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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09.03.10 18:20:3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떠난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 구나 발달재의 금봉이야" 1948년 박재홍이 불러 히트한 '울고 넘는 박달재' 2절 노랫말이다.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박달도령의 장원급제와 다시 만남을 비는 금봉이의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마을 어귀나 산모퉁이에 있던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 및 각자의 소원을 빌던 곳이다. 하루하루가 고달팠던 민초들의 마음속에는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는 서낭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서낭당은 노랫말이나 소설의 소재가 되어 자주 등장했다. 민초들의 생활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 순이는 기쁨에 설레는 가슴을 안고 쏜살같이 고개를 달음질쳐 내려왔다. 다시 언덕을 뛰어서 집을 향해 올라올 때 순이는 성황님, 성황님, 하고 부르짖었다. 이 모든 것이 성황님의 덕택 같았다." (정비석의 소설 '성황당 중에서) 엄밀히 따지면 성황당(城隍堂)과 서낭당은 약간 다르다. 성황당이 국가적 차원에서 경영된데 비해 서낭당은 민간신앙으로 존재했다.

성황당은 북제(北霽)시대에 출현하여 송대(宋代)에 번창하였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문종 때 들어왔다. 고려시대에는 주(州), 부(府), 현(縣)에 성황당을 두고 국가차원에서 제를 올리며 국태민안을 기원했다. 그 풍습은 조선에도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성황당은 호국의 의미로 작용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여러 산천의 성황당에 제를 올렸다. 성황의 황(隍)은 성 밖에 파놓은 구덩이(연못 · 해자 · 垓字)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황당의 성황신은 성읍국가에서 성이나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작용하였다.

서낭당은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이다. 마을 어귀 등에 돌탑을 쌓고 당목(堂木)과 세트를 이뤘다. 당목에는 빨강, 파랑, 노랑, 흰색, 검은 색 오방색깔의 옷감이 이리저리 걸렸다. 정월 대보름, 서낭당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올렸다. 서낭당은 기원의 장소요 만남의 장소였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들은 아들을 점지해 달라며 서낭신께 빌었고, 과거시험에서 낭군의 장원급제도 빌었다. 여인의 재가(再嫁)가 금지되었던 조선시대에 여인이 재혼이 하고 싶으면 서낭당을 찾아가 그 옆에 서 있었고 이를 처음 발견한 남정네는 여인을 거두었다. 서낭당은 한자로 표기할 수 없으므로 후대에 이르러 성황당(城隍堂)과 혼용된 것이다.

성황당은 큰 고을 마다 있었다. 고을의 동쪽에는 문묘(향교)와 성황당을 두었고 서쪽에는 곡식 신을 위하는 사직단(社稷壇)을 두었다. 청주는 동쪽인 당산(堂山)에 성황당을 두었으며 서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했는데 현재 충혼탑 부근이다. 고을의 배치는 이러한 형태가 하나의 관례였다. 제를 올리고 관리를 하는 것도 민간인이 아니라 청주목사가 관장하였다. 당산의 지명은 바로 성황당에서 유래한 것인데 일제 때, 당산의 성황당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신사(神社)가 들어섰다.

서낭당은 일제 때 수난을 겪었고 5.16 후, 군사정권에서 미신타파라는 미명아래 또 상처를 입었다. 돌무더기는 다른 곳으로 반출되어 담장이나 하수구 쌓기 등에 이용되었다. 서낭당의 전신 격인 청동기 시대의 선돌도 많이 파괴되거나 마을 입구 등으로 자리 이동을 하였다. 선돌에는 지,덕,노,체 등 4-H 운동의 구호나 '하면 된다'는 개발정책의 슬로건이 적혀 있기도 했다. 그 후에도 도로개설 등 토목공사로 서낭당이 헐리거나 당목이 손상당하는 예가 허다했다. 청원 가덕 일대에는 마을의 수호신 격인 당목을 보존하자는 주민의 거센 항의에 신설 도로가 우회하였다.

산업화 과정에서 자꾸 없어지던 서낭당이 최근 무심천 변에 등장하였다. 무심서로 인 라인 스케이트장 옆에 들어선 서낭당과 수백기의 돌탑이 상춘객의 시선을 끈다. 우진교통에서 정비사로 근무하는 배영근 씨가 전통의 서낭당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무심천 둔치의 보리밭을 정비하다 나온 돌로 국태민안과 청주시의 번영을 기원하는 서낭당과 돌탑을 쌓고 있는데 지나가는 행인들도 동참하고 있다. 서낭당에 돌 세 개를 얹으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동전을 던지는 모습도 보인다. 이탈리아 로마의 '트레비 분수'는 동전을 던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어쩌면 무심천 가의 서낭당이 한국의 트레비 분수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청주를 세계에 알리고 경제난을 극복하는 표상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외형적 돌탑을 쌓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돌탑을 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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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