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행궁이 국가 숙박시설인 '椒井院'(초정원) 인근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궁의 정확한 위치와 관련해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세종대왕의 행궁이 좁은 골짜기가 아닌 '넓은 골짜기의 교통로' 주변에 위치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회에 "이 곳은 동학(洞壑)이 널찍하고 행궁 터가 안온하며 군사들의 환위(環衛)와 초소(樵蘇, 나무를 베고 풀을 깎는 것에도 모두 편리하옵니다"라는 문장을 소개한 바 있다. 당시 도승지 이승손(李承孫, 1394∼1463)이 아뢰는 말이었다. 그 뒤에는 "더군다나 초수의 나오는 근원이 멀되 길게 흐르니 이러한 곳은 얻기 쉽지 않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번역)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 이 문장의 원문은 '況椒水之出 源遠而流長 如此之地 未易得也'로 돼 있다. 해석한 문장 중 '멀되 길게 흐르니'(源遠而流長)는 △행궁이 원탕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그런데 그곳까지 '길게 흐른다'는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 경우 세종대왕 행궁은 원탕 주변이 아닌, 그곳서 먼 곳에 위치한 것이 된다. '源遠而流長'이라는 문장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중 앞 표현 '源遠'은 '根深'과 짝을 이뤄 고문헌에 간간히 등장하는 표현이
1444년 2월 28일, 세종대왕이 한양 도성을 떠나 닷새만에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 행궁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왕은 이념적으로 이 땅과 백성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머무는 곳은 모두 궁궐로 불렸다. 그 종류는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장전(帳殿) 등으로 표현됐다. 정궁과 이궁은 격이 다르지만 모두 도성 안에 위치했다. 이에 비해 '행궁'은 도성 밖에 지은 임시 궁궐로, 온천이나 왕릉 주변에 많았다. '장전'은 임금이 휴식 등을 위해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임시 천막에 해당한다. 세조가 진천을 지날 때 '장전'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종대왕의 초수리 행궁터가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쟁이 있어 왔다. 자주 거론됐던 곳은 지금의 '내수읍 초정리 원탕 일대'와 '북이면 선암리 주왕이' 마을 등 두 곳이다. '주왕이'가 원탕에서 멀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행궁지로 거론되는 것은 지명 때문이다. '주왕'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왕(주)이 왕래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간행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24일 62회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회원 40여명이 탄 버스 안에서 들리는 정호승 시인의 강변역에서가 곽영희(56 재능시낭송협회 청주지회원)씨의 목소리를 타고 순간 버스 안의 고요함을 이끌어 낸다. 함우석 충북일보 주필 겸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교장의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자연과 계곡 속에 모든 것을 풍덩 내려 놓읍시다"란 말에 와 하는 함성을 외친다.김웅식 대장의 계곡 트레킹에 대한 주의사항과 "자연의 순리를 배우는 클린마운틴에서 오늘은 인간의 약함과 또 다른 깨달음, 계곡물에 몸을 맡기는 진리를 깨닫기 바랍니다"라는 말이 끝나자 작은 웅성거림이 들린다.이윽고 4시간을 달린 버스가 방동 약수터 주차장에 우릴 내려놓는다.간단하게 삼삼오오모여 점심을 먹고 드디어 말로만 듣던 방태산 계곡 트래킹이 시작됐다.산길을 따라 오르막길에 들어서 슬슬 숨이 거칠어지자 어디선가 속세의 어려움과 풍진을 내려놓으라는 듯 스님의 염불소리가 숨
가마는 집모양 처럼 생겼으면서 누군가를 태울 수 있는 기구를 말한다. 고구려 안악고분의 '주인도'(主人圖)와 '부인도'(婦人圖)에 가마가 등장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가마를 이용했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 가마의 한 종류인 채여(采輿)를 설명하는 내용이 장문으로 수록돼 있다. '위에는 나는 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 개의 대[竿]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공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인용문의 '인갈'은 관인이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임금이 탈 수 있는 가마로는 연(輦), 여(輿), 가교(駕轎) 등 3종류가 있었다. 왕실에서는 '덩'이라는 가마도 사용했으나 이는 공주나 옹주가 타던 것이었다. 1444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지금의 초정)를 찾았을 때 어느 가마를 이용했는가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은 약간의 '예습'이 필요하다. '연'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먼길을 거둥할
고려시대 우리고장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현종, 공민왕 등이다. 태조는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청주를 찾았다. 반면 현종과 공민왕은 거란과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안동으로 피난갔다가 귀로에 청주를 들렸다. 고려 목종과 충렬왕도 각각 강조의 난과 순행 중에 우리고장을 찾은 바 있으나 이때는 청주가 아닌 충주였다. 특히 충렬왕은 순행 중 용안역(지금의 충주 신니면)을 찾았다. 조선전기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이다. 이들은 계룡산, 초수리(초정약수), 속리산 복천암 등을 가는 도중에 각각 청주목을 방문했다. 이와 관련, 세 임금의 어가행렬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가행렬 자체를 최대한 간소화하려 했다. 지방관리가 도계(道界)까지 마중 나오는 것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충청도도사(都事) 한질이 와서 문안을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초수 행차에는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는데, 충청도 도사가 지경을 넘어 왔으므로 번거로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뒤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다'(務從簡便)
경기도 죽산-진천-청주에 이르는 길(지금의 17번 국도)은 조선시대에는 10대 대로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남대로와 더불어 일본 사신들이 자주 왕래했다. 부산에 도착한 일본사신은 영남대로인 문경-수안보-달천을 거쳐 한양 도성으로 들어갔다. 반면 남해안 내이포(乃而浦)로 도착한 사신은 창원-성주-옥천-청주-죽산-용인을 경유한 뒤 한강을 건넜다. 내이포는 지금의 진해를 말한다. '내이포에서 오는 자는 창원·성주·옥천·청주·진천·죽산·용인·한강을 경유하여 입경(入京)하게 하고…'(由乃而浦來者 經昌原 星州 沃川 淸州 鎭川 竹山 龍仁 漢江入京).- 세종대왕이 탄 어가는 3개 대로 중 세번째 대로를 이용, 죽산을 거쳐 1444년 3월 1일 진천 북평천 가에 도착했다. '거가가 진천현 북평천 가에 머물렀다(駕次于鎭川縣北平川邊).- 인용문에 등장한 북평천은 고유지명은 아닌 진천 읍치의 북쪽 하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워낙 많은 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들판에서 휴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 어가가 진천에서 초수리(지금의 초정)까지 가는 데 있어, 어느 길을 이용했는지 실록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지형과 당시 도로현황 등을 감안할…
조선시대 지방의 도로는 형식상 공로(公路)와 사로(私路)로 구분됐다. 공로는 관료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니는 길을 말한다. 가령 충청도관찰사가 청주에서 충주를 순력하려면 청주-청안-괴산-음성-충주 등의 공로를 택했다. 반면 사로는 장돌뱅이들이 오갔던 길로, 상로(商露) 혹은 간로(間路·샛길)라고 불렀다. 국가의 동맥으로 오늘날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길은 '대로'(大路)라고 표현했다. 시대별로 기준은 다소 달라, 6대로, 9대로 혹은 10대로 등으로 분류됐다. 신경준(申景濬)은 '도로고'(1770년·영조 46)에서 전국의 대로를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로 가는 길은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제4로, 제주 제5로, 강화 제6로 등으로 각각 명명했다. 같은 해 홍봉한(洪鳳漢)은 왕명을 받아 저술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서 전국의 대로를 국왕이 있는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 제 1로, 경흥 제 2로, 평해 제 3로, 동래 제 4로, 상주→통영 제5로, 삼례→통영, 제 6로, 해남→제주 제7로, 갈원→보령 제8로, 강화도 제 9로 등으로 분류했다. 반면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에서 한양∼의주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세종은 재위내내 여러 질환을 앓았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한 탓인지 안질을 심하게 앓았다. 때문에 세종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부활해 정사의 상당부분을 3정승이 처리토록 했다. '의정부서사제'는 3정승이 국정을 논하고 또 왕의 재가를 받아 정치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세종은 첨사(詹事)제도라는 것도 신설해 세자(후에 문종)의 정사 결재권을 크게 확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회를 할 때 세자에게 '남면수조'(南面受朝)하도록 했다. 남면수조는 말 그대로 남쪽을 바라보면서 조회를 받는다는 뜻으로, 사실상 국왕에 준하는 대우였다. 모두가 세종의 건강 때문에 비롯된 것들이었다. 세종 재위26년(1444) 청주에서 '호초맛 나는 물이 있다'는 첫 보고가 올라왔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에 물 맛이 호초(胡椒)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椒水)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목천현과 전의현에도 또한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 하니.'- 그 다음은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윤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을 세우게 하고, 이 물을 얻어 가지고 와서 아뢴 자에게 목면 10필을 하사하였다'(〃)라는 문장이 이
원나라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속국 고려의 임금을 자국영토 후미진 곳으로 귀양보내기도 했다. 고려 27대 임금인 충숙왕도 그런 신세가 됐다. 그는 원나라 조정의 미움을 사 수도 연경에서 1만5천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를 가야했다. 익재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世事는 시끄러워 귀담을 수 없는데 / 다리 위에 말 멈추고 할 말을 잊었노라 / 언제나 태양은 내 마음 밝힐지 / 푸른 산 바라보며 눈물지누나 / 내 언제 믿음을 저버렸던가 / 이국에서 헤매어도 은혜는 아네 / 내 몸 날개 없어 날아가지 못하고 / 슬프다 나 홀로 애만 태우네.'- 이처럼 익재는 고위 관료로서 뿐만 아니라 명문장을 남긴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원작격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나머지 8점의 익재영정을 그린 사람과 시기는 각각 다르다. 보은 탄부면 하장리 장산영당에 보관돼 있던 익재 영정은 한번 도난을 당한 후 현재는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보관돼 있다. 자산영당 익재영정은 그의 직계후손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사균(李思鈞·1471∼1536)이 화공에 의뢰해 제작했다. 연산군 10년(1504) 이른바 폐비윤씨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연산군은 이 시기기에 이르러 생모…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시문에 두루 능해 대가풍(大家風)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9개의 초상화를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른바 그의 호를 딴 '익재영정'들이다.이처럼 이제현의 초상화가 많은 것은 경주이씨 후손들이 그의 인물됨을 그리기 위해 그림을 많이 이모(移模)했기 때문이다. '이모'는 원작을 본떠서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9점의 이제현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본(국보 제 110호), 가산사 소장본(전남 문화재자료 164호), 구곡사 소장본(전남 유형문화재 189호), 수락영당 소장본(청원군 미원면 가양리·비지정), 구강서원 소장본(경북 문화재 제 90호), 장산영당 소장본(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72호), 용암영당본(충남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도동영당본(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기리), 도론영당본(전남 진도군 고군면 도섬리) 등이 있다.원작으로 평가받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8점의 작품중 우리고장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장산영당에 소장돼 있던 초상화가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현재 경주이씨 장산문중에서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한 이제현 초상화는 가로 96㎝, 세로 165㎝의 크기로 비단바탕에 그렸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강 이름을 구간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당연히 우고장 문화 젖줄의 하나인 금강도 이 범주에 속하고 있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은 금강의 각 나루, 즉 津(진)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상주 중모현 물은 황간ㆍ영동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대개 구역별 강이름은 나루의 이름의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등강은 옥천군 이원면 적등진 앞을 흐르던 강이고, '化仁江'(화인강)은 화인진 앞으로 흐르던 강이었다. 지금의 안내~안남면 수계로 볼 수 있다. '화인'이라는 예쁜 이름은 조선 전기의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등장한다. '대천(大川)은 적등진이 이산현에 있고, 화인진(化仁津)이 군의 동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보은에 이르기 29리, 서쪽으로 회덕에 이르기 13리, 남쪽으로 무주(茂朱)에 이르기 29리, 북쪽으로 청주(淸州)에 이르기 13리이다.' 세종실
사라진 북한 지명 중에 '덕원'(德源)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의 문천시로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잘 모르면 원산 북쪽을 생각하면 된다. 1674년 이른바 2차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趙大妃·자의대비)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남인은 1년(기년복), 송시열은 9개월(대공복)을 주장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 논쟁은 하찮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입장에서 보면 형(소현세자)을 잃은 효종을 장자(長者·맏아들)로 볼 것이냐, 차자(次者·둘째)로 볼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이른바 2차 예송 논쟁으로, 1차와 달리 송시열은 이 논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유배를 간 곳이 서두에 언급한 함경도 덕원이다. 그러나 우암은 이 유배 때 그리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동생 '時燾'(시도)와 時杰(시걸)이 그곳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대체로 을묘년(1675, 숙종1) 1월에 진천(鎭川)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철령(鐵嶺)을 넘어 덕원(德源)에 이르러 함께 있다가, 4월에 성보(誠甫·송시도 지칭)는 일이 있어 집으로 돌아가고 수보(송시걸…
전회 언급한 옥천 이원면 적등진(赤登津)은 교통량이 많은 곳이었다. 당시 경상도 김천과 지레 사람들이 한양을 가려면 반드시 적등강 수변에 위치한 나루를 통과해야 했다. 바로 '적등진'으로, 그 루트는 영동-옥천-보은-청주가 됐다. 적등진은 이 루트 중 영동-옥천 사이에 위치했고 그 옆에는 적등원과 적등루도 존재했다. 적등진 주변은 지금도 풍광이 매우 빼어난 편이다. 이 때문인지 뭇 문객들이 적등루(赤登樓)를 찾아 시를 많이 읊었다. 고려말 사대부 출신인 조준(趙浚·1346∼1405)은 정도전과 함께 조선 창업의 일등공신이다. 특히 그는 경제이론에 밝아 당시 세법의 근간이 되는 과전법을 입안했다. 그도 적등루를 올랐다. '황급한 6월달 3천리 길에, 나루에 사람 없어 혼자서 배에 오르네. 나물 캐고 군사를 내는데 누가 계교를 얻었던가. 적등루 아래의 물이 하늘에 닿았네.'- 서두에 언급한 것과 달리 적등루가 한가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직(李稷·1362~1431)이 지은 시에는 적등루 일대가 대단히 혼잡하게 그려져 있다. '오가는 길손들이 하루에 만명이 넘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배는 한 척뿐. 다시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으니, 갈매기도 한가로이 물 가운
문화가 권역을 이루는 데는 산줄기뿐만 아리나 물줄기도 큰 영향을 미친다. 백두대간은 충청도와 경상도 문화권을 구분하고 있다. 충북은 다시 남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권으로 나눠지고 있다. 이것의 분수령이 되는 산줄기는 이른바 한남금북정맥이다. 전븍 장수 신무산(神舞山·897m)을 본류 발원지로 하고 있는 금강은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전, 연기, 공주, 부여, 논산, 강경 등 10여 개의 지역을 거치며 397㎞를 달린 끝에 서해에 도달한다. 현재 지류는 '하천', 본류가 되는 수계는 '강'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곰나루'(웅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명 '금강'도 그런 과정을 통해 생겨났다. 그러나 전통시대에는 금강은 구간별로 다르게 불렀다. 영동 심천을 통과하는 금강은 지프내(심천), 옥천 이원에서는 적등강(赤登江),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그리고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불렀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수계에 딸린 나루터(津)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대천(大川)은 웅진(熊津)이다. 그 근원이 전라도(全羅道)에서 나와 양산(楊山) 서쪽을 지나 영동현(永同縣)에 들어가고, 이산현(利山縣)에 이르러 적등진
조선시대 내섬시(內贍寺)라는 내직 기구가 있었다. 내섬시는 호조 소속으로 궁중에 공급되는 각종 물품을 관리했다. 세종대 내섬시에 근무하면서 고문헌에 자주 등장했던 인물로 김흔지(金사람인변+完之)가 있다. 세종은 보위에 오른지 20년이 넘으면서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렸다. 이중 안질은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때문에 세종은 1444년에는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봄·가을에 걸쳐 두번이나 찾게 된다. 이때 초정약수와 관련된 일을 전담한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한 김흔지이다.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별장식으로 머무는 곳을 행궁, 또는 이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임금이 행궁으로 향하는 움직임은 '행차'가 아닌 거둥으로 표현했다. 1444년 음력 1월 27일 우리고장 초정약수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물 맛이 호초(胡椒)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椒水)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목천현(木川縣)과 전의현(全義縣)에도 또한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 하니…'- 그리고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 윤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세우게 하고, 이 물을 얻어
전회에 우리고장 진천 문백면 한계마을이 고향인 강백년(姜柏年·1603∼1681)을 설명한 바 있다. 그가 지은 '청춘에 곱던 양자'라는 시조는 주군(임금)에 대한 일편단심을 시로 잘 승화한 작품이라는 평가는 받고 있다. 국문학 전공자들은 그의 시조뿐만 아니라 한시도 크게 주목을 하고 있다. 이중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해동시선에 실려 있는 '산행'(山行)이다. 해동시선의 저자는 조선말기 지식인인 이규용(李圭瑢)다. '십리를 가도 인적이 없고 / 텅 빈 산에 봄새만 우네. / 스님 만나 길을 물어 보았으나 / 스님가자 길이 다시 헷갈리네.' 원문은 '十里無人響 / 山空春鳥啼 / 逢僧問前路 / 僧去路還迷'로 돼 있다. 시골 산길의 조용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 듯이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無人響', '山空' 등의 시어는 적막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이명한(李明漢·1595~1645) 있다. 두 사람은 8살의 나이차가 났으나 필담을 나눴다. 강백년이 8살 적다. 이명한이 고향 강릉으로 돌아가자 강백년은 다음과 같은 시로 마중했다. '풍진 세월에 늙어 품은 계책 어그러졌는데 / 오늘 눈 속에서 그대 돌아감을 부러워하네 / 헤어짐에 봄
조선시대 사간원은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기구로, 그 으뜸은 종3품 당상관인 대사간(大司諫)이다. 당상관은 정3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관리로, 지역하면 정사를 논할 때 堂에 오를 수 있는 품계를 말한다. 그 반대말은 당하관이다. 조선 효종 때의 대사간의 한 명으로 강백년(姜柏年·1603∼1681)이 있다. 그가 바로 전회에 언급한 표암 강세황의 할아버지다. 1648년 이른바 강빈(姜嬪) 신원 사건이 일어났다. 강빈은 소현세자의 빈으로,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7년에 돌아왔다. 그러나 소현세자를 미워한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후원별당에 감금됐다가 끝내 사사됐다. 이 여파로 그녀의 친정어머니마저 처형되고, 세 아들은 제주에 유배된 뒤 그 중 석철·석린 형제도 의혹 속에서 죽고 말았다. 강백년은 대사간 입장에서 강빈의 신원(억울함을 풀어줌)을 간언했다. 말이 간언이지 인조의 최대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강백년은 우리고장 청풍군수로 좌천됐다. 그러나 청풍군수가 종6품인 점을 감안하면 품계가 수직 강하한 셈이다. '황감을 대사간으로, 김식을 헌납으로, 최후윤을 정언으로, 홍우원을 봉교로 삼았다. 상이 특명으로 부제학 이기
"그는 그림을 통해 문인정신을 구현하려 했다. 때문에 그는 평생 속기(俗氣)없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미술 평론가들이 영·정조 시대의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을 평한 글이다. 그는 39살 때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의 부탁을 받고 그린 '도산도'(陶山圖)의 제발(題跋)을 이렇게 적었다. '제발'은 서화 두루마리나 첩책 말미에 기록한 그 감상록을 말한다. '그림은 산수보다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크기 때문이다. (…) 또 직접 보지 못한 지역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억측으로 닮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술 평론가들은 강세황의 이같은 창작 태도를 '와유'(臥遊)와 '사의'(寫意)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됐다고 밝히고 있다. '와유'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이르는 말이다. 반면 '사의'는 사물에 의탁하여 도(道)와 진(眞)에 이르고자 하는 뜻을 의미한다. 강세황 작품에 대한 '한국적 남종문인화' 혹은 '남종문인화의 토착화'라는 표현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강세황의 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낸 강백년(姜柏年)이고, 아버지는 대제학을 지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지난 28일, 제61회 충북일보 클린마운틴이 전북 부안군 변산 마실길에서 열렸다. 총 13개 코스로 구성된 변산 마실길, 클린마운틴 회원 40명은 이날 성천~적벽강~격포해수욕장~격포항으로 이어지는 7㎞의 3코스를 공략했다. 이 코스는 7천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된 적벽강, 채석강 등 아름다운 해안 절경이 최고의 자랑이다. 이 코스를 완주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2시간, 문제는 섭씨 30도가 넘는 푹푹찌는 날씨였다. 클린마운틴아카데미 함우석(충북일보 주필) 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삶은 늘 1등을 추구하는 치열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트래킹은 1등이 아닌 꼴찌를 배우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경쟁이 아닌 내려놓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애초부터 경쟁이 아니었다. 그냥 묵묵히 걸으면서 마음 속의 복잡함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힘들었던 순간, 살림을 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했던 시간 등 모든 것을 비웠다. 땀으로 범벅된 찝찝한 심신도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맡기면 에어컨 못지 않는 시원함이 느껴진다. 숲 속에 들어가면 시원한 그늘이 기쁨을 준다. 코스 중간에 버려진 쓰레기는 노여움을 느끼게 한다. 오
우암의 생가지인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을 지나 영동으로 가는 국도변인 원동리 야산에 이르면 작은 무덤과 비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비석 제원은 높이 86cm, 폭 41cm, 두께 17cm의 화강암이다. 비문에는 '贈 領議政 睡翁宋公(증영의정수옹송공) / 乳母憲菲之墓(유모헌비지묘) / 子姜수文墓在左(자강수문묘재좌) / 崇禎六十一秊 二月立(숭정육십일년이월입)'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해석하면 '영의정으로 증직받은 수용 송공의 유모 헌비의 묘소이다 / 그의 아들 강수문의 묘소는 좌측에 있다 / 숭정 61년 늦은 2월에 세우다' 정도가 된다. 전회에 우암 송시열의 부친이 송갑조(宋甲祚·1574~1628)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선조~인조 연간을 살면서 광해군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수재형 인물이었다. 그러나 과거합격 직후 인목대비를 배알했다는 이유로 유적(儒籍)에서 제적됐다. 그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그는 강골의 겸비한 문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송응기(宋應期)로, 이윤경의 딸인 광주이씨를 아내로 맞았다. 그는 연약한 몸으로 다섯번째 아들인 송갑조를 출산한 후 몇년 지나지 않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같은 환경에서 송
송시열의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1574~1628)라는 인물이다. 그는 선조~인조 연간을 살면서 광해군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수재형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소과의 일종인 생원시는 지금으로 치면 논술, 진사시는 경전해석을 묻는 시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한 직후 송갑조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같이 합격한 동과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목대비를 찾아 혼자 배알, 즉 인사를 했다. 당시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친모이나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서궁에 유폐된 상태였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인목대비를 찾았다는 것은 여간한 강골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즉각 파문이 일어났다. 이영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과거합격 동기생들이 그를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운동에 나섰다. 실록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송갑조(宋甲祚)가 정사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나서 혼자서 서궁에 숙배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흉도들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며 많은 선비들을 협박하였는데, 갑조가 옷자락을 뿌리치고 가버리므로, 흉도들이 그의 성명을 탐문하여 중상할 계획을 쓰자….'- 송갑조는 이같은 분위기에 고분고분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도…
얼마전 형식이 다른 본보의 기사를 통해 조선 세종 때 한양도성을 수축할 당시 충청도 사람도 총 5만6천여명이 동원됐고, 이때 이들이 새긴 각자(刻字) 성돌이 10개 가량 현존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전국적으로는 32만2천400여명이 동원됐다. 조선시대 인구를 감안하면 이같은 규모는 전국 모든 장정들이 총동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경상도에서 가장 많이 동원됐고 충청도는 그 다음인 17%를 차지했다.충청도 각 고을에서 동원된 수축군은 지금의 혜화문-낙산-흥인문 구간을 맡았다. 성돌에 지명을 새긴 것은 사후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더러 등장한다. '선지하기를, "도성을 수축한 후에 혹시 돌 한 개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의 감독관으로 하여금 수보(修補)하게 하고, 모두 논죄할 것이다" 하였다.'- 세종대의 한양도성 수축공사는 농번기가 끝난 겨울철에 이뤄졌다. 그러나 당시 토목공사를 주도한 인물은 세종이 아닌 상왕 태종이었다. '도성 수축 도감에서 계하기를, "성을 쌓는 군사가 도망하는 자는, 처음 범하면 곤장 1백 대를 치게 하고, 두 번 범하면 참형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태상왕이 그대로…
괘서(掛書)는 남을 모함하거나 나라를 비방하는 내용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붙이거나 투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괘서 행위는 대부분 익명으로 행해지면서 선량한 사람을 무고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고 따라서 조선조정은 괘서행위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괘서사건이 전국적으로 42건이나 발생했다. 이런 괘서사건은 순조 이후 특히 많이 일났다. 순조가 11살 나이에 등극하자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이후 성장한 순조가 직접 정치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장인 김조순(金祖순·1765∼1832)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관료들은 절대 부패해졌고,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갖지 못하면서 유랑민이 되는 등 국가 말기적 현상이 나타났다. 전회에 청주읍성 북문에 괘서를 붙인 김치규(金致奎)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본래 청주사람은 아니었다. 김치규는 평안도 중화 출신의 가난한 지식인으로, '충청도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고장 청안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청안 토호였던 이원기(李元基) 집에 기거하며 그의 아들 훈장 노릇을
정감록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했던 예견서를 말한다. 도참, 도교, 풍수지리설적인 사상이 혼합돼 있다. 그러나 정감록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이본(異本)이 존재하고 있다. 이중 원전 정감록으로 일컬어지는 '감결'은 조선의 선조인 한륭공의 두 아들 이심·이연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그 내용은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도읍 몇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 도읍 몇백 년을 논하고 있다.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정감록에 이씨 조선 이후의 왕도로 등장하는 계룡산은 풍수적인 입지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산태극 물태극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물줄기가 태극 모양으로 돌아겨 나가고 있고, 물길 또한 그 모습을 하고 있다. 계령산 암반 곳곳에는 정감록과 관련된 여러 글자가 각인돼 있다. 이중 가장…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에는 '죽정내'라는 다소 독특한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화산 삼거리에서 다소 북쪽으로 올라가면 이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여말선초 문신인 최유경(崔有慶)이 말년에 이곳에 내려와 대나무로 만든 정자를 짓고 만거한 데서 '죽정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정내'라는 지명은 한글이 존재하지 않았던 전통시대에는 '竹亭川'(죽정천)으로 표기돼야 논리적으로 맞는다. 지금은 마을 앞에 초평저수지라는 거대한 담수호가 생겨났지만 과거에는 '川'이 흐른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1872년 진천현지도를 보면 죽정내는 '竹亭川'으로 표기돼 있고, 당시 존재했던 주막이름도 '竹亭店'이다. 고려말의 최유경은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보수파에 속하던 인물이다. 그는 역성혁명이 아닌 왕씨 고려의 존속을 원했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일파가 압록강 하구 위화도에 이르러 회군을 했다. 당시는 음력 6월로 정황상 막 우기가 시작됐다. 그런 탓인지 압록강을 건너려는 과정에서 익사자가 속출했다.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첫번째 여울에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