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부모산(232m) 정상 부근에 '모유정'(母乳井)이라는 우물이 위치하고 있다. 하부 직경 1m 크기의 모유정은 이름 그대로 '어머니의 젖과 같은 우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물과 관련해 임진왜란과 몽골침입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1920년대 동아일보가 부모산 모유정 전설을 소개했다. '피란민들이 실컷 울다가 울음을 그치고 본즉 그 앞에 놓여 있는 돌틈에서 천만 뜻밖에 맑은 물이 펑펑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 신기한 일을 본 백성들은 "이것은 필시 천지신령이 우리를 불쌍히 굽어 살피사 우리에게 생명수르 내리신 것"이라고 말하면서 (…) 즉시 그곳을 넓게 파고서 제법 버젓한 샘을 꾸미여 놓고보니 생명천 가치를 가지게 되었드랍니다.(…) 그리하여 그후부터 이 산을 아양산(阿孃山)이라고도 하며 부모산(父母山)이라고도 불러왔다 합니다.'- 인용문 중의 피란민은 임진왜란 때의 난민을 의미한다. 그러나 임란 당시 청주 부모산에서 왜군과 전투가 있었다는 역사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전설은 임진왜란이 아닌, 몽골 침입을 역사적 배경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구한말 청주지역 유림의 한 명으로 박노중(朴魯重·사진)이라는 인물이 존재했다. 그의 본관은
산 정상부 경사면에서 삼국시대 대형 집수지(集水池)가 발견되면서 청주 부모산(282m)이 새삼 지역민의 주목을 받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한 고을의 지세를 진산(眞山)-물길-안산(案山)의 모습으로 파악한다. 진산 앞에 물길이 있기 때문에 '배산임수'라는 표현이 나왔다. 또 진산을 무릎꿇은 모습으로 마중하는 산이 '안산'이다. 따라서 안산은 진산과 마주 보는 방향에 위치하고, 또 위계가 낮기 때문에 진산보다는 낮다. 그래서 '책상 案'자를 쓰고 있다. 그러나 부모산이 청주의 안산인지는 다소 불확실하다. 진산인 우암산은 무심천에 가깝게 위치하는 편이나 마중하는 산인 부모산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혹자는 부모산보다 구KBS청주총국 뒷산을 청주의 안산으로 보기도 한다. 부모산(父母山)은 독특한 지명이 인상적이다. 전국의 산중 '父母'를 이름으로 갖고 있는 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산' 또는 '부모성'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1530년(중종 25) 이행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하기 위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청주목 고적조에서 부모성(父母城)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사진 참조) '고을 서쪽 15리에 있는데 돌로 쌓
전통시대부터 존재하던 속리산 법주사의 금속제 미륵대불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반출됐고, 이후 일대는 1939년까지 약 70년 동안 허허벌판으로 잡초만 우거진 채로 방치됐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손을 맞잡은 사람이 전북 태인 출신의 갑부인 가산(嘉山) 김수곤(金水坤)과 당시 법주사 주지 석상스님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배불정치에 크게 분개했다. '당시의 주지 장석상씨는 대원군의 배불정치로 불상이 뜯겨 역사상 큰 오점을 후세에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에 일치, 바로 그 자리에서 김씨의 사재로 미륵불을 더욱 크게 세우기로 했다. 조각의 제일인자로 알려진 김복진씨에 의해 높이 80자의 콘크리트 불상 건립에 착수했다.'- 가산이 미륵대불 불사금으로 내놓은 사재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1960년대 발간된 경향신문은 밝히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콘크리트 시멘트불이 낙성되자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의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는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김수곤 씨의 특지로 경비 약 3만원을 들였다'라고 김수곤이 희사한 불사금 규모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우리나라 화폐사를 보면 일제 강점기하의 소(牛) 가격은 '70원'
법주사는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도량의 전통이 굳어져 있다. 전통불교 여러 종파 중 법상종(法相宗)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법상종은 이른바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사상(彌勒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식사상(唯識思想)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뿐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륵사상은 부처의 후신불이 미륵불이 어느 시점에서 도솔천에서 하생,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한다는 이론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로 치면 일종의 메시아 사상이다. 그러나 하생이라고 해서 미륵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물을 통해 온다고 불교는 말하고 있다. 법주사 경내에는 국보 제 64호인 석연지(石蓮池)가 위치하고 있다. 이 '석연지'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돌에 연꽃을 새진 연못' 정도가 된다. 바로 석연지는 '도솔천의 미륵불이 빨리 하생, 연못(池)을 통해 출현하라'는 상징적인 염원을 담은 조형물이다. 그렇다면 법주사 미륵불과 석연지는 같은 사상을 표현한, 미래의 구원을 염원하는 조형물이 된다. 이처럼 법주사는 창건 초기부터 미륵도량의 전통이 굳어져 있다. 법주사가 동제 대륵대불-청동미륵대불-금동미륵대불 등 미륵불을 줄곧 세우려 한 이유
속리산 법주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은 팔상전(국보 제 55호)과 미륵대불이다. 팔상전은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목탑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명대사의 요청으로 1624년(인조 2)에 재건됐다. 조선은 유교가 국시였기 때문에 불교를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란기의 승려들은 호국사상으로 무장, 전국 곳곳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따라서 임진 직후의 조선 조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불교계의 요청을 일시적으로 수용,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불사(佛事)가 많이 일어났다. 법주사 팔상전도 그런 배경하에 건립됐다. 이에 비해 법주사의 또다른 상징물인 미륵대불은 시간적으로 전통과 현대에 걸쳐 있는 묘한 조형물이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때 진표율사에 의해 동불(銅佛)로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을 건립과는 과정에서 일주문 밖으로 반출, 당백전을 주조하는데 사용됐다. 법주사 미륵대불이 동불이자 실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17세기 선비 정시한(丁時翰·1625-1707)이 지은 '산중일기'에 잘 드러난다. "말을 달려올라 가보니, 법주사가 수정봉 아래에 있었다. 지대가 평평하였다. 제3문으로 들어가니 높이가 7,8
법주사 사하촌은 분지 지형을 띄나 경작지는 넓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가난을 조금이라도 떨치기 위해 부업을 해야 했다. 대표적인 부업이 복조리였다. 사하촌 주민들은 9월이 되면 복조리의 주재료가 되는 산죽을 채취하기 위해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채취된 산죽은 △하루쯤 말리기 △껍질 벗기기 △네 가닥으로 쪼갠 후 물에 담그기 등의 과정을 거쳐 복조리 재료로 사용됐다. 이때 여자와 아이는 바닥조리, 성인 남자는 '우기'와 '매끼틀기'를 주로 맡았다. '우기'는 바닥조리를 오므려서 묶는 것을, 매끼틀기는 복조리의 허리 부분으로 단단히 묶는 작업을 일컫는다. 복조리의 세는 단위는 '지리'로, 50개를 하나로 묶은 것을 말한다. 사하촌 주민들은 이 복조리를 '지리' 단위로 묶어 보은은 물론 청주, 상주장까지 내다팔았다. 속리산 사하촌 주민들이 두 번째로 많이 한 부업은 도리깨의 '노리'(아들) 만들기였다. 도리깨는 크게 손잡이 막대, 노리, 꼭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노리'는 보은지방 사투리로 표준어는 '휘추리'다. 복조리 제작이 끝나면 영농철 전까지 사하촌 주민들에게 약간의 한가한 시간이 찾아왔다. 주민들은 이때 봄부업으로 도리깨를 많이 만들었
조선도 조용조(租庸調)의 원칙에 따라 농토를 가진 농민들에게는 세를 부과했다. 조선시대 이 제도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공법(貢法)-영정법(永定法)-비총법(比總法) 순으로 변했다. 이중 답험손실법은 글자 그대로 '답험'과 '손실'이 합쳐진 표현이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조정은 농사의 작황을 현지에 나가 집적 조사하는 것을 '답험', 그리고 손실법은 작황에 따라 등급을 메기는 것을 의미했다. 이 제도는 불합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령 어느 지역의 농토는 가뭄 때문에 작황에 안 좋아 'C' 등급의 수확을 했다. 그러나 현지에 조사를 나간 관리는 'A' 등급이라고 판정하는 경우가 부지기였다. 세금을 더 걷기위함이었다. 세종은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할 정도로 즉위 초부터 토지세에 대해 고민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토질의 전분6등법, 풍흉의 연분9등법으로 잘 알려진 '공법'(貢法)이다. 세종 즉위 3년(1421) 대신 김점(金漸)이 상소를 했다. "한 도(道)의 일은 오로지 감사에게 위임되었는데, 유독 손실을 답험하는 일에도 별도로 경차관을 보내게 하였으나, 경차관이 된 사람은 겨우 복결(卜結)의 수효만 알 뿐이므로, 감고(監考)하는 서원(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인 법주사는 충북 불교의 종가로 속리산의 상당한 면적을 소유하고 있다. 법주사로는 종교시설로, 경제적 영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주사가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게 된 데는 역사적인 계기가 있다. 1464년 조선 제 7대 임금인 세조는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복천암을 방문했고, 이때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의 대규모 토지를 복천암에 하사했다. '임금이 속리사와 복천암에 행차하였다. 복천사에 쌀 3백석, 종 30명, 논밭 2백결을, 속리사에 쌀과 콩을 아울러 30석 하사하고 신시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인용문 중에 '2백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결'(結)은 우리나라 전통시대 토지단위의 하나로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이 '결'(結)은 엄밀히 말하면 면적이 아닌 수확량을 기준으로 한 토지단위다. 세조의 아버지 세종은 토질의 비옥도에 따라서는 6등급, 그해 풍흉에 따라서는 9등급으로 분류하는 이른바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처음 도입·실시했다. 이때 전분6등법상의 1결 면적은 1등전과 6등전이 대략 3분의 2대 1 정도가 됐다. 즉 비옥도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하등전으로 갈수록 1결의 면적이 넒어지게 된다. 비
속리산 법주사의 '사하촌'(寺下村)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舍乃里)다. 지명 사내리에 대해서는 △'절 안'의 뜻이 한자화됐다 △원래 '사내골' 뒤쪽에 '사내사'라는 절이 있었다 △집이 쭉 이어졌기 때문에 '집 舍'(사), '이에 乃'(내) 자를 써서 '사내리'라고 했다 등의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다. 법주사 사하촌인 사내리 지명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59년에 편찬된 '여지도서'는 사내리를 '사내동리'(舍乃洞里)로 표기했다. 그리고 '관아에서 동쪽으로 30리이다. 호적에 편성된 민호는 28호이다. 남자가 45이며, 여자는 49명이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충청도읍지(1840년대)는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30리, 호수는 31호, 남자는 69명, 여자는 52명이다'라고 적었다. 따라서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18세기 중반부터 자연마을이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사내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는 '동래 정'(鄭) 씨로 현재 7~8대 정도가 내려오고 있다. 법주사 사하촌 6.25 때 급격한 인구 변화를 겪었다. 조선후기가 되자 빈부의 차이가 너무 벌어지면서 이땅의 민초들은 지팡이 하나 꽂을 땅을 갖지 못했다. 그
1920년대 충북도지사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법주사 여승 성폭행 사건과 관련, 당시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로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이때가 1925년 3월 31일이다. 박주중양과 동아일보 사이에 당연히 악연이 싹트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국가의 공복이자 지방장관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판단했는지 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칼럼난은 박중양의 법주사 여승 성폭행이 속리산 법주사에서 일어난 것을 빗대 아예 그를 속세의 아전이라는 뜻인 '속리(俗吏), 그리고 '군'이라고 불렀다. '충북지사 박중양은 도처에서 속리(俗吏)의 본색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 속리 박중양 군이여. 관찰사의 권위도 장하고 명승지 유람도 좋은 일이지만 다수한 농민을 실사아사(失時餓死)케 하고 또한 범형치사(犯刑 致死)케 하는 것이 군의 당행할 직무인가. 그리하고도 일선융화만 창도하고 총독부 당국의 환심만 사면 만사가 태평이란 말이지.'- 인용문 중 '명승지 유람'은 화양동 등 괴산지역을 1주일 유람하고 돌아온 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농민을 실사아사하고 범형치사케'는 말티고개를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하기 위해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보
일본식 이름이 호추시게요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일제강점 기간인 1920년대 충북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산수유람 편의를 위해 속리산 말티고개를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을 지시한 것은 1923년 6월 중순이었다. 말티고개는 그로부터 1개월후 오솔길보다는 조금 더 넓어졌다. 박중양이 1년 후인 1924년 11월 초순 속리산 법주사를 다시 찾았다. 그는 그 이전에 화양동 등 괴산지역 명승지를 1주일간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올 정도로 유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고위 관료들이 장기 유람을 관행으로 여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박중양은 개인의 만족을 위해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않았다. 박중양의 이날 법주사 방문에는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 내외와 일부 공무원, 그리고 신문기자 등이 동행했다. 사이토 마사토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1919~1927년 동안 제 3대 조선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통치 스타일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꿨고, 이때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변절했다. 일행은 젊고 예쁜 비구니(여승)를 불러앉힌 후 밤늦도록 주연을 가졌다. '일행 열여섯 명이 보은읍을 지나 오후 다섯시 삼십분
말티고개는 보은에서 약7㎞ 지점에 있는 속리산 입구의 첫 고개로 높이는 430m다. 현존하는 흑백사진을 보면 말티고개는 일제 강점기까지 오솔길 정도의 모습으로 그 폭이 좁았다. 고개 굽이가 워낙 많고 험하다 보니 선형 개선은 물론 노폭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대형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노폭을 확장하고 선형 개량을 처음 시도한 인물은 1920년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이다. 박중량의 일본식 이름은 ‘호추시게요’(朴忠重陽)이다. 이것에서 보듯 그는 친일행각이 뚜렷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념적 친일파라는 사학자들의 평가가 따라 다니고 있다. 박중양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직과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1923년 2월 24일 충청북도지사에 부임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말티고개를 확장하는 토목공사를 처음으로 하게 된 것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는 유람을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부임 2달 후인 1923년 4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는 괴산군내 명승지를 무려 7일 동안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온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말티고개를 넘으려 한 것은 법주사를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공로(公路)를 기준으로 했을 때 속리산 복천암에서 온양으로 가려면 말티고개 외에 차의현(車衣峴, 혹은 차의치), 묵현(墨峴), 누치(漏峙) 등을 경유해야 한다. 차의현의 지금 지명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수리티재'다. 해발 3백여m의 수리티재는 보은 수한면 차정리와 회인면 건천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국도 25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차의현은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회인현과의 경계이다"라는 적어놨다. 이밖에 해동지도는 '차의치(車衣峙)', 여지도서와 대동여지도는 '차의현', 일제 강점기 지리지인 '조선지지자료는 '차령(車嶺)'으로 기록했다. 이상에서 보듯 전통시대 지명에는 '차의'(車衣) 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왜 그런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수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차의(車衣)'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묵현'이 지금 어느 고개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부 지도는 '묵령'(墨嶺)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황상 문의 마장이에서 회인 중앙리 저자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먹티'가 확실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회인현 산천조에서 '목감산 고을 서쪽 5리에 있
세조는 1464년 속리사와 복천암을 둘러본 후 온양행궁을 가기 위해 다시 북향을 시작했다. 조선시대 '공로'(公路)를 기준으로 했을 때 보은에서 온양을 가는 코스는 2가지가 존재했다. 조선시대 공로는 현(縣)과 현을 연결시켜 주던 도로로, △국가 문서 전달 △조세수납 △관찰사 순력 때 주로 이용됐다. 이에 비해 사로(私路)는 장돌뱅이들이 지름길로 가기위해 주로 개척했다. 먼저 보은에서 온양에 이르는 방법은 보은-회인-청주-천안-온양의 루트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루트는 보은-회인-문의-연기-전의-온양 이다. 세조의 어가는 이중 후자를 택했다. 왔던 길을 피하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보은 속리산을 출발한 세조의 어가가 하루 뒤 문의현에 도착했다. 세조실록은 이에 대해 '어가가 문의현(文義縣)에 머물렀다'(10년 2월 29일자)라고 짥막하게 적었다. 세조의 어가는 계속 북서진을 해 다음날 전의현에 도착했다. '어가가 전의현에 이르니, 예조판서 박원형(朴元亨)이 사신 원접사로서 와서 하직하였다.'- 인용문 중 다소 생소한 용어인 '원접사'는 중국의 사신을 멀리까지 나가 맞아들이던 임시 벼슬을 말한다. 세조가 순행 중에도 국사를 처리했음을…
조선 전기의 우리고장 영동 출신의 김훈이라는 인물은 아내 여흥이씨와 사이에 김수성(金守省), 김수경(金守經), 김수온(金守溫), 김수화(金守和) 그리고 딸 1명 등 4남 1녀를 뒀다. 이중 맏아들 김수성이 출가해 속리산 복천암 주지를 지낸 신미(信眉) 대사이고, 김수온은 식우집(拭·集)을 남기는 등 조선전기의 대문장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신미대사의 첫째 동생인 수경도 벼슬이 낮지 않았다. 먼저 우리고장 보은현감을 역임했다. '신미가, 임금이 부처를 받들어 믿는 것을 의지하여 자주 짧은 편지로써 임금에게 통해 아뢰어, 아우·조카가 벼슬에 제수되어 뜻과 같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김수경이 보은현감으로서 벼슬에 초배(超拜)되니, 인망(人望)에 맞지 아니하여 물의가 자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충청도 수부읍의 하나인 청주목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가 영농철에 접어들었는지 성종은 김수경에게 민폐끼치는 행정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청주목사 김수경·영해 부사 김효급·예안현감 김귀지가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말하기를, "이제 바야흐로 농사가 시작되어 백성이 노고할 것이니, 폐해가 되는 일을 일으키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김수
봄이 손짓한다. 내게 오라고. 봄은 때론 청순하게, 혹은 섹시하게 시선을 자극한다. 지나간 청춘도 되살릴 것 같은 설렘이 봄바람을 타고 콧잔등을 스쳐간다.지난 29일 대청호 둘레길 8구간을 찾은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회원들 35명의 마음도 봄소식에 들뜨긴 매한가지였다.봄은 둘레길 곳곳에 노랗고 빨간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연한 쑥이 꼬무락대며 올라오고, 만개한 진달래가 바람에 일렁거렸다. 마치 생명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이날 내내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지만, 이미 봄에 매료된 회원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대청호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줘서 고맙다"며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특히, 숲길과 동네길을 오가는 완만한 산책 코스에 회원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렇게 자연을 벗 삼아 걷기를 십여분. 마티고개에 도착했다.마티고개는 지형이 말머리와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생각보다 경사가 심하고 길이 험했다.가는 길목마다 작은 개울이 보였는데, 다듬어지지 않은 촌스러움이 나름의 멋을 완성했다.한 여성회원은 "비가 와서 땅이 질퍽거렸지만 그 나름의 운치가 있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둘레길 8구간 길은 '석탄리 피실~능선 갈림길~석탄리
세조의 1464년 충청도 순행은 신미(信眉·1403-1479) 대사가 주지로 있는 속리산 복천암이 'U턴', 즉 반환점이 됐다. 그러나 당시 실록은 충청도 순행의 본래 목적이 온양행궁 거둥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임금이 온양(溫陽)에 행행(行幸)하고자 하여, 봉원부원군 정창손·예조 판서 박원형 (…) 공조 참판 강희맹을 수상(守相)으로 삼고…'- 그러나 세조는 곧바로 온양행궁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한참 더 내려가 속리산 복천암을 방문했다. 그렇다면 세조의 어가는 한양도성을 나서기 직전, 거둥 코스를 긴급히 바꿨거나 아니면 경호문제 등으로 인해 '연막'을 피운 것이 된다. 세조가 원래의 목적지를 한참 벗어나 복천암 신미대사를 만난 것은 둘 사이의 인간적인 친밀함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으면서 불교와 승려를 탄압했다, 심지어 도첩제라는 것을 실시, 승려의 도성 출입도 금지했다. 이런 환경에서 왕과 승려가 '서로 꼭 봐야 할 사이'가 됐다면 그 전에 뭔가 특수한 인연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 특수한 인연의 중간매체로 훈민정음을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골수 중화주의자인 대신들의 반대가 뻔
청주향교는 5성과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있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했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맞도록 하기 위하여 우서(虞書·요순시대 지칭)의 12목(牧) 제도를 본받아 지방관들을 설치하였노니, 주나라의 국운이 8백년간 계속 된 것처럼 우리나라의 국운이 장구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때 청주, 충주 등 전국 12목에 향교도 함께 설치되면서 중앙에서 경학박사가 파견됐다고 밝히고 있다. 세종대왕은 초정약수에 행차를 할 때 청주향교에 여러 권의 서적을 내리기도 했다. 이때 청주향교에 하사된 책은 통감절요, 통감훈의, 집성소학, 근사록, 통감강목, 성리군서, 사륜집 등 9권이었다. 세조의 어가는 1464년 2월 25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청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때…
세조 어가는 1464년 2월 26일 청주를 출발하여 피반령(皮盤嶺·360m)을 넘어 회인에서 1박했다.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와 보은군 회인면 오동리를 남북으로 잇는 피반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역사성이 오래 됐다. 세조 어가는 27일 보은 동평을 지나 병풍송에서 1박했다. 이때 복천암 주지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가 영접나와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떡을 대접했다. '거가가 보은현 동평(東平)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백 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조 어가는 그 다음날(28일) 충청도 순행의 맨 남쪽 꼭지점인 속리산 중턱의 복천암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속리사(俗離寺)를 경유하기도 했다. '임금이 속리사에 행행하고, 또 복천사에 행행하여, 복천사에 쌀 3백 석, 노비 30구, 전지 2백 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조선시대 1'결'은 대략 3천평 정도로, 이날 복천암이 세조로부터 받은 전토는 60만평이나 됐다. 위 인용문은 눈여겨 볼
세조의 어가는 1464년 2월 23일 청주에 도착해 이틀간 머물렀다. 이때 세조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실록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유생, 창기의 노래 환영이 있었고, 104살의 문원(文原)이라는 노인이 시를 바친 것으로 나타난다. 세조는 그 노인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했다. '노인에게 주육을 하사하였다. 문원(文原)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나이 1백 4세이나 기력이 오히려 건장하므로 임금이 그 노인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포와 술 및 의복 한 벌을 하사하였다.'-당시 세조의 어가를 호종, 경호군사를 총괄 지휘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자운(尹子雲)이었다. 그는 경호군사들의 군기와 관련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청주도착 이틀째 되는 날 갑자기 인원 점검을 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왕의 순행과 관련해 가장 풍기문란적인 내용이 적발됐다. '이어 종친에게 명하여 길을 나누어서 적발하게 하였더니, 의정부 사인 성윤문이 민가에 투숙하였고, 사대장 김처의가 군을 버리고 마을에 들어갔으며, 예조좌랑 이수남·이길보는 기녀를 데리고 민가에 투숙하였고, 또 충찬위 이세정은 술에 취하여 길가에 누워 있었다.'- 경호원들의 행동을 유형별로 요약하면 △민가 투숙 △기녀와 동침
세종대왕 때 청주목 초수리 행궁을 건립한 사람은 김흔지(金人+完之)라는 인물이다. 그는 세종의 어가보다 한달 먼저 초수리에 내려와 행궁 건립을 시작했다. 이때가 1444년(세종 26) 1월 27일이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 윤(內贍寺尹)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세우게 하고….'- 그의 이름은 같은 해 2차 초정약수 거둥 때(음력 7월 22일)도 등장한다. 이때는 행궁 건립이 아닌 기존 행궁의 수선이었다. '내섬시윤 김흔지를 청주에 보내어 초수 행궁(椒水行宮)을 수선하였다.'- 김흔지는 내섬시윤으로 출발해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정2품)에 오를 정도로 행정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단종은 그가 졸하자 손수 관까지 내리기도 했다. '한성부윤 김혼지가 졸하니, 관곽(棺槨)과 부의로 종이 1백 권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머물렀던 초수리 행궁은 그로부터 4년후인 1448년 3월 실화로 화염에 휩싸였고 범인은 하옥됐다. 세종은 이런 범인을 "지금 농삿달을 당하여 여러 날 옥에 가두어 두는 것은 심히 불가하니'(세종실록 30년 5월 21일자)라며 석방토록 했다. 이후 초수리 행궁은 세종대왕…
1464년 2월 22일 초수리(초정약수)를 떠난 세조의 어가는 다음날인 23일 청주에 도착했다. 초정약수~청주는 한나절 거리로 그렇게 먼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걸린 것은 세조가 중도에 사냥놀이를 하고 천변에서 신하들과 작은 술자리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위사(衛士)로 하여금 면령(免嶺)에서 몰이하게 하고, 어가를 천변에 머물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어서를 세자와 신숙주·홍윤성 등에게 내려서 이르기를, "내가 종훈 ·여러 장수와 더불어 적은 것을 베어서 나누어 마시는 것은…"'- 세조가 청주에 도착하자 사장이 쌀을 바치고, 창기들은 가요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사장'은 조선조 때 사창의 곡식을 나누어 주고 거두어 들이는 일을 맡아 보던 사람을 일컫는다. '어가가 청주(淸州)에 이르렀는데, 사장(社長) 40여 인이 노상에서 향안(香案)을 베풀고 쌀 70말을 바쳤으며, 한 중이 목탁을 어가 앞에서 쳤으나 임금이 모두 다 이를 물리쳤다. 노인·유생(儒生)·창기(娼妓) 등이 가요(歌謠)를 바쳤다.'- 조선전기 청주목을 경유한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 모두 3명이다. 이 부분에서도 세 임금의 성격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세종은 자신 때
세조의 어가가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초정약수)에 당도한 것은 1464년 2월 21일이었다. 세조의 어가는 이날 진천~초수리 구간을 단 하룻만에 이동했다. 따라서 세조의 어가가 초수리에 도착한 시간을 늦은 오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의 어가를 맞은 당시 청주목사는 고태필(高台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1465년 청주목사가 되어 정사를 엄정히 집행, 아전들은 그를 두려워 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여겼다. '충청도 관찰사 김진지가 글로써 아뢰기를, "청주 목사 고태필·온양 군사 이신효·임천 군사 박휘는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우며 상세하고 공명하여, 관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편안하니, 승직(陞職)할 만하고…"'- 초수리에 도착한 세조가 다음날 한 일은 사냥과 천변에서 가진 작은 술자리였다. '임금이 위사(衛士)로 하여금 토령(吐嶺)에서 몰이하게 하고, 어가를 천변(川邊)에 머물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민족의 기록문화 꽃으로, 국보 제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이런 조선왕조실록은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 의해 한글로 완역돼 있어, 일반인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부분은 번역상 적지 않은…
세종과 세조는 20년 시차를 두고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다. 그러나 움직이는 속도는 달랐다고 밝힌 바 있다. 세종 어가는 한양도성~초정약수 구간을 닷새에 주파한데 비해, 세조의 어가는 하루 이른 사흘 걸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세조는 '오고'(五鼓)에 일어나 하루 거둥을 시작했다. '5고(鼓)에 어가(御駕)가 거둥하였는데, 어가 앞의 횃불이 혹은 꺼졌다가 혹은 밝아졌다가 하였으므로 횃불을 없애도록 명령하고…'-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종각의 북을 쳐서 통금의 시작과 해제를 알렸다. 이를 '파루(罷漏)라고 불렀고, 이를 어긴 자는 경수소(警守所) 곳에 구금하였다가 그 다음날 위반한 시간에 따라 곤장을 차등있게 때렸다. 이밖에 조선시대는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를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까지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다섯 마디의 시간을 각각 일고(一鼓)~오고(五鼓)라고 부르고, 그 숫자만큼 북을 쳤다. 다섯 단계의 맨 마지막인 '오고'는 새벽 3시부터 5시까지를 뜻했다. 한여름에 새벽 5시면 날이 훤하게 새나, 겨울철은 그렇지 않다. 음력 2월말도 많이 어두운 편이나, 세조의 어가는 그 시간에 거둥을 시작
한양도성을 출발한 세조의 어가는 사흘만에 우리고장 충청도 경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당시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이 세조 어가를 맞이했다.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辛永孫)이 어가를 맞이하고, 절제사 권언이 군사를 거느리고 결진(結陣)하였는데, 군대의 장비가 매우 성하였다. 임금이 우상대장 김질에게 명하여 용천산(湧川山)에서 몰이하게 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 구경하였다.'- 세조실록은 신영손이 도계 어느 곳에서 세조의 어가를 영접했는지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천 광혜원에서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 광혜원에는 충청도 신·구 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할 때 인장을 주고 받는 교구정(交龜亭)이 존재했다. 당시 관찰사 인장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이것을 교환했기 때문에 그 장소를 '교구정'이라고 불렀다. 경상도 교구정은 한양애서 봤을 때 그 초입에 해당하는 문경새재 동쪽 사면에 위치했고, 지금도 현존한다. 세조의 어가가 좀더 남행(南行)을 해 진천 광석(廣石)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진천 광석이 어느 곳인지는 지명 추적이 잘 안 되고
[충북일보] 오는 30일 본보와 충북리더스클럽이 주최하는 '14회 충북경제단체 친선골프대회'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그랜드 컨트리클럽(그랜드 CC)에서 열린다. 대회는 경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간의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업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대회는 도내 경제단체 회원과 재경 경제인 등 160여 명이 40개 팀을 이뤄 신페리오 방식으로 치룬다. 라운딩 이후 시상식과 김영환 충북도지사 초청 만찬, 행운권 추첨은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시상식은 △메달리스트 △우승(남·여) △준우승(남·여) △니어리스트(남·여) △롱게스트(남·여)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부상이 각각 주어진다. 가장 멋지게 옷을 입은 참가자인 △베스트드레스상(남·여) 수상자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성지연기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가칭 '충북아트센터' 건립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오는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기본계획 수립, 타당성 조사, 중앙투자 심사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26일 충북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중순 마무리되며 용역을 통해 세운 기본계획에는 공연장 등 규모, 운영 방안, 경제성 검토 등이 담긴다. 도는 이 계획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앞서 도는 지난 7월 행정안전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신규 사업은 의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충북아트센터 건립에는 총 2천300억 원이 소요된다. 연구원은 내년 4월까지 경제성과 재무성, 정책적 사업 추진 가능성 등을 분석한다. 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해 상반기 행안부에 지방재정 중앙투자심사를 신청할 방침이다. 심사를 무난히 통과하면 충북아트센터 건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는 2026년 첫 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오는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잡았다. 도는 이런 절차가 차질 없이
[충북일보] "산업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라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경쟁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진(67) ㈜ATS(에이티에스) 대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선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TS는 국내 자동차 플라스틱부품 업계 1위 기업으로 2004년 설립해 20년간 끊임 없이 달려왔다. 주력 제품은 초정밀 사출 기술을 이용한 자동차용 클립(Clip)과 패스너(Fastener)등 자동차 플라스틱 부품이다. 이재진 대표는 "클립, 패스너 등 플라스틱 부품과 연료 부품 분야로 두 가지 트랙을 사업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며 "보통 300가지 정도의 부품이 매월 생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티에스는 지난 2022년 국내 완성차 업체 2곳이 필요로 하는 부품 점유율의 50%를 넘어섰다. H사의 1대에 사용되는 내장·외장용 클립 100개중 50개 이상은 에이티에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재진 대표는 "신차 개발은 2년을 앞두고 이뤄진다. 올해 기준으로 2026년 모델링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부품을 부품 회사들이 2~3년전부터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차의 디자인 등에 맞춘 개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