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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숨쉬는 오지 문화 - 제천 송한리와 오미리

오미자 많은 마을…약초·산나물 가득
오토캠핑장·펜션 들어선 산촌체험마을

  • 웹출고시간2011.10.09 18:19:2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충북도내 각 지자체의 오지마을을 찾아 현지인들의 애환과 삶, 그곳에 살아 숨쉬는 문화를 집중 조명하는 '전통이 솜쉬는 오지의 문화'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한다.
예로부터 육지였던 마을이 '뱃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배경과 댐이 들어서면서 마을의 이름이 제값을 하는 등 충북도내 오지마을에는 다양한 문화와 지명이 있다.
오지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을 찾아본다.
◇ 오미리

제천시의 가장 오지라고 불리우고 있는 오미리.

"오지라고 하기 보다는 예전에는 인적이 드문 산골이었다고 불러주시는게 좋아요"

오미리 산촌마을 입구의 전경.

15년전만해도 버스하나 다니지 않던 오지 마을인 제천의 오미리.

옛날에 오미자가 많이 나서 오미리라고 마을이름을 불렀듯이 지금도 오미리에는 장뇌삼과 토종꿀, 더덕 ,송이, 각종약초 산나물이 많이나온다.

6.25전쟁이 발생한 것도 말도 남의 입을 통해 들었다고 할 정도로 오지였다.

송한리에서 버스에 내려 2시간을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 오솔길을 따라 등에는 시장에서 구입한 봇짐을 지고 걸어가다보면 산마루에 올라 소리한번 지르고 심호흡을 하면서 다시 내리막길을 30여분 터벅터벅 걸어거야 했던 이곳은 지금은 도로가 포장이 되고 산촌체험마을로 변하면서 도시인들의 발길을 찾게 만들고 있다.

15년 전까지 강모 목사님이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할 당시 소위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주민들이 부탁한 물건을 제천시에서 사다가 되팔곤 하셨다.

구멍가게의 물건은 지게꼬리부터 고무신 양말 과자 연필 공책 낫과 호미까지 술과 담배를 제외하곤 시골마을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됐었다.

이곳에서 만난 촌로 이모(75)씨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금은 너무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전과 같은 사람사는 맛을 느끼지 못하고 삭막해져가고 있어"라며 "개발을 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인정은 남아 있는 것이 이곳은 풍경이야"라고 말한다.

오미리 산촌마을을 소개하는 작은 안내판.

인적이 드문 산길을 따라 절골이라 불리우는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작은 이정표가 보인다.

'산골체험마을 안내'라고 쓰여진 표지판아래에는 절골을 안내하는 작은 지도가 보인다.

절골입구에 들어서면 소바우 야영공원(오토캠핑장)과 펜션을 안내하는 이정표와 '오미계곡' '오미저수지' '점골-용두산 등산로' '소바위 감악산 등산로' 등 도시민들의 휴식처로 인기가 좋은 휴양지를 알려주고 있다.

소바위는 소의 머리모양을 닮은 바위로 잘 알려져 있다.

고추를 따시던 김모(72) 할머니는 "이곳에는 예전과 같은 아름다운 풍습은 거의 다 사라졌어. 도시사람들이 찾아오면서 농촌의 문화라고 할까 미덕이라고 할까 하는 것이 거의 사라졌어"라며 "하지만 아직도 농촌의 정 같은 것은 끈끈하게 이어져 가고 있어"라고 말한다.

오미리 저수지는 강원도 신림면 황둔리 들판의 식수인동시에 농업용수로 사용된다.

매년 여름철이 되면 대학생들의 봉사활동으로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다고 알려주는 주민들은 도시에서 맛보지 못한 인정을 느끼게 한다.

한여름에도 기온이 25도 이상을 넘지않아 밤에는 서늘한 기온으로 모기가 별로 없다고 하는 이곳은 지금은 오토캠핑장이 생기고 펜션이 들어서고 하면서 과거의 오지라는 말은 사라지게 됐다.

오미리의 특징중 하나는 강원도와 인접해 있어 사투리가 강원도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제천까지 가려면 오미재를 넘어 1시간 정도 걸리나 강원도 황둔리의 장터까지는 차로 20여분이면 족하다.

이곳 사람들이 들려주는 사투리는 '베(벼)' '사이(곁두리)' '소두방(솥뚜껑)' '누링기(누룽지)''고재이(고쟁이)' 등 젊은 층은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다.

오미리의 문화는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농촌풍경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 도시민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산골체험마을' 조성으로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가재잡이 등 고향을 맛을 알리는 전통은 남아 숨쉬고 있다.

◇ 송한리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의 이상신 이장이 텃밭에 가꾼 배추를 손보고 있다. 이마을은 전령적인 농촌마을로 투자가 아쉬운 실정이다.

송한리는 효자마을로 유명하다.

이상신(57) 송한리 이장은 "파평윤씨효열문은 효자 이시진과 그의 처 파평윤씨의 지극한 내조와 시부모에 해한 효를 실천한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며 "송한리는 효를 가장 잘 실천하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오인용 효자비 등 효를 기리는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어 '효의 본고장'임을 증명하고 있다. 현재는 94세의 임소저 할머니가 가장 나이가 많다.

이 마을에는 117가구 25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나 이중 20여 가구는 외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년후 효자마을로 소문난 송한리를 찾아와 현재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송한리 절골입구의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송한리의 절골이라고 불리우는 마을은 조선시대에 '월명사'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된 상태다. 이 지역은 깨끗하고 시원한 물과 소나무 등 경치가 아름다워 한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쉬고 가는 곳으로 암암리에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절골 입구에서 만나 이모(59)씨는 "절골이 여름철에 시원하고 깨끗한 물로 유명세를 타면서 한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 동네를 오염시키고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환경파괴와 함께 주민들과의 불협화음까지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절골마을의 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농작물이 심어져 있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이곳은 특용작물인 황기를 많이 재배하고 있어 현재는 '황기특산주 생산 공장'까지 들어와 있어 예전의 전통적인 마을의 형태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과거에는 가장 낙후된 마을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자연보존을 위해 주민들이 노력하고 지키는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마을의 지명에는 굴바우가 있는 '가실골', 바위밑에 굴이 뚫려있는 '굴바위', 인근마을인 포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너갈티', 와따로 있는 마을인 '독정촌', 마을 사람들이 돌무기 라고 불리우는 '돌매기', 강원도 주천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쇠가 생산됐던 '미고개', 은행나무가 있는 '은행나무땀', 잣나무가 무성한 '잣나무골', 옛날 관행 길가에 있었던 '주막거리', 둔덕이 있는 마을인 '진두득', 미고개에서 쇠가 생산됐을 때 쇠를 다루려고 풀무를 놓아 두었던 '풀뭇골' 등 이름만 들어도 정이 가는 마을 이름들이 30여 가지나 된다.

오미리 저수지는 강원도 신림면 황둔리 들판의 식수인동시에 농업용수로 사용된다.

이곳에서 오미리로 넘어가는 오미재는 송한리를 둘러싸고 있어 한폭의 산수화를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뒷산을 가로질러 오미리로 넘어가는 한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소로길이 있었으나 현재는 새로운 도로가 뚫려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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