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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완

한국문화창작재단 이사장

어깨를 움츠리고 야외에 있는 세면장으로 달려가 대야에 물을 받으니 그 속에 달님이 먼저 떠오릅니다. 세숫물 속에 들어 있는 달님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요. 달님이 먼저 몸을 푼 적당한 온기의 물로 얼굴과 발을 씻고 나니 하루의 피곤이 풀리는 것 같았죠. 100년이 다 된 오래된 고택, 유선관은 커다란 산허리에 자리를 잡고 오랜 세월을 견뎌냈죠. 따뜻한 온돌, 그 위의 두터운 요, 포근한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잠자리에 들자, 머리 위로 찬 기운이 유영을 합니다. 코는 시리고 등은 따뜻했어요. 마치 야외 온천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얼굴만 쏙 내밀면서 느꼈던 그 신선함이 고스란히 밀려듭니다.

다음 날 아침, 깊은 단잠을 깨운 것은 창호지를 투과하며 밀려드는 빛이었어요. 몸을 일으켜 하얀 장지문을 밀었죠. 아, 그 지극한 눈부심이란. 밤새 내린 눈은 천지를 완벽한 순백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죠.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한동안 겨울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박노해 시인의'오래된 것은 아름답다.'라는 시가 가만히 떠올랐지요. 그의 시처럼 해와 달의 손길로 닦여지고 비바람과 눈보라가 쓸어내려준, 순하고 겸손해지고 깊어진 것들과 고요히 마주하고 있었어요. 자기안의 숨은 얼굴을 드러내고 치열하게 묵언(·言) 정진하는 고택(古宅)의 풍경이 녹아든 거죠. 천지간의 맑은 기운을 밤새 흡수한 듯 온 몸이 개운했습니다.

과학과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도심의 삶은 점점 빈틈이 없이 완벽하게 짜여갑니다. 알루미늄 새시로 바람 한 점 들어올 수 없이 차단된 방안은 전체를 데워주는 난방 시스템과 연결되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 주지만, 답답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어지듯 순환되지 않은 공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게 보면 선조들의 지혜가 새삼 놀랍기만 합니다. 바람에 들썩거리는 문풍지는 추위는 적당히 막아주면서도 밖의 공기와는 소통을 하죠. 내부의 뜨거운 열기는 배출하면서 자연의 힘으로 적당한 균형을 이뤄냅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대흥사로 올랐어요. 추사의 현판 앞에서 한참을 머무르며 과거의 시간과 조우를 했고요. 맵고, 추운 겨울바람이 코끝을 아리게 하고 손이 시렸지만, 싫지 않은 느낌이었죠. 이런 것도 얼마 만에 느끼는 몸의 감각인지 반갑기만 했습니다. 대웅전 옆에 작은 돌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러 사람이 쌓은 돌탑은 수많은 기원들이 담겨 있는 겁니다. 돌 하나를 간절히 얹어 놓는 마음들이 눈에 선합니다. 아들의 합격문제, 남편의 사업, 건강,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바람들이 차곡차곡 쌓여 하늘로 향하고 있는 것이죠. 대흥사 대웅전을 지나 위쪽으로 계단을 밟고 오르다보니, 돌탑이 내려다보입니다. 문득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니 돌탑은 점점 크기가 줄어들어 결국 뾰족한 창처럼 보이는 겁니다. 하늘의 눈으로 보니,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채우기보다는 비우라는 의미처럼 느껴지더군요. 어쩌면 돌탑은 하늘로 오를수록 비워지는 과정인지도 모르죠. 돌탑을 쌓는 인간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부처는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는 것 같군요. 비울 때, 비로소 채워지는 것이라고요.

추운 겨울이면 꼭꼭 가둬놓은 아파트의 방과 비우고 다시 채우는 고택의 사랑방에서 느낀 감회가 다시금 떠올랐죠. 찬 기운과 완벽하게 차단된 아파트의 공간에서 지내다, 고택에서 보낸 하루는 작은 깨달음을 줍니다. 불편함의 고마움이죠. 고택에서 보낸 하루의 생활은 불편함의 연속이었어요. 잠시 동안이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화장실, 온기 하나 없는 세면실, 출출한 겨울밤 군것질을 하려고 어둔 밤을 헤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의 가게 문을 두드려야 하는 수고로움…….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삶의 풍요로운 이야기를 안겨줍니다.

이번 땅 끝 마을 해남의 여행은 불편함이 오히려 삶의 에너지가 된다는 것, 정신력은 불편함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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