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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재봉 솜씨는 단연 수준급이었다. 쌀 서너 가마니를 내어 어렵게 장만했다는 미제 싱거(SINGER)미싱은 보릿고개를 넘는 우리 집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경기도 안성 동막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학교 근처에 가본 일이 없어도 당신 스스로 한글과 한문을 깨우쳤다. 청주로 시집을 와 신혼초기에 다소 무리를 해서 재봉틀을 장만한 것이다.

농사일을 하면서도 할머니는 바느질과 재봉틀 품삯으로 아버지를 학교에 보내 신식 교육을 받게 했고 손자들이 보챌 때면 고쟁이 속에 감춰두었던 그 품삯으로 과자 등을 사주었다. 할머니는 양재학원을 다닌 적도 없었는데 할아버지의 두루마기나 삼베적삼을 척척 만들어냈고 더러는 손자들의 바지나 원피스도 만들어 입혔다. 나는 그때 할머니의 손이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들어낸다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느껴졌다.

우리 동네에는 재봉틀이 우리 집 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절 무렵이면 동네 아낙들이 우리 집으로 집결하다시피 하였다. 할머니는 흔들거리는 호롱불아래서 밤을 새우며 동네 사람들의 설빔, 추석빔을 만들어주고 얼마간의 품삯을 받았다. 할머니의 눈썰미는 참으로 대단했다. 양재에 필요한 대나무 자나 분필 등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대강 눈대중으로 재단을 했고 큼지막한 무쇠 가위로 옷감을 쓸어냈다. 그 거친 옷감이 재봉틀을 거치면 때깔고운 회장저고리나 옥색 치마로 탄생했다. 동네 아낙들은 할머니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며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 싱거 미싱은 발로 밟는 것이 아니라 오른 손으로 핸들을 돌리고, 왼 손으로 박음질을 하는 앉은뱅이 재봉틀이었다. 두 발로 구르는 재봉틀이 나왔음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그 앉은뱅이 재봉틀을 고집했다. 그 재봉틀은 여러 가지 부속품을 갖추고 있다. 북실을 감는 기계며 재봉의 용도에 따라 박음질의 눈금을 달리하는 여러 기능을 갖추고 있다. 명절 무렵이 오면 할머니의 일손은 더욱 바빠졌고 꼬맹이들은 긴 목을 빼며 색동저고리가 완성되길 기다렸다.

나는 할머니 몰래 통 큰 바지를 줄이거나 교복에 일부러 구멍을 내어 재봉틀로 박다가 기계를 망가트리는 통에 번번이 할머니의 꾸지람을 들었다. "사내놈이 큰일을 해야지 자잘하게 여자들 흉내를 내면 못 쓰는 법이여..." 그때에는 교복에 흠집을 내어 재봉틀로 박아 입는 이상한 패션이 유행하였다. 누나는 어디서 미군이 입다버린 사지 쓰봉을 구해 와서 재봉틀로 다시 옷을 만든 후 검정 물감을 들여 입었다. 무명옷이 대부분인 당시 미군의 사지 쓰봉 재활용은 일류 멋쟁이들의 전유물이었다.

그 후 재봉틀을 보유한 가정이 점점 늘어갔다. 먹뱅이에 사는 당고모의 집에도 재봉틀을 들여놓았다. 재봉틀은 혼수 목록 제 1호였다. 당시의 혼수품은 가전제품이 아니라 장롱, 침구류와 더불어 재봉틀이 필수품이었다. 브라더 미싱이나 드레스 미싱이 주종을 이뤘고 혼기 찬 새악시들은 부모를 졸라 재봉틀을 혼수품으로 가져갔다. 라사라 양재학원, 노라노 양재학원 등 유명 양재학원이 성업을 이뤘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재봉틀 고쳐요..."하는 수리공의 목소리가 골목으로 메아리쳤다.

산업사회로 접어들며 여인네의 영원한 벗인 재봉틀이 가정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기성품의 시장이 넓어지고 동네마다 세탁소나 수선집이 들어서고 나서는 여인들이 재봉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아침 출근길에 떨어진 양복 단추를 달려 해도 집 사람은 번개같이 세탁소로 달려간다. 재봉틀이 차지하던 방 윗목에 재봉틀은 어디가고 그 대신 번들거리는 속칭 호마이카 장식장이나 원목가구가 그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

청주문화의 집에서는 이 점을 안타깝게 여겨 '홈패션 교실'을 열었다. 재봉틀을 가까이 하면 가정경제에 적잖게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나만의 개성을 연출하는 효과가 있다. 살림도 보태고 남과 다른 유행을 창조할 수 있는 1석2조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강사를 하는 심상분 씨는 동호인 모임인 청강아카데미 회원들과 함께 홈패션의 길잡이인 '우리 집 홈패션 D·I·Y'를 펴냈는데 출간 1주일 만에 인터넷 서점 '인터 파크'의 취미,레저 분야에서 단박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청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고 문학 분야와 합치면 도종환의 시집 '접시 꽃 당신'이후 두 번째 있는 일이다. 여인의 곁을 떠난 재봉틀이 다시 여인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다. 바느질과 재봉은 여인들의 건전한 취미생활일 뿐만 아니라 경제위기를 돌파하는 작은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수 십 년 간 방치해 둔 할머니의 재봉틀이 고향의 물레방아처럼 사각사각 다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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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