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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4·19 역사 재조명 - 청주지역의 학생시위

민주주의 회복 '피맺힌 절규'
고등·대학생 4천여명 참여… 시위 격렬 '전국 5대 진원지'

  • 웹출고시간2010.04.18 18:44:1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청주농고생들의 4·19혁명 당시 시위 모습.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12년 장기집권을 종식시킨 4·19혁명. 이는 총칼에 의한 무력투쟁이 아니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갈망하는 학생들의 피맺힌 절규였다.

역사적인 이날 사건의 현장에는 교육의 도시 청주의 학생들도 있었다. 청주지역은 서울, 부산, 대구, 마산과 함께 전국 5대 진원지였을 정도로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됐다.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증언과 각종 기록을 토대로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1960년 3월9일. 부정선거의 기운은 청주지역에서도 감지됐다.

청주공업고등학교의 써클인 공석회(公石會)는 이를 규탄하기 위한 시위를 모의했으나 사전에 발각, 실패로 돌아갔다. 12일 야간 봉화데모와 14일 규탄데모도 모두 경찰의 방해로 실행하지 못했다.

15일 마산사건과 김주열 군 참사사건이 보도되면서 청주지역의 학생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학생들의 열망은 교육의 도시 청주에서도 다를 게 없었다.

가장 먼저 시위에 나선 것은 청주공고였다. 16일 시위에 실패한 청주공고생 1천여명은 18일 오전 11시 교문진출에 성공했고 청주상고생 1천여명, 청주고생 900여명, 청주여고생 300여명 등과 합류, 충북도청 앞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오후 2시 경찰의 최루탄과 공포탄 앞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230여명의 학생들이 연행됐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우암산으로 피신했다. 잠잠해진 시내는 오후 8시 자녀의 석방을 요구하는 500여 학부모들의 목소리로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19일 오전 9시. 이번엔 청주농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농고생 500여명은 괭이, 삽 등 농기구를 들고 내덕지서 앞을 통과해 대성중 부근에 이르렀고 세광고생, 청주공고생 등이 시위에 합류했다.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김주열 동지의 사인을 규명하라", "학원의 자유화를 보장하라"는 학생들의 피맺힌 절규는 청주시내 하늘을 가로질렀다.

학생들의 외침사이로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체포하라"는 경찰 관계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경찰에 맞섰지만 최루탄 앞에는 역부족이었다.

낮 12시. 청주대생 500여명의 시위가 전개됐다. 대학생이 처음으로 참여한 것이다. 정문을 통과한 청주대생은 외덕교회(지금의 우암교회)를 거쳐 내덕동 방아다리까지 진출해 경찰과 대치했으나 경찰이 소방차를 동원, 오물을 발포하는 바람에 강제 해산됐다.

이후 시위대는 비상계엄정국에서도 국민주권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목소리를 쉬지 않고 외쳤다. 청주지역은 경찰이 무력진압을 자중, 타 도시에 비해 유혈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경찰서 기관총이 여전히 시내 한복판을 조준하고 있었다.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학생, 나아가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충북도경찰국장은 당시의 책임으로 구속됐으며, 4·19혁명에 참여한 청주지역 학생 4천여명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임장규기자

김현수 충북 4·19기념사업회장 "청주도 민주화운동 격렬했다"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이 아니면 이 나라를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청주대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한 김현수(73·당시 경제학과 4학년) 충북4·19기념사업회장은 혁명 당시의 비장한 각오를 이렇게 떠올렸다.

김 회장이 이끈 청주대 시위대는 당시 청주지역에서는 유일한 대학생 시위대였다. 18일 서울에서 고대 학생들의 시위가 있자 청주대 학생들도 동요, 19일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김 회장의 제창으로 결의문을 채택하고 '연행된 학생 석방하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섰다.

"지금의 우암교회를 지나 오정목 다리 부근까지 전진했지만 결국 경찰이 소방차를 동원, 오물을 쏘는 바람에 뿔뿔이 흩어졌죠. 150여명이 연행됐고, 저도 충북도경찰국 수사실로 잡혀 갔습니다"

시위를 주도한 김 회장은 당시 경찰 관계자에게 "너는 이제 사형"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어차피 죽는다는 생각에 김 회장은 경찰국 담을 뛰어 넘어 우암산으로 도망갔다.

이후 수배명령이 내리진 가운데도 산발적으로 시위를 주도한 김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 뒤 학생대표로 충북지역 치안을 책임졌다.

이어 5·19일에 열린 4·19위령제에서는 충북도집행위원장 겸 제주를 맡아 청주공고 운동장에서 제문을 낭독했다. 희생된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그는 말없이 울었다.

김 회장은 "청주는 4·19혁명이 가장 격렬하게 전개됐던 도시 중 하나"라며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근원지임에도 이러한 사실이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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