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농업국가였고, 그중에도 벼농사를 가장 중시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정치 중 농사보다 더한 것이 없고, 그 농사의 요체 중 수리(水利)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지리지는 수리와 관련된 내용으로 제언(堤堰)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제언은 인공적으로 쌓은 저수지나 보를 말한다. 지금의 저수지는 그 규모가 무척 큰 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방죽도 제언으로 표현했다. 벼는 마지막 추수기를 제외하고 생육기간 내내 물을 필요로 하는 작목이다. 때문에 벼농사를 잘 지으려면 제언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사료에는 제언 축조를 게을리한 고을 수령에게 곤장을 때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태종 18년의 실록 기사에는 우리고장 충청도와 관련된 내용도 등장한다. '청주 목사 김매경·판관 윤번·충주판관 장안지·진천 현감 진운수·죽산 현감 김종서에게 각각 태(笞)50대를 때려서 환임(還任) 시키니(…) 행대(行臺) 정길흥이, 김매경 등이 제언을 수축(修築)하지 않았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수령'(守令)은 군수와 현령의 앞뒷말을 취한 단어로, 지금의 시장·군수와 같은 지방관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들에게 곤장을 쳤다는 것은 당시 조정이 제언을
괴강 건너편 괴산읍 능촌리에 충민사(忠愍祠)라는 사당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김시민(金時敏·1554∼1592) 장군의 위패만을 모신 사당으로 알고 있다. 김시민은 임란 종전후 '육지의 이순신'으로 불릴 정도로 명장이었다. 그는 왜적 2만명을 맞아 불과 3천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 진주성에서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였다. 비록 적의 유탄을 맞아 숨지기는 했으나 진주성을 방어해 냈다. 그러나 충민사는 단수가 아닌 복수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또 다른 주인공은 김제갑(金悌甲·1525∼1592)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다. 그는 왜장 모리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으로 들어가 지구전을 벌였다. 그러나 70살이 거이 다 된, '고령의 문관'이었던 거는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됐고, 부인, 아들 등 전가족이 몰살됐다. 사실 그가 전장에서 최후를 맞은데는 불운이 크게 작용했다. 방금 '고령의 문관'이라고 표현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령인 관계로 '임지를 교대하라'는 명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쪽…
대전시 대덕구에 있는 계족산(鷄足山 419m)은 대전시 중구에 있는 보문산 공원과 더불어 대전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산이다. 장동 산디마을을 가운데 두고 한바퀴 빙도는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동안 먼 서쪽으로는 계룡산 북쪽 가까운 곳까지 들여놓은 유성 시가지 서남쪽으로는 대전시가지와 경부고속도로가 보이고 동쪽 대청호 주변의 환산과 백골산, 국사봉등의 산군과 어우러진 호반의 정취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드넓은 대전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계족산 정상 봉황정에서의 탁트인 조망은 계족산 산행의 백미이다. 산 모양새가 닭발 모양으로 생겨서 이름 붙여졌다는 계족산의 옛이름은 봉황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계족산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계족산성을 비롯해 30여개에 달하는 산성과 산성터가 남아있어 볼거리를 제공하고 산성외에도 절터 및 각종 사찰이 남아있다. 또한 계족산에 있는 임도를 이용한 황톳길은 등산외에도 맨발 걷기, MTB등을 즐길 수 있다. 계족산은 크게 두줄기의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능선은 대전시가지의 동쪽과 맞붙어 장동고개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짧은 능선으로 대덕구의 아파트 단지에서 올라오는 들머리가 많다. 산행내내 서쪽으로는…
전회에 백두대간 운하사업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경세가 하륜도 다음과 같은 말로 적극적인 찬성을 했으나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역시 엄청난 규모가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윤이 말하였다. "기쁨으로 백성을 부리고,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은 예전의 도(道)입니다. 만일 의리에 합한다면, 비록 칼날에 죽더라도 또한 분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쁘게 하는 도리는 창고를 열어서 양식을 주고 밤에는 역사를 쉬게 하여 피로해서 병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역사'는 세곡선에 올라 노를 져었던 역부(役夫)를 의미한다. 이때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인물이 한옹(韓雍·1352∼1425)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씨(韓氏)는 '청주'를 단일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청주한씨는 한란 이후 곡산(谷山), 평산, 안변, 한양, 당진 등 한때 10여 본으로 분관했다. 그러나 지금은 곡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원됐다. 따라서 현재의 한씨는 엄밀히 말하면 청주, 곡산 등 2개의 본관이 존재하고 있다. 한옹이 바로 곡산을 관향으로 갖고 있다. 현재 곡산 한씨는 전국적으로 4천9백여명(1천5백여 가구·
조선초기 경상도 세곡(稅穀)은 마산창 등 남해안 3창에 모아져 서해를 거쳐 한양 경창으로 운송됐다. 그러나 바닷길로 운송하다 보니 사나운 바람을 만나 조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태종 3년(1403)의 침몰 사고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무려 34척의 배가 동시에 침몰했다.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해중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 하였다.'- 실록은 이날 침몰 사고의 재산손실과 인명희생 규모를 "쌀은 만여 석이고, 사람은 천여 명"이라고 적었다. 태종은 이때부터 경상도 세곡을 바닷길이 아닌 육로로 운반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태종은 생각이 대범했다. 그는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세곡을 운반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남한강과 낙동강 수계를 연결하는 구상을 한 바 있다. 결국 환경론자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디어의 원조는 조선…
고려 공양왕 때에는 말 한마리를 팔면 노비를 두세명 살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초에는 14세~40까지의 노비로는 무명 400필, 14세이하, 40이상의 노비로는 무명 300필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말(馬)의 값은 450필이었다. 노비가 말보다 더 싼 셈이었다. 이밖에 여종을 팔 때애는 뱃속의 태아까지 값을 쳐서 받았다. 16세기 인물인 미암 유희춘은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열살짜리 사내종에서부터 예순일곱된 늙은 계집종까지 모두 여섯명 노비를 상으로 주었다. 우리고장 보은 출신으로, 조선 전기의 홍윤성(洪允成·1425~1475)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종을 막 대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종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 뿐만 아니라 겁탈하는 모습이 실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 생겨난 속담이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 였다. '시첩(侍妾)·노복(奴僕)이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면 문득 용서하지 않고, 궁검(弓劍)을 쓰기까지 하였으며, 아내 남씨에게 자식이 없어서 같은 고을의 사족 김자모(金自謀)의 딸을 강제로 취하여 장가들었다'.- 노비 목숨을 경시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른바 '용석(龍石)의 사건이 있다. 그는 사랑하던 양반집 종년을 데리고 도망갔으
바람이 차다. 곱게 물든 단풍의 화려함은 여전함을 시샘하듯 '우수수' 털어내는 가을바람이 차다. 몸은 움츠러들고 걸음은 '종종종' 자발적다. 하긴 나뿐 아니라 모두들 춥긴 추운 모양이다. 누렇게 물든 황금벌판을 달리는 그림속 주인공울 기다리는 찬샘마을앞 수많은 '타슈'들에게 보내는 시선이 심드렁한 것을 보니... 둘레길은 찬샘마을앞을 가로지르는 마을길 오른쪽으로 '쇠점고개' 팻말을 따라 시작된다. 헤설피 드러난 목덜미로 소름이 돋는다. 듬성듬성 빈자리 늘어가는 가을 들판을 가로지르는 임도를 지나 20여분 오르니 쇠점고개이다. 외진 고갯마루엔 키다리 안내팻말과 바람만이 길목을 지킨다. 쇠점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냉천골과 이어지고 왼쪽 능선을 따라가면 노고산성 오른쪽 능선을 따라가면 함각산과 견두산성, 추동으로 이어진다. 잠시 일행들 기다릴겸 고갯마루에 주저앉아 가을햇살을 즐긴다. 스산하다. 사방을 에워싸는 산속의 작은 소음속 평화로운 일상이 눈으로 가슴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미세하게 감지되는 기척 잠시 숨죽이며 살펴보니 저만치서 서성이는 고라니 한 마리가 눈에 띈다. 저또한 무슨 기척을 느낀건지 한동안 꼼짝않고 그 자리에 서있다. 그들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우
지리서는 말 그대로 당시의 지리 환경과 문화에 대한 인문적인 기록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수정할 내용이 반드시 생겨나게 된다. 세종 때의 관찬 지리서로 '동국여지승람'이 있다. 이를 새롭게 수정·보완한 것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제목에 '新增'(신증)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수정·보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행(1478∼1534)이 진전문(進箋文)과 서문(序文)을 쓰는 등 사실상 대표저자 역할을 했다. 진전문은 책의 성립 과정을 알리는 문장을 말한다. 이행은 용재집을 남길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그러나 이행은 유배와 이배를 거듭하고 또 평안도 유배지에서 최후를 맡는 등 불우한 삶을 살았다. 첫번째 시련은 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한 것에서 찾아왔다. 그는 이 사건으로 곤장 60대를 맞고 우리고장 충주로 유배됐다. '전교하기를, "승지 박열·이계맹은 금부에 가서 홍문관 원에게 형장 때리는 것을 감독하여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라. 박안성은 장형을 속받고 진잠에 부처하고, 응교 최숙생은 장 60을 때려 신계에 부처하고, 부
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실려 있었다.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저자로, 목가적이면서 권농(勸農)의 의미로 해석됐다. 남구만이 이 시조를 지은 동기는 완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1689년 그는 숙종의 뜻을 거스르고 희빈장씨의 소생인 균(均)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역린을 건드린 것으로, 그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로 유배됐다. 동해 사람들은 이때 그 유명한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내용의 시조가 지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남구만 사당이 남아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낙향했을 때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었다고 주장, 역시 같은 내용의 시조비를 세웠다. 이와는 별개로 1920년대까지 창으로 불려진 내용은 요즘 교과서에 실린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29일자 시조 소개란에 실린 내용이다.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질이 우지진다 /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아니 일엇느냐 / 뒷뫼에 사래 긴 밧흘 언제 갈려 하느니.' '노고지리'를 '노고질', '아이'를 '아희놈', '재 너머'를 '뒷뫼'로 표
조선 시대에도 노비는 소유주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눴다, 다시 주거 형태와 신역의 부담 형태에 따라 각각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었다. 주인집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노예를 솔거노비, 관청이나 주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노예는 외거노비라고 불렀다. 외거노비는 약간의 자유를 누리는 대신 주인에게 곡식, 베 등 일정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를 신공(身貢)이라고 불렀다. 노비는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으로 물건처럼 취급됐다. 가축이나 토지에 비견해 '말하는 재산'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는 단위를 '名'(명), '員'(원)이 아닌 '口'(구)라고 했다. 공노비 중에 선상노(選上奴)라는 노비가 있다. 말 그대로 지방에서 선발하여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노비를 일컫는다. 이들 선상노는 관원의 수행, 각궁의 잡역, 성상(城上), 방직(房直), 고직(庫直) 등을 담당했다. 성상, 방직, 고직 등의 표현이 다소 생소하다. 성상은 각 관서의 소장기물을 맡아 간수하던 노예, 방직은 관청의 심부름꾼으로 달리 '방지기'라고도 불렀다. 고직은 창고를 지키던 노예를 말한다. 실록에 우리고장 백성이면서 군복무하듯 서울로 올라간 선상노의 사례가 더러 등장하고 있다
충북일보 '43차 클린마운틴 아카데미'가 지난 29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에서 펼쳐졌다. 이날 행사에는 충북일보 직원과 시민 등 40여명이 참가했다.오전 7시 청주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전 10시께 가야산에 도착했다. 흐린 날씨 속에서도 가야산의 멋진 절경을 보기 위한 시민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도 발걸음을 주춤하는 참가자는 없었다.참가자들은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김웅식 교수에게 산행 시 마음가짐 등에 대해 배웠다.김 교수는 "산행할 때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것은 물론 함께하는 사람들과 멋진 가을 전경에 흠뻑 취해보라"며 "마음을 비우고 산의 넒은 마음을 배웠으면 한다"고 했다.코스는 백운동주차장에서 출발해 만물상-상아덤(서장대)-서성재-백운사지를 거쳐 원점으로 돌아오는 약 7㎞ 거리.만물상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초반 오르막길이 비탈져 처음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겐 쉽지 않은 코스였다. 하지만 3㎞(2시간30분)를 지나 만물상에 도착하는 순간 내려다보이는 가야산의 전경에 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7년 만에 개방된 만물상은 꼭꼭 숨겨놓았던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며 많은 등산객들을 홀렸다. 울긋불긋 오색단풍이
우리나라 회화사를 논할 때 조선 전기의 최고 작품으로 단연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가 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엄밀히 말하면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이 기획하고, 안견이 그린 작품이다. 안견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은 그에게 이런 종류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몽유도원도이다. 이런 사연 때문에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산문과 시가 곁들여져 있다. 전회에 이현로와 정분에 대한 서술을 한 바 있다. '이현로가 벼슬이 떨어져서 충청도관찰사 안완경(安完慶)·체찰사 정분을 따라 충주(忠州)에 이르렀는데, 미처 말에서 내리기 전에 잡는 자가 끌어내리어 묶어서 담 그늘에 두었다.'- 인용문 중에 안완경(安完慶·?∼1453)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관찰사 안처선의 아들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만큼 전도가 양양했다. 안평대군과 함께 거명됐다는 것이 다소 불안하다. 안완경이 어떻게 해서 안평대군과 친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때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안평대군은 문신, 수양대군은 무신을 포섭하고 있었다. 안평대군이 안완경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용(瑢)이 정자양(鄭自洋)을 시켜 충
출퇴근 시간과 맞물린 도심의 거리는 먹이감 찾아 이동하는 맹수들 처럼 치열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뒤퉁맞다. 그렇다고 서열에서 빠져나오는 일조차 쉽지 않다. 팍팍한 무리 속을 어렵사리 벗어난 레저토피아 탐사대원들이 도착한 곳은 비하동 만남주유소 광장이다. 들고나는 차량들의 바람기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주유소 광장옆으로 난 소로를 따라 둘레길은 시작된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숲길은 폭신폭신 융단같다. 간간이 떨구어놓은 밤송이 궁금증에 헤집어도 보고 함초롬히 피어있는 쑥부쟁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정겨운 길을 따라 1시간여만에 부모산 산정에 오른다. 청주의 강서동에 위치한 부모산(父母山 231.7m)은 임진왜란당시 왜장 흑전이 침공하여 이고장 출신 박춘무가 그의 아우 춘번,아들 동명과 함께 칠백여의병을 모아 성내에서 대적할 때 군량과 식수가 떨어져 아사직전 이 곳 상봉에서 물이 솟아 생기를 얻고 왜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그후 이산(악양산)을 부모산이라 하고 이 샘을 모유정(母乳井)이라고 한다. 현재 모유정은 통신탑이 서있는 정상아래 위치해 있다. 오래전 샘은 말라있고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함께 역사를 기억한다. 부모산의 주변에는 금강의 지류
# 금요일△청주우정산악회(011-464-1434)* 17~21일 :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해외여행△청주무궁화산악회(010-3423-2783)* 4일 : 순천 금전산* 11일 : 대둔산* 18일 : 정선 민둥산* 25일 : 영남알프스 신불산△청주우리산악회(010-2466-3822)* 4일 : 정읍 내장산* 11일 : 사랑도 칠현산* 18일 : 정선 민둥산* 25일 : 창녕 화왕산△청주 의정산악회(016-864-3259)* 4일 : 영암 월출산* 18일 : 영월 태화산△청주에이스 금요산악회(011-487-5556)* 11일 : 청송 주왕산* 25일 : 곡성 동악산# 토요일 △해맑은산꾼들(010-6473-4488)* 5일 : 장성 백암산* 12일 : 가야산 만물 상단풍* 19일 : 서산 황금산* 26일 : 경주 오금산, 고위산△청주백두오름산악회(010-6486-1055)* 5일 : 영동 천태산* 12일 : 장성 백암산* 19일 : 금산 월영봉* 26일 : 순천 금전산△청주산사랑 산악회(010-3423-8505)* 5일 : 영암 월출산* 12일 : 죽령산* 19일 : 웅진 굴업도* 26일 : 병풍산~불태산 종주△사람과산(010-9573-3651)* 5일…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바람을 막고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풍수에서는 바람은 기(氣)를 흩어지게 하고, 물은 재화를 불러온다고 보고 있다. 사실 농사를 짓는데 있어 물을 얻지 못하면 재화를 얻지 못한다. 풍수상 물은 홀로 움직이지 않고 산과 함께 움직인다. 때문에 풍수를 '땅의 관상학'이라는 뜻으로 상지법(相地法)이라고도 한다. 이와 관련, 풍수는 산의 흐름인 맥을 '용'(龍)으로 표현했다. 풍수상 용은 그 모습에 따라 바르게 뻗은 정룡(正龍)과 치우쳐 뻗은 방룡(傍龍) 그리고 생기가 있어 보이는 진룡(眞龍)과 그렇지 않은 가룡(假龍) 등으로 구분한다. 이상에서 보듯 풍수는 주관적인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때 천기(天氣)에 해당하는 풍수 내용을 발설해, 천지풍파를 일으킨 인물이 있다. 바로 이현로(李賢老·?∼1453)다. 수양대군 세조가 안평대군 이용에게 하는 말이다. "먼저번에 이현로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궁(宮)을 백악산(지금의 북악산 지칭) 뒤에 짓지 아니하면, 김보명의 말과 같이 정룡(正龍)이 반드시 쇠하고 방룡(傍龍)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이현로에게 말하여 여러 정승에게 고하라고 했는데, 말
괴산군 칠성면의 산막이 옛길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괴산군에 따르면 주말이면 평균 1천500~1만대의 승용차가 산막이 옛길을 찾고 있다. 따라서 이를 사람수로 따지면 주말평균 5천~1만명이 산악이 옛길을 찾고 있는 셈이 된다. 산막이 옛길은 칠성댐 건너편인 괴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칠성호를 따라 남쪽 방향으로 시작된다. 약 3㎞ 정도의 거리로, 옛길 끝은 칠성면 사은리 '산막이' 마을이 된다. 마치 영월 청령포를 연상시키는 산막이 마을에는 과거 분청사기 가마가 위치했고, 이를 굽던 도공들은 가마 옆에 산막을 치고 기거했다. 산막이라는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따라서 댐 담수로 위치가 위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지금의 산막이 마을 옛길은 과거 도공들이 왕래하던 길이었다. 그 끝에 노수신(盧守愼·1515~1590) 적소(유배지)가 위치하고 있다. ◇고행의 상징 유배용어 장배, 위리안치, 절도안치, 본향안치, 적소, 귀양살이 등 유배 용어는 그 표현이 다소 어려운 면이 있다. 장배( 杖配)는 유배를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곤장을 맞고 떠나는 것을 말한다. 죄의 경중에 따라 60~100대형이 추가됐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조선은 누에치기를 무척 중요시했다. 누에에서 생산된 견사가 비단의 원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정은 매년 친잠례(親蠶禮), 선잠제향(先蠶祭享), 잠령제(蠶靈祭) 행사를 가졌다. 전자는 왕비가 궁궐에서 직접 누에를 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왕비가 직접 모범을 보임으로써 양잠을 장려하는 의미가 있다. 이중 누에고치를 직접 거두는 의식은 수견의(收繭義)라고 불렀다. 선잠제향은 매년 늦은봄 길한 뱀날(巳日)에 양잠신인 서능씨(西陵氏)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던 행사를 일컫는다. 잠령제는 매년 5월초 봄누에가 시작되기 전에 전국 잠사인들이 누에의 혼을 위로하고 풍잠을 기원하는 제를 말한다. 조선이 양잠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가 "농상을 권하고 학교를 일으키라"는 하명을 직접 내린다. "농상(農桑)은 왕정(王政)의 근본이며, 학교는 교화하는 근원이다. 즉위한 이래로 여러 번 교서를 내려 농상을 권하고 학교를 일으키라는 뜻을 보였으나, 수령은 거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감사는 더 고핵(考劾)하지 않아서 모두 실효가 없으니, 내가 심히 염려된다."- 양잠과 관련된 지명으로 서울에 '잠실'(蠶室)이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과거 누
◇마곡사 찾아가는 길봄 경치가 아름다운 마곡사를 찾았다. 공주에서 예산 유구 방면으로 32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사곡면에 이르고, 면소재지를 조금 벗어나면 우측으로 지방도로 이다. 여기서 다시 우측으로 회전하여 9km 정도 가면 마곡사 주차장이다. 주차장 위쪽에는 새로 만든 상가단지와 식당들이 질서있게 조성되어 관광객을 맞이한다.주차장 위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오르면 새로 만든 일주문이 '태화산 마곡사'의 현판을 달고 서있다.일주문에서 옆 계곡 계류, 갈대들이 나무들과 어울려진 길을 오르면 조선 숙종 때 사람인 송상기의 "유마곡사기"를 생각나게 한다. "절은 고갯마루에 있고, 10여 리 길가에 푸른 시냇물과 횐 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이 절경의 노래 속에 태화산이 마곡사를 앉고 있다. ◇마곡사의 옛 이야기들흐르는 계곡 바위 골 따라온 햇살이 마곡사를 비춰 준다.마곡사는 백제 무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한다.자장율사가 불법을 성취하려고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 중 문수보살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 등과 깨달음을 전수 받아 귀국하였다 한다.이에 선덕여왕이 전이백결(田二百結)을 하사하고 전국에 사찰자리를 물색하게 하여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던 중
세종대왕의 국가통치에 대한 열정은 실로 다방면에까지 뻗쳤다. 그중에는 세정(稅政)에 대한 개혁도 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등이 이때 탄생한다. 전분육등법은 말 그대로 토지 비옥도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 전세(田稅)를 걷는 것을 말한다. 연분구등법은 그해 농사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거둬들이는 것을 일컫는다. 이 경우 최고 풍년을 들었을 때는 '上上年', 가장 흉년이 들었을 때는 '下下年'으로 표현됐다. 충북은 도세가 미약한 편이다. 때문에 중앙에서 어떤 행정적인 시험을 하고 싶을 경우자주 그 첫번째 대상지가 됐다. 세종이 두 전세제도를 시험한 곳 역시 충청도, 그중에서 청안현이었다. 시험 과정은 1년 동안 매우 치밀하게 진행됐다. 먼저 판관 등을 청안으로 보내 땅의 비옥도를 등급으로 메길 수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경차관으로 내자 판관 박회·사직 조욱생 등을 청안현에 보내어 그곳의 전지의 품등(品等)을 분류하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정인지, 김종서 등 당대 거물급 인사를 파견됐다. 이는 세종이 두 전세법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음 내용은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안개에게 잠식 당한 도심의 아침은 무거운 커튼이 드리운듯 갑갑하다. 몇발짝 다가서면 꼭 그만큼만 보이고 꼭 그만큼은 숨는다. 희미함을 뒤집어쓴 수름재의 돌비는 오히려 몽환적이다. 둘레길은 수름재 삼거리에서 갈비 전문 음식점인 '유가촌' 옆으로 난 소로를 따라 시작된다. 몇걸음 떼었을까· 찹찹한 안개 속에 묻어나는 풀냄새, 흙냄새, 시골냄새. 도심과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만나게된 한적한 고향마을의 정취는 오랜 벗을 만난듯 반갑다. 넓은 들녘은 누렇게 익은 벼이삭이 고갤 떨구고 허름한 담장옆 감나무 가지엔 소담스러운 감이 주렁주렁 키작은 지붕위엔 펑퍼짐한 늙은 호박이 앉아있고 개울 건너 동구밖엔 아름드리 둥그나무 서있는 그림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풍경 가슴한켠 아련하게 남아있는 유년의 고향마을 풍경이다.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 호들갑스레 들여다보는 둘레길 서정은 주중동 밧터를 지나 정상마을을 거쳐 정북동 머굿대까지 이어진다. 오동나무가 많아서 불리워졌다는 '머굿대' 그 많았다던 오동나무는 다 어디로 가고 오동나무가 있었을것 같던 자리는 지금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정북동 머굿대를 지나자 시원스레 시야가 트이며 눈앞에 장관이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진 들
흔히 '천방지축마골피'를 희성이자 천계(賤系)를 대표하는 성씨로 알고 있는 경향이 많다. 근거가 없는 설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나타난 현상이다. 일제 강점기가 돼서야 과거 접할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각 성씨들 사이에 족보를 만들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고, 이때 조선총독부 산하 일제 고등경찰이 앞서 언급한 '천방지축마골피' 설을 퍼트려 우리 민족을 이간시키려 했다는 설이 있다. 축씨와 골씨가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 등 두 성씨가 사용되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천(天)씨는 2천년 기준으로 밀양 등 5개 본관에 1천여명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 때 천명익이라는 인물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는 아니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들어온 성씨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됐다. 역시 천계가 아닌 것으로 봐야 한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방씨(溫陽方氏)의 경우 중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군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우고 2층에 마루를 깐 건축물로, 과거 관아에서 부속 건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졌다.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누각과 정자는 다르면서 같은 점이 있다. 바로 벽과 문이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조선초기 문신 손순효(孫舜孝·1427∼1497)는 물재집에 '樓虛則能納萬景 心虛則能容衆物'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누각은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고, 마음도 비워 있어야 여러 사물을 포용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취경(取景)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樓亭)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는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는 불교 선사상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청풍과 한벽루의 역사 충숙왕 4년(1317) 우리고장 청풍현 출신의 '청공'(淸恭) 스님이 왕의 스승(王師)이 됐다. 바로 한벽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로, 이
삼국시대에도 성(姓)은 존재했으나 지배층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성씨제도는 고려태조 왕건이 지방호족 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이른바 사성(賜姓) 정책을 시행하면서 본격화됐다. 특히 고려 문종 9년(1055)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이 공포되면서 성의 보편화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 성씨 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족보다. 족보는 핏줄에 대한 종적 기록이지만, 의도적인 대외 과시용 성격도 강하다. 이 때문에 상당수 족보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가 고시조이고, 고려조 △△△가 중시조이다라'는 식으로 유구하게 표현된다. 물론 사실이 아닌 경우도 많다. 고려의 의종대의 사료에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는 고려 전기까지는 최소한 족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부터 가문 과시용 족보가 많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조상을 바꾸는 것은 환부역조(換父易祖)와 남의 조상에 자신을 이어붙이는 가탁(假託) 현상이 일어났다. 조선시대는 족보에 대한 불법행위는 강상윤리로 다스렸다. '삼사에서 아뢰기를, 심상운이 환부 역조(換父易祖)한 것과 같은 것은 곧 인륜(人倫)의…
진휼((賑恤)은 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린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농업국가인 조선도 이 진휼정책에 국가적인 관심을 쏟았다. 그 어렵던 시절에 복지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사간원의 상소 내용도 실려 있다. 진휼을 왕정의 기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궁한 사람을 구제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왕정(王政)에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 한(漢)나라의 상평창(常平倉)과 당(唐)나라의 의창(義倉)도 또한 이 때문에 설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휼을 국가 제일 정책으로 내세운 이면에는 또 다른 절실한 이유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농민은 생산과 조세의 주체였다. 이 경우 농민들이 기근 등으로 유랑을 하면 세금을 걷을 수 없고, 세금이 잘 걷히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에 빠지게 된다. 진휼정책은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의도도 지녔다. 조선시대 굶주린 백성을 보살피는 책무는 기본적으로 수령과 관찰사였다. 그러나 사태가 급박할 경우 임금의 명에 의해 중앙에서 임시 사신이 지방에 파견됐다. 이들을 진휼사(賑恤使)라고 불렀다. 세종대 안순(安純·1371∼1440)이라는 인물이 우리고장 충청도 진휼사로
'계룡산 제일봉인 천황봉에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 제단을 설치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코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로 보존되어 왔다. 민족의 운명이 암담했던 지난 세기에도 이산은 우리에게 희망과 위안을 안겨주는 명소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았는데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천황봉에 군사시설및 통신시설을 설치하면서 본래의 모습이 크게 훼손되었다. 다행히 근래에 계룡 영산의 중요성를 인식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천황봉을 복원하자는 의지를 결집하였기에 도에서는 1958년부터 2003년에 이르기까지 시설물의 이전과 원상복구 작업을 추진함으로 비로소 옛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이상이 천황봉 정상 기념비에 기록된 천황봉의 역사이다. 조선시대 삼악중 하나인 민족의 영산으로 천황봉의 일출은 계룡산 최고의 비경을 자랑하지만 군사 보호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다. 그런곳이 2007년부터 해마다 10월 국군의날을 전후하여 열리는 '계룡군문화 축제'의 부대행사로 한시적이지만 천황봉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인터넷 사전예약과 여행자 보험가입등 절차가 다소 번거롭지만 20여년간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기에 그만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