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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땅 돌며 조국광복 불지펴

10년동안 러·중서 독립군 양성 등 항일투쟁

  • 웹출고시간2007.02.28 01:19:4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내일은 88주년을 맞는 3·1절이다.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진천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1871~1917) 선생이 숨을 거두면서 남긴 유언이다.

올해로 헤이그 특사사건 발생 100주년이자 서거 90주년을 맞아 그 주역인 보재 선생이 조명받고 있다.

1907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2년 전 울분 속에 맺은 을사늑약(이른바 을사보호조약) 등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폭로하고 국제여론의 도움을 얻어 조약을 파기시키기 위해 그해 6~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명을 극비리 파견했다.

전 의정부참판 이상설, 전 평리원검사 이준(1859~1907), 전 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1887~?)이 바로 그들이다.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태어난 보재 이상설 선생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서울을 극비리에 출발한 이준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위종과 합류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도착했다.

보재 선생은 다른 특사들과 함께 한국의 공식대표로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일본 공사의 방해로 네덜란드 정부와 강대국 대표위원들에게 끝내 거절당했다.

특사들은 이에 평화회의 취재차 헤이그를 찾은 각국 언론에 ‘한국의 호소’라는 연설문을 제공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준 열사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순국했고, 이상설과 이위종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이준 열사를 먼 이국 땅에 안장해야 했다.

헤이그특사 사건 직후 일제에 아부하는 대한제국의 친일정부는 헤이그에 특사로 간 보재 선생을 궐석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이위종 선생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보재 선생은 이후에도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지에서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는 주장을 펴는 등 항일운동에 헌신했다.

보재 선생은 1909년 시베리아 연해주로 가서 흥개호 남쪽 봉밀산 부근 땅을 매입해 최초 독립기지로 건설했고, 중국령 라자구에 독립군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해 광복군사관을 양성했다. 또 이동녕·정재관·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됐고, 신한혁명당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되는 등 조국광복에 매진했다.

그러나 보재 선생은 평생을 민족과 나라를 위해 투신하다 만국평화회의 특사 사건 10년 뒤인 1917년 음력 3월 2일 망명지인 러시아 니콜리스크 우스리스크에서 47세로 순국했다. 선생은 임종을 지킨 이동녕 등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힘을 합세해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들은 선생의 유연에 따라 유해를 화장해 강에 뿌렸고 문고도 모두 불태웠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사)보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재정.통일부장관)는 진천읍에 숭모비와 숭렬사를 건립해 존영을 봉안, 해마다 선생의 서거일을 맞아 제향을 올리고 있다. 또 2001년 3월에는 진천읍 내 진흥빌딩~성적사거리 구간이 보재로(溥齋路)로 지정,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다.

진천 / 강신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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