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도 기녀문화가 존재했다. 이와 관련, 고려사 명종 12년 2월 을사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우리고장 옥천서 일어난 사건으로 8백여년 전의 일이다. "관성(管城) 현령 홍언(洪彦)이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고, 음황하여 절도(節度)가 없으므로, 벼슬아치와 현민들(吏民)이 언(彦)의 사랑하는 기녀(妓)와 기녀의 어미 및 형제를 죽이고 드디어 언(彦)을 붙잡아 유폐하니…"- 인용문에 등장하는 관성은 지금의 옥천을 의미한다. 조선의 대문장가 정철의 묘가 우리고장 진천군 문백면에 있다. 정철은 기녀들과 염문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한 만큼 관련 시조도 많이 남겼다. 정철은 선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세자를 건의했다가 선조의 미음을 사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른바 '건저의 사건'으로, 이때 그곳에서 만난 기녀가 '진옥'이다. 먼저 정철이 매우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수작을 건다. '옥을 옥이라 하거늘 광옥만 여겨떠니 /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일시 적실하다 / 내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가 하노라.'- 이해를 위해 일부 고어는 현대문으로 바꿨다. 기녀 '진옥'도 답을 했다. 역시 성적 은유를 담고 있다. 이 시조 역시 '근화악부'에 실려 있다. '
기녀(妓女) 제도의 발생에 대해서는 전쟁 점령지에서의 여자 획득설, 부모 잃은 고아, 부모의 빈곤으로 인한 인신매매, 과부의 사생아, 역적의 처자, 음란함으로 타락한 여자 등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우리나라 기녀의 기원을 '고려가 후백제를 쳐들어 갔을 때(…)사내들은 노를 삼고 여자들은 비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우리나라 기녀가 시작됐다"라고 적었다. 여러 설중 전쟁에서의 점령지 여자 획득설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옛그림을 보면 기녀들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온다. 이와 관련, 조선시대는 미인의 조건으로 이른바 3白, 3黑, 3紅을 얘기했다. 3白은 살결, 치아, 손이 흰 것, 3黑은 눈동자, 눈썹, 머리카락이 까만 것, 3紅은 입술, 볼, 손톱이 붉은 것을 말한다. 다만 얼굴은 지금의 계란형보다는, 신윤복(申潤福'1758 ~?)의 그림 '미인도' 같이, 살이 약간 통통하게 오른 모습을 좀더 미인으로 쳤다. 조선시대 기녀나 기생들에게는 '해어화'(解語花)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직역하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에게
우리나라 이미용의 역사에 있어 단발령은 주요한 변곡점이 된다. 1895년 12월 30일 고종은 칙령을 내려 전국민의 단발을 명령했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 하였다.'- 인용문을 잘 살펴보면 칙령에 앞서 고종이 먼저 단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은 그 이듬해 중국 왕조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건양은 양력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종은 이때도 자신이 솔선수범해 단발을 했음을 강조한다. "짐이 이번에 정삭을 고치고 연호를 세운 것은 500년마다 크게 변하는 시운(時運)에 대응하여 짐이 국가를 중흥(中興)하는 큰 위업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며, 복색을 바꾸고 머리를 깎는 것은 국인(國人)의 이목(耳目)을 일신시켜 옛 것을 버리고(…) 아! 나의 어린 자식들인 너희 백성들이여!"- 이와 관련, 당시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리고,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현장에 나가 단발을 직접 지도감독하고 독려했
오송 뷰티 세계 박람회가 성공리에 막을 내렸으나 '미처 다하지 못한 메이컵 이야기'가 남아 있다. 전회에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까지의 메이컵사를 설명한 바 있다. 1930년대는 물자라 귀했던 시절이라 가정을 방문해 '분매' 형식의 판매를 했다. 분매(分賣)는 한 부분씩 나눠파는 것을 말한다. 지금도 어떤 아이스크림은 나눠서 판매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 화장품도 그렇게 덜어서 팔았던 적이 있다. 파는 측은 용기를 아껴서 좋고 소비자는 저렴한 값에 '구리무'를 사서 좋았다. 이때 유행한 것이 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동동구리무'로, 이 역시 크림을 큰 통에 넣고 다니면서 덜어서 팔았다. 6.25 이후인 1950년대는 라디오시대로 TV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은 'AFKN'이라는 주한미군 tv를 통해 서구여성의 화장미를 엿볼 수 있었다. 'American Forces Korea Network'(주한미군방송)의 약자인 'AFKN'은 공중파 방송만 있던 시절에는 '2번' 채널을 통해 볼 수 있었으나 화질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영어공부에 관심이 있던 학생들은 번쩍이는 화면을 보면서 청운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1950년에는 '여원'이라는 여성잡지가…
성큼 다가온 여름,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회원들은 경북 예천 회룡포를 찾아 무더위로 지친 몸과 마음에 잠시나마 치유의 시간을 가졌다. 지난 25일 오전 8시 클린마운틴 회원 40여명은 버스에 올라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회룡포를 향해 괴산, 문경을 거쳐 2시간여를 달려왔다. 회룡포는 낙동강으로 합류되는 물길인 내성천이 마을을 휘돌아 만든 한반도 최고의 물돌이동으로 드라마 '가을동화'와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오전 10시30분께 간단한 준비운동을 마친 탐방단은 회룡 마을에서 출발해 장안사, 회룡대, 원산성 등을 거쳐 다시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10㎞ 코스로 향했다. 회룡포 둘레길은 코스 중간 중간 마을로 들어서는 길이 많아 자신의 체력과 취향에 맞춰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산행을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하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김웅식 대장의 지도에 탐방단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녹음이 우거진 숲에서 자연과 교감을 나눴다. 산행코스에는 회룡대, 용포대와 같은 전망대가 곳곳에 있어 물길이 만들어 놓은 회룡포의 모습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 가파른 언덕을 넘어 전망대에 도착한 탐방단은 뜨거운 볕
조선시대에도 오늘날 비누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석감'과 '조두'라는 세정제를 사용했다. '석감'(石齒+僉)은 명아주를 태운 재에서 추출한 잿물에 밀가루 등을 섞어 만들었다. 그러나 석감은 세안이 아닌 세탁용으로, 옷의 때를 뺄 때 끓는 물에 풀어서 사용했다. 이에 비해 조두는 인체에 사용했던 세정제의 하나로 팥을 미숫가루처럼 곱게 가루를 내 세수할 때 문질렀다. 조두를 만들 형편이 못되는 집에서는 콩깍지 삶은 물, 창포 우린 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연산군일기에는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복세암(福世菴) 중들이 세수하는 조두를 해사(該司)에서 진배(進排)하는데, (…) 중들이 세수하는 것이 국가에 무슨 관계가 있어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조선은 유교가 국시였던 국가였기 때문에 스님들이 세수하는 것까지 경멸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과 같은 비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18세기초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2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1630~1692)었다. 그러나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통된 것은 개화기 때였다. 특히 당시에는 비누가 매우 비싸 쌀 한말이 80전인데 비해 비누 1개 값은 1원이었다. 때문에 개화기 무렵의 비누는 부유
7.80년대만 해도 외판원들이 가가호호를 방문해 화장품을 판 적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직업이 있었다. '매분구'(賣粉女+區'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외출이 오늘날처럼 자유스럽지 못했으므로 일상 용품을 구매하기 위해 외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방문 판매원인 매분구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화장품을 판매했다. 이와 관련, 대부분의 사료들이 숙종대에 매분구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매분구 이야기는 성종대에 처음 등장한다, 다음은 사헌부 대사헌 이칙이 아뢰는 말이다. '그 이른바 망오지란 분(粉)을 팔며 다니는 계집으로서, 남의 재물을 받아서 조사에게 뇌물을 행하는 것으로 업을 삼는 자입니다.'- 인용문의 내용으로 봐 망오지는 분을 파는 여자 신분으로 당시 고위관료에게 뇌물로 어떤 청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상대는 권중린이라는 인물이다. '이제 망오지(亡吾之)의 뇌물을 행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또 들으니 그녀가 늘 권중린의 집에 드나든다 합니다. 권중린이 간원의 장(長)이 되어서 뇌물을 행하는 계집으로 하여금 그 집에 드나들게 하고, 또 그 말을 들어서 청탁을 하였으니, 권중린을 국문하기에 청합니다."- 조선시대에
전회에 마한시대 우리고장 사람들의 미의식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 뒤를 이은 백제 사람들의 화장문화에 대한 얘기는 중국 사서인 '위서(魏書)'에 쓰여 있다. "분은 바르되 연지를 바르지 않았으며 머리는 변발을 하여 뒤로 늘여 뜨렸다." 이것으로 봐 백제의 여자들은 짙은 화장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연지를 찍은 여자가 그려져 있는 고구려 벽화와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물론 고려시대 여성들도 화장을 했다. 그 모습을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서긍(徐兢)'이라는 인물이 적었다. 그는 고려에 한 달 동안 머문 기억을 바탕으로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썼다. "고려 부인들은 향유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않고 눈썹은 긴데 검은 비단의 몽수를 쓰며 이 비단은 3폭에 길이 8척이나 되며,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을 땅에 끌리게 한다." 고려시대에는 면약(面藥)이라는 화장품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피부에 바르는 크림의 일종으로, 역시 고려도경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면약호는 오직 정사ㆍ부사ㆍ도할관ㆍ제할관의 자리에만 은제(銀製)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동으로 만들었다. 둥근 배에…
얼굴 화장에 대한 사료는 영정 등 그림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고장에 전통시대의 여성얼굴이 초상화로 남아 있다. 모산본 하기는 하지만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 문효영당에 하연(河演·1376~1453) 부부의 초상화가 현존하고 있다. 고려 우왕과 단종 연간을 산 하연은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과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는 등 조선 전기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또 세종임금 때 이조를 맡아 공세법(貢稅法), 즉 연분9등법과 전분6등법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 간 문안에 개인 용무의 방문객인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는 등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 지기도 했다. 초상화에서 성산이씨 하연부인은 옅은 화장기가 있는 얼굴에 눈썹을 그렸고 입술에는 연지를 칠했다. 지체 높은 귀부인답게 표정은 근엄하고 옷감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화장문화가 급변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다. 이때는 이른바 신식문물이 많이 들어오는 시기이기 때문에 곡절있는 사연이 많다. 우리고장 충주
오송 뷰티 세계박람회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뷰티'가 의미하는 '화장'은 이른바 수입된 표현으로, 개화기 때 들어온 일본식 한자다. 조선시대에는 '화장'이라는 단어보다 '丹粧(단장)'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다. '분단장', '칠보단장' 등이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조선전기의 실록은 전국의 미색 처녀를 선발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백성(百姓) 각호(各戶)에 만일 자색(姿色)이 있거든 일체 모두 채택(採擇)하여 정결(精潔)하게 빗질하고 단장(丹粧)시켜고, (…) 만일 여자를 숨기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거나…'- 조선시대에는 이 단장을 담장(淡粧), 농장(濃粧), 염장(艶粧), 응장(凝粧), 야용(冶容)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담장'은 피부를 깨긋하게 다듬는 정도를, 그리고 '농장'은 색체 화장이 조금 들어가는 경우를 말한다. 이밖에 '염장'은 요염함이 드러나도록 화장을 한 것, '응장'은 혼례식 때 신부의 화장을 말한다. 지금도 신부의 화려한 화장과 치장을 '응장성식(凝粧盛飾)'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밖에 '야용'은 억지로 아름답게 분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야하다'는 표현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화장을 하려면 화장대가 필요하다. 조선시대에는 이
전회에 불비상에 등장하는 아미타불을 언급한 바 있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파하는 부처를 말한다. 사찰 전각에 극락전, 극락보전, 무량수전, 아미타전 등의 이름이 붙어 있으면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불가에서는 선업(善業)을 쌓으면 그 선과(善果)의 결과로 연꽃을 통하여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의 극락세계는 삼악도(三惡道)의 불행과 네것과 내것이 없고 그리고 수명이 '백천억 나유타의 겁으로도 셀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삼악도는 살아서 지은 죄과로 죽은 뒤에 간다는 지옥도(地獄道)와 축생도(畜生道) 그리고 아귀도(餓鬼道)를, 1나유타는 1천억의 시간을 의미하고 있다.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이 전시중인 8개의 불비상은 백제가 망한 후 지금의 세종특별시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점이 연기파 불비상의 최고 주목거리가 되고 있다.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곳의 하나가 '주류성'(周留城)이다.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운주산성을 주류성으로 보고 있다. 실제 연기 사람들은 운주산 정상에 '백제의 얼 상징탑'을 세우고 매년 백제인의 혼령을 위로하는 고산제를 지내
국립청주박물관이 '돌에 염원을 새기다'를 주제로 한 '백제 불비상' 특별전을 갖고 있다. 이름이 다소 독특한 불비상은 한자로는 '佛碑像'이라고 쓴다. 말 그대로 비석 모양의 석부재 전후좌우 4개 면에 부처상을 조각했다는 뜻이다. 불비상은 조각이 미려할 뿐만 아니라 명문, 즉 글자가 새겨져 사료적 가치가 더욱 높다. 그런 불비상은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불비상은 언제, 어떤 사연이 계기로 발견됐을까. 지난 2011년에 작고한 황수영 박사는 생전에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의 최고 권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지난 1960년 자신이 가르치던 동국대학 제자들에게 "아무거나 좋으니까 탁본을 떠오라"는 학기말 숙제를 낸다. 그러자 당시 충남 연기가 고향이던 이재옥이라는 학생이 전의면 비암사의 불교조각 작품을 탁본을 제출했다. 사료적 가치가 엄청난 것을 직감한 황 교수는 곧바로 비암사로 내려와 불비상 조각품 2점을 더 발견하게 된다. 국보 제 106호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이런 사연 끝에 발견됐다. 현재 국립청주박물관 특별전에는 앞서 언급한 3점 외에 연기지역 또 다른 사찰인 연화사와 서광암에서 발견된 4개의 불비상도…
조카 단종(본명 李弘暐)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는 얼마 안가 후환을 없애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작업에는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宋玹壽·?~1457)도 포함돼 있었다. 단종은 14살 때 한 살 연상인 송현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녀가 바로 정순(定順)왕후 송씨다. 수양대군과 송현수는 일찍부터 친한 사이였다. 이 때문인지 송현수는 바로 처형되지는 않는다. 일부 대신들이 "송현수를 빨리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하나 세조는 처음에는 이를 물리친다. '"권완과 송현수는 모두 율(律)이 능지 처사하고 재산을 적몰하는 데 해당하며, 연좌된 사람들도 모두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니, 명하여 권완은 아뢴 바에 의거하고, 송현수는 다시 추국하게 하였다.'- 추국 결과, 송현수는 장(杖) 일백에 영원히 원방의 관노(官奴)에 속하게 되고, 처자 역시 관노비에 충당되게 됐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정창손(鄭昌孫) 등의 주장으로 교사(絞死)되고 말았다. 이때 송현수만 희생당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인용문에 권완(權完 ·?~1457)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송현수와 가깝다는 이유로 먼저 능지처참당을 당하고 전재산이 몰수됐다. 또 연좌율이 적용되어 전가족이 화
조선 전기를 산 인물로 김한로(金漢老·1367~?)가 있다. 그는 태종과 과거합격 동기생인 동방(同榜)이었다. 이것을 믿었기 때문인지 그의 행동은 항상 좌충우돌이었다. 그는 태상왕(이성계)이 중국사신을 위해 주최한 궁궐 잔치에 지각할 것처럼 보이자 역리(驛吏)의 말을 빼앗아 탓다가 파직을 당했다. '판봉상시사 김한로가 파직되었다. 한로는 이때에 의순고 별좌로 있었는데, 태상왕이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사람을 시켜 길에서 역리의 말을 빼앗아 잡으려고 하니…'- 조선 최고의 난봉꾼 중의 한 명은 아무래도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일 것이다. 그의 여러 기행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이른바 기첩 '어리'의 사건으로, 그는 남자가 있던 기첩 어리를 궁궐로 몰래 데려오고 급기야 아기까지 갖게 했다. 이후 성밖에서 아기를 낳게 하고 다시 궁궐로 몰래 들여와 살다 아버지 태종(이방원)에게 발각돼 결국 세자 자리에서 폐위됐다. 이 부분은 좀더 살펴볼 대목이 있다. 일국의 세자는 신분이 노출 때문에 기생이라는 천민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이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때 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도움을
전회에 김태희 등 내국인이 주축이 된 '청주 청년회'가 1920년 6월 19일 '앵좌(櫻座)극장'에서 출범식을 가졌다고 밝힌 바 있다. 1920년대면 말 그대로 '문명의 열차'가 막 고동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다. 그런 문명의 여명기에 청주에 여가문화의 일종인 극장 건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현상이다. 그러나 '앵좌극장'이 청주의 제 1호는 아니다.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峰)가 1923년에 발간한 '청주연혁지'를 보면 앵좌극장 직전에 '덕영좌'(德永座)라는 극장이 존재했다. 청주연혁지는 신축 동기부터 밝히고 있다. '청주에 일본인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서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는데 견디기 어려웠었다. 이곳에는 하등이 오락설비가 없는 것은 배속의 기생충도 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德永座라는 극장이 생기게 되어 오래된 일본취미의 흥행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극장 덕영좌는 그 시설 정도가 형편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오꾸마 쇼지는 '설비는 처음부터 강능하지도 않았었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덕영좌는 덕영증병위(德永增兵衛) 개인이 경영하는 이름뿐인 극장이었지만 극장이라고 할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본 관계는 시대의 추이에…
금년은 개화기 때 저온현상이 찾아오면서 청주 무심천 벚꽃이 비교적 오랫동안 만개한 상태를 유지했다. 본보는 4월 8일자 기사에서 무심천 벚꽃의 근현대사를 다룬 적이 있다. '1914년(대정3) 3월에는 청주에서 생겨난 청년회가 기념으로 벚나무를 식재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집집마다 권장하여 많게는 10주, 적게는 2·3주씩 하여 남으로는 무심천 제방일대에 벚꽃을 식재….' 그러나 당시에는 지면 관계상 청주 연혁지 내용을 모두 소개하지 못했다. 나머지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로는 성서정(城西停)의 제방, 동으로는 성동정(城東停)의 성벽 흔적을 따라 식재하였다. 회원들은 상호 감시하여 한국인 어린아이들이 나뭇가지를 꺾지 못하도록 경계하여 그 공로가 헛되지 않아 벚나무는 잘 자라나서 몇 년이 되지 않아 개화를 보게 되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성서정'과 '성동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성서정은 개명 전에는 청주군 북주내면 서리(西里)와 원리(院里) 지역으로, 지금의 서문동에 해당한다. 성동정은 개명 전에는 청주군 동주내면으로, 지금의 문화동 일대가 된다. 나머지 내용을 계속 소개하면 '만약 그것이 한 꽃이 피는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 긴 제방에 많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구입석리에서는 작년부터 시금까지 사입여호 인구 1백60여명이 철가 도주하였다. 대개는 도 기본림을 화전으로 경작하여 오다가 연년히 당국에서 화전을 엄금하고 화전지대 식수를 함으로 생도들 잃은 그들이 살아갈 도리가 없음으로 할 수 없이 그와 같이 정든 고향을 등진 것이다.'- 비슷한 시기로 일제 강점기인 1935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등장한다. '들에서 살어보랴고 애를 써도 살갈이 막연하기 때문에 금칙을 범하여서까지라도 살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산에 들어가서 미림을 소실하야 연맥, 마령서, 속등 등의 잡곡을 가라먹는 무리가 있으니 그것이 화전민이다.' 이상에서 보듯 우리나라 화전의 역사는 질곡 그 자체였다. 이는 그 만큼 산림이 녹화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가 벌거숭이산을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었다. 당시 '선조림 후벌채', '1벌2식', '추풍령식 벌채' 등의 구호가 유행했다. '선조림 후벌채'는 먼저 나무를 심고 그후에 벌목을 한다는 것을, '1벌2식'은 나무 1그루를 베면 반드시 2그루를 심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밖에 '추풍령식 벌채'는 산에서 벌
지구 온난화로 식목 적기를 더 앞당겨야 한다는 얘기가 자주 나오고 있다. 의외로 조선시대에는 일년 중 양력 2월 하순~3월을 식목을 적기로 봤다. 조선후기 실학자로 '산림경제'를 지는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연원역 찰방과 단양군수를 역임했다. 농서인 산림경제는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식목의 적기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식목은 정월(正月)이 상시(上時)이고, 2월이 중시(中時)며, 3월이 하시(下時)다'- 쉽게 설명하면, '식목은 음력 정월이 가장 좋은 때이고, 2월이 그 다음이며, 3월이 그 중 처지는 때가 된다' 정도가 된다. 물론 이때의 정월은 음력 한 달을 얘기하는 것으로, 지금의 양력으로 치면 3월 초순 정도가 될 수 있다. 그는 또 나무를 심은 후의 관리 요령에 대해서도 지금과 부합되는 내용을 서술했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나무의 뿌리는 편안하게 뻗기를 원하고, 배토(培土)는 평평하기를 바라며, 토양(土壤)은 원래 서 있던 곳과 같기를 원하고, 구덩이는 단단히 메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모종은 어린 자식 다루듯 하되, 놓아두면 천성대로 저절로 자란다'라고
'이는 삼가 경모궁(景慕宮)에 나무를 심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궁 안 동산으로부터 주변 사방 산들에까지 모두 소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녹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버드나무 등을 심었는데 궁관(宮官)에게 명하여 심은 나무의 총 숫자와 살아 있고 죽은 나무의 실제 수효를 매 계절 초하루에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여 아침저녁으로 살펴보는 자료로 삼아 어버이를 공경하는 소자의 뜻을 붙였다.'- 정조가 경모궁에 나무를 친히 심고 이의 소감을 적어놓은 글이다. 홍재전서는 정조의 시문집으로, 그 분량이 184권 100책일 정도로 방대하다. 이처럼 조선시대도 나무심기 행사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임금들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사찰에서 기념식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말년을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보낼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그도 손수 나무를 심으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도 그런 성향을 지녔다. 하나의 사료 안에서 두 사례를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석왕사(釋王寺)에 있는 어필각(御筆閣)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직접 심은 소나무를 봉심하고, 각 불각(佛閣)과 양어장, 온천 약수 등
지금은 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창업(創業)이라고 한다. 그러나 창업은 본래는 건국(建國)을 의미했다. 때문에 나라를 맨 처음 세운 임금을 '창업지주'(創業之主)로 표현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이른바 '즉위 교서'라는 것을 발표했다. 지금으로 치면 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마스터 플랜 정도가 된다. 이성계는 오랫동안 야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정치에는 둔감한 편이었다. 때문에 실록을 보면 정도전이 '즉위 교서'를 써서 태조에게 발표하도록 한 것으로 돼 있다. 즉위 교서는 17개 항목으로 되어 있고, 향교와 관련된 내용은 이중 세번째 기술돼 있다. 이는 조선의 창업 주역들이 교육을 '백년지대계'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무 두 과거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과 지방에는 향교에 생도를 더 두고 강학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니 문생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좌주'는 과거시험 때 시험감독관을 일컫는 표현이다. 교육의 중요성이 즉
봄이 오는 길목, 충북일보 클린마운틴아카데미 58차 여행지는 '아름다운 섬'이자 '눈물의 섬'으로 불리는 '강화도'다. 30일 클린마운틴아카데미 회원 40여명은 강화나들길 제2코스 호국돈대길 탐방을 위해 청주에서 버스로 3시간여를 달려왔다. 호국돈대길은 갑곶돈대에서 초지진까지 17㎞ 이르며 보통걸음으로 6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돈대'란 평지보다 조금 높게 올라와 있는 평평한 땅으로 강화도에서는 적들의 침입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위시설로 통한다. 강화도에는 숙종 5년(1679) 방위를 위해 돈대가 설치돼 그 수가 50여개에 이른다 하니 패권이 치열했던 강화도의 역사적 상흔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출발 전 김웅식 대장의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자 회원들은 호국돈대길의 관문인 갑곶돈대보다 7.4㎞ 떨어진 오두돈대부터 첫발을 디뎠다. 자라의 머리와 같은 지형에 설치돼 있다는 의미를 가진 오두돈대부터 광성보~용두돈대~덕진진~초지진까지 9.4㎞의 여행길이 시작됐다. 오두돈대에 올라서니 눈앞에 좌우로 흐르는 염하(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 백년 전 조선의 병사는 이곳에 서서 적들의 동태를 살폈을 것이다. 오두돈대를 지나 닿은 곳은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과 미군이
전회에 '대뢰'(大牢)를 언급했다. 대뢰는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소는 보통의 소(牛)가 아닌, 집에서 기르던 소(牢)를 의미했다. 그래서 '牢' 자는 집을 의미하는 '갓머리변'에 '牛' 자의 결합으로 돼 있다. 청주향교에서 대뢰를 둘러싸고 상소문 올리는, 어찌보면 해프닝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세조가 대뢰를 잡아 제를 올린 이후, 청주향교는 이를 그곳만의 전통제사로 삼은 것 같다. 그러나 광해군대 이르러 농우(農牛)가 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잡는 제사를 제한하게 된다. 그러자 당시 '우방'이라는 청주향교 유생이 이런 상소문을 올린다. '우리 세조 충장대왕께서 본 고을에 어가를 머무시어 몸소 성인의 묘당에 제사를 하심에 대뢰를 쓰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로는 법제를 이루었으니 해마다 희생에 쓸 소를 사서 먹이어 봄 가을에 배향을 지냈는데 호조가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희생소를 줄였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옛예법이 바뀌어 버리니 우리세조께서 제수우를 사용하여 남기신 뜻도 오늘부터 없어질 것이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어찌 소를 양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세조대왕의…
청주향교의 제기(祭器) 46점이 무더기로 도난당한 사실이 얼마전 본보를 통해 알려졌다. 전통시대 전국의 향교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성현·선현에 대한 제사이고, 또 하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향교는 그 고을에서 풍수적으로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청주향교도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서원'(書院)도 비슷한 기능을 지녀 혼란을 주고 있으나 향교는 국립 교육기관, 서원은 사립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에 위치한 청주향교는 이른바 5성, 송조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를,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이밖에 우리나라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고려사는 기록했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본보는 청주읍성 성돌이 탑동 양관을 짓는데 사용됐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관리부재 상태의 청주옥의 석부재도 양관 건축에 사용됐다. '감방(조선시대 전통옥 지칭)은 절반이 거의 무너져가는 온돌로 되어 있어 (…) 이러한 이유로 유치인이나 수인이 집을 부수고 도망이 계속 일어나 도망치면 잡히고 잡혀서는 다시 도망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이와는 별개로 도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11년 청주읍성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丙辰四月日畢役' 명문이 새겨진 성돌을 수습한 바 있다. 직역하면 '병진년 4월에 공사를 마쳤다'는 뜻이다. 기년상 조선후기 병진년에 해당하는 해는 1736년(영조 12)과 1796년(정조 20)이다. 이와 관련 지역 한 사학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청주읍성이 일부 허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개·보수가 이뤄져 1736년에 공사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이인좌가 청주읍성을 접수할 때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고는 적지 않았다. 무기를 숨겨 상여에 숨겨 몰래 들어왔고, 또 내응하는 자가 많았다고 적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 등이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 이인좌와 더불
청주시와 민간단체 등이 합심이 돼 청주읍성 성돌을 찾는 노력이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까지 재작년부터 발굴조사를 하면서 옛 남궁병원에서 40개, 서문자리에서 20개, 남주동 개인주택 디딤돌 60여개 등 총 120여여개를 확보내지 확인했다. 본보의 보도에 의해 청주 탑동의 6개 양관 중 4개 건물에서 주춧돌, 기단석 등으로 대량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으나 양관 자체가 도지정 문화재에서 회수는 사실상 어렵다. 청주성과 관련된 표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 685년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5년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5년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으로 삼았다.' 역사상 청주시장 제 1호는 '원태'인 셈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문왕 9년조에는 '서원경에 성을 쌓았다'라는 표현이 문헌적으로 분명하게 등장한다. 이때가 서기 689년이다. '9년 가을 윤 9월에 왕이 장산성에 거둥하였다. 서원경(西原京)에 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서원경 성벽을 쌓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도 자세히 등장한다. 삼국사기 권47 '열기'라는 인물의 열전은 이렇게 쓰여 있다. '구근(仇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