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낙화, 예술의 경지로 승화

보은 김영조씨, 연구생으로 첫발 기술 익혀

  • 웹출고시간2009.03.18 20:20:4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보은군 속리산 자락에서 전통예술인 낙화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김영조씨.

낮은 산들이 아름다운 속리산 자락에서 인두로 세상을 담아내고 있는 화가 김영조씨(60).

그는 화(火)를 다스려 화(畵)를 만들어 내는 낙화(烙畵)전문 화가다. 전통예술인 낙화를 기예에서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장본인이지만 아직도 그는 세월에 인종(忍從) 하며 시골에 묻혀 살고 있다.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 속리산 초입의 국도변을 지나다 보면 '멀리 가는 향기'라는 전원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김씨는 세상 사람들이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혼이 담긴 손놀림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는지 쉽게 짐작이 된다.

그는 지난 2007년 '제24회 대한민국 전통미술대전'에 처음 작품을 냈다. 인두로 수백만 번 점을 찍어 완성한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주저 없이 그에게 '특선'의 영예를 안겼고, 작품이 전시될 때 수천만 원에 작품을 사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상업적인 느낌이 든 그는 '쟁이 기질' 때문인지 이 작품을 팔지 않고 도로 작업실로 가져와 아직도 보관 중이다.

그에게 이제 낙화는 어느새 신앙이며, 영혼이 됐다. 김 씨는 매일 새벽 이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앞에 냉수 한 그릇을 올린 뒤 불공을 올린다.

이 때문일까. 화가의 아픔이 배 있는 작품에서는 감동보다 차라리 전율이 느껴진다.

인두로 수백만번의 점을 찍어 완성한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김영조씨는 이 작품을 지난 2007년 제24회 대한민국 전통미술대전에 출품해 특선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김씨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별도로 미술을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그와 낙화의 인연은 서울 종로에 있던 '한국낙화연구소'에 연구생으로 우연히 들어가면서부터 시작 됐다.

낙화를 처음 본 순간 한 눈에 반해버린 김씨는 땀으로 범벅이 된 한여름에도 선풍기 하나 없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고 기술을 익히는 속도도 배나 빨랐다.

어느새 낙화전문 화가가 된 김 씨는 예술작품 보다는 관광지에서 낙화를 팔아 생계를 유지키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카메라가 보편화 되지 않은 시절이라 김 씨의 작품은 관광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30여 년 동안 낙화를 그려온 그는 차츰 자신의 일이 관광지 기념품 제작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장르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됐다.

그간 작품을 접했던 유명 미대 교수들과 전문가들의 감탄과 격려도 이어졌다. 또 관광차 속리산을 올 때 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 일본 등 외국에서 이어지는 작품주문 등은 그에게 큰 용기가 됐다.

김씨는 지난 2000년 속리산에 있던 자신의 개인 화랑인 '청목화랑'을 지금의 보은읍 대야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그는 낙화에 대한 옛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전국의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선조들의 그림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연구 결실은 2007년 제32회 전통공예대전 특선, 2008년 제27회 대한민국 전통미술대전 특선 등 각종 대회의 입상으로 나타났다. 그의 도전은 일제 강점기와 6.25 등을 거치며 전통미술인 '낙화'의 대가 끊긴 줄 알았던 심사위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김씨는 요즘 나무와 한지에 주로 작업을 한다. 전기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숯불을 피워 전통기법으로 불교관련 그림과 산수화, 동물화, 인물화 등을 그리고 있는 김씨. 그에게서 삶의 향기로움이 느껴진다.

보은 / 정서영기자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