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이 9년여 동안 피난생활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처음에는 지금의 충남 홍성으로 피신한다. 여기서 8개월 정도 머물다가 전북 장수로 피난지를 옮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들이 현감으로 있었던 강원도 평강으로 도피하고, 나머지 4년은 지금의 충남 부여 임피면에서 생활한다. 그는 평강에서 50개월 가량 머물면서 역둔전 등 국유지를 불하받아 농사를 지으며 피난생활을 이어갔다. 아들 윤겸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평강시절을 제외하면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가장 많이 했다. 임진년 음력 8월의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산속 바위 밑에서 잤다. 내가 산 속에 들어온 후로 점차 한 달이 넘어 절기가 중추(추석)으로 접어드니 찬 기운이 엄습하여 갑절이나 처량하다.' 오희문은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임진왜란의 전황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노비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노비를 수시로 관청으로 보내 정보를 수집·보고토록 했다. 임진년 음력 8월 10일자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장 조헌과 참장 이천준은 때에 맞는 인걸로서(…) 승리를 거두어 행동하는 것이 옛사람과 같으니…' 이때의 승리는 청주성 전투를 의미한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서 쓰여진 개인일기로 '쇄미록'이 있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11월부터 1601년 2월까지 9년여 동안 썼다. 현재 해주오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쇄미록은 7책 분량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겪은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참상뿐만 아니라 조선중기의 생활상도 풍성하게 담고 있다. 때문에 개인이 쓴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물 제 1096로 지정돼 있다. 쇄미록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의 하나인 '시전'(詩傳)에서 발췌됐다. 시전에는 '쇄혜미혜 유리지자'(쇄兮尾兮 遊離之子)라는 표현이 있다. 첫 글자 '쇄'는 '銷'자에서 '金' 대신 '王'자이다. 쇄미록은 이 문장 중 '쇄'와 '미' 자를 따와서 만든 표현이다. 해석하면 '부서지고 자잘하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로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에 전국을 피난하면서 쓴 일기'라는 뜻이다. 오희문은 조선 중기인 중종과 광해군 연간을 살았던 인물로, 아버지는 장성현감을 지낸 오경민(吳景閔)이고 어머니는 고성남씨 남인(南寅)의 딸이다. 그의 아들 윤겸(允謙)은 임진왜란 종전 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포
백전백패하던 조선군에게 청주성 전투의 승리는 고무적인 것 이상이었다. 전란 중의 선조가 대신들과 영규에게 어떤 상을 내릴 것인가를 논의하나 곧바로 논쟁이 벌어졌다.조선은 무장 이성계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대부가 힘을 합쳐 세운 연합정권이고 그 고리는 유교였다. 이런 까닭에 정도전은 석가모니를 '佛氏'(불씨)라고 멸칭하기도 했다. 요즘말로 하면 '미스터 아무개' 정도가 된다. 그러나 영규는 조선의 대통을 실천하는 유학자가 아닌, 머리를 깎고 산중으로 들어간 수도승이었다. 대신 윤두수가 이런 말을 한다."승려를 당상관에 제수한 것은 개벽이래 아직 듣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의당 특이한 법전을 써야 합니다."-청주성 전투의 공을 봐서는 당상관 벼슬을 주는 것이 합당하나, 유교사회의 승려이기 때문에 일종의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같은 자리에서 또 다른 대신인 윤승훈은 "영규는 (…) 호령이 엄명하고 곧바로 전진할 뿐, 퇴각함이 없이 한마음으로 싸웠습니다. 청주의 왜적은 이 군사가 아니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논란 끝에 영규대사에게 당상관(정3품)에 해당하는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에
영규(靈圭·?∼1592) 대사는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청주성과 금산전투에 잇따라 참전했다. 속향이 공주인 영규대사와 옥천에 기거하고 있던 조헌은 '공주'라는 지역성을 매개로 만났다. 선조수정실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승려 영규는 당초 공주 산사에 있었는데, (공주)목사 허욱(許頊)이 불러 승장을 삼았으나, 하려 하지 않다가, 강권한 뒤에야 응하였다. 일단 무리를 모아 군대를 만들고 나서는 오직 조헌만을 따라 진퇴하였다." 영규대사는 조헌과 더불어 청주성 탈환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헌과 마찬가지로 승리 후에 관군이 공다툼 시비를 걸어온다. "충청병사 이옥(李沃)은 영규가 성을 함락시킨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적이 되돌아올까 두려워하여 즉시 성을 헐고 곡식을 태우게 하고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므로 청주의 사람들이 그(곡식)의 살점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마침내는 적을 물리친 것을 자기의 공으로 삼아 거짓으로 보고하여, 상을 받았으니…"- 후에 충청병사 이옥은 이같은 사실이 발각돼 삭탈관직을 당했다. 영규대사와 조헌은 청주성 전투 후 선조를 보위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려했으나 방향을 바꿔 금산으로 향했다. 이때도…
'옛날에 중원에 나그네로 왔더니 / 지금은 중원으로 유배되어 왔도다 / 그저 달천의 물을 마실 뿐이요 / 달천의 물고기는 먹지 않았는데'- 연산군~성종 연간의 인물인 이행(李荇·1478∼1534)이 우리고장 충주의 달천 주변에 유배를 와서 쓴 시로, 적거록이라는 고문헌에 실려 있다. 그 증손이 이안눌(李安訥·1571∼1637년)이다.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그리고는 동년배인 권필과 선배인 윤근수·이호민 등과 문장을 논했다. 후대에 이들의 시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불렀다. '동악'은 이안눌의 어릴적 호이다. 따라서 그가 이 모임의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1607년 이안눌이 동래부사로 부임하면서 '四月十五日'이라는 한시를 지었다. 시제목은 평이하나 내용은 슬프기 그지없다. '술잔을 바치고 죽은 자를 곡한다오 / 아버지가 자식 위해 곡하기도 하고 / 자식이 아버지 위해 곡하기도 하고 /…/ 또 어미는 딸 때문에 곡을 하고 / 또 딸은 어미 때문에 곡을 하고 /…/ 눈물이 문득 턱을 타고 내리네 / 아전이 앞에 나와 말하기를 / 곡할 이 있는 것은 그래도 슬프지 않지
임진왜란과 관련, 당시 충청도 순찰사인 윤국형(尹國馨·1543~1611)이라는 인물이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일부 사료를 윤국형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도순찰사와 도관찰사는 같은 종2품으로 품계는 같다. 다만 도순찰사는 임시로 파견되는 직책으로 전시에는 군권(軍權)을 가지게 된다. 도순찰사는 성종 때부터 처음 등장한다. 적지 않은 사료들이 조헌 등 의병 지도자들이 모병 활동을 할 때 당시 충청도 순찰사였던 윤국형이 방해내지 훼방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와 청주사이에 가서 장정을 불러 모으니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방법으로 저지하고 방해하였다. 이에 조헌이 순찰사 윤국형을 찾아가 거사에 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말하자…'- 같은 선조수정실록에는 바로 '청양현감 임순(任純)이 백여 명의 군사로 조헌을 돕자 국형이 그가 절도(節度)를 어겼다고 하여 잡아 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니, 조헌이 또 편지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고 바로 우도(右道)로 가서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라
의병장 조헌은 생전에 이런 시를 남겼다. 宣尼(공자)께서 당시에 東周를 이루지 못하셨으나 / 남긴 가르침은 가득차고 넘쳐 만년을 비추네 / 남자가 경을 궁구함은 장차 주나라를 이루려 함이지 / 어찌 한 나라의 왕이 다스리는 한 지역만을 위할 것인가.'- 인용문 중 '동주'는 공자가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던 중국고대 주나라를 일컫는다. 이처럼 조헌이 추구한 세상은 예의와 염치(廉恥)가 충만한 도학적인 세상이었다. 관군의 방해가 적지 않았고 또 목숨을 담보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조헌 휘하로 의병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상당수는 조헌의 직계 제자들 이었으나 일부는 조헌의 성격과 인품 그리고 사상에 이끌린 사람들이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경구는 무인뿐만 아니라 문인의 세계에도 통했다. 후대의 송시열은 이를 두고 '明道正誼 就義成仁'(명도정의 취의성인)이라고 표현했다. '도를 밝혀 정의를 바로 세웠고 의를 취하여 인을 이루었다'라는 뜻이다. 금산 칠백의사 중 이름과 신원을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同日殉節錄'(동일순절록)이라는 문헌이 있다. 같은 날 순절한 사람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 목록에 첫번째로 오른 인물이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이다. 그 다음은 이광륜(李
한자 '表'(표)는 그것이 명사로 사용되면 '겉', '바깥' 등의 뜻을 지닌다. 반면 동사로 사용되면 '밝히다', '드러내다'로 쓰인다. 따라서 사당 '表忠祠'(표충사)에는 '충성심을 밝힌다'라는 뜻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고장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의병장 조헌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표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조헌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는 충남 금산군 복수면에도 위치하고 있다. 두 사당은 명칭은 같으나 다른 점이 있다. 옥천 안남의 표충사에는 조헌 뿐만 아니라 아들 완기(完基·1570∼1592)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조헌은 슬하에 4남2녀를 뒀다. 지금은 정실과 소실 관계가 거의 성립하지 않고 또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완기만이 정실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3남2녀는 측실이다. 적자 완기는 22살에 사망했기 때문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나머지 3남2녀는 대부분 장성했다. '조완도는 강음현감이고, 조완제는 전옥서 봉사이며, 다음은 조완배이다. 맏딸은 김노에게, 다음은 김성룡에게 시집갔다. 조완기는 자식이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완기는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 조헌을 따라 종군하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8월 1일, 금산전투는 이보다 18일 늦은 8월 18일에 있었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두 전투에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크게 달랐다. 청주성 전투에는 대략 1천7백명, 금산전투에는 7백명이 참가했다. 불과 18일만에 의병의 수가 1천명 가량 줄었다. 관군은 전공이 의병에게 돌아가는 것을 무척 꺼렸다. 때문에 국가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활동을 방해하고 훼방을 놓았다. 심지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일월록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처음에 조헌이 글을 보내어 순찰사를 책망하였기 때문에 순찰사가 감정을 가지고 각 고을로 하여금 조헌의 휘하에 응모하여 간 의병의 부모ㆍ처자를 모두 잡아 가두게 하고, 또 관군으로 하여금 응원해 주지 못하게 하여서…' 인용문은 계속 해서 '이때에는 조헌의 군사는 모두 흩어지고 7백 명의 의사(義士)가 남아 있어서 죽거나 살거나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였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순찰사는 당시 충청도순찰사인 윤국형을 말한다. 음력 8월 18일의 충남 금산전투에서 7백여명의 의병은 대부분 몰살당했다. 이들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약간의 이설도 있으나 대체로 조헌
조헌이 우리고장 옥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그렇지는 않다. 조헌은 1544년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라는 곳에서 조응지(趙應祉)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 잃고 계모를 맞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주경야독을 한 끝에 그의 나이 23살 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왔다. 조헌은 보은현감도 역임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헌은 계모에게도 친모못지 않은 효도를 했다. 그는 혼자된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자청해서 보은현감이 됐다. 바로 계모의 친정이 보은이었다. 계모는 의붓아들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사망하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찌 이런 인물을 다시 보랴. 다만 다른 어미의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이지. 이 애야 말로 진실한 내 아들이다.' 조헌은 효자이면서 동시에 시조짓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실려 있는 시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내용 중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조헌은 왜군이 임진년에 쳐들어 올 것으로 예상하고 1년전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인용문에 등장하는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에는 물안개가 끼었는데 뱃사공은 간데 없고 물가에 빈 배만 떠 있다. 그런 석양에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고 있다. 사공과 빈 배, 그리고 나와 갈매기가 짝을 이루면서 작가의 외로운 심정을 잘 드러나 있다. 다음 소개하는 또 한 편의 시조도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아 /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을 찾으리라.'- 창랑은 푸른 물결, 조대는 낚시터, 낙조청강은 석양의 푸른 강, 유지는 버드나무 가지, 옥린은 물고기 비늘, 행화촌은 살구꽃이 핀 마을을 말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초장은 맑은 강물에 낚시를 넣고 낚시터에 앉았다는 상황 설정이다. 중장은 저물녘의 맑은 강을 시각적으로 그렸다. 종장은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들고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고…
가거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산이다. 전체 넓이는 9.18㎢다. 해안선 길이는 22km로 아주 짧다. 그 안에 신안군 최고봉인 독실산(639m)이 있다. 섬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다. 독실산 정상에서 바닷가까지는 가파르다. 그곳까지 흘러내린 산줄기는 짙푸른 상록수림이다. 그 덕에 사시사철 식수가 풍부하다. 서북쪽 해안에 위치한 항리 마을에는 섬등반도가 있다. 가거도에서 가장 독특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의 주요 촬영지이기도 하다. 섬등반도는 천혜의 전망대다. 초원에 서면 가거도의 절반 이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하늘과 맞닿은 독실산 정상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멋진 해넘이가 선물하는 아름다운 저녁노을도 감상할 수 있다. 태양보다 더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에 오래도록 스러지지 않는다. 신안 제일의 홍도 못지않다. 관광자원과 해안 절경도 많다. 홍도의 풍광은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여성미다. 가거도는 굵고 힘찬 남성미를 풍긴다. 독실산 정상, 장군봉과 회룡산, 돛단바위와 기둥바위, 병풍바위와 망부석, 구정골짝, 소등과 망향바위, 남문과 고랫여, 국흘도와 칼바위 등 가거도 8경은 홍도 33경에 못지않다. 사람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의 시작에 대해서는 음력 8월 1일과 2일로 약간은 엇갈린다. 그러나 1일 시작됐다는 내용이 보다 많다. 이날의 의병 공격은 3개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조헌과 영규대사의 연합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반면 청주 부모산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박춘무 의병군은 남문을 공격했다. 그리고 연기 쪽으로 퇴각해 있었던 방어사 이옥의 관군은 미호천을 건너와 청주읍성 북문을 공격했다. 이날 전투가 치열했는지 여부는 사료마다 표현이 다소 엇갈린다. 선조실록은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고 적었다. 반면 이긍익(李肯翊·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이날 밤에 적이 저희들의 시체를 불태웠는데, 3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적은 북문(北門)으로 빠져 도망쳐 달아났다"라고 서술했다. 임란 발발 직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 문소만록에서 "이리하여 8월 1일에 크게 싸워서 비록 적의 머리를 베는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적도들이 화살과 총탄에 많이 맞아 그 형세가 매우 고립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은 무리들을 다 이끌고 도망했다"라고 표현했다. 전과가…
왜군이 1592년 5월 2일 보은, 회인을 거쳐 청주에 들이닥쳤다. 5월 2일이면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19일 밖에 안 되고, 또 우리고장 황간, 청산이 화염에 휩싸인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관련 사료를 보면 왜군은 보은, 회인, 청주를 단 하루만에 주파했다. 이는 당시 청주성에서는 관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왜군 북상로 주변의 관군은 모두가 달아났다. 왜군은 사실상 청주성에도 무혈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신익이라는 인물로, 청주읍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록에 이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 패전한 장수들 중에는 신익(申翌)보다 더한 자가 없습니다. 당초 한 도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에 머무르면서 왜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먼저 달아나서 허다한 군량과 병기를 모두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고 용인(龍仁)에 이르러서도 또다시 앞서 달아나 수만 명의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으니..."- 청주성은 이후 3개월 가량 왜군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이때 관군은 미호천 서쪽으로 퇴각해 왜군과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윤국형이 쓴 '문소만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조선을 협박했다. 일본 승려사신 겐소(玄蘇·?~1612) 임란전 조선을 자주 찾았고, 강화회담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일종의 직업 외교관으로 볼 수 있다. 겐쇼는 임란 1년 전 일본통신사 경험이 있는 김성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일본을 거절하여 조공을 바치러 가지 못하였습니다. 평수길(平秀吉·도요토미)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먼저 주문하여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입니다."- 겐쇼는 이어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노골적인 협박을 했다. 외교적인 언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왜인들이 자주 드나들고 많이 거주했던 부산에서는 임란 발발 1년전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실록이 적었다.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오던 왜선이 다시 오지 않았고, 관(館)에 머물던 왜인이 항상 수십 명이었는데 점차 일본으로 되돌아가 임진년 봄에 와서는 온 왜관이 텅 비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원인으로는 도요토미가 조선 도자기를 탐을 내서 등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영토 획득설이다. 도요토미는 전쟁을 해서 획득한 영토를 다이묘(大名·지방영주)와 무사들에게 나눠주고 이들은 그 같은 은전 때문에 주군인 도요토미에게 충성을 해왔다. 그러나 일본 전역을 통일하게 되자 이같은 메카니즘이 작동되지 않게 됐다. 그래서 영토를 외국, 즉 조선에서 획득하려고 했다는 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번역된 일본 논문에 쓰여 있다. "일(조선침략 지칭)이 순조롭게 달성되면 새로운 정복에 의해 회득된 諸國, 봉록, 유리한 영지를 줄 것이며 너희는 많은 즐거움 속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실제 도요토미는 명나라와 화친회담을 갖게 되자 7가지 요구를 하게 되고 그 안에 조선 4도 할양론도 들어 있다. 이때의 4도는 대체로 한강 이남을 의미한다. 실록에도 "급기야는 땅을 할양(割讓)하고 쌀을 바치는 일로 제도(諸道)의 백성들에게 공갈하고 있으니"라는 표현이 있어, 이를 확인하고 있다. 이밖에 일본천황 후궁으로 명나라 황녀를 보낼 것, 조
강릉 바우길은 한마디로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길'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금강소나무 길은 한사람이 걸으면 적당했다. 그래서 참가자들 한사람씩 차례로 줄지어 걸었다. 그 때문일까. 참가자들의 말수는 적었고, 조용히 숲의 소리와 소나무 내음에 집중했다.태양 볕이 불처럼 뜨거웠고, 비오는 듯 흐르는 땀을 닦아줄 바람한 점 없었던 날이었음에도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만들어낸 그늘에 덕분에 참가자들은 지긋이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연과 인간이 교감을 한 순간이다. 29일 51회 클린마운틴 참가자들은 강릉에 바우길을 걸었다. 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코스로 총 150km다. 바우길은 강릉바우길 14개 구간, 대관령바우길 2개구간 울트라바우길 계곡바우길로 이뤄져있다. 참가자들의 여정은 명주군 왕릉에서 시작했다. 명주군 왕릉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5대손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의 묘다. 야트막한 산에 모셔진 왕릉을 둥그렇게 소나무들이 감싸 안은 모습에서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왕릉을 시작으로 금강소나무 숲길을 걸었다. 금강소나무 기둥에 굵직하게 패인 마디마디가 모진 세월을 그대로 보여줬다. 클린마운틴에 여러 차
충주 달천의 어원에 대해서는 전회에 수달이나 단물 관련설을 언급한 바 있다. 전자는 과거 달천에는 수달이 많이 살아서 '달강'이라 했고 이것이 '달천'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후자는 과거 달천은 물맛이 좋아 '단냇물'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달천'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달천동 주변에는 '달다'가 변한 말일 수도 있는 '단' 자가 들어간 지명이 유난히 많다. '단월동', '단호사'(丹湖寺), '물개달래'(달천리 서쪽 물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달천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달천 혹은 덕천(德川)이라고 한다.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 속리산 꼭대기에서 나와서 물이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이행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였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인용문 중에 이행(李荇·1478∼1534)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그러나 이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서술했던 지명인 충주 달천 주변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했다.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이 이를 가
조선시대에는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돼 군량을 충당하던 토지를 둔전( 屯田)이라고 불렀다. 둔전은 시간이 흐르면서 경비 보충을 위해 관청에서도 설치했다. 전자는 국둔전, 후자를 관둔전이라고 불렀다. 둔전은 당초 취지와 달리 민전(民田)의 침탈, 농민 노동력의 강제 동원 등 민폐를 많이 끼쳤다. 이런 둔정이 긍·부정을 떠나 크게 황폐화됐던 적이 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이다. 왜군이 물러가고 나라가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자 둔전을 재설치하는 문제가 급부상했다. 이때 이른바 '둔전 전문가'로 등장한 인물이 윤조원(尹調元·1572∼1637)이다. 그는 익산군수로 부임하여 전주지역 옥야(沃野)의 수로를 개통시킨 일로 가자(加資)된 적이 있다. 가자는 특별 진급의 일종으로, 정3품 이상의 품계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다. "전주(全州)의 옥야(沃野)가 40여 리인데 5일 안에 그 쌓인 찌꺼기를 파내어 수로를 개통시키는 역사를 마쳤으니, 그 공이 더욱 큽니다. 도감 낭청 심곤(沈·)과 차사원 익산 군수 윤조원(尹調元)을 강인(姜絪)의 예에 따라 논상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상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조원은 1616년(광해군 8) 황해감사로 재직할 때 이이첨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이 최근에 개관돼 관람객을 맞고 있다. 충주고구려비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5~6세기 무렵에 고구려에 의해 세워진 역사적 실체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골 마을의 '입석'(立石) 정도로 방치됐기 때문에 '역사' 위에 '설화'가 덧입혀져 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이효장 설화'다. '이효장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순직했다. 시신을 서울로 운구를 하던 중 중앙탑 부근에 이르자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하구암리에 산소를 잡자 비로소 운구되었다. 조정에서는 이효장의 공로를 인정, 이곳 일대의 땅을 하사했고 그 표적으로 2개의 비석을 세워 경계로 정하니 그중 하나가 충주고구려비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와 유사한 면이 있다. 온달은 전투 중 '흐르는 화살'(流示)에 맞아 죽었고, 이효장은 근무 중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했다. 이효장(李孝長·?∼146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다. 부친은 한성부윤을 지낸 이사관(李士寬)이고, 모친은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딸이다. 실록에 그가 어떤 정책을 수행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호조참의로 있을 때 해청(海靑)을
전회에 충청도관찰사 김육이 대동법의 전면적인 시행의 주장했으나 유림과 대신들의 주장에 막혀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이 어떤 이유와 명문으로 반대했는지 실록에 상세히 실려 있다. 현종 연간에 배기(裵紀)라는 유생이 상소를 올려 대동법 시행의 불가함을 아뢰었다. 그는 '호남에는 그것(대동법 지칭)을 시행할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고, 감당할 수 없는 다섯이 있습니다'라고 주장, 대동법 시행을 반대했다. 그는 그 이유 중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꼽았다. '지금은 호서(湖西)는 1결(結)에 10말, 호남은 1결에 13말, 이렇게 균등하지 못하게 거리가 가까운 곳은 도리어 가볍고 먼 곳이 도리어 무거우며, 각읍의 잉여미도 경비를 제한 외에 남아 있는 것이 수만으로 계산할 정도인데도 꼭 더 많은 잉여미를 두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시행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한 마디로 도량형이 지역에 따라 다르고, 또 운반거리가 차이가 나는데 공물(貢物·쌀)을 전국적으로 균일하게 거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이유의 또 다른 하나를 다음과 같이 거론했다. '지금은 지극히 흔해빠진 토산물까지도 모두 서울 시장의 높은 값
1639년(인조 17)에 제천지역 유림이 김식(金湜)·김권(金權)·김육(金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에 존재했던 봉강서원(鳳崗書院) 이다. 봉강서원은 1671년(현종 12)에 중건됐고, 1672년에 '봉강(鳳崗)'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제사와 함께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후 복원되지 않고 있다. 배향 인물중에 김육(金堉·1580∼1658)이 보인다. 김육은 충청도의 대동법을 논할 때 생략할 수 없는 인물이다. 대동법은 하나의 세법에 불과하나 그것이 조선시대 나라 전반에 미친 영향은 이성계와 사대부 일군이 위화도 회군후 실시한 과전법에 버금갔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잡다한 공물을 백미로 통일, 단순화시킨 공물법을 말한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우리고장에도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치계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 지금 굶주린 백
전회에 중종대의 충주목사 안위(安瑋·1491∼1563)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사실 그는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었다. 실록은 그가 한 쪽 눈이 멀었다고 적었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예조 좌랑 안위(安瑋)는 한쪽 눈이 멀었는데 본조(本曹)는 조정의 예모(禮貌)를 맡는 곳이고 또 객인(客人)을 접대할 때에 보기에 민망하니 가소서." 하니…'- 중종은 이에 대해 "다른 직임이라면 오히려 할 수 있거니와 객인이 보는 곳에는 예모에 합당하지 않다. 아뢴 대로 갈라"고 이직을 하명한다. 그러나 그는 신체 장애를 극복하고 구황행정을 잘 펼쳐 조선시대 특별 진급의 일종인 '가자'(加資)를 받았다. "충주목사 안위는 관직에 부지런하고 검소하였고 일 처리가 자세하고 익숙하여 진휼하는 일이면 다 강구하여 있는 힘을 다해 조치해서 때맞춰 구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내의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안위는 구휼행정만 잘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수 구황음식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바로 '충주구황절요'다. 이 책은 1541년(중종 36) 안위가 충주목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기관(記官) 홍윤창(洪胤昌)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내용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쓴 '묵재일기'에는 양아록 주인공 숙길(淑吉) 외에 맏손녀 숙희(淑禧·1547~?)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이문건은 대를 이을 손자 숙길이가 태어났을 때는 축배를 드는는 등 부산을 떨었다. 맏손녀 숙희가 태어났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점차 숙희의 행동이 맘에 들었는지 여러 행동을 촘촘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숙길이 누나 숙희도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병치레를 많았다. 이문건은 1553년 일기의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아이는 약질로 태어났으며 성품이 밝고 명랑하나 조급하고 잘 울었다. 계축년(7살) 8월 풍열을 앓는 것이 경기와 같았는데 약을 썼더니 차도가 있었다. 그해 9월에 아랫니를 갈기 시작했다." 이문건은 성주에 두 채의 집을 갖고 있었다. 숙희는 할어버지의 귀여움을 받으며 주로 위채에서 생활했고, 이때 일기를 매일 쓰고 또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된다. 이 때문인지 숙희는 할아버지 이문건에게 "나도 글을 가르쳐달라"고 자주 졸랐다. 이문건은 묵재일기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어제부터 천자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숙희의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희는 9살 때 육갑, 13
조선시대 사헌부는 오늘날로 치면 대략 검찰에 해당한다. 그 수장은 종2품의 대사헌이다. 그 밑으로는 종3품의 집의(執義), 정4품의 장령(掌令), 정5품의 지평(持平) 등이 이었다. 사헌부 벼슬아치는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했기 때문에 그 직위에 관계없이 '대간'(臺諫)이라고 통칭되기도 했다. 성종 연간에 사헌부 집의를 지낸 인물로 안위(安瑋·1491∼1563)가 있다. 사료를 보면 그는 1539년 사헌부 집의가 되어서 소세양(蘇世讓)과 함께 당시 세도가인 대윤 윤임(尹任·1487-1545)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서 1542년 우리고장 충주목사로 좌천됐다. 이를 두고 조정에는 쑥덕공론이 많았다. 당시 사관이 '이해되지 않는 인사'라고 생각됐는지 실록에 이례적으로 장문의 사론(史論)을 적었다. '사신은 논한다. 전에 소세양(蘇世讓)이 윤임(尹任)을 탄핵하려고 장령 안위(安瑋)에게 부탁하여 대론(臺論)을 유발하려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안위가 충주 목사로 나가고 안위의 아우 안현(安玹)이 전라 감사로 나가게 되자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했었다.'- 조선시대 도적이 창궐은 탐관오리의 횡포 외에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와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