하는 일반어사 제도가 더 많이 활성화됐다. 종류도 파견 목적에 따라 순무, 균전(均田), 독운(督運) 등 매우 다양했다. 순무는 순찰, 균전은 형평 과세, 독운은 조운을 살피는 것을 일컫고 있다. 이밖에 호패(號牌), 구황(救荒), 재해 점검을 위해서도 일반어사가 자주 파견됐다. 암행어
충북일보가 주최한 '42차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행사가 지난 24일 청원군 대청호 둘레길 9구간에서 펼쳐졌다. 이날 행사에는 충북일보 직원과 시민 등 28명이 참가했다.오전 8시 청주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전 9시30분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참가자들은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김웅식 교수에게 산행에 알맞은 걷기 요령, 산행 시 마음가짐 등에 대해 배웠다.김 교수는 "비가 내릴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산이며 산은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필터역할을 하는 만큼 굉장히 소중한 존재"라며 "단순히 관광을 왔다는 생각보다는 산의 중요성과 감사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이날은 예정된 코스(동이면 석탄리 안터선사공원-수북리-며느리재-군북면 국원리-돌거리고개-청풍정-도호리)로 가지 않고 배를 타고 도호리에 도착, 역주행하는 코스로 진행됐다.배를 타고 건너는 대청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으로 가는 내내 참가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햇빛에 반사된 호수는 마치 다이아몬드를 뿌려놓은 것처럼 화사했다.도호리에서 시작되는 강변로를 따라 걸으며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과 김옥균을 사랑한 기생 명월이의 설화를 지닌 청풍정과 명월
얼마전 우리고장 음성 인물 채수(蔡壽·1449~1515)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연산군 시절을 산 인물이다. 연산군이 보위에 오른지 5년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채수는 이때 정희대비(세조의 비)가 폐비윤씨에 대해 적은 글을 사관에게 넘겨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극형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곤장 70대만 맞고 풀려난다. 이때 실록에 우리고장 지명이 어느 때보다 많이 등장한다. 누가 "기생을 데려다 잔치를 했다"고 고변을 한 모양이다. '신이 먼저 충주에 가서 기다리자 아비가 또한 뒤따라 왔었습니다. 단지 하룻밤을 자고서 이튿날 신이 먼저 떠나 안부역(安富驛)에 이르고 아비가 뒤에 왔는데, 충주의 수령이 잠시 전별만 했을 뿐이고 기생을 데리고 잔치를 하느라 오래 머무르며 폐단을 만든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안부역은 지금의 수안보 일대를 말한다. 그의 손자가 채무일(蔡無逸·1496∼1556)이다. 조선시대 화가는 이른바 문인화가와 화원으로 대별된다. 문인화가는 사대부를, 화원은 속칭 환쟁이를 일컫고 있다. 문인화가도 조선시대 미감(美感)을 일정 부분 주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화가로 이름이 남는 것을 꺼려했다. 따라서 자식들에게
재실(齋室)은 묘제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재실과 같이 죽음에 관련된 문화는 엄숙한 편이다. 따라서 일반 주택과 차이가 많다. 재실의 누(樓)는 묘제를 지낼 때 주로 사용되는 공간으로 문중회의와 묘제 후 음복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전사청(典祀廳)은 제사에 필요한 기구 및 제수를 보관하는 곳으로 유사실(有司室)로 연결된다. 유사실은 제수 점검, 제사절차 협의, 문중회의 주관 등을 담당하는 유사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재실도 엄연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묘지기, 산지기 등 관리인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묘·산지기는 상민이나 천민 신분으로, 재실의 문중에 신분·경제적으로 종속됐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경주 부윤(慶州府尹) 전동생은 그 첩(妾)이 죽으니, 치내(治內)에 장사하고, 또 관노(官奴)를 묘지기(墓直)로 정하였으며, 품관(品官)이 있는 인리(人吏)로 하여금 재(齋)를 베풀게 하여…'- 그러나 재실문화는 근래들어 거의 붕괴됐다. 묘직이나 산직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다. 또 조상숭배와 동족 관념이 희박해 지면서 제사 참가율이 하락, 폐허로 변하는 재실이 크게 많아지고 있다. 이런 환경속에 우리고장 영동 용산면 율리에 송담재(松潭齋·충북문화재
단양 도담삼봉(국가명승 제 44호)은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절경이다. 주변의 석회암지대는 하천과 지하수 등에 의해 모두 깎여나갔다. 지질학 용어로 용식(溶蝕) 현상이다. 반면 도담의 세 봉우리는 석회암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원추 모양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강 안에 '바위섬'(巖島)이 존재하는 곳은 국내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도담삼봉의 이같은 명승성은 역사적으로 '에피소드 공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단색이 아닌 다원색이었다. ◇택리지도 장문으로 언급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숙종~영조 연간을 산 인물이다. 그는 택리지에서 단양을 '들판은 없지만, 강과 시내, 바위와 골의 홀륭한 경치가 있다'(無十里野有江溪巖洞之勝世)라고 적었다. 또 '이담삼암'(二潭三巖)이라는 표현으로 단양 전체의 명승성을 함축했다. 이담은 2개의 못이라는 뜻으로 구담과 도담을, 3개의 바위를 의미하는 삼암은 상선암·중선암·하선암을 의미한다. 그는 도담삼봉에 대해 돌로 인위적으로 쌓았다는 뜻인 '석가산 같다'고 표현했다. '강물이 휘돌아 가면서 모여 깊고 넓다. 물 가운데 세 개의 돌봉우리가 각각 떨어져 한 줄로 선 것이 활줄같이 곧으며 쪼아서 새긴 것이 기이하
연산군은 폭정 만큼이나 식탐이 강했다. 맛이 있거나 몸에 좋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즉시 진상을 명령했다. 그 대상도 짐승, 해물을 가리지 않고 다양했다. '경기감사에게 하서(下書)하기를, "해별(海鱉)·강돈(江豚)·옥복(玉腹) 각두 마리씩을 산 채로 잡아 봉진하라" 하였다.'- 인용문 중 해별은 바다자라, 강돈은 돌고래를 말한다. 옥복은 지금의 사문화돼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옥돔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의 식탐은 외국 것도 가리자 않았다. 당시 부산 등 남해안 지역에 일본 전복이 유입된던 모양이다. '전교하기를, "왜전복(倭全鰒)이 있다 하니, 사서 바치도록 하라. 이 물건 뿐 아니라 모든 특이하게 맛난 것은 널리 구해서 바치라" 하였다.'- 호색한이었던 연산군은 보양식에도 당연히 관심을 보였다. 이번에는 백마(白馬)가 정력에 좋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역시 진상을 명령한다. '전교하기를,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 하였으니, 흰 말의 고기는 양기(陽氣)를 돕기 때문이었다'- 연산군 식탐을 길게 이야기한 것은 왕의 밥상에도 정치적인 색채가 상당 부분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사람에게는 인명(人名)이 있고, 땅에는 지명(地名)이 있다. 한반도 지명 분류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아쉽게도 일본인 젠쇼에이스케(善生永助)였다. 그는 1935년 발간한 '조선의 취락'이라는 책에서 한반도 취락과 지명을 학문적으로 처음 분류했다. 지명은 땅에 대한 단순한 호칭같지만 그 이상의 문화·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지명은 토지에 고착된 것이기 때문에 보수성이 매우 강한 편이다. 경기도 수원의 지명에서 이같은 현상을 발견된다. 수원(水原)은 상고시대에는 매홀(買忽)로 불렸다. '매'는 '물', '홀'은 '성'을 의미한다. 지금의 수원은 고대 후기에는 수성(水城), 고려 시대에는 수주(水州)라는 지명을 갖고 있었다. 근원인 '물 水' 자는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명의 보수성은 역으로 그것이 바뀔 경우 종종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한다. 우리고장 보은군에서 그같은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신라는 470년(자비마립간 13) 3년의 공사 끝에 보은에 산성을 쌓았다. 바로 삼년산성으로, 보은군의 최초 이름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은 여기서 유래했다. 이후 삼년군으로 첫 개명을 하게 된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삼년산군을 '보령'(保齡)으로
경부고속도로 금산 나들목에서 68번 지방도를 따라 영동방면으로 가다보면 제원대교를 건너 우측도로변 원골 쉼터가든 입간판과 함께 서있는 월영봉 표지석과 산행안내도를 만날 수 있다. 투명한 햇살, 살가운 바람 가을이 성큼 다가섰음을 체감한다. 소풍길 나선 아이들처럼 와글와글 사진 찍고 산행안내도를 뒤로 산행은 시작된다. 오름길은 시작부터 급하다. 홀치기 하듯 감아올린 뻑뻑한 걸음만큼 숲속세상은 깊어지고 아랫세상은 멀어진다. 가뭄 끝에 놓인 산길은 푸석푸석 날먼지 날리는데다 너덜길이다. 가쁜 숨 삭히는 시간 속에 주어진 상은 언제나 후하다. 발길이 멎는 곳이 전망대요 눈길이 가는 곳이 천국이다. 가을 햇살의 야무진 손끝에 길들여진 산하는 찬란하다. 산자락을 휘감아도는 금강의 물곡선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천연의 캔버스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평온하다. 더디다. 머물다 가는 시간들이 잦다보니 더디다. 1시간 10분 만에 월영산이다. 제원면에서 세운 정상석이 서있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과 영동군 양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월영산(月影山)은 달맞이 산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정월 대보름에 월영봉의 달그림자가 금강에 맑게 비치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는 인근 주민들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의약서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있다. 세종의 명에 의해 1433년 노중례, 유효통, 박윤덕 등이 편찬했다. 내과·전염병·외과·이비인후과·안과·산부인과·소아과·치과 등 각종 임상을 망라적으로 다루고 있어 종합 의약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향약집성방의 모든 내용이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에 앞서 편찬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跋)이라는 의약서를 꽤 많이 인용했다. 향약제생집성방은 권중화, 김사형, 김희선, 조준 등이 지은 것을 제생원(濟生院)에서 편찬했다. 당시 실력자인 권근(權近)이 이 의서의 발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제생원의 향약집성방은 이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 예천백 권상(權相) 중화仲和)와 더불어 그가 일찍이 저술한 향약방을 가지고 다시 수집을 더하여 전서의 판각을 완성하니, 장차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그 거주하는 곳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찬자 4명중 한 명인 권중화(權仲和·1322∼1408)는 개인적으로 황당한 경험을 한다. 그는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홍건적이 침입하다머리에 붉은 두건을 써 이름이 붙여진 홍건족은 고려를 노략질하기 위해 1차(1359년·공민왕8), 2차(1361년·공민왕 11) 등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했다. 1차 때는 평안도 함종까지 진출했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퇴각했다. 2차 때는 10만여명의 대군이 침입했다. 공민왕은 개성의 마지막 방어선인 절령(일명 자비령·개성~평양 중간)이 돌파를 당하자 남쪽으로의 몽진(蒙塵)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몽진은 왕의 피난길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본래는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공민왕 일행이 지금의 경기도 땅에 들어서자 우리고장 충주, 청주목사 등이 잇따라 알현했다. '분수원(焚修院) )에 이르니 안렴사 안종원 충주목사 박희(朴曦)가 와서 알현하고 드디어 영서역(迎曙驛 양주에 이르니 남경유수 최인원(崔仁遠), 청주 목사 김성갑(金成甲)이 와서 알현하였다.'- ◇충주를 경유하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공민왕이 이천현을 경유할 때 홍건적에게 완전히 함락됐다. 이때 천인공로할 만행이 저질러졌다. '우설(雨雪)이 내리는데 어가가 이천현에 이르니 어의가 젖어 얼어서 섶을 태워 스스로 따뜻하게 하였다. 이날에 적이 경성을 함락하고 유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