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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은 둘, 둘 같은 하나

충북 최초 父子 제과제빵기능장…이종화·성호 기능장
전국 최초 '이용·미용기능장' 동시 취득…이유리 헤어디자이너

  • 웹출고시간2014.07.31 19:46:29
  • 최종수정2014.07.31 19:46:29
충북 최초 父子 제과제빵기능장…이종화·성호 기능장


폴 오스터의 소설 '빵 굽는 타자기'란 제목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과의 조화를 잘 보여준다. 거리의 빵집 앞을 지날 때 갓 구워낸 빵 냄새는 마음까지 어루만져 위무하는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농염한 빛깔로 구워져 제 마음껏 부풀어 오른 빵의 몸피에서 한 세계의 충만함을 만끽한다면 과장일까.

"됐어. 이 정도면…."

겉은 파삭하게 익고 크림빛 속살은 쫄깃한 듯 촉촉하게 씹힌다. 바게트를 구운 아버지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지난 6월말, 충북 유일의 제과제빵 기능장이었던 아버지를 이어 아들 이성호(33)씨가 뒤를 이어 제과제빵 기능장이 되었다. 시청 맞은편, 크레시앙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이종화 대표의 아들 이성호(33)씨는 2002년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하고 2009년 동우대학 호텔제과제빵과를 졸업했다. 그동안 서울국제 빵 과자전 마지팬 케이크 부분 '기술 장려상'을 비롯해서 아시아 푸드 페스티벌 설탕공예 부분 금상을 수상했고, 2009년 5월에 열린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충북지역 금상을 수상한 실력파다. 2013년 9월에는 케이크 마스터 2급과 초콜릿 아티스트를, 그리고 지난 6월 27일 제과제빵기능장 자격증마저 거머쥐었다. 마침내 충북 최초의 부자(父子) 제과제기능장이 탄생한 것이다.

아버지 이종화 대표는 "기술을 배우면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평생의 재산이다. 아들이 나의 일을 배우고 나와 함께 제과제빵 전문인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라고 말한다.

제과제빵업계에서 기능장이란 의미는 '장인 중에 장인'이란 의미다. 지금까지 이종화 대표가 충북 유일의 제과 기능장이었지만 이제 아들이 힘을 합한 것이다. 이종화 기능장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특이한 이력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평범한 빵과 케이크가 아니라, 지역특산물과 연계한 제품의 개발하는 특별한 전력이 있다. 19살부터 빵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그는 강원도 속초에서 도널드베이커리란 상호로 최고의 명품 제과점을 일구어냈다. 그때 이종화 기능장이 개발한 상품이 그 유명한 '오징어 빵'이다. 오징어를 물에 삶은 후, 국물은 밀가루를 반죽하고 오징어 살은 야채와 함께 갈아 속을 넣은 영양가 만점인 '오징어빵'을 탄생시켰다. 이원장은 "서울에서 '시바 국제 빵 과자 전시회'가 열렸다. 속초의 지역특산물을 이용한 오징어 빵이 'KBS 6시 내 고향 편'에 방송되자 속초에 온 관광객들은 너도나도 오징어 빵을 찾았다."라고 그 때를 회상한다.

속초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종화 기능장은 2004년 청주 용암동에 도널드베이커리를 오픈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빵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청주에서 다시 승부를 걸었다. 청주의 '도널드 베이커리'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명품 빵으로 인식되었다. 이제는 다시 지역특산물과 직지와 연계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앞으로 인생의 남은 목표가 후학 양성이라는 이종화 기능장은 아들의 입성이 무엇보다 반가운 모양이었다. 아들 이성호(33)기능장은 "아버지가 현장에서 쌓은 기술만이 아니라, 경험한 지식과 장인정신까지도 함께 전해야 된다. 일본처럼 오래된 전통기술을 전하는 한국식 도제제도의 양성화도 필요하다."라며 "가장 용기 있는 자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뤄놓은 이 일을 함께 하는 일은 소중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전국 최초 '이용·미용기능장' 동시 취득…이유리 헤어디자이너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색하는 시간이 청춘의 시간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청춘표류>에 등장하는 말로써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란 것이다. 청춘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열여섯 중학생 시절에 국가미용사 자격증을 따면서 헤어디자이너 이유리씨는 구체적인 삶을 모색했다. 그리고 초지일관 그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10년이 흐른 후, 지난 6월 27일 제 55회 '미용기능장, 이용기능장 자격증'을 동시에 획득했다. 이른바 쌍용장에 등극한 것이다. 더구나 이유리 헤어디자이너는 25살이라는 나이에 '전국 최연소 미용기능장, 이용기능장 동시 취득'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기능장이란 이른바 '기술의 꽃'으로 불리며 최고의 반열로 인정받는 경지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녀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서울연희미용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시에는 전국의 미용고등학교가 세 곳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네일아트와 메이크업 자격증을 획득한 후, 청주로 다시 내려왔다.

"졸업하면서 방송국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주성대 뷰티디자인과로 진학하게 된 것이다."

이유리 헤어디자이너는 주성대에서 외래교수로 있던 이동범 교수를 만났다. 이교수는 2009년 충북에서 남성으로는 최초로 헤어디자이너의 꽃이라 불리는 '미용기능장'을 보유한 실력파였다. 이동범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9년 만에 건양대학교 뷰티디자인과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서원대학교 산업대학원 향장미용과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주성대 외래교수로 활동하면서 후배들에게 커트 분야의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리 헤어디자이너에게 이동범 교수는 가야할 길을 알려준 셈이었다. 주성대를 졸업하고 곧 서원대 산업대학원 행정미용학과를 수료했다. 현재 그녀는 청주 뷰티인미용학원에서 열정적으로 헤어강의를 하고 있다.

그녀가 취득한 '이용기능장, 미용기능장' 시험은 미용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7년 이상의 실무 경험이 있어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만큼 전문기술이 요구되는 관문이다. 미용업계에서는 보통 7~8수는 기본이란 말이 돌 정도로 까다로운 과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2011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이미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실력을 검증받은 미용인이 어쩌면 남성들의 분야라고 여겨지는 '이용기능장'까지 취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로의 분야가 갖고 있는 독창적인 기술들이 있으니 서로 장점을 보완하면 한쪽만 아는 헤어디자이너보다 더욱 훌륭한 헤어디자이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양의와 한의가 서로 보완된다면 환자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용기능장과 미용기능장'을 동시에 취득한 그녀의 마음에는 그런 효율성과 합리성이 담겨있는 것이다.

"기술적 바탕 위에 세계적인 헤어의 흐름과 변화하는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 이제 시작인 것 같다. 배움 없이는 새로운 세상으로 결코 발을 딛을 수는 없다."

25살의 이유리 헤어디자이너가 꿈꾸는 세상은 어디쯤일까. 그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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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