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8월의 지리산은 구름바다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녹색의 숲이 조화를 이룬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기분이다. 가도 가도 경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지리산은 그저 화두(話頭)를 위해 품만 내준다. 산행 내내 스스로 묻고 답하길 반복한다. 즉문즉답을 저절로 터득한다. 나무람을 통해 지혜를 배운다. 되돌아보며 홀로 하는 깨침이다. 말이 필요 없다. 지리산에 들면 모든 게 예사롭지 않다. 그냥 사소한 나무와 풀과 돌이 아니다. 모든 게 작은 떨림과 울림을 준다. 그리고 마침내 장쾌한 오케스트라가 된다. 산객들은 그 위에 선 연주자들이다. 2016년 8월14일 새벽 지리산에 든다. 성삼재에서 노고단(1507m)까지 길이 너무 좋다. 새벽 공기가 시원하다. 길옆으로 우거진 나무가 함께 한다. 정갈하게 잘 정비된 길이다. 마음을 열어주는 길이다. 바닥의 촉감이 좋다. 하늘로 가는 기분이다. 완만하고 너른 길을 따라 50여분을 걷는다. 노고단이 여명에 어슴푸레 보인다. 노고단대피소가 새벽하늘 아래서 빛난다. 묘한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지리산에 들 때마다 저미는 감정이다. 노고단 고개는 차로 오를 수 있
유교사회에서의 '삼강(三 綱)'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ㆍ부위부강(夫爲婦綱) 등을 말한다. 임금을 섬기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고,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자식의 도리이며, 남편을 섬기는 것은 아내의 도리라는 뜻이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 집현전 학자 설순에게 하명하여 중국과 우리 나라의 고금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효자, 충신, 열녀를 모아서 책을 만들도록 했다. 바로 《삼강행실도》다. 《삼강행실도》는 그로부터 2년 후 효자, 충신, 열녀 각 1백10명씩 총 3백30명을 3권의 순한문 책으로 간행되었다. 1481년(성종 12)에는 언해, 즉 한글 번역도 이뤄졌다. 그러나 언해를 함에 따라 책 분량이 많아질 뿐 아니라, 널리 배포하기도 어려웠다. 그러자 허침, 정석견 등이 성종 20년에 세종조의 《삼강행실도》를 바탕으로 하여 효자, 충신, 열녀 각 35명씩 총 105명으로 줄여 1권의 책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인물은 총 16명으로, 전체 1백5명의 l6%를 차지한다. 《삼강행실도》에 지난 회에 소개한, 우리고장 충주와 청주의 지방관을 지낸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崔婁伯·?~1205)도 효자편에 등장한
[충북일보] 고려와 조선시대의 장례문화는 크게 달랐다. 불교가 발달했던 고려시대에는 묘지명(墓地銘)이,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시대에는 묘비명(墓碑銘) 문화가 성행했다. 묘지명은 한 인물이 숨진 뒤 망자의 이름과 나이, 가계와 행적, 가족 및 장지(葬地) 등을 돌에 새겨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매장한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묘비명은 그 내용과 형식은 묘지명과 같으나, 이를 새긴 비석을 무덤 입구에 세우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망자의 일대기를 사언(四言) 형식의 산문으로 압축한 명문 구성은 거의 같다. 고려시대 묘지명 문화가 유행한 것은 불교 화장풍습과 관련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망자의 화장한 뼈를 작은 석관에 담아 지하에 매장하는 장례가 유행했고, 이때 묘비명보다는 묘지명이 더 적합하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여성 이름이 유일하게 기록된 염경애(廉瓊愛) 묘지명이 있다. 1148년(의종 2)에 제작된 이 묘지명은 세로 30.3cm, 가로 69.7cm, 글자크기 1.2cm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제작자는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崔婁伯·?~1205)이다. 그는 수주(水州·지금의 수원) 지역의 향리 최상저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시어사 등의 대
조선시대 청주에서 수도 한양을 왕래하는 여로(旅路)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청주-진천-죽산을 경유한 뒤, 이후는 영남대로[동래로]를 이용하는 노선이다. 청주-진천-죽산 노선은 지금의 17번 국도와 거의 유사하고, 죽산 이후의 영남대로 여로는 용인-판교-양재-한강나루 등을 거쳐 도성(都城)에 입성하였다. 이 노선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상경로로 계속 기능하였다. 시장을 분석하는 이론 가운데 이른바 '중심지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고차(高次)일수록 시장이 발달해 도청 소재지인 청주는 4차 중심지, 충주와 제천은 3차 중심지, 군청 소재지는 2차 중심지, 나머지 면단위의 시장은 1차 중심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 같은 이론은 좀 지난 논문 내용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것으로 보여진다. 70년대는 고도경제 성장기로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직행·고속·시내·새마을버스 등 교통발달이 눈부셨다. 그 결과, 수도 서울과의 연계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도민들은 시장발달과 함께 교통여건이 좋아지자 지역의 범위를 벗어나 서울을 '이웃동네' 가듯 왕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 '속리산고속'이다. 1969년 경부고속도로 천안-청
[충북일보] '청송'은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하다. 여름의 절정에 알맞은 이름이다. 한 여름에 더 빛나는 최고의 피서지다. 주왕산(721m)은 청송의 중심에 우뚝 선다. 가장 먼저 대전사 뒤로 뫼산(山)자 바위가 눈길을 끈다. 산길은 계곡과 나란히 서 편하다.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많다. 어느 곳에서나 다리쉼을 할 수 있다. 잊을 만하면 폭포지대가 나타난다. 주왕산은 들머리부터 남다르다. 길과 계곡이 나란히 걷는다. 주왕산의 심장에서부터 흘러내려온 물이 천천히 내려간다. 대전사 입구를 지나면 상쾌해진다.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부드럽다. 계류는 순하게 흘러간다. 천변에는 수달래 관목들이 무성하다. 주방천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사이를 휘감아 돈다. 손에 닿는 물이 차갑다. 계곡을 따라 3개의 폭포가 거리를 두고 이어진다. 가는 곳마다 천하비경이다. 산그늘은 더위에 지친 산객들을 보듬어 준다. 주방천은 주왕산의 심장부 타고 흘러내린다. 이곳에 용추폭포와 절구폭포, 용연폭포가 있다. 모두 응회암 절리 틈으로 떨어지는 폭포다. 일제 강점기엔 1·2·3 폭포로 불렸다. '용(龍)'자를 쓰지 못하도록 한 일제의 간악함 때문이다. 2016
보은군이 말티고개에 '속리산 수학여행 1번지'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말티고개 하면 떠오르는 것이 '꼬부랑 길'이다. 말티고개의 노폭을 확장하고 선형 개량을 처음 시도한 관료는 1920년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이다. 박중량의 일본식 이름은 '호추시게요'(朴忠重陽)로, '신념적 친일파'라고 불릴 정도로 친일의 행각이 뚜렷하다. 1923년 2월 충청북도지사에 부임한 박중양이 말티고개 확장공사를 처음으로 하게 된 데는 유람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 작용했다. 1923년 4월 17일자 기사에 의하면 박중량은 도내 순시를 이유로 화양동 등 괴산군내 명승지를 무려 7일 동안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그가 말티고개를 넘으려 한 것은 역시 법주사를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는 말티고개 입구에 이르러 소를 끌어오도록 명령했고, 그 이유는 "도지사인 내가 어찌 흙을 밟을 수 있느냐"였다. '당대의 일도 소관으로서 엇지 차에서 내려 흙을 발브랴하는 생각이 드럿는지 박중양 씨는 긔어코 차에서 나리지를 안코 촌가에 가서 소를 꺼러다가 자동차를 꺽러넘기게 한 결과 겨우 도지사의 위엄은 직히게 되얏섯다.'- 박중양은 바로 이
옥화구곡은 여름철 청주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남한강 상류인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보은군 내북면 봉황리 수계변에 설정돼 있다. 구곡은 이름 그대로 곡(曲)이 9개가 설정되는 것이 보통으로 각 곡마다 작명한 지명과 함께 시가 뒤따르고 있다. 옥화구곡에도 하류에서 상류 방향으로 제 1곡 만경대(萬景臺)→2곡 후운정(後雲亭)→3곡 어암(漁巖)→4곡 호산(壺山)→5곡 옥화대(玉華臺)→6곡 천경대(千景臺)→7곡 오담(鰲潭)→8곡 인풍정(引風亭)→9곡 봉황대(鳳凰臺) 등 구곡이 설정돼 있다. 9곡 가운데 8개는 해당 지점의 자연경관 특징을 반영해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제 2곡 후운정 만큼은 그런 분위기가 풍기지 않는다. '후운'은 조선 선조~숙종 연간의 홍석기(洪錫箕·1606∼1680)라는 인물로, '최치원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치원(崔致遠·857∼?)은 통일신라 말기를 살았고, 그가 남긴 문장에는 천재성이 묻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육두품 출신으로 신분 상승의 한계를 절감했고, 따라서 시대를 잘못 만남 불우(不遇)을 탓하며 산천을 주유했다. 홍석기가 옥화구곡 제 2곡에 정자를 세우고 이를 '후운정'으로 명명한 것은 자신도 최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원균(元均, 1540~1597)은 왜의 수군이 남해를 새까맣게 뒤덮으며 몰려오자 배를 스스로 침몰시킨 후 육지로 도주하려 했다. 이를 중간에서 "그러면 안 된다"며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협력을 건의한 인물이 그의 참모이자 우리고장 진천 출신인 이영남(李英男, ?~1598)이었다. 원균은 이영남의 의견을 수용, 전열을 정비한 후 이순신의 전라좌수군과 연합해 옥포, 당초 등의 해전에서 잇따라 이겼다. '승리'라는 전리품이 들어오자 두 사람 사이에 '공다툼'이 일어났다. 그 결과, 원균은 1594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충청병사)로 전출됐다. 당시 절도사가 머무는 병영(兵營)은 우리고장 청주에 있었다. 원균은 왜군이 다시 북상할 것으로 예견하고 청주지역 군사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흔히 상당산성(사적 제 212호)은 조선 숙종 때 전면적인 보수를 해 석성(石城)으로 수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보다 앞서 상당산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인물은 원균이었다. 그는 이때 청주고을 주민뿐만 아니라 충북 전역의 백성을 징발됐다. "병사(兵使) 원균(元均)은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성을 쌓을…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전라도 정읍에서 숙종의 사약을 받기 직전 수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서면으로 유지를 내려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崇禎帝)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실 것을 당부했다. 권상하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703년 민정중·정호(鄭澔) 등 노론계 인물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했다. 만동묘의 '만동'은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글자다. 그 뜻은 만 번을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양자강·황하 등 중국의 강은 서쪽이 높기 때문에 동쪽, 즉 우리의 서해로 흘러든다. 선조는 곡절은 있을 수 있지만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충(忠)은 변함이 없다는 의미에서 만절필동의 새겼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20여만명의 대군을 파견, 조선을 왜로부터 구해준 인물로 '재조지은(再造之恩·다시 일어서게 도와준 은혜)'의 칭송을 받았다. 따라서 만동묘에 명나라 신종의 위패가 모셔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반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은 임진왜란과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만동묘에 나란히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의
조선 중기 윤임(尹任, 1487~ 545)의 집안에서는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중종의 제1 계비가 됐다. 반면 윤원형(尹元衡) 집안에서는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중종의 제2 계비가 됐다. 당시 세간에서는 외척의 반열에 오른 두 집안을 빗대 윤임은 '대윤', 윤원형은 '소윤'이라고 일컬었다. 1545년(명종 즉위) 소윤이 대윤을 공격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소윤 윤원형은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과 의기투합, 윤임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윤임은 실각, 귀양을 가던중 살해됐다. 살해된 장소가 공교롭게도 우리고장 충주목 어디쯤이다. "윤임은 자는 임지(任之)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정미년에 출생하여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찬성에 이르렀다. 을사년에 남해(南海)로 귀양 가다가 충주에 이르러 사사(賜死)되니 나이는 59세였다."- 조선중기 문신인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서술하되 작문하지 않는다는 기록정신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이 같은 기록정신을 바탕으로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그런 《연려실기술》은 을사사화의 발생 배경을 좀 다르게 적어놓고 있다. 대윤
[충북일보] 멀고도 먼 길이다. 청주에서 설악산 찾기는 쉽지 않다. 도로 사정이 좋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먼 길이다. 밤 11시 청주를 출발한다. 밤새 달려 오색에 도착한다. 이번 산행의 들머리다. 새벽 3시 산문이 열린다. 잠시 다리쉼도 없이 산행을 시작한다. 캄캄한 새벽어둠을 가르고 오르고 오른다. 앞으로 또 앞으로 나간다. 욕심 많은 일부 산객들이 추월하고 나선다. 또 다른 산객들이 앞서간다. 부지런히 가니 어느새 뿌옇게 여명이 밝아온다. 고사목 사이로 덩치 큰 소나무가 눈에 띈다. 그 옆에 아직 지지 않은 철쭉이 웃는다. 분비나무 군락지도 보인다. 고사목 숫자도 제법 많다. 해발고도 1500m 지대를 지난다. 아직은 활엽수와 침엽수가 섞여 평화롭다. 스멀스멀 올라온 짙은 안개가 신비감을 더한다. 곱게 핀 야생화가 선계에 든 느낌을 준다. 까만 밤을 하얗게 달려와 급히 오른다. 숨을 힘껏 몰아쉬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마침내 대청봉(1708m)이다. 그러나 희뿌연 안개속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심한 바람에 비까지 내린다. 거센 비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배낭과 옷이 모두 젖는다. 정상석에서 인증샷을 포기하고 돌아선다. 중청대피
[충북일보] 현존하는 조선시대 고지도 가운데 '1892년 군현지도'(혹은 〃 지방지도)가 있다. 흥선대원군으로 상징되는 19세기말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로, 서양 기운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1866년(고종 3) '서세'는 한반도 서해안에도 출현하였다. 미국 제너널셔먼호는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까지 거슬러 올라왔다가 평안 도민들의 장마철 화공(火攻)을 받고 침몰했다. 당시 평안관찰사는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개화파의 비조가 되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6)였다. '쇄국'(鎖國)은 나라에 빗장을 지른다는 뜻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병인양요(1866) 이후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에 맞서기 위해 포수(砲手)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수부대는 수도 한양과 병인양요가 일어난 강화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됐으나 독일인 오페르트의 남연군(南延君, 흥선대원군 아버지) 묘 도굴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는 내륙에도 배치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황간면 일대로, 백두대간 추풍령 이북이 여기에 속한다. 당시 흥선대원군 정부는 추풍령 이북에도 포수부대를 배치하고, 일대를 '포수
임진왜란 때 최소 1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전쟁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학계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왜는 이렇게 끌고 간 조선인 포로의 일부를 국제 노예무역에 이용하였다. 당시 왜는 포르투칼로부터는 조총과 담배를 수입하면서 조선인 포로를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왜는 조총 1자루를 구입하는데 조선인 피로 40명을 지불하였고, 당시 노예시장이 개설된 곳은 태평양전쟁 때 원자탄 피폭을 당하는 나가사키(長崎)였다. 조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왜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1607년(선조 40) 교류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했고, 당시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의 조선통신사는 그해 1월 한양도성을 나서 4개월 후에 왜의 수도인 에도(江戶, 현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도쿠가와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했던 만큼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사로잡혀 온 귀국의 남녀들이 각 지방에 흩어져 산 지 20년이 됩니다. 나라 안의 선비들이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줌으로써, 혹 시집이나 장가간 자도 있고 어린 아이를 둔 자도 있습니다.…
고려와 몽고는 처음에는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두 나라는 압록강 유역의 거란군을 토벌하는데 군사적으로 협력하였다. 몽고는 거란을 토벌하는데 성공하자 과도한 조공을 요구했고, 여기에 몽고사신 저고여가 국경에서 피살되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고려 고종 8년(1231)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이 1차 침입을 하였다. 당시 실제 권력자 최우(崔瑀, ?~1249)는 고종에게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자 김세충(金世沖, ?~1232)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두 사람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김세충: 송경(개경)은 태조 때부터 역대로 지켜온 것이 무려 2백여년이다. 장차 도읍할 땅이 어디있는가? 최우: 그렇다면 왕성을 지킬 비책이라도 있는가? 김세충은 머뭇거리며 즉답을 하지 못했다. 무신 최우는 김세충을 끌어내 목을 베고 강화도 천도길에 올랐다. 그는 운반 수단이 마땅치 않자 나라 세곡(稅穀)을 나르는 수레 1백량을 동원해 자기 집안의 물건을 강화도로 옮겼다. 그는 백성들에게 섬이나 산성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이때 장맛비가 열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15년만에 조선과 왜(일본)는 국교를 재개하였다. 열도의 새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쓰시마를 통해 "국교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국서를 조선에 보내왔다. 조선도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선조 40년(1607) 임진왜란 종전 후 처음으로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정사는 여우길(呂祐吉, 1567∼1632),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은 1607년 1월 12일 궁궐에 들어가 하직인사를 올렸고, 그러자 선조는 간단한 술과 함께 말안장, 정남침(定南針 나침반)을 하사하였다. 한양 도성을 빠져나온 경섬은 한강의 어느 촌락에서 통신사로서의 첫밤을 맞았고, 이때 선조의 국서를 살펴봤다. "임진년의 변란은, 귀국이 까닭 없이 군대를 일으켜 극히 참혹한 화란(禍亂)을 만들고 심지어 선왕의 능묘에까지 욕이 미쳤으므로, 우리나라 군신의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리어, 의리에 귀국과는 한 하늘 밑에 살지 못하게 되었었던 것입니다. (중략) 이제 귀국이 옛일을 혁신하여 위문 편지를 먼저 보내와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 하여 성의를 보이니, 참으로 이 말과
[충북일보] 5월의 내장산(763m)을 찾는다. 단풍나무들이 초록의 향연을 펼친다. 진녹색의 물결이 황홀하다. 초록의 단풍나무들이 우거져 터널을 이룬다. 초록 비단을 덮어놓은 듯하다. 내장사 입구까지 녹색 천지다. 온통 파랗다. 파릇한 새싹을 살피다 하늘빛을 띤 꽃을 만난다. 이름 모를 꽃의 화려함에 잠시 놀란다. 탐방로 곳곳에 식재된 각종 야생화 무리가 좋다. 진입로 가로수는 온통 단풍나무다. 가을이 되면 노랗고 빨갛게 물든다. 지금은 진초록 잎으로 찬란하게 빛난다. 내장산의 봄은 이르게 시작한다. 그 덕에 여름으로 진입 속도가 빠르다. 봄기운이 끝나고 여름이 완연해지고 있다. 여름이 북상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도 5월의 내장산은 여전히 싱그럽고 아름답다. 내장산이 여름의 녹음 속으로 치닫고 있다. 일주문에서 내장사까지 단풍터널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녹음이 단풍을 대신한다. 녹색터널이 되레 단풍보다 화려하다. 진한 단풍나무 향기가 산객을 맞는다. 찾는 이가 많지 않으니 한적하다. 2016년 5월 21일 오전 10시 5분 단풍나무 녹음 길을 따라 내장사까지 편하게 걷는다. 단풍이 없으니 혼잡하지도 않다. 본격적인 산행에 나선다. 이번 산행 계획
《병자일기》는 문신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부인 남평조씨가 쓴 일기로, 병자호란 전후의 농촌 현실과 노비들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병자일기》 속의 남평조씨 생활은 대략 난중피란기(1636년 12월 15일~1637년 2월 17일), 서산·당진체류기(1637년 12월 18일~1638년 1월 25일), 충주 이안 체류기(1638년 1월 26일~5월 28일), 서울 귀환기(1638년 5월 29일 이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안은 지금의 충주시 대소원면 본리에 해당한다. 이런 《병자일기》는 국문학적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 《병자일기》는 해서체의 난필에 띄어쓰기가 안 돼 있어 단번에 읽히가 쉽지 않다. 그러나 수정체를 서서히 움직이면 중세 우리말의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김영춘의 논문에 따르면 《병자일기》를 통해 17세기 국어의 단모음화·전설모음화·원순모음화·모음이화·자음동화 등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단모음화는 치음(齒音, ㅅ·ㅈ·ㅊ)의 영향을 받아 ㅑ·ㅕ·ㅠ 등 복모음이 ㅏ·ㅓ·ㅜ 의 단모음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남평조씨는 충주 체류기간 쓴 일기에서 지금의 '소'[牛]를 '쇼', '소나기'를 '쇠나기', '
고려 공민왕 10년(1361) 11월 홍건족(紅巾族)이 쳐들어왔다. 홍건족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들은 오랑캐가 아닌 한족이었다. 홍건족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자 공민왕은 겨우 28명의 신하만 데리고 황급히 개경 도성을 빠져나와 몽진에 올랐다. 국왕의 도피는 피난이 아닌 몽진(蒙塵)으로 표현했다.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 뜻으로, 궁궐의 편안한 생활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음력 11월은 겨울의 초입에 해당하는 시기로, 어가가 경기도 이천에 당도하자 진눈깨비가 내렸다. 공민왕은 젖은 옷을 모닥불에 말려야 할 정도로 몽진은 비참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가가 이천현(利川縣)에 당도했는데 비에 젖은 왕의 옷이 얼어붙자 장작불을 피워 한기를 막았다.'- 우리 민족의 침략사 가운데 가장 잔혹한 장면의 하나가 이때 벌어졌다. 《고려사》의 기술에 의하면 당시 홍건족의 잔혹한 행동은 야만의 극한에 달했다. '이날 적군이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아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
[충북일보] 고려 제 5대 임금인 경종(955~981)은 관리들의 봉급제도인 전시과(田柴科)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 제도에 의해 고려의 관리들은 가을철이 되면 농민의 개인 농토에서 수확량을 10%를 가져갔고, 또 땔감을 채취할 수 있는 임야를 제공받았다. 그런 전시과는 벼슬의 높고 낮음인 관품(官品), 그리고 인품(人品)에 따라 토지를 차등적으로 지급하였다. 이 가운데 인품은 시행 초기부터 골칫거리가 됐다. 인품은 개성 신·구 세력의 정치적 흥정에 따라 도입된 것으로, 주관성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경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목종(穆宗, 980~1009)이 초기 전시과의 불합리성을 개혁하였다. 본명이 왕송(王誦)인 목종은 전시과 외에 학문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행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성애를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목종의 생모는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이다. 그녀는 중 김치양(金致陽·?~1009)과 불륜에 빠져 아들을 낳았고, 목종이 후계자로 정한 당숙 대량원군 순(詢)을 제치고 그 사생아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 목종은 둘의 음모를 눈치채고 서경(평양)에 나가있는 강조(康兆)에게 긴급 구원을 요청
'임꺽정(林巨正)'은 우리고장 괴산출신 홍명희(洪命憙·1888~?)가 지은 일제 강점기의 장편소설로 유명하다. 그러나 임꺽정(?~1562)은 조선 중기인 명종대에 실존했던 도적의 우두머리이다.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을 꼽은 바 있다. 백정 출신으로 알려진 임꺽정은 서울까지 진출하는 등 신출귀몰하였다. '명종실록'의 사관은 사론(史論)에서 이렇게 썼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은 조선 조정이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다. 임꺽정을 생포한 인물은 당시 경기·황해·평안도의 3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1570)이었다. 토포사는 조선후기 도적이나 반란 세력의 진압 임무를 맡은 특수 관직을 말한다. '국조인물고'는 남치근이 임꺽정을 체포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재령(載寧
문명의 발달이 빨라지기 시작한 고려시대에도 높은 고개를 넘기는 종종 쉽지 않았다. 도둑이 들끓었고 맹수인 호랑이도 자주 출몰했다. 김부식이 지은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호랑이와 불한당으로 인하여 올라오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이 주저하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며, 반드시 많은 동행자가 생기고 무기를 휴대하여야만 지나갈 수 있도록 서로 경계 하였는데도, 오히려 살해를 당하는 자가 1년이면 수백명에 달하게 되었다.' 고려 조정은 그 대책으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국립숙박시설의 일종인 혜음원((惠陰院)을 세웠다. 혜음원지는 현재 사적 제464호로 지정돼 있고, 이곳을 방문하면 숙박시설 외에 절터와 행궁지를 만날 수 있다. 충북 백두대간에는 제일 북쪽의 단양 영춘면에 여촌령(呂村嶺, 늦은목이), 맨 남쪽의 영동군 상촌면에 우두령(牛頭嶺)이 위치하고 있다. 모두 24개 영로이다. 이들 영로 가운데 충북 백두대간 세번째 고개인 고치령(串赤嶺) 정상에는 산신당이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산신령과 단종을 신격화한 그림이 산싱당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고치령 산신당은 충북 북부와 경북 북부를 넘나들던 보부
554년 백제 성왕이 우리고장 옥천 관산성 부근에서 참수를 당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백제군은 말 한 마리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600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신라군은 성왕의 사지(四肢)는 돌려보냈으나 머리는 경주 왕성의 북청 계단 아래에 묻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신라는 백제 왕실과 국가에 대한 모욕을 그런 방법으로 표출하였고, 이후 두 나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백제 성왕이 접경의 여러 성 가운데 유독 옥천 관산성을 빼앗으려 한 이유는 매우 궁금하다. 학계에서는 그 이유를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을 봉쇄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백제는 그 직전 한강 하류지역에 신라에게 강탈당했다. 나-제동맹(433년)에 의해 신라와 합동으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수복했으나 신라 진흥왕의 동맹 위반으로 한강 하류를 잃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경주를 축으로 하여…
[충북일보] 4월9일 월악산(1천97m) 방문은 행운이었다. 월악산은 내륙의 바다라 불리는 충주호와 함께 언제나 우뚝하다. 들머리부터 첩첩하다. 하늘을 닮은 숲은 푸르다. 맑은 공기가 청량감을 준다. 눈 돌리는 곳마다 절경이다. 곳곳이 힐링의 공간이다. 오전 7시 청주를 나선다. 월악산 송계계곡 덕주골에 닿으니 오전 9시다. 덕주골 상가를 지나 덕주사를 거친다. 계곡 사이로 진달래가 활짝 폈다. 연분홍색 채도가 흐린 아침 날씨를 상쇄한다. 진달래 아래로 햇살이 무늬를 만든다. 덕주사를 지나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숲 속 공기 덕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고요의 숲 정령을 만난다. 마애여래석불까지 돌길이다. 가는 내내 그늘 숲길이 울창하다. 숲길은 돌계단과 가파른 경사의 이어짐이다. 마애여래석불은 급경사 언덕배기 거대한 수직암반 벽면에 새겨져 있다. 얼굴은 돋을새김하고 몸통은 선각으로 처리했다. 조형성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도 서글서글한 이목구비가 강한 인상을 준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오름길이다. 산객들을 질리게 하는 돌계단·철계단과 맞닥뜨린다. 모롱이를 돌때마다 화강암이 불쑥불쑥 솟는다. 바위틈에는 수백년의 소나무가 자란다. 그 사이 사
수레는 둥근 바퀴와 축의 회전운동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쉽게 운반하는 교통수단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 수레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기원전 3천년전 서아시아로 추론된다. 수레의 등장으로 물자와 사람들의 이동 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도시 발달이 촉진됐다. 나아가 인류는 수레를 보다 잘 이용하기 위해 길을 닦았다. 현재는 그 수레가 자동차, 길이 고속도로 등으로 바뀌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만주 집안현과 한반도 평양, 황해도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고분벽화에는 18개의 고분에 40여개의 수레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고대 수레바퀴는 크게 텟쇠. 빗등, 살, 장구통, 메뚜기 등의 부품으로 구성돼 있다. 텟쇠는 목재 바퀴를 보호하기 위해 두루는 쇠, 빗등은 바퀴의 테를 이루는 목재, 살은 바퀴테를 유지하기 위해 빗등과 장구통 사이에 끼우는 것으로, 주로 참나무로 만들었다. 장구통은 바퀴 중앙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뚫린 나무통으로 살이 이 부분에 모아져 꽂혔다. 메뚜기는 양쪽 바퀴를 가로로 연결하는 축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축구멍에 꽂은 쇠를 일컬었다. 수레바퀴 가운데 가장 만들기가 어려운 부분은 바퀴의 모양대로 철판을
고려와 조선시대 형벌은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 등 대략 5가지가 공통적으로 존재했다. 태형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로, '笞' 자에 회초리를 의미하는 대죽변(竹)이 들어갔다. 장형은 길고 무거운 몽둥이로 볼기(히프)를 내리치는 형벌로, '杖' 자에 몽둥이를 의미하는 나무목변(木)이 들어갔다. 도형은 지금의 징역형을 말한다. 유형은 유배형이고, 사형은 죄인의 목숨을 빼앗는 형이다. 이 가운데 유배형은 원칙적으로 압송관이 유배지까지 동행했다. 조선시대 벼슬을 한 죄인은 의금부 관원이, 일반 사족은 형조 관할의 역졸(驛卒)이 압송을 담당했다. 그리고 사형 집행인인 망나니[회자수]에게는 '속참행하(速斬行下)', 즉 단칼에 베어달라는 청탁성 뇌물이 건네졌다. 그래야 고통이 짧았다. 유배인 압송관에게도 뇌물을 건네는 관행이 존재했다. 조선 명종대 대신인 묵재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유배형을 받자 압송관이 찾아와 뇌물을 요구했다. '새벽에 의금부 서리 최세홍이 나를 찾아왔다. 불러들여 만나보니 유배지가 성주로 정해졌다고 한다. 오늘 마패가 나오면 내일 출발할 수 있다고 한다. 술을 대접해…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