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관찰사는 오늘날로 치면 충북도지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충북과 충남이 나눠져 있지 않은 만큼 관할 면적이 훨씬 넓어 54개 고을을 관리 감독했다. 충청도관찰사는 종2품의 외관직으로, 달리 감사·도백·방백·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가 일을 보는 관청은 감영·영문·순영이라고 불렀고, 이들에게는 이른바 직계권이 주어졌다. 직계권은 국왕 외에 다른 부서의 통제나 명령을 받지 않고 상당히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권한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보고는 국왕 앞으로 했고, 임금 외에 누구도 관찰사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관찰사도 임금이 보낸 암행어사에게 비리나 안일한 근무태도가 적발되면 파직 등을 당하곤 했다. 관찰사는 지방장관을 임명하는 것인 만큼 그 절차는 다소 복잡했다. 먼저 관료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이조에서 후보자를 3배수 뽑아 올린다. 임금은 이중 한 명을 낙점, 통보하게 된다. 그러면 임면을 받은 인물은 궁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게 된다. 이를 '사조'라고 불렀다. 전현직 관찰사는 도계에 교귀소(交龜所)라는 곳에서 임무 교대식을 가졌다. 조선시대 관찰사 인장은 그 뚜껑이 공통적으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초록 행복 푸른 꿈'을 슬로건으로 한 옥천 이원묘목축제가 오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사흘간 열린다. 전국 과수묘목의 60-70%를 차지하는 옥천이원묘목은 8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략 1930년대부터 묘목을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1930년대는 일제 억압통치가 정점을 향하던 시기로, 묘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당시 이원면에는 안헌귀(1908-1970)라는 분이 생존해 있었다. 이원리 태생인 그는 한 동안 교편생활을 하다 1939년 귀향, 영농에 종사하게 된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30년이 지난 1964년에 충북도에서 발간한 '흙과 땀'(청구출판사)이라는 농촌 계도지에 싣게 된다. 당시 충북도지사는 후에 농협중앙회장도 역임하는 신명순(申明淳) 씨였다. 그러나 이 책은 오랫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을 발굴해낸 사람이 현 옥천군 친환경농축산과장으로 있는 이재하 씨다. 그는 옥천이원묘목이 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고 안헌귀 선생의 아들이 소장하고 있던 계도지를 찾아냈다. 이 글에 따르면 옥천 이원에서 묘목 생산을 처음으로 한 인물은 내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었다. '이원의 묘목생산은 일인(日人)…
진천군의 지명변화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본래 고구려의 금물노군, 만노군이었는데 신라가 흑양군으로 고쳤고, 고려가 진주(鎭州)로 고쳤다. 1259년(고려 고종 46)에 위사공신 임연(林衍)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켰다.'- 영조 때 쓰여진 여지도서(1757)는 이후에 지명 변화에 대해 '임연이 죽자, 다시 진주현으로 하였고, 태종 때 진천현으로 고쳤다. 연산군대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로 복원되었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의 내용은 지금의 진천이라는 지명이 고려 때 지명이 진주(鎭州에서 비롯됨 것임을 알게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부 지역 사학자는 '진천의 호족이 왕건에 대항한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진(鎭)'자가 유래하였다'라고 밝혔다. 이 주장의 대칭점에 위치하는 것이 청주의 '청'(淸) 자이다. 방금 전에 '왕건에 대항한 반란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이때의 반란군은 분명히 청주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당시 청주는 왕건이 아닌 궁예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궁예는 '철원에 성을 쌓는데 청주사람 1천여명을 데려갔다'고 사료는 적고 있다. 일설에는 궁예가 유년시절에…
조선시대에는 정식 행정지명 외에 별칭도 많이 사용했다. 경상도는 영남(嶺南), 전라도는 호남(湖南), 충청도는 호서(湖西)라고도 불렀다. 딱딱한 행정 명칭에 비해 한층 시적이고 정감있는 표현이다. 영남할 때의 '영'이 어느 고개를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문학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존재한다. 혹자는 우리고장 단양의 죽령, 또 다른 이는 영동의 추풍령을 일컫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는 죽령설이 다소 우세한 편이다. '죽령 남쪽'이면 경상도를 모두 아우를 수 있다. 반면 추풍령은 경상도의 허리 쯤에 위치하기 때문에 경상도 지역을 모두 아우를 수 없다. 호남에 대해서는 어문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오랜 역사를 지닌 김제 벽골제로 보고 있다. 이 경우 호남은 '벽골제 남쪽 지방' 정도가 된다. 우리고장 충청도의 별칭인 호서의 '호'에 대해서는 금강, 의림지, 미호천 등 대략 3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금강의 또 다른 명칭이 호강(湖江)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호서를 금강의 서쪽으로 보면 지금의 충북지역은 호서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제천 의림지 설도 약점을 지니고 있다. 충청도 모두를 아우르기에는 위도가 높고, 또 의림지 서쪽은 경기도
전회에 우리고장 영동을 소개할 때 윤상(尹祥·1373∼1455)이라는 인물의 표현을 인용한 바 있다. '산과 물이 맑고 기이하다. 윤상(尹祥)이 금유(琴柔)에게 보낸 글에, "영동은 산수(山水)가 맑고 기이해서 시(詩) 짓는데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진실로 많다" 했다.'- 윤상은 경상도 예천군의 향리인 윤선(尹善)의 아들로 태어나서 과거를 통해 양반 신분이 된 인물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적어 놓은 방목(榜目)을 보면 그는 태조 때 진사와 생원시에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시대에는 형식상 서얼을 제외하고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 준비에는 적지 않은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하고 또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평민(양인)이 합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려 때 향리는 한 지역의 지배계급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향리(아전)는 수령의 보좌역으로 중인에 해당했다. 윤선이 이런 환경에서 오늘날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문과에 합격했다는 것은 남다른 노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료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적지 않이 등장한다. '공은 자질이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나게 태어났다. 향리로서 고을 일을 맡아 볼 적에 고된 사무를 보면
1413년(태종 13)은 한국 지명 변천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 지명에 위계성을 부여하는 계수관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그 결과, 충청도 4개 대읍인 청주, 충주, 공주, 홍주 등은 '州'(주) 자를 계속 유지하게 됐다. 반면 소읍이라고 할 수 이는 괴주는 괴산, 옥주는 옥천, 제주는 제천, 진주는 진천으로 각각 지명이 변했다. 이 과정에서 괴산같이 산이 많은 고을에는 '山' 자가, 물이 비교적 풍부한 곳에는 '川' 자가 붙었다. 충북 최남단인 영동(永同)의 지명에는 이같은 사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영동은 신라 경덕왕 때 길동군에서 영동군으로 변한 후 그 지명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본래 신라의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을미에 계주자사(稽州刺史)로 승격하였다가, 목종 8년 을사에 자사를 폐하였고, 현종 9년에 상주(尙州) 임내에 붙였으며, 명종 임진 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인용한 문장은 영동이 한 때는 계주(稽州)라는 지명을 지녔었고, 또 경상도 상주에 속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현종 9년은 대략 1018년이 된다. 따라서 영동은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경상도에…
괴산군이 얼마전 지명탄생 600주년이 되는 2013년을 앞두고 '괴산군 탄생 600주년 기념사업' 아이디어 공모를 한다고 밝혔다. 군은 "괴산 지명 탕생은 괴산의 역사·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로 군민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이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지명 괴산(槐山)이 처음 생겨난 시기는 군이 밝힌대로 6백년 전이 1413년(태종 13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현종 9년에 충주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조선 시대인 태종 3년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하고,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인 괴산으로 고쳐 군으로 삼았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 이전에는 잉근내군(仍斤內郡·고구려), 괴양군(槐壤郡·신라), 괴주(槐州·고려) 등으로 각각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왜구들이 해안뿐 아니라 수계를 타고 충청도 내륙까지 침입했다. 이때 괴주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왜를 괴주(槐州)에서 쳐서 3급을 베었는데 왜적 200여 기(騎)가 괴주 장연현에 침입했으므로 왕안덕이, 도흥과 함께 이를 쳐서 3급을 베었다.'- 괴산 지명과 관련해서는 살펴볼 것이 더 있다. 먼저 왜 괴주(槐州)에서 괴산(槐山)으로 바뀌었는가 하는 점이다. 조선 태종은 즉위 1
한남금북정맥 줄기에서 갈라져 피반령을 거쳐 팔봉산과 은적산, 그리고 황우산을 끝으로 금강물줄기로 떨어지는 46.6km의 산줄기가 팔봉지맥(八峰枝脈)이다. 6년 전인가... 숫자적인 정확한 자료도 경험적인 친절한 안내서도 없이 달랑 지도 한 장, 나침반 그리고 좌충우돌 열정 하나로 외진 산줄기를 누비던 시절은 살면서 가끔 옛 시절 삼아 이야기하지만 고생도 즐거움이 되었던 시절이기에 변방의 작은 성취감도 기쁨이 되었던 시절이기에 더 그립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호천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인 미호샛강길은 부강의 황우산을 시작으로 은적산과 팔봉산 그리고 피반령을 거슬러 한남금북정맥 마루 금으로 이어진다. 바로 팔봉지맥 마루 금이다. 다시 한 번 그 길을 걷게 될 줄이야... 감회가 남다르다. 아련하게 남아있는 우리들의 지난날과 보태어질 날들이 만나는 날. 서둘러 나서는 아침이 두서가 없는 건 설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으스스' 얕은 한기가 옷깃을 파고든다. 각내와 부강을 잇는 저산고개에서 망덕산을 향해 오른다. 20여분이면 망덕산을 오를 수 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팻말이 앙증맞다. 특징도 조망도 없는 그렇고 그런 동네뒷산의 평범함이 망덕 산의 모습이다.…
감귤이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재배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일본 고문헌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본서기(日本書記)에는 신라 초기에 상세국(桑世國)으로부터 귤을 수입한 기록이 보인다. 상세국은 지금의 제주도를 일컫는다. 따라서 제주도에서는 늦어도 삼국시대 초기부터 재래 감귤이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귤은 조선시대에도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때문에 남해 해안가에 감귤나무를 이식하려는 시도가 자주 있었다. '상림원 별감 김용(金用)을 제주로 보내어, 감귤 수백 주를 순천 등의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 옮겨 심게 하였다.'- 조선 조정은 과거시험 직전에 '황감제'(黃柑製)라는 의식을 자주 거행했다. 이는 해마다 제주도에서 진상하던 황감을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에게 내리고 과거시험을 보던 의식을 말한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반궁(泮宮)에 황감을 하사하고 잇따라 시사하여 이유신 등 여섯 사람을 뽑았는데,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는 급제(及第)를 내리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분수(分數)를 주라고 명하였다.'- 짧은 문장이지만 난해한 단어가 많이 보인다. 반궁은 성균관, 급제는 벼슬, 분수는 시험 결과의 등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당시 과거의 수석 합격
대과(문과)와 구별되는 소과에는 생원과 진사시 등 두 종류의 시험이 존재했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묻는 것을,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 형태로 문예창작 능력을 테스트했다. 전자가 오늘날 독해시험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논술시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두 시험에서 급제한 사람을 우리 귀에 익은 '생원'과 '진사'라고 각각 불렀다. 문과가 3단계에 걸쳐 진행됐다면 소과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초시는 한양과 각도에서, 그리고 2차 시험이자 최종 시험인 복시는 한성에서 실시하였다. 소과 초시에는 이른바 지역 쿼터제가 적용됐다. 한양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200명 배정됐다. 그리고 각도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경기도 60명, 충청도 90명, 전라도 90명, 경상도 100명, 강원도 45명, 평안도 45명, 황해도 35명, 함경도 35명씩 모두 1천4백명이 배정됐다. 이중 복시를 통해 2백명을 최종적으로 선발했다. 따라서 소과의 최종 경쟁률도 대과와 비슷한 7대 1 정도가 되도록 조절됐다. 그러나 복시의 최종 선발에는 그러한 지역 간의 균형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역 간의 격차가 컸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대과에
응제시(應製詩)는 왕명에 의해 짓는 시를 말한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개성이 함락당했다. 공민왕은 하는 수 없이 대신을 이끌고 몽진(왕의 피난)에 나서 지금의 안동에 3개월 가량 머무르게 된다. 당시 안동은 복주로 불렸다. 이후 공민왕은 상주, 보은 원남, 회인 등을 거쳐 우리고장 청주에 당도, 약 5개월간 머물게 된다. 청주가 고려의 임시수도 역할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체류 기간이 길어지자 과거시험까지 보게 된다. 이때 그 유명한 망선루(당시 취경루)가 등장한다. 고려 현종도 거란 침입 때 전라도 나주로 피난갔다가 환궁하는 길에 청주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으나 이때는 그 기간이 나흘(1011년 2월 13~16일)에 불과하다. 공민왕은 청주에 체류하던 기간 중 무심천변에 세워진 공북루(拱北樓)라는 정자에 올라 이른바 배표(拜表) 의식을 거행하게 됐다. 공북루는 '북쪽(개경)을 섬긴다'는 뜻이고, 배표는 사신으로 보내는 신하를 전송하는 의식을 일컫는다. 공민왕은 즉위 초기에는 배원정책을 철저히 추구했다. 그러나 홍건적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는 일시적이나마 배원정책을 철회하게 된다. 바로 이날 청주 공북루에서의…
'비록 엄한 형벌로 바로잡고 위세와 노기로 사람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요행히 법률에 조촉되지 않으려는 생각만을 가지게 될 뿐 인의 마음은 갖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지만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습니다. 원한은 큰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며 무서월 할 것은 백성뿐입니다. 물이 배를 나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배를 엎을 수도 있습니다.' 민심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으로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문장을 쓴 인물은 당나라 초기의 공신이자 학자인 위징(魏徵)이다. 그는 10가지 내용을 당태종에게 상소했다. 따라서 상소문의 제목도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疎)이다. 조선시대 같은 제목의 상소문을 올린 인물이 있다. 세종-성종 연간을 산 김흔(흔은 訴에서 삐침 제외·1448~1492)이라는 인물이다. 명종실록에 '신은 삼가 듣건대 성종조(成宗朝)에 직제학 김흔이 십사소(十思疏)를 올리니, 성종은 어찰(御札)로 답하고 다시 옷과 신을 하사하여 포장하였다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당시 김흔은 위징이 상소했던 내용을 성종에게 똑같이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실록에 "당(唐)나라 태종(太宗)도 훌륭하고 뛰어난 임금이었으나, 나중에 가서 십점소(十漸疏)…
민물 매운탕으로 유명한 부강의 용댕이 매운탕집을 지나면 공사중인 철교량이 나온다. 공사중인 철교량을 지나 서쪽 방향으로 가다보면 아기자기한 서해 바다에 온 착각을 하게 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밀전병을 부치듯 모래섬들은 이곳 저곳에 떠있고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백로들과 쇠오리, 흰뺨 검둥오리, 원앙, 비오리등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내륙 최대의 철새 도래지이며 생태의 보고라고 하는 합강이다.장수 뜸봉샘에서 발원한 금강과 음성 마이산에서 발원한 미호천이 합류하는 곳이라 하여 합강리다. 과거 물길을 이용해 바다의 물류를 운송하는 종착지의 역할과 소금과 젓갈류의 교역을 이루는 내륙 최대의 교역장의 역할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과거 합강 인근에는 부강포구가 있었다고 한다. 부강은 금강하구로부터 마지막 포구다. 그래서 충청 내륙지방의 관문 역할을 했었다. 황해에서 생산되는 어염과 일용잡회들이 이곳으로 모여지고 그 일대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이 집산되었던 경제의 중심지였다. 용당이(혹은 용댕이, 현재의 제방에서 강 안쪽에 위치)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부강포구는 한때 200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한꺼번에 정박할 수 있는 '전국 8대 포구' 중의 하나였다. 용당이는 예
조선시대 문과(대과)는 1번이 아닌,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 등 3단계로 나눠 진행됐다. 이는 국가고급 관리를 뽑는 만큼 엄정·신중을 기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1단계인 초시에는 이른바 지역 쿼터제가 적용됐다. 초시에서는 성균관 유생 50명(관시), 한양출신 60명(한양시), 지방출신 140명(향시) 등 총 250명을 선발했다. 향시 140명은 경기도 10, 강원도 15, 황해도 10, 충청도 25, 경상도 30, 전라도 25, 평안도 15, 함경도 10명 등으로, 충청도는 한양을 제외하고 경상도 다음으로 많았다.2단계인 복시는 관시 ·한성시 ·향시의 입격자 250명을 식년 봄에 서울에 모아 다시 시험을 보게 해 최종적으로 33명을 뽑았다. 250명 중 33명을 뽑았으니까 실질 경쟁률이 대략 7.6대 1 정도가 됨을 알 수 있다.3단계인 전시는 2차 합격자 33명을 대상으로 당락이 아닌, 갑·을·병 순위를 결정하는 시험이었다. 임금님 앞에서 시험을 봤던 전시는 부정행위가 없는 한 탈락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참고로 전시 답안은 어둡기 전에 작성·제출해야 했고, 임금에게 집적 보이는 것인 만큼 정자체인 해서로 반드시 써야 했다.문과 응시생
사부(師傅)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기를 가르쳐준 스승을 사부라고 부른다. 또 임금의 어릴적 스승도 사부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왕자 교육은 시강원(侍講院)이라는 곳에서 했다. 이 시강원의 정1품 벼슬이 사부다. 이에 비해 왕세손에 대한 교육은 강서원(講書院)이라는 곳에서 했고, 그 벼슬은 한 단계 낮은 종1품이었다. 실록에 임금과 왕자시절 사부에 대한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임금이 매우 즐거워하여 서로 대하기를 잠저 때같이 하였다. 민제가 임금을 선달이라 칭하니, 임금도 민제를 사부라 불렀다. 술자리가 파하자, 민제가 임금을 전송하며 대문 밖에 서 있으니, 임금이 민제에게 들어가라고 청했다.'- 태종은 이것이 인연이 돼 나중에 사부 민제의 딸(원경왕후)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인용문에도 등장하 듯이 둘은 잠저(임금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집) 시절에 서로를 '선달'과 '사부'라고 부를 정도로 인간적으로도 가까웠다. 따라서 민제의 두 아들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그가 생존할 때는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한달만에 태종은 외척 발호의 싹을 제거하는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 매형뻘인 태종에 의해 민무구, 무질 두
지난 2007년부터 충북도민들과 함께 해온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가 올해로 6년차를 맞았다.도내 명산과 둘레길을 돌며 '올바른 산행문화 보급'에 앞장서온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올해는 전국의 옛길과 둘레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전국에 녹아 있는 조상의 얼과 자연의 숨결을 보다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다.첫 탐방지는 광주 무등산 옛길. 50여명이 46차 클린마운틴 아카데미에 합류했다. 25일 오전 7시 청주체육관을 출발한 버스는 2시간30여분을 달려 무등산 옛길 1구간 입구에 도착했다.2009년 5월 개방된 1구간은 광주 산수동~원효사로 이어지는 7.75㎞ 코스. 아쉽게도 본 옛길은 사라졌다고 한다. 도로 포장 때문이다. 대신 바로 옆에 산길을 냈다. 그곳을 따라 형형색색의 등산복 행렬이 시작됐다."호로록~, 호로록~." 산새 울음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 동행한 윤석준 숲 해설가는 "새 소리와 비슷하지만, 사실은 산개구리 소리"라고 했다. 겨우내 참았던 목청의 폭발인가, 우리를 반기는 인사인가, 그 소리 한 번 기똥차다.1시간30여분을 걸어 청풍쉼터에 도착했다. 잠시 목을 축이는 사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대장 격인 김웅식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일반산행
충청북도 서부를 남서류해서 금강으로 흘러드는 총길이 89km의 하천으로 대곡천이라고도 불리어지는 미호천은 금강의 가장 큰 지류하천이다. 한남금북정맥 산줄기의 최북단에 위치한 음성 망이산(마이산 472m)에서 발원하여 진천~오창~청주 분지 등 곡창지대를 끼고 충청남도 연기군 합강리에서 금강 상류와 합류한다. 충청북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까치내'는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는 하천 연안을 따라 비옥한 토지가 넓게 형성된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고운 모래톱과 깨끗한 수변공간은 온갖 철새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으며 특히 천연기념물 454호인 미호종개가 서식하는 등 희귀한 많은 생물종이 다양하게 살고있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상류로부터 유입되는 농공단지의 폐수나 생활폐수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1960~1970년대의 미호천은 명경지수(明鏡止水)는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맑은 물이 흐르는 추억의 강이었다. 아련한 기억 속 미호천은 청주시민의 천렵 터였다. 여름만 되면 행락객들은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철부지 아이들은 해가는 줄 모르고 멱을 감았고 모래무지나 피라미 떼를 쫓았다. 강변 곳곳에 널린 광활한 모래밭에서 모래성을 쌓거나 씨름판을 벌였으며 누가 멀리가나
# 금요일△청주우정산악회(011-464-1434)* 2일 : 강릉 고루포기산* 16일 : 거제 계룡산△청주무궁화산악회(010-3423-2783)* 2일 : 용인 태화산* 9일 : 아산 광덕산* 16일 : 가평 명지산* 23일 : 남원 문덕봉* 30일 : 강릉 괘방산△청주우리산악회(010-2466-3822)* 2일 : 부산 갈맷길* 9일 : 광주 무등산* 16일 : 원주 배부른산* 23일 : 임실 오봉산* 30일 : 동두천 마차산△청주 의정산악회(016-864-3259)* 2일 : 고성 향로봉* 16일 : 안동 학가산△청주에이스 금요산악회(011-487-5556)# 토요일 △해맑은산꾼들(010-6473-4488)* 3~4일 : 외 나로도 천등산* 10일 : 거창 보해산, 금귀봉* 17일 : 남원 고정봉* 24일 : 부산 이기대길* 31일 : 남양주 수락산△청주백두오름산악회(010-6486-1055)* 3일 : 동두천 소요산* 10일 : 완도 상황봉* 17~18일 : 거문도, 백도* 24일 : 지리산 만복대* 31일 : 부산 이기대길△청주산사랑 산악회(010-3423-8505)* 3일 : 완주 문필봉, 연석산* 10일 : 강진 만덕산* 17일 : 안산 풍도* 2
조선시대 왕비 중 청주한씨 외에 우리고장을 관향(貫鄕)으로 한 가문이 또 있다. 청풍김씨로 현종비 명성왕후와 정조비 효의왕후 등을 배출했다. 명성왕후와 명성황후는 다른 인물이다. 명성왕후의 한자는 明聖, 명성황후는 明成이다. 흔히 민비로 불리는 인물이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이다. 청풍김씨는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김대유(金大猷)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말에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인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진 후 우리고장 제천의 청풍(淸風)에 세거했다. 청풍김씨가 문벌을 활짝 꽃피운 시기는 대동법 확장으로 유명한 명신 김육(金堉·1580∼1658) 때이다. 선조~효종 연간을 산 김육은 이때 이미 세거지 청풍을 떠나 한성에 터를 잡았다. 이처럼 시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 누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을 경화벌열이라고 한다. 명성왕후와 효의왕후도 경화벌열의 여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실제 태어난 곳은 청풍이 아닌 서울이다. 현종비 명성왕후는 김육이 사망한지 얼마 안 돼 왕비가 됐다. 바로 김육은 명성왕후의 친조부가 된다. 친아버지는 한때 복상(服喪) 문제로 송시열과 불화를 겪었던 김우명(金佑明)이다. 그녀는 한양 장
조선의 역대 임금은 추존된 경우를 포함해 총 32명이 배출됐다. 왕비는 이보다 다소 많은 48명이 배출됐다. 이는 병사 등으로 인해 왕비를 다시 얻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의 왕비는 국왕의 정실 부인으로서 중궁(中宮)의 자리에 있던 사람을 말한다. 사극을 보면 흔히 중전(中殿)으로 표현되나, 이는 '중궁전'의 준말이다. 이밖에 왕비는 국모(國母), 내전(內殿), 곤전(坤殿), 성녀(聖女) 등의 이칭도 지니고 있다.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는 여러가지 경우가 있었다. 간택 절차를 거쳐 세자빈에 책봉되면 훗날 세자인 남편이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도 왕비가 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세자빈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왕비로 책봉된 사례도 적지 않았고, 원래의 왕비가 쫓겨나거나 사망하여 후궁이 왕비에 책봉된 예도 있다. 신분상으로는 숙종의 왕비였던 희빈 장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반가의 출신이다. 왕비의 존칭은 왕과 동등하게 '전하'(殿下)이며, 품계는 없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왕비와 대비를 각각 왕후와 왕태후로 격상하면서 그 존칭이 '폐하'(陛下)로 바뀌기도 했다. 침전은 경복궁의 경우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은 대조전
조선전기 호불군주(好佛君主)로는 세종과 세조가 있다. 세조는 속리산 복천암과 정이품송 전설에서 보듯 초지일관 불교를 사랑했다. 세종은 다소 달랐다. 처음에는 불교에 대해 강압적이고 비판적이었다. 조선전기 여러 종파가 난립하자 선종과 교종 등 두 종단만 남기고 정리한 군주가 바로 세종이었다. '그러므로 조계·천태·총남 3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자은·중신·시흥 4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중들이 우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소의 절만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입니다.'- 당시 예조가 건의한 내용으로, 세종은 이를 모두 수용했다. 그 결과, 지금의 충북에는 보은 속리사와 충주 노은면의 보련사만 남고 모두 산문을 닫아야 했다. 대신 살아 남은 사찰에는 재정지원 규모가 확대됐다. '충청도 보은 속리사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1백 4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충주 보련사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7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세종은 말년에 가족사에 비운이 잇따르자 불교에 크게 의지했다. 그러나 궁궐 안의 호불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임금이 바뀌자 대신들의 상소가 경향을 가리지 않고 빗발쳤다. 다음은 충청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신라 혜공왕 때(776년) 진표율사가 처음 조성한 것으로 돼 있으나 직접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 법주사 미륵대불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처음 등장한다.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중 의신(義信)이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성덕왕이 중수했는데, 석조와 석교·석옹(石翁) 등이 있으며, 절 안 산호전(珊瑚殿)에는 금신장육상(金身丈六像)이 있으며, 문 앞에는 구리로 부어 만든 깃대가 있는데, 모양이 몹시 높고 그 한 쪽에 통화(統和) 24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인용문 중 '산호전에는 금신장육상이 있으며'라는 문장을 다시 한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표현은 당시 미륵대불이 장육상이기는 하나 산호전이라는 실내 전각 안에 모셔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금신'이라는 표현으로 봐서 32길상(吉相)의 하나인 황금옷을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조선후기의 옛문헌에는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특히 영험스런 면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국시가 유교였던 점을 감안하면 다소 이
국제저널 '무형유산' 편집위원들이 최근 속리산 법주사를 방문, 문화재를 둘러보고 예불의식도 참관했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은 33m의 엄청난 높이로 주변 산세까지 압도하고 있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재료상 콘크리트-청동-금동불 순으로 변화했다. 콘크리트가 청동불로 바뀌는데는 안정상의 이유, 청동이 금동불로 바뀌는데는 외관의 모습이 크게 작용했다. 전자의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부 콘크리트 철근이 부식됐을 가능성이 우려됐고, 후자는 청동인 까닭에 용접선이 그대는 드러나는 등 외관상 보기가 안 좋았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더라도 법주사 미륵대불이 황금색의 띄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는 단순히 '보기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32길상(吉相) 80종호(種好)라는 교리적인 이유도 작용하고 있다. 32길상은 중아함경과 방광대장엄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른바 부처님 외모에 관한 규정이다. 이중 일반인이 비교적 쉽게 접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정유육계(頂有肉髮), 나발우선 기색감청(螺髮右旋 其色紺靑), 액광평정(額廣平正) 등이 있다. 순서대로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 '이마가 넓고 평평하며 바르다'
지난 1997년 이문건이 쓴 묵재일기 속에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는 한글 필사본 소설이 함께 적혀 있는 것이 발견돼 학계를 흥분시킨 바 있다. 저자는 우리고장 음성 태생인 채수(蔡壽)라는 인물이다. 작품은 일종의 저승 경험담 계열의 전기(傳奇)적인 내용으로, 주인공 설공찬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나와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는 구조로 돼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부분이다. 이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중종정권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채수는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울러 소설에는 여성도 글을 할 줄 알면 관직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조선 사회체제를 통박한 것이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이 장편인 데다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그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국문표기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 중간 작품으로 제시된 안락국태자전·왕랑반혼전 등이 소설이 아닌 모두 불경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줘왔다. 설공찬전은 조선 최초의 금서였다. 그러나 각계각층의 독
매서운 한파 속 도심의 아침은 온통 웅크린 사람들 일색이다. 잔뜩 껴입은 사람, 뒤집어 쓴 사람 나름 혹독한 계절의 강을 건너는 방법들이 난무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보이는 대원들의 모습이 반갑다. 날씨가 추워서 불참하는 대원들이 많을거란 우려와는 달리 변함없이 자리해준 대원들의 자리가 든든하다. 재잘재잘 묵은 회포 푸는 사이에 대원들을 태운 차량은 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을 빠져나온 다음 37번 도로를 이용하여 보은방면으로 향한다. 소정리와 장계리를 지나 인포삼거리에서 안남면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굽이길을 따라 잠시 평화로움을 즐기다보면 아담한 면소재지의 아기자기함이 드러나는 안남면이다. 한눈에 가늠되는 아담한 규모이지만 면사무소, 경찰서, 학교 등 있을건 다 있다. 면사무소 앞으로 주차장이 넓게 형성 되어있다. 안내팻말과 편의시설 또한 잘 되어있다. 둔주봉을 중심으로 대청호 둘레길과 향수 100리길 등 다양한 컨셉이 가미된 관광지 개발과 함께 찾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지역주민들의 손님맞이도 나날이 발전을 한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마을앞 보리밭으로 하얀눈이 내려앉았다. 하얀 조각보를 펼쳐놓은듯 아름답다. 한적한 시골마을은 동면에 들어간 듯 조용하다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