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상 19세기 초에 '아리랑'과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천주교 순교자 이승훈은 '만천유고'에 '농부가'(1790)를 남겼다. '호미매여라 호미매여라 / 황혼월색이 만기간(滿旗竿)일세 //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啞魯聾) / 일석노담재주환(日夕農談載酒還)'. 후렴구 '아로롱'은 말 안하고(啞) 우둔하게(魯) 귀막고(聾) 지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로롱'이 아리랑과 같은 의미를 지녔는지는 다소 논란이 남아 있다. '아리랑'이라는 분명한 명칭은 생각보다 늦은 19세기말에 등장하고, 그 배경의 주인공은 고종이었다. 황현(黃玹·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고종은 매일 밤마다 궁궐에 전등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광대와 재인들을 불러들여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과 같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하며 놀았다.(…) 이제는 다름 아닌 궁궐에서도 하는 것이다.' '아리랑' 할 때의 '랑'을 '아가씨 娘' 자로 적어고, 그리고 이를 '염곡'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염곡은 이른바 남여상열지사의 노래를 말한다.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다.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임금은 이것을 전담하는 원임대신으로 하필이면 민영주(閔泳柱)를 임명했고,
충북을 포함한 충청도에도 아리랑이 존재했다. 그러나 국내 음악계에서 '충청도 아리랑'이라고 개념화시켜 놓은 것은 없다. 그렇게 볼 정도의 음악적인 틀과 정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다만 중국 만주 정암촌에서 불려지는 아리랑이 '청주아리랑' 또는 '충청도아리랑'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는 강력한 견해가 있다. '청주아리랑'은 임동철 전 충북대 총장이 처음 발견, 지난 2003년 관련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 삼베질쌈 못한다고 날 가라네 // 삼베질쌈 못하는 것 대단하고 / 아들딸 낳아준 건 대단찮나.(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시아버지 죽서어 좋댓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 시어머니 죽어서 좋댓더니 / 보리방아 물저놓니 또 생각나네.' 후렴은 앞과 같다. 정암촌의 노랫자락이 '청주 아리랑'으로 인정받으려면 우리고장 청주 주변에 비슷한 노랫가락이 조금이라고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양자의 음악적인 혈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암촌 아리랑의 핵심적인 노랫말은 '날 가라네 날 가라네 날 가라네'다. '날 가라레'는 '나를 집밖으로 나가라'라는 뜻이다. 이 노랫말이…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선정 이유를 "아리랑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됐으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 주고 사회적 단결을 제고하는 역할을 했다"라고 밝혔다. 이에따라 우리나라는 15종목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아리랑 하면 가장 궁금한 것이 어원이다. 현재 무려 40개의 어원설이 있으나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없다. 대신 '무어원설'이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이 설은 '노랫말 아리랑은 의미 없는 사설로,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 나가는 구실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아리랑이 생겨난 시점도 궁금하다. 다양한 설이 있으나 고대, 고려, 조선초기, 근대 발생설 등 대략 4가지 설로 구분되고 있다. 고대 발생설은 이병도 박사가 주장했다. 그는 아리랑의 '아리'는 낙랑을 뜻하고, '랑'은 한자 '고개 령'(嶺) 자의 변형으로, 바로 평양(낙랑) 아래에 있는 '자비령'을 의미한다고 봤다. 고려시대 발생설은 고려속요에 선이 닿아 있다. 고려속요의 하나인 '청산별곡'에는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애 살어리랏다 / 멀위랑 다래랑 먹고 쳥산애 살어리랏다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아비가 묘터를 스승이 비문을, 제천 정보연 정철은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2대 문호로 일컬어지고 있다. 정철의 가계는 아들 정종명(鄭宗溟), 손자 정양(鄭瀁), 증손 정보연(鄭普演·1637∼1660) 순으로 이어진다. 정종명과 정양은 문벌의 자손답게 문관의 벼슬을 했다. 증손 정보연도 처음에는 그 길을 걸었다. 특히 부친 정양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했다. 정양은 1600년생, 송시열은 1607년생이다. 따라서 송시열은 생전에 정양을 '형'이라고 호칭했다. "송시열은 정형 안숙(어릴 적 이름)의 영구가 서울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충주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병들어 깊은 산골에 엎드려 있는 처지이므로, 몸소 조제(노제를 지칭)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삼가 아들 기태(基泰)를 보내어 대신 영연(靈筵)에 곡하게 하면서 고합니다."- 송자대전 행간에는 정보연이 지조가 있었으며, 청아하고 고매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로 그려져 있다. 대범하여 세속의 일들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송시열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우암은 일찍이 그의 단아한 인품을 칭송하여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연(顔淵)에 비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감옥이 열악한 환경을 지녔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죄인들에 대한 복지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요사이 장맛비가 너무 많이 내리니 필시 옥사가 지체되어 갇혀 있는 죄수가 있기 때문에 화기를 손상시켰을 것이다. 서울과 지방의 감옥의 죄수로 강도 이외에 장형 80대 이하는 모두 석방하고, 장형 80대 이상으로 연로한 자는 보방(保放)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용한 문장 중에 '보방'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보방은 '보석'(保釋) 제도의 일종으로, 보증인은 세워야 한다는 점은 오늘날과 같았다. 그리고 당시는 영구 보방 외에 한시적인 보방도 존재했다. "의금부·형조·사헌부에 전지 하기를, 지금 추위를 당하여 여러 날 구속되어 있으면 바람과 추위의 엄습을 당해서 혹시 목숨을 잃는 데까지 이를까 염려되므로 (...) 겨울 기간을 한하여 보방해서 추국하도록 하여 나의 흠휼하는 뜻에 부응하라."- 옥이 너무 비좁아 보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는 '"본부에 갇힌 사람이 모두 1백 70여 인이고 전옥서에 옮겨 가둔 자도 40여 인이라, 갇힌 사람은 많고 옥은 좁아서 갇힌 사람들이 앉아 눕지 못합니다. (…) 전교하기를, "처녀의 가장 및 양부에게 시집가서…
조선시대 청주옥(獄)은 철당간과 흥업백화점 사이에 둥근 담장 모습으로 위치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조선전기 청주옥에 갇혔던 유명 인물로는 이색과 권근이 있다. 이들은 이른바 '윤이·이초 사건'에 연루돼 청주옥에 갇혔다.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파평군 윤이(尹彛)·중랑장 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이들은 이성계가 장차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밀고했다. 이는 명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한 음모였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색·우현보·권근 등 많은 대신들이 연루 혐의를 받고 청주옥에 갇혔다. 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에 우현보·권중화·경보·장하·홍인계·윤유린과 최공철(崔公哲)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이색·이임·우인열·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 등은 청주(淸州)의 감옥에 가두고 이를 국문하게 하였다.'- 이어지는 문장은 "그해 여름에 이색 이하 여러 폄소에 있던 자가 모두 청주의 옥으로 잡혀 와 갇혔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 성안에 들어와서 공해가 모두 물에 잠겼었다"라고 돼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중앙공원 압각수 설화다. 익
정철의 묘는 그의 손자인 정양(鄭瀁·1600∼1668)과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에 의해 1665년 경기도 고양에서 우리고장 진천 문백으로 이장됐다. 손자 정양은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현재 문백에는 정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정종명의 묘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바로 정종명의 아들이 정양이다. 정양은 진천현감을 역임하기도 했고, 또 병자호란 피난일기인 '강도피화기사'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도피화기사'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도중에 청나라 군대를 만나 온갖 고생을 한 경험을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특히 일기에는 여인들이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결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정양 자신도 청나라 군사의 공격을 받아 이때 한쪽 눈을 잃은 것으로 돼 있다. 피난도중 아내가 배위에서 출산을 하면서 가족들이 이중의 고초를 겪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양의 묘는 진천이 아닌 우리고장 제천 금성면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송시열이 쓴 정양의 묘표(비석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부인 이씨는 덕화를 받아 공을 섬기는데 매우 예법이 있었는데 불행히 먼저 죽었다. 두 번째로 그의 묘를 옮겨 제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는 면리제(面里制)가 근간으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현재 里 밑에 자연부락 지명이 존재하나 이는 법적 행정지명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골지역은 '~리 OOO번지' 식의 주소를 갖는다. 일제는 1914년 우리나라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면서 농촌지역의 경우 부(府)와 현(縣)을 폐합, 군(郡)으로 일원화했다.이때 도내에서는 영춘, 청풍, 연풍, 청안, 문의, 청산, 황간현 등이 면(面)으로 격하됐다. 이중 청풍현은 바로 청풍면이 되지 않고 1914~1917에는 비봉면(飛鳳面)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행정명으로서의 면은 태조 때부터 등장한다. '목조는 두타산성을 지켜서 난리를 피하였다. 때마침 전일의 산성별감이 새로 안렴사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에 이르러 살았는데…'- 조선전기 우리고장 보은에서도 면(面) 이름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청산현의 월경지(越境地)인 주성부곡을 서술하면서 '북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월경(越境)은 청산(靑山) 임내의 주성부곡(酒城部曲)이 현 북면(北面)에 터무니 없이 들어와 있다.'-…
정철에게는 정여립을 단죄한 기축옥사의 업보가 계속 따라다녔다. 그는 임진왜란 와중에 명나라를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선조의 신임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인들은 기축옥사의 한을 곱씹고 있었다. 결국 정철은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동인의 모함을 받아 지금의 강화도 송강촌이라는 곳으로 방축됐다. 실각한 그가 왜 강화도로 들어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선조의 부름이 다시 있을 것으로 보고 한양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는 추정이 있다. 반면 그의 문인(門人·제자)인 권필(1569∼1612)이 강화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권필은 젊었을 때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이때 역시 그곳에 건저의 사건으로 유배와 있던 정철을 만나 사제 관계를 맺은 바 있다. 권필은 이후 강화도에 정착, 그곳에서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혹자는 정철이 이를 고려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쫓기듯 들어간 강화도에서, 정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난과 병고였다. 그는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봐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는 약
우리고장 진천 문백에 영면하고 있는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은 조선중기 당쟁의 한 복판에 서 있던 인물로 생각될 수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그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진력을 다 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이 기간 동안 충청과 호남의 양호체찰사가 되어 우리고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체찰사는 왕명에 의해 특정 지역에 파견되는 임시 고위관료를 말한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전에 이른바 건저의(建儲議·세자를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 사건에 대한 선조의 노여움으로 압록강 아래인 평안도 강계에 유배됐다. 이때 그는 유배생활의 고달픔을 시로 남겼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고 / 하늘을 업고도 하늘 보기 어렵네 / 마음을 아는 넌 오직 백발이라 / 나를 따라 또 한 해를 지나는구나.'- 인용문 중 '하늘을 업고도 하늘 보기 어렵네'는 유배된 곳의 집담장 둘레는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배의 한 종류인 위리안치(圍籬安置)는 빽빽히 들어산 탱자나무가 담장을 이룬 것을 말한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가시가 나 있고, 또 그물처럼 촘촘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달여만에 유배지 강계에서 사
전회에 송강 정철의 아들 종명이 아버지를 변호하는 내용을 간략히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글은 장문이고 또 정종명 혼자가 아닌, 동생 홍명(弘溟)과 같이 올린 상소문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변호·복권시키려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의 사실'이라는 것도 있다. 더욱이 상소하는 대상이 일국의 지존인 국왕이다. '신의 아비가 명종·선조 두 조정을 섬기게 되어서는 용호가 풍운을 만나고 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이 한때 견줄 데 없었으나 다만 강직한 충성 때문에 남과 화합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철은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놓고 무진 무진 먹세그려'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지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으나 불같은 성격을 함께 지녔다. 두 아들은 '남과 화합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소문은 아버지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맡고 싶어서 맡은 것이 아닌, 선조의 강권 때문에 맡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위관(委官)은 죄인을 추국할 때 대신 중에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관을 말한다. 국조인물고를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 11월에 공을 우의정에
그날 서인 영수 정철과 동인 연수 이산해는 선조 앞에서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선조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이산해는 그날 병을 핑계로 어전에 나가지 않았다. 정철은 이같은 음모도 모르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건의했다가 혼자 선조의 미움을 사 강계로 유배됐다. 이른바 건저의(建儲議·세자를 논하는 것) 사건으로, 이로 인해 서인이 몰락하고 동인이 집권했다. 기축옥사의 최고 국문관이었던 정철은 실각하자마자 기축옥사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은 동인계열 사람 수백명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이때 동인중 정철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북인, 온건론을 편 쪽은 남인으로 갈렸다. 정철의 아들중에 정종명(鄭宗溟·1565∼1626)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과 실력을 갖췄으나 군수직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모두 아버지 정철 때문이었다. 이조가 정종명을 안성군수로 추전했으나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이를 거부했다. "정종명은 간신의 아들로 여러 해 동안 폐기한 데에는 의도한 바가 있었다. 전에도 여러 차례 수령에 의망된 적이 있어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괴이하여 추구하고…
조선시대 죄인은 옥(獄)에 갖혔어도 형량에 따라 형구를 차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흔한 것이 '가'(枷)라고 불리는 나무칼이었다. 이 나무칼은 죄의 경중에 따라 무게게 달랐다. 장형을 받은 죄인은 15근, 사형이 결정된 중죄인은 25근의 나무칼을 차야 했다. 1근이 6백그램인 것을 감안하면 25근은 15kg의 무게다.사극을 보면 어떤 죄인은 발에도 무엇인가를 차고 있다. 착고(着錮·또는 차꼬)라는 형구다. 이 착고는 두 개의 토막나무에 가로구멍을 파고 그 안에 죄인의 양쪽 발목을 넣고 자물쇠로 채운 모습이다. 을사사화 때 우리고장 충주인물 이홍윤이 의금부로부터 국문을 받는 중에도 이 착고를 찼다는 내용이 실록에 등장한다.충주출신 사림파 사대부인 이약빙에게는 이홍남, 홍윤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복간인 둘은 재산문제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때 형 홍남이 귀양지 영월에서 빨리 풀려날 목적으로 동생 홍윤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한다. 그 결과, 한달 사이에 충주백성 28명이 능지처참을 당하고 8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사관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주륙(誅戮)당하거나 귀양간 자가 무려 40∼50인에 달하여 충주(忠州) 전체가 온통…
조선시대 형벌을 얘기할 때 태형과 장형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둘은 죄인을 체벌하는 것은 같으나 강도에 있어 큰 차이가 났다. 태형의 '태'는 한자 '매질할 태'(笞) 자로 '대죽변'이 붙어 있다. 바로 둔부를 노출시킨 후 회초리로 매질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장형할 '장'은 '지팡이 장'(杖)자로 '나무목' 변이 붙어 있다. 즉 장형은 커다란 몽둥이로 체벌을 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태형이나 장형을 가할 때는 남녀의 모습이 달랐다. 방금 둔부를 노출시킨 후 매질한다고 밝혔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남자는 둔부를 완전히 노출시켰으나 여자 죄인은 홑겹의 옷을 입게 했다. 그런데 홑겹의 옷을 입게 하자 여자죄수 사이에서는 몰래 여러 겹의 옷을 입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연산군일기의 기생 '내한매' 이야기가 그런 경우다. '잔치를 베풀 때에, 잘 아는 음악을 물었는데도 모른다고 대답하므로, 형조에 내려 처벌하게 하였는데, 곤장을 맞을 때에 치마 속에 모피를 몰래 감춰 둔 것이 참의에게 발각되어…'- 장형의 종류 중에는 '난장'(亂杖)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여러 사람이 빙 둘러 돌아가면서 죄인의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 몽둥이로 때리는 것을
조선시대 옥에 갖힌 죄수들은 야간에는 통 2개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했다. 나졸들이 넣어준 통 중 큰 것은 대변용, 작은 것은 소변용이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조선시대 옥의 이같은 환경을 크게 비판했다. 다산은 조선옥의 열악한 환경을 '옥중오고'(獄中五苦)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섯 가지 고통이라는 뜻으로 △형틀의 고통 △토색질(갈취)을 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갖혀 있는 고통 등을 말한다. 다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시대 옥을 '이승의 지옥'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옥하면 참수형을 집행하던 망나니를 빼놓을 수 없다. 나라에서는 백정을 망나니로 삼으려 했지만 잘 안 됐다. 따라서 사형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대신, 이들을 망나니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즉 망나니는 자신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이런 망나니에게도 뇌물이 건네지는 경우가 있었다. 사극을 보면 죄인을 꿇어앉힌 후 망나니가 목을 베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김윤보라는 인물이 그린 '형정도첩'이라는 그림을 보면 죄인을 땅을 보고 눕게 한 후 망나니가 목 위에서 칼을 내리쳤다. 이때
24일 아침 8시. 아직은 11월이지만 40여명의 54차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회원들은 겨울 등산복을 꺼내 입고 모였다. 올해 10번째로 찾아나선 명품길은 영호남을 잇는 소통의 800리 '지리산 둘레길'. 2008년 개발을 시작해 올해 5월 총 274km 환형의 전체 구간을 완전 개통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3구간 중 전라북도 남원 매동마을에서 경상남도 함양 금계마을까지 11km 가량이다. 원래는 인월면에서 시작해야하지만 8시간을 모두 걸을 순 없어 5시간 정도의 코스를 택했다. 10시 반쯤 매동마을에 도착하자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야말로 쪽빛 하늘아래 그림같은 마을이 우릴 반겼다. 기념촬영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상황 방면을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산 좋아하는 사람 치고 악인이 없다'고 했던가. 둘레길에서 만난 둘레꾼들은 유독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숲길과 임도, 차도를 번갈아 걷다보니 등구재가 보인다. 거북등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삼봉산과 백운산 사이에 움푹 들어가있어 말의 안장같다. 등구재에 올라가 식사를 하기로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일행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땀을 닦고 거친 숨을 쉬며 식당으로 들어서니 주인 아주머니가 웃는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가두어두는 곳을 감옥(監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감옥은 일본식 표현으로, 갑오경장 무렵 국내로 들어오면서 우리말 '옥'을 물리치고 대중성을 획득했다. 전옥서(典獄署)라는 관청이 이 조선시대 옥을 총괄했다. 그러나 전옥서라는 명칭은 고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개국 직후부터 벌써 그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옥서는 수도(囚徒)의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2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고, 사리(司吏) 2명이다.'- 조선시대 옥에 대한 정보는 문헌 외에 의외로 고지도에 다수 남아 있다. 구한말이 되자 서구열강 세력이 밀물 듯이 몰려왔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전국 군현에 지도를 그려올리도록 지시했다. 이른바 1872년 군현지도이다. 흔히 말하는 수령은 군수와 현령의 준말로, 달리 사또 또는 원님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수령은 행정, 군사 외에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전국의 모든 군현 주변에는 옥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1872년 군현지도에는 청주와 충주목 그리고 영동·청산·청풍현 등 5개 목현에만 옥이 그려져 있다. 왜 이같이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1598년(선조 31) 이순신 장군이 우리고장 진천출신 이영남 등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는 그날의 전투가 생각보다 격렬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인물이 이시언(李時言·?∼1624)이다. 현재 남해안 일대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고건축으로 여수 진남관과 충무공 사당인 충민사 등이 남아 있다. 바로 이시언이 세운 건물로 진남관은 국보 제 324호, 충민사는 사적 제 3891호로 지정돼 있다. 그는 또 삼도수군의 사령부를 가배량(加背梁·현 거제도)에서 통영으로 이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통영 시민들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것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시의 이름을 '충무'에서 '통영'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이시언이 수군로서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해안으로 가기 전에 우리고장 충청도 병사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병사'는 지금으로 치면 향토사단장 쯤이 된다.
청주-조치원 사이에 영업용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4년 4월이었다. 그러나 첫 영업자는 내국인이 아닌 일본인 織居加一이었다. 그는 경무부 허가를 받아 매일 2회씩 청주와 조치원 구간에 영업용 승용차를 운행했다. 이후 이 일본인은 재미를 봤는지 '조선자동차운전회사'라는 여객운수회사를 차려 청주를 중심으로 괴산. 미원,진천 등에도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영업용 자동차를 배차했다. 청주-충주간은 처음에는 여객의 왕래가 적어서 승객의 수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운행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승객이 점차 늘면서 짝수일에 1회씩 정기 운행을 개시했다. '청주 연혁지'(1923년 출간)를 쓴 오꾸마쇼지라는 일본인은 책에서 청주-조치원 신작로와 함께 주변도 설명했다. 그 내용이 다소 이채롭다. '고문경찰시대에 조치원 도로가 개수되어 겨우 도로다운 형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거의 중앙에 해당하는 지점에는 하나의 당우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에 덕망이 높은 인격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우의 비석은 그 사람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당우와 당우의 비석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수의동에 위치한 송상현 사당과 신도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전회에 경부선 역이 한적한 마을인 조치원에 들어서면서 조치원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조치원은 청주와 사이에 신작로 개설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신작로(新作路)는 말 그대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새롭게 낸 길을 이르는 말이다. 소설가 박태순은 '무너지는 산'에서 신작로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시냇물은 이제 그 양편에 축대를 쌓아 하수천이 되었고 소달구지가 지나다녔을 오솔길은 자갈로 다져진 신작로가 되어 버스가 경적 소리를 내며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신작로가 바탕이 된 지금의 청주-조치원 국도는 비교적 반듯한 편이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조치원과 청주를 잇는 신작로 노선으로 2개 안을 검토했다. 하나는 지금의 노선이고, 또 하나는 미호천 둑을 따라 보다 북쪽으로 청주를 연결하는 안이었다. 일제는 검토 끝에 지금의 노선을 택하고 1910년 10월 신작로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6월에 완공했다. 신작로가 들어서기 전의 구한말 우리나라 도로 사정은 불문가지였다. 이방인의 눈에도 조선의 길은 '스스로 그렇게'(自然) 생긴 길이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여사가 1890년대 한국을 찾아 이런 기행문을 남겼다. '한국의 도로는 인공적
보은 회인은 지금은 면(面) 단위에 불과하지만 고려시대 때는 현(縣)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도 그 행정적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대전시 회덕에 짧은 기간 예속된 적이 있다. 회덕, 회인할 때의 '회'는 한자 '품을 懷'(회) 자다. 두 지역의 지명을 직역하면 회덕은 '덕을 품는다', 회인은 '인을 품는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른바 유교식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두 지역이 한때 친족 관계였던 것을 의미한다. 실록 지리지에 그 내용이 들어있다. "고려가 회인으로 고치어, 현종 9년에 청주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회덕 감무로써 회인을 겸임하였다."- 인용문 중 '회덕 감무로써 겸임했다'는 뜻은 회인이 회덕 현감의 행정적 지휘를 받은 것을 뜻한다. 회인은 이같은 부침을 무릅쓰고 부군 통폐합 조치가 있던 지난 1914년까지 현의 지위를 유지했다. 회인에는 호점산성(虎岾山城)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성이 있다. 호점을 글자 그대로 풀면 '호랑이 고개'라는 뜻이 된다. 구한말까지 호환(虎患)이 존재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여름철에는 방입구에 그물을 치고 잘 정도였다. 계곡이 깊고 산이 높은 회인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강원도 산골에는 아직
조치원을 가리켜 흔히 '충북같은 충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만큼 청주를 생활권으로 하는 사람이 많고 역사적으로도 청주와 인연이 깊다. 지금의 전의지역은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목 소속이었고, 연기현은 1018년(고려 현종 9) 청주에 영속된 사례가 있다. 봉수도 청주의 것을 받았다.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남쪽 용수산(龍帥山)이다. 동쪽으로 청주 저성(猪城)에, 서쪽으로 공주 독성(禿城)에 응한다.'- 최근 조치원에서 '조치원역'을 '세종역'을 바꾸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조치원도 당연히 세종시에 속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시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개명을 통해 조치원역을 세종시의 관문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금은 연기군청이 조치원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연기현 치소는 지금의 조치원읍이 아닌 다른 곳에 위치했다. 조치원읍에서 남쪽 삼십리 되는 곳에 연기군 남면 연기리가 있다. 바로 이곳에 연기현의 치소가 위치했다. 역사도 비교적 오래 돼 백제시대부터 조선말까지 이곳의 현의 중심지였다. 그러다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그리고 조치원에 역이 생기면서 군청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경상우수영는 원균(元均·1540∼1597)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왜수군과의 전력차가 너무 심하자 배를 불태운 후 육지로 도망하려 했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과 전구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때 원균을 붙잡아둔 인물이 부하 이운룡이다. 그는 원균의 앞을 가로 막으며 "장수는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원균을 결국 경상우수영을 버리지 못했다. 대신 이운룡의 건의대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과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상대 진영의 전체 동의가 있어여만 가능한 연합함대 구성은 쉽지만은 않았다. 이때 양진영을 오가며 청병사절 역할을 한 인물이 이영남(李英男·1563∼1598)이다.
우리고장 진천에서 가장 오래 된 성씨의 하나는 상산임씨다. 중시조는 임희(林曦)는 고향에서 이름을 딴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지기도 했다. 많이 알고 있듯이 상산은 진천의 별칭이다. 따라서 지금고 상산임씨와 진천임씨라는 표현이 함께 쓰이고 있다. 상산이 진천의 별칭이었다는 사실은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의 하나인 문경 희양산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에 처음 등장한다. 비문에 '상산의 혜각(慧覺)은 진주(지금의 진천)의 김(金)'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혜각이라는 스님이 진천 상산의 어느 절에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산은 이후 고려사, 세종실록 등 여러 지리지에 자주 등장한다. '충경왕 10년 기사에 또 지의령군사로 승격시켰다가, 임연(林衍)이 베임을 당하게 되매, 진주 감무로 강등하였고, 본조 태종 13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고쳤다. 별호는 상산(常山)이다.'- 조선시대 각 고을은 그 읍치를 정할 때 풍수적인 원리를 철저하게 따졌다. 따라서 당시 각 고을은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이 있고 그 사이를 하천이 흐르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때의 안산은 '책상다리 案' 자로 무릎을 꿇고 주산을 맞이한다는 의미다. 때문에…
청안은 현(縣) 즉 지금으로 얘기하면 군청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청안은 지금은 일개 면소재지에 불과하나 구한말까지도 현세가 비교적 당당한 편이었다. 얼마전 음성현이 한때 청안현에 예속된 적이 있다고 밝힌바 있다. 그 정도였다. 이것 외에도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개편되기 전까지 지금의 증평읍을 비롯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 그리고 지금의 오창읍 일부 등도 모두 청안현에 속했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가 증평면을 만드는 과정에서 현의 지위를 잃고 괴산군에 편입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바로 청안면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1914년은 우리나라 행정사에서 가장 굵은 마디가 형성된 해가 된다. 이 해에 청안군 읍내면과 동면 전부 그리고 북면의 일부가 합쳐져 괴산군 청당면(淸塘面)이 만들어진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17년에 그 이름이 청안면(淸安面)으로 바뀌었다. '청안'이 한 때 '청당'으로 불려진 것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청안현'을 이렇게 적었다. '청당현(靑塘縣)은 고려 초에 본래 청주(淸州) 임내에 붙여 일명 청연(靑淵)이라 하였는데,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도안(道安)을 겸임하게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