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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09.08.04 19:28:2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역사적으로 삼국의 접경지대였던 충북은 어느 곳엘 가나 삼국의 문화가 삼원색처럼 융합되어 있다. 삼국의 문화는 모자이크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충북문화, 중원문화라는 특이한 형태로 숙성되고 진화되었다. 이는 빨강, 노랑, 파랑 삼원색이 합쳐 흰색을 만드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삼원색은 각기 존재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융합을 하며 독창적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색깔은 홀로 존재하기도 하고 다른 색깔과 손을 잡고 뒤섞이며 중원문화를 창출해 내고 있다. 펼치면 삼국문화요, 응집하면 중원문화다.

도내에서도 삼국의 문화가 가장 강렬하게 풍겨오는 곳은 다름 아닌 충주다.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충주에 가면 삼국의 문화를 번갈아 가며 느낄 수 있고 또 삼국의 문화가 융합된 묘한 현상을 감상할 수 있다. 한강의 상류인 남한강은 일찍이 삼국의 젖줄 역할을 하였고 삼국은 그 젖줄을 차지하기 위해 충주 벌에서 혈투를 벌였던 것이다. 충주를 차지하는 자가 중원의 패자(覇者)로 군림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역사의 법칙이다.

충주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문화가 뚜렷이 존재한다.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성은 고구려 산성이냐, 백제산성이냐를 놓고 오랜 논쟁을 벌였는데 최근에는 백제산성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해발 337.5m의 산에, 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장미산성은 남한강을 굽어보는 요충지에 축조되었다. 성안에서는 삼국의 토기조각이 모두 출토되었는데 특이할 만한 사항은 한성 백제시기에 해당하는 토기가 다량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보아 장미산성은 한성 백제의 남방 전초기지로 풀이되나 토성을 많이 쌓았던 한성 백제시기에 석성이 등장한다는 점이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비수처럼 충주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는 백제 문화는 퇴각을 하고 그곳에는 고구려의 웅혼이 꽃을 피운다. 사적 제 205호로 지정된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가 충주 일대를 지배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이외에도 충주에는 고구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봉황리 마애불은 고구려의 작품으로 단정 지을 수 없으나 어딘지 모르게 고구려 장인의 솜씨가 짙게 풍겨온다. 충주지역 일대에서는 고구려의 와당이 가끔 발견된다. 붉은 색 태토에 두툼한 연꽃무늬와 연꽃의 끝이 반전(反轉)된 모습은 틀림없이 고구려 계열의 와당이다.

뿐만 아니라 사적 제 463호로 지정된 가금면 누암리 고분과 하구암리 고분을 보면 고구려와 신라의 묘제문화가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묘제에 있어 고구려는 초기의 돌무지무덤에 이어 돌방무덤(석실묘)을 갖고 있고 고대신라는 돌무지덧널무덤(목곽 적석총)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백제는 중국 양(梁)나라의 영양을 받은 벽돌무덤(전축분)과 석축 무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누암리 고분군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 석실분) 및 소형 돌덧널무덤(석곽묘)이 주종을 이룬 것으로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다.

굴식 돌방무덤은 무덤방을 네모진 돌로 쌓아 돌방을 만든 다음, 막돌을 이용하여 천정으로 올라가며 좁혀쌓기를 하고 마지막에는 판석으로 덮는 형태다. 이를 궁륭형 천정이라고 하는데 전체적으로 둥근 천정의 모습은 서양의 돔 양식을 연상케 한다. 이번에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하구암리의 고분군은 누암리 고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널길(무덤방으로 들어가는 길· 연도)의 조성이나 돌방 및 주검받침(시상대·屍床臺)형식이 누암리와 비슷하고 짧은굽다리접시, 굽다리긴목항아리 등의 토기류 등 출토품도 대동소이하다.

경주의 고분은 거의가 적석목곽분이다. 목곽위에 엄청난 양의 돌을 덮었으므로 도굴이 불가능하였다. 신라고분의 부장품이 도굴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것은 적석목곽분을 쓴 덕분이었다. 이에 비해 널길이 있는 고분은 도굴이 많이 되었다. 널길을 조성한 석실분은 널길만 찾으면 무덤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도굴이 자행되어 유물이 많지 않다. 누암리 고분에 대한 도굴이 자행된 것은 널길과 석실분 모양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며 북진정책을 썼다. 그 충돌지점은 바로 충북이고 충돌의 꼭지 점은 충주에 있다. 그런 문화의 충돌을 겪었기 때문에 충주의 고분은 같은 신라지역이면서도 경주의 고분과 형식이 다르다. 이를테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누암리와 하구암리 고분은 신라와 고구려의 무덤 양식이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하다. 그것은 충북지역에서만이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고 중원문화의 한 특징이기 때문에 중원문화를 정립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할 당위성과 책무를 여기에서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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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